<한국디아코니아연구소1회 디아코니아학 제1강좌 >
제1강 왜 디아코니아학인가?
2. 결핍요소
그렇다면 <디아코니아신학>에서 왜 이것이 신학이면 그냥 신학이지 왜, 디아코니아신학이 되면서 명사가 되었느냐에 대한 이유가 있을 것 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신학이 현실의 무게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아니기에 그 기존의 신학을 거부하면서 새롭게 명사화 되어서 탄생한 학문으로 파악을 하면 금방 이해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정신을 담기 위해서는 새로운 단어와 학문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자, 그러면 이 지점에서 왜, 한국사회의 개신교회가 디아코니아의 방향으로 가지 못하고 엄청난 갭과 괴리감 속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갔는지에 대해서 3가지의 요소를 가지고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첫째로 한국 개신교에서 가장 핵심적 신학의 주제인 인의론(認義論)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인의론이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설명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서적 근거는 로마서 1장 17절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사랑의 실천의 관계에 있어서 믿음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는데 사랑의 실천에 대한 행위를 경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은 루터나 쯔빙글리 등의 종교개혁가들이 중세 카톨릭에 저항을 하면서 인의론을 주장했던 것인데, 그들의 주장이 믿음만을 강조하기 위해서 종교개혁을 했던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종교개혁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한국 개신교회는 믿음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인의론에 대한 해석으로 인하여 사랑의 실천 즉 디아코니아적인 실천은 개인적인 책임이나 즉흥적인 결단에 의한 것으로 치부를 하면서 그들의 신학적인 범주에서 추방을 시켰던 것입니다.
흔히 주장되어지는 인의론에 대한 해석은 정통 루터 신학의 핵심인 인의론으로 인하여 행함이 약화되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신학의 과제인 행함이 신앙의 합리적 열매와 신앙의 순종의 증명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에서 연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과연 합당한 주장인가? 그것은 마르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책을 읽어보면 믿음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책의 중심내용은 산앙의식에 관한 종교개혁의 3대 기본교리와 율법의 이중용법 그리고 모든 신자의 만인사제론, 율법과 복음, 신앙과 업적, 그리스도와 이웃, 자유와 복종, 내면성과 외면성의 상관관계를 담고 있습니다.
루터는 서론에서 “그리스도인은 만물에 대해서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섬기는 종이며 모든 이에게 예속 된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는 멜기세텍 이후의 첫 열매이고 사제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가운데서 참여하는 결과로서의 사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직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권리와 모든 전권을 가질 수 있다는 만인사제설을 주장하면서 사제와 평신도의 구분도 비성서적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중세 카톨릭의 업적주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을 가하고 있는바 선행은 구원을 얻기 위한 의(義)의 노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자유로운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선행은 자기 이익을 남기지 않고 자유로운 사랑에서 우러나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주고받고 식의 보상심리 조차도 배격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근거에서라면 사랑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그릇되고 의도적인 선행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자명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섬기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모범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동했듯이 그리스도인은 이웃에게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왕의 자녀이지만 이웃에게 봉사하는데 있어서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 그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루터의 마지막 전언이라는 것을 살펴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자신을 유보하지 않는 그래서 자신을 잊어버리고 사랑의 실천을 행하는 인의론을 주장했던 것이지 단지 믿음으로써 만의 인의론을 주장했던 것이 아님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의 인의론과 연계된 문제인데 “신학은 화해의 말씀에 봉사한다” 는 명제가 그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발생된 문제는 실천신학에서조차도 선포된 말씀 그 자체가 힘을 가진 상태에서 실천으로 이어지게 한다는 신학작업가설이 나오게 되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성서적 진리의 모든 전달이 성서본문에서 설교로 이어지고 다시 설교에서 실천적 영향으로 이어진다는 과정에 포인트를 두었다는 점을 지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요소인 성서본문과 성서구절은 역사 비판적 주석과 해석학 그리고 명상 속에서 설교자와 청중들에게 적절하게 인용되면서 그 역할을 해왔던 것입니다.
이로 인한 결과는 설교를 중심으로 한 예배와 이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설교자로서의 목사의 역할이 다른 직제에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상위에 자리하게 된 것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디아코니아적인 실천은 학문적인 영역과 교회의 본질적인 영역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현실에서 곤경을 당하는 이들과 사회문제를 신학적 방법으로 접근하려는 지점에서 좌초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디이코니아를 실천하는 것이 동면의 양면과 같은 상보적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교회와 현재의 교회는 말씀과 디아코니아 실천 사이에서 매우 이질적인 관계맺음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디아코니아는 신학적 작업의 시야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으며 특히 실천신학의 역사도 목회신학의 역사라고 할 만큼 디아코니아의 실천영역은 교회 내에서도 매우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 인한 결과는 사회문제가 신학적 작업에서 방법론적으로 배제되거나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현실에 대한 성찰은 단순한 실존론적 성찰에 그쳐 버리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이 올바른 신앙적 실천을 가져올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던 것이며 복합적인 현실에 대응하는데 있어서도 실패를 했던 것도 예정된 귀결이었다고 봅니다.
세 번째는 단성론(Monophysitismus) 즉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리스도의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심보다 더 강조되는 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신성/인성 중에 어느 쪽의 요소가 많이 내재되어 있느냐의 문제인데 이것은 기독교 2천년 동안의 싸움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만을 주장하면 이단으로 몰리던 것이 지난 시대의 역사였는데 현재 한국 개신교회에서의 단성론은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디아코니아적인 실천은 한국교회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는데 이것은 마태복음 25장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강조되고 있는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을 읽으려고 하지도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의론, 말씀 선포, 단성론에 대한 일면적인 해석은 한국 개신교회의 특징이기도 하면서 디아코니아 실천을 방해했던 요소임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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