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이야기

[스크랩] 강좌1-1:왜, 디아코니아학인가?

향기나무 김성휴 2006. 12. 1. 09:58

 

 

 

 

 

 

<한국디아코니아연구소1회 디아코니아학 제1강좌 >



제1강 왜 디아코니아학인가?


1. 들어가면서


먼저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이 과정을 개설한 목적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드린 다음에 본 강의로 들어갈까 합니다. 먼저 섬기는 자로 오신 야훼 하나님과 섬기는 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감사를 드리면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6절에는 사랑으로 행하는 실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아코니아는 그 실천을 위해서 이론적으로 정립된 학문이며 그 이론적인 내용이 무엇이고 그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어떻게 실천을 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학문임을 알려 드리면서 강의에 들어갈까 합니다.


현재 한국사회는 격변하는 사회변화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복지국가라는 타이틀을 향해서 발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 강의를 통해서 현재 한국교회에서 인식되고 있는 사회복지국가 개념과 디아코니아에서의 사회복지 개념은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디아코니아학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한국교회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 어떻게 다르며 무엇이 다른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강의의 목적 중에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이야기인 즉 현재의 한국교회에 나타난 문제점을 지적해 보면서 실제적인 대응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 이 강의의 취지일 것입니다.


강의는 성서와 그리스도의 역사를 디아코니아의 눈과 시각과 관점으로 획득해 가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제1강의 주제는 <왜, 디아코니아학인가?>가 주제입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디아코니아학이라는 것이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하고 낯설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독일사회에서는 매우 폭넓게 확산이 되어 있으며 새로운 학문과 실천운동으로서 유럽사회에도 빠른 속도로 알려 지고 있는 것이 1990년대 이후의 상황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디아코니아신학이라고 했을 때에 <왜, 이런 학문이 발생된 것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의문 들고 있는 것은 사실 입니다.

                                           

우선, 신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신에 대한 이론(테오로지) 혹은 학문인데 이 신학은 중세시대에 학문의 꽃으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근대 철학의 완성자였던 임마뉴엘 칸트도 신학을 지배적 권력도구인 상류학과로 분류했던 것이 그 당시의 신학의 위치였습니다. 여기서 “지배적 권력도구”라는 개념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인 삐에르 부르디에의 “문화권력” 개념과 유사한 개념으로 이해를 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신학의 위치는 여러 시대를 지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는데 그 이유는 문예부흥의 결과로 인한 학문의 다양화와 신학의 현실에 대한 접근성이 낮아지면서 학문의 주류적인 위치에서 변방으로 물러났던 것이 현대까지의 역사였습니다.


독일에서도 신학과에는 잘 가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경향은 6.8학생운동을 기점으로 해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보면 정확할 것입니다. 6.8학생운동은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개념에 대한 혁명운동이었기에 신학도 그 운동의 방향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교회의 실천과 신학의 논리 사이에 괴리가 심했기 때문에 신학의 고유한 특성이 사라지면서 결국에 신학은 하나의 고립된 섬(학문)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설명을 해보면  테오드르 슈트롬도 신학이 18세기에서 19세기를 거치는 동안 대학의 변화 과정 속에서 신학의 학문적 지위가 불확실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학문적 신학의 결정적 위기는 이미 19세기 초에 시작되어서 신학자체가 오늘날에는 반학문적인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기에 학문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신학적 이론과 교회적 실천 사이에는 차이가 더욱 심화되어서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교회 현장가들에게는 새로운 시대에 조응할 수 없게끔 아무런 자양분도 제공하지 않았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신학과 실천 사이의 괴리감과 결핍감의 정도는 이후로 점점 더 심화되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과 사회적 실천과의 불확실한 선상에 있던 신학은 늘 언저리에서 서성거리거나 이론과 실천의 중간에서 방향을 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신학은 학문적 작업의 방향설정과 목사와 교회의 실제적인 과제에 대한 이론 사이에서 양자간의 골이 더욱 깊어지는 결과만을 초래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당연하게도 교회적 실천의 중요영역은 학문적 신학과 접촉하는 쪽으로 이용을 당해왔으며, 신학적 성찰이 직업적 과제 수행에서 제외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적 과제로서 현실의 문제가 시급해도 마찬가지였으며 그 결과로 인하여 수많은 교회 안의 사회적 실천은 방법론적인 설명이 철저하게 배제된 채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세기의 신학과 교회는 사회적 실천과정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의 모호한 관계맺음으로 인하여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로 항해를 해왔다고 보면 별로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저의 에피소드를 소개해보면 이렇습니다.  신학대학원 시절에 저는 용인의 시골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허병섭 목사가 막일을 하러 다니던 시기이기도 했으며 저는 민중교회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는데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는 어떤 대학생이 장애인 기관에서 실습과 봉사를 한 행위에 대해서 저에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에 어떤 부끄러움과 함께 여러 가지의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의문은 바로 우리나라의 신학교육 과정 안에 디아코니아가 다루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고 또한 디아코니아가 신학의 커리큘럼에 왜 없는가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신학수업시간에는 디아코니아에 대한 전공필수과목이 개설된 신학교는 거의 없고 디아코니아에 대한 학점에 대해서 이수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현재 한국 신학대학의 현주소인 것을 보면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을 하는 곳도 그랬지만 그 당시의 민중신학민중의 현장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 그 당시 목회자들의 결론이었습니다. 이론을 연구하는 사람과 실천을 하는 사람과 현장에서 현실적인 복음을 갈구했던 사람들이 서로 간에 하나의 네트워킹 형성해서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이 땅에 섬기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똑같은 사람들이지만 한쪽은 신학적인 이론으로만 가고 다른 쪽은 실천하는 쪽에만 있고 또 다른 쪽은 현장에서 이론가와 실천하는 사람들을 기다려도 오지 않고 있는 그런 상황이 그 당시의 풍경이었고 지금도 그런 풍경이 어렵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벽이 있었고 엄청난 갭이 있던 자리에는 매우 목마른 결핍이 자리했던 것입니다. 그 결핍에 대한 욕구는 지난 세기의 과제도 되지만 <지금, 여기> 내가 서 있는 현실에서 통합적인 과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시기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결핍과 통합적인 사유는 독일의 디아코니아 운동을 보면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현재 독일의 디아코니아 운동 현황은 3만1천개의 실천기관과 45만 명의 섬김직이 연대하면서 실천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자원봉사자의 수가 100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은 단지 우연하게 생긴 것일까? 우연하게 생긴 것치고는 기관의 수와 연대하고 있는 명수가 너무나 방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런 현상은 신학의 결핍증세에 대한 반동적인 경향 하에서 일어났던 운동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독일에서의 디아코니아 운동은 과제연구가 아닌 현실에 가까운 구체적이고 통합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내적선교와 구호국 그리고 디아코니아 사업단이 등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디아코니아학이 종교개혁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작업과 비헤른에 관한 연구로 신학적 연구대상으로 자리를 잡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리를 잡아오는 동안에 문제점은 없지 않아서 19세기에는  내적선교(Innere Mission)와 디아코니아의 발흥이 학문/비판적으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학문적 신학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나타났던 시기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교회 실천운동도 비조직적이었으며 신학적인 연결과 학문적 신학과의 연결 없이 진행되었다고 슈트롬 교수는 분명하게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디아코니아는 대학신학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고 목사의 교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1927년 제베르크(Seeberg)가 베르린의 연구소에서 디아코니아학(Diakonik)을 논의 하였지만 히틀러에 의해 중지가 되면서 내적선교(Innere Mission)와 구호국(Hilfswerk)의 확장은 더욱 더 어렵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독일 디아코니아 운동의 최근까지의 간략한 역사입니다.


디아코니아학에 대한 정의는 “신학도는 최소한 항목별로 간학제적으로 일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그것을 배우는 자들은 구체적인 경험과 관련된 교회와 사회 안에서 실천적 삶을 살아가야 한다“라고 Strohm 교수는 설파하고 있습니다.


덧붙여서, 독일 캐톨릭의 카리타스학 연구소장인 폼페이(H. Pompey)의 주장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폼페이는 인간의 고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난의 상황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과 고난 속에 있는 사람 자체가 신학연구의 대상이고 자료라고 주장을 하고 있는데 더 나아가서는 이를 위한 교육과정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명기하고 있습니다.



출처 :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
글쓴이 : 네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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