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질문에 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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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이슈를 논하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용어를 정리는 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 앞으로의 논의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먼저 기본 용어를 정리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용어들 가운데 몇 가지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이 외에 필요한 것들은 독자께서 시간을 내서 공부를 조금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뿌리와 역사"(도서출판 두루마리, 02-2277-8087) 책을 보시면 보다 자세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을 내서 공부하기 바랍니다. 성경도 이를 명하고 있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네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자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나타나도록 연구하라."(딤후2;15)
1. 파피루스(Papyrus): 값싼 종이. 이처럼 값싼 종이 조각들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아마도 신약 성경은 원래 이런 종이 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학자들이 발견한 이런 종이 조각들은 1, 2, 3, 4, 5, 6, 7 등의 숫자를 매겨졌으며 그 안에는 신약 성경의 다른 부분들이 적혀 있었다. 이런 파피루스 중 많은 수가 교회 역사의 첫 3세기(100-300 A.D.) 동안에 만들어졌다.
2. 벨룸(Vellum, 양피지): 글이 기록된 고급 가죽. 벨룸 중 몇몇은 족자처럼 말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두루마리'(scroll)라고 불리며, 또 어떤 것들은 마치 책처럼 장(page)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코덱스'(codex)라고 불린다. 두 개의 가장 오래된 '코덱스'는 '바티칸 코덱스'(Vaticanus)와 '시내 코덱스'(Sinaiticus)이다. 이들은 보통 "바티칸 사본"(B 사본) 그리고 "시내 사본" 혹은 "알레프 사본"(Aleph)이라고 불리는데, '알레프'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글자이다.
3. 본문(Texts): 이것들은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자료(사본, 복사본 등)를 모아 재구성한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을 의미한다. 'text'라는 단어는 어떤 종류의 문서든지 그 문서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을 지칭하며, '그리스어 본문'이라는 것은 여러 사람이 그리스어로 편집된 신약 성경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본문'을 만든 유명한 사람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에라스무스, 스테파누스, 엘지버, 베자, 밀, 펠, 왈톤, 트레겔레스, 티센도르프, 그리스바크, 알포드, 메쯔거, 알란드, 네슬레, 웨스트콧트, 호르트 등.
4. 사본(Manuscripts): 이것은 성경의 구절들이나 일부분을 담고 있는 파피루스 혹은 벨룸(양피지)에 기록된 문서이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성경 전체를 담고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것들은 그 중의 일부분만을 담고 있고 심지어 어떤 것들은 단지 몇 구절만 담고 있다.
5. 역본(Versions): 이것은 누군가가 그리스어 본문으로부터 자신의 언어로 번역한 성경을 의미한다. 서기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리기 전에 이미 시리아어와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들이 있었다. 성경은 아마 오래 전에 고딕, 페르시아, 콥틱(이디오피아) 언어 등으로도 번역되었다. '역본'은 사실 '성경기록'(scripture)을 '옮겨 놓은 것'(translation)이며,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Version'이란 단어는 원래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을 '다시 내는 것'을 의미한다. 개역 표준역(Revised Standard Version, RSV)과 미국 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 ASV) 등은 킹제임스 역(Authorized Version) 성경을 개정한 '영어 역본들'(English Versions)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ASV와 RSV(NEB와 리빙 바이블도)는 '권위역'성경의 기초가 된 사본들이 아닌 다른 종류의 사본들로부터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6. 사본들의 계열(Families of manuscripts): 현재 4종류의 계열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킹 제임스 성경과 마틴 루터의 성경은 시리아 계열(Syrian family)에 속하며, 그것은 '공인본문'(Received Text 혹은 Textus Receptus)이라 불린다. '공인본문'은 어떤 공적인 단체가 그 성경을 인정했다는 의미의 '공인본문'(公認本文)이 아니고,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의 '공인본문'(共認本文)이다. 따라서 이같은 '공인본문'을 '표준원문'(標準原文)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표준'으로 만들거나 선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ASV, RSV, 한글개역성경,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등은 모두 다 흔히 '알렉산드리아 계열'(Alexandrian)이라 부르는 '이집트 계열'(Egyptian family)에서 번역되었다. 또 다른 계열로는 구 라틴어 사본들을 포함하는 '서방계열'(Western family)과 '시이저 계열'(Caesarian family) 등이 있다. 그런데 마지막 계열은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해 주는 사본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서, 권위역 성경의 사본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취지 하에서 만들어진 인위적인 계열인 것이다.
7. KJV가 다른 모든 성경들보다 우수함을 증명해주는 사실들
(a) 부흥과 영혼구원: 전도자들과 선교사들이 킹제임스 성경으로 선교하고 전도함으로써 구원받게 된 영혼들과 선교사역의 양은 그 외 다른 어떤 성경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보다 훨씬 많다.
(b) 물질적 번영: 영국, 독일, 미국의 역사는 종교개혁 본문을 귀중히 여겼을 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물질적 복의 역사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버리게 될 때 재난이 닥쳤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c) 권위역 성경을 거부한 사람들의 열매: 만일 여러분이 이성적이라면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지배하에 있는 중남미 국가들과 남유럽, 필리핀 등을 보라. 이들 모두가 전세계에서 가장 큰 부채를 짊어진 국가들이 아닌가? 브라질 같은 나라는 미국보다 훨씬 더 지하자원이 많고 땅도 비옥하지만,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이교사상)과 신학(바르지 못한 성경)이 그것을 지배하므로, 번영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또한 새로운 역본들의 근거가 된 '소수사본'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영혼 구원을 해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네슬fp, 알란드. 메쯔거, 웨스트코트, 호르트, 라이트푸트, 엘리콧 등) 참으로 거듭났다는 증거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들 중 대부분은 이미 200년 동안이나 권위역 성경을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유아세례' 등을 통해 사람이 거듭난다는 로마카톨릭 사상을 그대로 믿고 있었다. 로마교회의 열매들은 이미 교회역사가들에 의해 잘 알려져 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지금까지 킹제임스 성경의 근간이 된 '공인본문'을 '올바른 본문'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들은 부패된 계통의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와 '이집트 계열'의 사본들만을 중요시하고 있다.
8. 킹제임스 성경: 한국 교회는 지난 100년이 넘는 복음 전파기간 중에 단 한번도 킹 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대해 보지 못했다. 따라서 성경문제가 뜨겁게 거론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많은 평범한 크리스천들은 왜 갑자기 예전에 들어보지도 못했던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것이 불쑥 튀어나와 교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는가 의아해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근래에 미국이나 영국에서 발간된 성경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 '킹제임스 성경'은 지금부터 거의 400년 전인 1611년에 영국에서 '보통 사람들'(일반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책으로 전해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성경이 나옴으로 인해 미신과 무지 속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빛'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 성경에 복을 주셔서 많은 이들이 그것을 '권위를 인정 받은 성경' 즉 '권위역'(Authorized) 성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성경의 출간 이후에도 여러 개의 다른 성경들이 있긴 했지만, 지난 400년 간 영국 및 미국 등에서는 거의 100% '권위역' 성경만을 사용해 왔다. 복음전파가 한창 진행 중이던 18,19세기에 영국 및 미국의 선교사들이 전 세계에 파송되면서 킹 제임스 성경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이 어떻게 킹 제임스 성경이 아닌 다른 성경을 접하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을 그대로 두길 원치 않았고, 그 자신의 역본들을 내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킹제임스 성경'이 나온 지 약 270년이 지난 뒤에 영국에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라는 '영성주의자들'에 의해 소위 '영국 개역성경'(R.V.)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었다. 그 뒤로도 수십 가지의 '새로운' 역본들이 모두 '이집트 계열'의 본문에서 번역되어 출간되었지만,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위해 보존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을 대체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팔린 '모든 다른 역본들'을 합쳐도 킹제임스 성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난 해 역자가 미국에 가서 기독교 서점에 들러 '킹 제임스 성경'과 '다른 성경들'이 팔리는 비율을 물었더니, 지금도 크리스천들의 80%가 킹 제임스 성경을 찾는다고 서점 주인이 말했다. 킹 제임스 성경의 가장 큰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의 소유권 혹은 판권(ⓒ Copyright)이 없다는 사실이다. 독자 여러분의 성경 뒷부분을 찾아보면, 그 성경들에는 모두 판권이라는 것이 있다. 즉 어느 출판사나 개인이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잡아매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이지 않는다. 현재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경 이슈'의 대부분이 사실은 '판권'에 의한 '돈' 때문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맘몬(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둘 중 하나를 신중하게 선택해야만 한다.
킹 제임스 성경의 또다른 특징은 지난 400년 동안 단 한 차례의 개정도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이같은 일이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9. 개정(revision): 성경 본문을 바꾸는 것
10. 교정, 정정(correction): 철자나 맞춤법이 틀린 것을 바로잡는 일로서 '개정'과는 전혀 다른 것임
질문 1 [TOP]
▶ 일개 번역본보다는 오히려 최초의 자필원본에 충실해야 하지 않을까요?
☞ 하나님께서 '자필원본'에 가치를 부여하시는 만큼만 가치를 두시면 됩니다.
이미 오래 전에 소실된 원본에 충실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원본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정 사실 하나만으로도 위의 질문에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신실한 성경학도라면 쉽게 깨달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저의 답변의 끝은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원본에다 얼마만큼의 가치를 부여하고 계실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예레미야 36장의 익히 알려진 이야기 즉 예레미야가 기록한 두루마리와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해서 예레미야서 몇 장을 면밀히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21절에 보면, 여호야김 왕 앞에 두루마리가 놓이고 그의 종 예후디가 그것을 낭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3절에서 예후디가 두루마리의 서너 장을 낭독하고, 여호야김 왕이 그것을 펜 나이프(소도)로 일일이 잘라내서 활활 타오르는 화로 불에 던져 넣어 그 두루마리가 전소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원본"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감동시키사 재차 두루마리를 기록하게 하셨고, 거기에 몇 말씀을 추가하셨습니다(렘 36:32).
이리하여 "두 번째 원본"이 탄생했습니다! 예레미야 45장 - 51장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재생된 이 두 번째 원본의 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그가 바빌론에 이르거든 이 두루마리를 읽고(렘 51:59-61), 다 읽은 후엔 돌에 매어 유프라테스 강에 던지라고 말하였습니다(렘 51:63)!
이리하여 "두 번째 원본"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잠깐만요! 예레미야 45장-51장의 그 두루마리 본문의 복사본이 지금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복사본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바로 그 "두 번째 원본"의 '복사본'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세 번째 원본"이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원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1) 이제껏 출판된 모든 성경에는 예외 없이 예레미야 45장-51장의 본문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 본문은 바로 "두 번째 원본"이나 혹은 "세 번째 원본"의 복사본으로부터 번역되었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일단 원본이 복사되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달된 이상, 하나님께서 그 '원본'을 보존하시는 데 일말의 관심도 없으셨음이 분명히 드러났으며 이같은 명백한 사실은 그 누구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것 이상으로 원본을 강조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같이 원본을 강조하는 것은 명백히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원본'의 본문이 훌륭히 보존되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설사 '원본'이 발견된다손 치더라도, 우리에겐 그것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질문 2 [TOP]
▶ 킹제임스 성경의 사도행전 12장 4절에 있는 '이스터'(Easter) 즉 '부활절'은 '파스카'(Pascha)라는 단어를 오역한 것이므로 다른 역본들과 같이 '유월절'(passover)로 번역해야 옳지 않을까요?
☞ 그렇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사도행전 12장 4절의 '파스카'를 '부활절'로 번역한 것은 정확한 것입니다. 다음의 설명이 그것을 말해줄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4절에서 '이스터'(Easter) 즉 '부활절'로 번역된 단어의 그리스어는 '파스카'(Pascha)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만 29번 나옵니다. 그 중 28 번은 주 하나님께서 이집트(애굽)를 지나시며 이집트의 처음 난 모든 것들을 죽이시고(출12:12) 이스라엘 민족을 400년간의 종살이로부터 자유케 하신 날 밤에 관한 것으로서 '유월절'로 번역되었습니다.
"완전한 성경이 있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많은 이들도 'Pascha'를 이렇게 번역해 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권위를 부여하신 성경(AV) 안에 '이스터'(Easter)라고 번역된 단어를 발견하고는 권위역 성경도 완전치 않다는 증거를 포착했노라고 상상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을 위해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이스터'는 고대 이교도들의 아스타르테(Astarte) 축제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쉬타르'(Ishtar)로도 알려져 있고 '이스터'(Easter)로도 발음됩니다. 이 축제는 항상 4월 하순 경에 개최되었고, 초기 형태는 겨울철이 지난 뒤 땅의 '갱생'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축제엔 다산과 번식을 기념하는 의식도 수반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이스터 축제일의 상징은 토끼(음란 잡지인 [플레이 보이]지의 상징과 동일함)와 달걀이었습니다. 이들은 둘 다 그들의 번식력 즉 다산으로 매우 유명했습니다.
이스터 축제의 주인공은 여신 아스타르테(Astarte)였습니다. 이 여신은 성경에서 '하늘의 여왕'(Queen of heaven, 렘 7:18; 44:17-25)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녀는 담무스(Tammuz, 겔 8:14)의 어미이자 또한 그의 아내였습니다! 이 가증한 의식은 동틀 녘 이스터 아침에 행해지곤 했습니다(겔 8:13-16). 예레미야와 에스겔서의 기록에서 우리는 이교도들의 이스터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상관도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제제기: 유다인들의 유월절은 4월 중순(14일)에 개최되었고, 이교도들의 축제였던 이스터는 같은 달에 좀더 늦게 개최되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사도행전 12장 4절에서 헤롯이 유다인들의 '유월절'이 아닌 이교도들의 '이스터'를 언급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만일 그가 유월절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라면 'Pascha'를 '부활절'(이스터)로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은 부정확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정말로 이교도들의 절기인 이스터를 언급한 것이라면, 1611년판 킹제임스 성경은 오늘날 인쇄되고 있는 성경 중에서 이 부분을 가장 정확히 번역한 유일한 성경이기에 하나님의 말씀, 바로 그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4절에 있는 '부활절'(Easter)에 관한 혼란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우리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최종권위가 되는 성경으로부터 조언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이 수수께끼의 자물쇠를 풀 수 있는 열쇠는 4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3절에서 발견됩니다.
"유다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더 나아가 베드로도 잡으려 하더니 (그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우리가 구하고자 하는 답을 얻기 위해선 무교절과 유월절의 관계를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붙잡힌 것이 "무교절 기간 중"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행 12:3). 우리는 첫 번째 유월절로부터 조사를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절기는 주님께서 이집트의 처음 난 모든 것들을 치셨던 밤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밤, 이스라엘 민족은 양을 죽여서 좌우 문기둥과 인방에 그 피를 바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출 12:4,5). 자, 이제 성경이 첫 유월절과 무교절 즉 '누룩없는 빵'의 날들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지 살펴봅시다(출 12:13-18)
13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너희가 거하는 집 위에 피가 있어서 너희를 위한 표가 되게 할지니라.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그 재앙이 너희 위에 임하여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또한 이 날은 너희에게 기념일이 될지니, 너희가 이 날을 너희 대대로 주를 위한 명절로 삼고, 규례에 따라 영원토록 명절로 지킬지니라.
15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을 것이요, 그 첫째 날에 너희 집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라. 무릇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을 넣은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16 첫째 날에 너희에게 거룩한 집회가 있으며 일곱째 날에도 거룩한 집회가 있으리니, 이 두 날에는 각 사람이 먹는 일을 빼고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오직 너희 중에서 그 일만 할지니라.
17 너희는 무교절을 지킬지니 이는 바로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대대로 이 날을 지키되 규례에 따라 영원토록 지킬지니라.
18 첫째 달에 곧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 일 저녁까지 너희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을 것이요
출애굽기 12:13에서 우리는 유월절이 어떻게 그 같은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양의 피가 문에 표시되어 있는 모든 집을 "넘어가시리라"(passover)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Passover'는 '넘어감'을 의미합니다.
유월절 이후에(출12:13,14), 우리는 유다인들이 칠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함을 보게 됩니다. 이 날들은 '누룩없는 빵'을 먹는 날들 즉 무교절이었습니다! 18절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이것을 준수해야 하는 기간이 4월 14일부터 21일까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역주: 유다인들의 첫 번째 달은 지금의 태양력으로 4월이 됨). 이 종교적인 준수일들은 민수기 28:16-18에 더욱더 명백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달 십사 일은 주의 유월절이며, 또 그 달 십오 일은 명절이니 이레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을 것이며, 그 첫째 날에는 거룩한 집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16절에서 우리는 유월절(passover)은 그 달의 14일만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15일부터는 "누룩없는 빵을 먹는 날들" 즉 "무교절"이 시작됩니다(신명기 16:1-8).
1 아빕월을 지켜 주 네 하나님께 유월절을 지키라. 이는 아빕월에 주 네 하나님께서 밤에 너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2 그러므로 너는 양떼나 소떼에서 취하여 주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주 네 하나님께 유월절 희생양을 드리되
3 누룩을 넣은 빵을 그것과 아울러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 곧 고난의 빵을 그것과 아울러 먹을지니라. 이는 네가 이집트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로써 너의 평생 동안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을 항상 기억할 것이니라.
4 그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내에서 누룩을 넣은 빵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첫째 날 해 질 때에 네가 희생으로 드린 고기를 온 밤이 지나도록 조금이라도 남겨두어 아침까지 이르게 하지 말 것이며
5 또 유월절 희생양을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네 성문 안에서 드리지 말고
6 오직 주 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가 이집트에서 나오던 때 곧 저녁에 해 질 때에 드리고
7 주 네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것을 구워 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8 너는 엿새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주 네 하나님께 거룩한 집회로 모이고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라.
1절의 아빕월은 지금의 태양력으로 4월이며 원래 히브리 민간력으로는 7월이었지만,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기 위해 종교력의 1월로 삼은 달입니다(출12:2). 위의 신명기 구절에서 우리는 유월절 양이 그 첫 날 밤에 희생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신 16:1). 동틀 녘(겔 8:13-16)이 아니고 해질 때(신 16:6)에 유월절을 기념했다는 것은 주목해 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역대하 8:13에서 우리는 무교절이 연중 행해야 하는 유다인들의 3대 절기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명령에 따라 날마다 정한 비율로 안식일과 새 달과 한 해에 세 번 지키는 엄숙한 명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장막절에 드렸더라."
유월절은 항상 무교절 전에 있었습니다. 역대하 30장에서 보면 정월에 유월절을 지킬 수 없었던 유다인들은 이월에 지키도록 허락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날짜는 항상 같았습니다.
"둘째 달 십 사일에 유월절 어린양을 잡으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여 자신들을 성결케 하고 태운 헌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이르러......예루살렘에 모인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주를 찬송하며 큰 소리나는 악기를 울려 주를 찬양하였으며"(역대하 30:15,21)
"사로잡혀갔던 자들의 자손들이 첫째 달 십사 일에 유월절을 지키되......이레 동안 즐거이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주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시리아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이키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의 집 일을 할 때에 그들의 손을 힘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느니라."(에스라 6:19,22)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조사한 결과 사건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 4월 14일에 양을 잡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입니다. 14일 이후에 행하는 그 어떤 사건도 유월절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2) 15일 아침부터 무교절로 알려진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이 시작됩니다.
신약 성경에서 유월절이 언급될 때마다 이 명절은 항상 한 주간 내내 먹어야 하는 어떤 음식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다만 4월 14일 저녁에 먹어야 하는 음식과 관련되어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 즉 무교절이 유월절로서 언급된 적은 결코 없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주님의 천사가 하룻밤에 이집트를 넘어간 것이지 결코 잇따라서 칠일 밤 동안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사도행전 12장 3, 4절을 봅시다:
"유다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더 나아가 베드로도 잡으려 하더니 (그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그가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군사가 넷씩인 네 조에게 맡겨 지키게 하더니, 이는 이스터가 지난 뒤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함이더라."
3절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무교절 동안(4월 15일 - 21일 사이)에 체포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때는 무교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유월절(4월 14일)은 이미 지난 후였습니다. 헤롯이 이스터(Easter)에 관한 이 구절에서 유다인의 절기인 유월절(passover)을 언급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번 유월절은 일년 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교도들의 성일인 이스터는 이제 며칠 있으면 지키게 될 것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헤롯은 '하늘의 여왕'(Queen of heaven)을 숭배했던 이교도 로마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다인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유다인들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킬 까닭이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유다인들을 화나게 할까봐 유월절이 끝나길 기다렸을 것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두 가지 큰 오류가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는 더 이상 유다인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다교와 절교했습니다. 따라서 유다인들이 헤롯의 행동에 화를 낼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유다인들이 종교적 축일 중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원치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헤롯이 유월절이 지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다인들은 이미 유월절 기간 중에 예수님을 죽인 바 있습니다(마 26:17-19,47). 그들은 또한 헤롯이 야고보를 죽인 것을 보고 흥분했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대중들은 종교적 축제일이 지난 후가 아니더라도 축제 기간 중에 얼마든지 난폭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로마인으로서 헤롯의 위치를 생각해 보아야만 하며, 또한 헤롯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무슨 날을 기념하는 일로 매우 유명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마 14:6-11). 사실 마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헤롯이 자기의 생일축하 기간 중에 하나님의 사람을 기꺼이 죽이려 했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이 유월절이 이미 지난 뒤인 무교절 기간에 베드로를 체포했음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 즉 무교절은 4월 21일에 끝났을 것이고, 그 즉시 헤롯이 지키던 이교도 축제인 이스터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헤롯은 단순히 이스터까지 기다리기 원했기 때문에 베드로를 무교절 기간 중에 죽이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마 26:17-47)이나 로마인들(마 14:6-11) 모두가 종교적 축제 기간 중에도 살인을 원했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헤롯은 유다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축제 기간 중에 '베드로를 죽이는 즐거움을 갖도록' 허락하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대신에 그는 그 자신의 이교도의 축제일인 이스터까지 기다려서, 흥분된 분위기에서 베드로가 죽는 것을 보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령 충만한 우리의 성경 즉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파스카'(Pascha)를 '이스터'(Easter)로 올바로 번역한 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확실하게 유다인들의 유월절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그것을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경에서 '유월절'로 바꾼 것은 독자를 혼란케 하고, 그 당시 상황의 진실을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질문 3 [TOP]
▶ 제임스 왕(King James)이 동성연애자였다는 게 사실입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유명한 킹제임스 성경 번역을 위임했던 영국의 국왕 제임스 1세는 비록 영국이 낳은 최고의 군주는 아니었다해도 많은 이들이 존경해 왔던 위대한 군주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지혜와 결단을 통해 그는 스코틀랜드의 상호 투쟁하는 족속들을 하나의 통합 민족으로 연합되게 하였으며, 그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합병하여 현재 알려진 바와 같은 대영제국의 기틀을 형성하였습니다.
단지 영국 국교회들만이 영어로 된 성경을 소유했던 때에, 제임스 왕은 평민들 즉 일반인들이 그들의 언어로 된 성경을 소유할 것을 소망했습니다. 그래서 1603년에 제임스 왕은 이 위대한 일을 완수하기 위해 역사상 가장 학식 있는 사람 쉰 네 명을 소집하였습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이 자기 백성이 영적 무지에 빠져 있길 바라던 때에, 제임스 왕은 자기의 국민들에게 자기가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영어로 된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책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라틴어, 그리스어 그리고 프랑스어에 능통했습니다. 이태리어와 스페인어를 가르쳤던 제임스 왕은 '담배를 강력히 반대한다'(Counterblast to Tobacco)라는 소논문을 쓰기도 했었습니다. 그것은 영국 내에서의 흡연 반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항상 적들을 두게 마련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인 웰돈(Anthony Weldon)은 조정에서 추방당했고 이에 복수를 맹세했었습니다. 제임스 왕이 죽은 지 25년 후인 1650년에 가서야 웰돈은 그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그는 제임스 왕을 동성연애자로 몰아 부치는 글을 썼는데, 그 때는 이미 제임스 왕 사후인지라, 왕이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웰돈의 이 보고서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었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무시되었습니다. 이것은 최근 들어 제임스 왕을 비방하여 그의 이름이 담긴 성경 즉 킹제임스 성경을 더럽혀서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책 곧 킹제임스 성경으로부터 좀 더 '현대화 된' 번역판 성경으로 돌아서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끄집어내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 그런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 다시 웰돈의 이 거짓 보고서는 그 보고서의 저자였던 웰돈과 같은 불순한 동기를 가진 자들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에 의해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는 1605년 영국 국민들의 손에서 그 참된 성경을 빼앗고자, 의회의 의원 전원과 제임스 왕을 죽이려고 시도했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필사적인 노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605년에 헨리 가넷(Henry Garnet)이라는 예수회(Jesuits) 사제의 지도하에 포크스(Guy Fawkes)라 이름하는 로마 카톨릭교도 한 명이 전 의회와 제임스 왕을 살해하기 위한 암살용 화약 36통을 가진 채 의회 지하실에서 발견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왕을 살해한 후에 그의 자녀들을 감금시키고, 반항했던 모든 자들을 죽이고, 영국을 교황에 충성하는 나라로 재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완전한 영어성경도 그 계획의 희생물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포크스와 가넷 그리고 8명의 공모자들은 체포되어 모두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제임스 왕의 인품을 추락시키기 위해 그렇게도 열심이었던 자들도 성스럽지 못한 배에 동참하게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질문 4 [TOP]
▶ 킹제임스 성경에는 고어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그것들을 제거한 현대 번역판 성경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 (처음 질문엔) "그렇습니다", (두 번째 질문엔) "그렇지 않습니다." 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고어들이 있지만, 우리들은 그것들을 삭제해 버린 현대 번역판 성경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고어가 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입니다. 고어란 더 이상 일상 회화에서 사용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체되어 버린 단어를 말합니다. 고어의 좋은 예는 고린도전서 10:25에 있습니다:
"무릇 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Whosoever is sold in the shambles, that eat, asking no question for conscience sake."
여기에 나오는 "shambles"란 단어는 고어로서 옛날에 도살을 하여 그 자리에서 고기를 파는 시장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현대의 일상회화에서 "시장"(market place)이란 단어로 대체되었지만, 실제로 우리는 "shambles"가 고대의 시장 및 오늘날에도 세계 도처에 있는 고기 시장을 더욱 정확히 묘사한 표현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어는 오늘날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고 우리가 "shambles"를 제거해 버리고 더 흔히 쓰이는 "시장"을 삽입한 새 번역본을 출판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믿음과 실행의 모든 문제에 관한 한 우리의 최종권위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과연 성경이 실제로 이 고어들에 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 살펴보는 일일 것입니다. 완전한 성경을 믿는 우리는 물론 이 고어들에 관해서도 실제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를 따르길 원합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사무엘상 9:1-11에서 실제로 성경이 고어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1 기스라 이름하는 베냐민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사대 손으로 베냐민 사람이요, 능력이 많고 강력한 사람이더라.
2 기스에게 한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젊은이더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없고 그는 백성 중 누구보다도 그 어깨 위는 더 크더라.
3 사울의 아버지 기스가 자기의 나귀들을 잃어버리매 자기 아들 사울에게 말하되, 너는 종 하나를 데리고 일어나 가서 나귀들을 찾으라, 하매
다음은 사울이 자기 아버지의 암나귀들을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자기의 아버지 기쉬가 나귀보다 자기와 및 자기의 종을 염려할까 하여 나귀 찾는 것은 포기하고 되돌아가기로 결심한 이후의 상황입니다:
6 그가 말하되, 보소서, 이 도시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는 존경받는 사람이니이다.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이루어지니 우리가 거기로 가사이다. 혹시 그가 우리의 갈 길을 보여줄까 하나이다, 하니
7 이에 사울이 자기 종에게 말하되, 보라,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가겠느냐? 우리 그릇에 있는 빵을 다 썼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져갈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 하니
8 그 종이 사울에게 다시 대답하여 말하되, 보소서, 내 손에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으니 이것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려서 우리의 길을 알려 달라고 하겠나이다, 하니라.
자, 이제 다음 구절에 '고어'가 그 모습을 드러낼 터이니 주의하여 보도록 합시다.
9 (예전에 이스라엘에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가서 여쭈려 할 때에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선견자에게로 가자, 하였더니, 이는 지금 대언자라 부르는 자를 예전에는 선견자라 불렀음이었더라.)
10 사울이 자기 종에게 말하되, 잘 말하였도다. 오라, 우리가 가자,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 도시로 가니라.
11 그들이 도시를 향한 언덕으로 올라가다가 물 길러 나오는 젊은 처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하되, 선견자가 여기 있느냐? 하니
위의 사무엘상 9장의 성경말씀 속에서 우리는 고어뿐 아니라 그것을 다루는 성경의 관례와도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울과 그 아버지의 사환 중 한 명이 도망가 버린 암나귀들을 찾고 있음을 봅니다(사무엘상 19:1-5). 그들은 선견자(Seer) 사무엘을 찾아가 암나귀를 찾는데 있어서 그의 도움을 얻고자 결심합니다(6-8절). 11절에서 드디어 우리는 고어와 마주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11절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것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여 설명부(9절)를 괄호 속에 넣어 두셨습니다. "지금은 대언자(Prophet)라 부르는 자를 예전에는 선견자(Seer)라 불렀음이었더라"라고 말하는 9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따라서 우리는 이 사건이 일어났던 때와 이 사건이 거룩하게 기록된 시대 사이에 '선견자'(Seer)라는 단어가 점차 사용되지 않다가 결국은 그 단어가 '대언자'(Prophet)로 대체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선견자'(Seer)라는 단어는 고어였습니다. 그러나 고어가 나타나는 11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그들이 도시를 향한 언덕으로 올라가다가 물 길러 나오는 젊은 처녀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하되, 선견자(seer)가 여기 있느냐? 하니"
시대에 뒤떨어진 단어인 "선견자"(Seer)가 그대로 보존된 11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11절은 분명히 "대언자(Prophet)가 여기 있느냐?"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미리 고어를 설명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거룩한 영감을 통해 친히 9절을 사용하신 것이며, 그 거룩한 본문을 바꾸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에 고린도전서 10장 25절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상황들을 다루는 성경의 관례는 회중들에게 "옛적에는 '고기시장'(shambles)이라 불리던 것이 지금은 '시장'(market place)으로 불린다"라는 취지를 말해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본문에서 고어들을 제거해서는 안됩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물론 고어들을 다루는 데 있어 우리 죄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제안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질문에 대한 대답은 "성경이 고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만, 그것들을 삭제한 현대 번역판 성경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그분 자신의 책을 바꾸지 않으셨고, 우리도 분명히 그렇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질문 5 [TOP]
▶ 1611년 이래로 킹제임스 성경도 줄곧 개정되어 오지 않았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개정이 아니라, 수차례의 교정이 있어 왔을 뿐입니다.
1611년에 탄생된 「권위역 성경」의 권위를 심하게 뒤흔들려는 비평가들의 최후 배수진 가운데 하나는 소위 개정이라는 것으로 시비를 삼아 장난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적들, 곧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이 역사적 사실과 사본학적 증거와 성령님께서 이루신 명백한 증거들을 들이대며 자기들의 빈약한 주장을 뒤엎어 버리자, 궁극적인 패배를 맛보지 않으려고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요새로 도피합니다. 일단 이 요새 안에 들어서면, 그들은 자기들의 대적들에 대해 자신만만해 하고는 다음과 같이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십니까? 1611년판입니까? 아니면 1629년판입니까? 아니면 1769년판입니까?"
이같은 공격에 대해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이 충격을 받고 잠시 어리둥절해하면, 그들은 이 혼란한 틈을 타서 재빨리 도망쳐 버립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자기들의 성안에 들어가 성문을 걸어 닫는 순간, 그들은 자기들의 요새가 리건(David F. Reagan)박사라는 사람에 의해 이미 조직적으로 파괴되어 완전히 허물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리건 박사는 미국 테네시주 낙스빌에 있는 트리니티 침례교회의 목사입니다. 그는 「1611년 킹제임스 성경, 초기 개정 신화」(THE KING JAMES VERSION OF 1611, THE MYTH OF EARLY REVISIONS)라는 책을 저술하여 「킹제임스 성경」의 초기 수정판에 얽힌 신화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폭로했습니다. 다시 말해 리건 박사는 「권위역 성경」 비평가들의 마지막 피난처를 파괴시키는 일을 훌륭히 수행해냈던 것입니다. 필자는 그가 발견한 것을 보다 개선시키려 애써야 할 이유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으므로, 그의 허가를 얻어 그의 소책자 전편을 여기에 소개하는 바입니다.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의 초기 개정 신화
마귀가 처음 이브에게 "속임수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방법"(고후4:2)을 가르쳐 준 이래로, 사람들은 줄곧 이 방법을 사용해 왔습니다. 카인으로부터 발람에 이르기까지, 예후디로부터 성경기록관들(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이르기까지, 중세 암흑시대 신학자들로부터 오늘날의 인본주의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은 사람들의 부패한 손이 노리는 제1의 표적물이 되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격은 대개 세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첨가, 삭제, 그리고 바꿔치기가 바로 그 것입니다. 아담의 시대로부터 컴퓨터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전략은 변치 않고 동일합니다. 사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최근 들어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는 마귀의 공략 중 하나는 영어로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 곧 1611년판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정면 공격입니다. 그 공격의 내용은 「킹제임스 성경」이 이미 네 차례나 개정되었으므로, 다른 개정 성경들에 대한 반대론은 타당치 않으며, 마땅히 철회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믿을 수 없는 '신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신화는 1881년 영국의 「개역성경」번역자들이 이미 사용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자신들의 최신 번역판 성경을 팔려는 근본주의 학자들의 불순한 동기에 의해 부활되었습니다. 이 소책자는 이러한 공격에 대한 답변을 담고 있습니다. 본 자료의 목적은 성경보존을 부인하는 자들을 깨우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을 이미 믿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들의 집요한 공격에 답변할 때 늘 생기는 문제점이 하나 있습니다. "비평가들에게 어떤 식으로 얼마만큼 대답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영어 성경의 무오류성에 대한 천박한 질문들에 일일이 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어느 곳에서고 공정성(公正性)이 득세하기 마련이며, 항상 그렇듯이 모든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26:4-5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분명한 것은 어리석은 질문에 대해 그것을 무시해야 할 때가 있고, 그것에 답해야 할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어떤 공격에 대해 답변하는 것이 당신을 상대방과 동일하게 미련한 존재로 만든다면, 그런 질문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 최상의 답이 될 것입니다. 가령,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다는 아무개가 이혼을 했으므로 성경은 무오할 수 없지 않느냐는 질문을 누가 해 온다면, 이 경우에 여러분은 침묵이 최상의 답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사실 여부에 따라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문제나 질문이 제기될 경우, 이것을 회피하거나 무시하게 되면 성경 공격자는 자기의 기만 속에서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고 우쭐하게 될 것이며, 이로 인해 매우 좋지 못한 결과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저는 1611년판 「킹제임스 성경」의 개정 여부를 다루는 이 문제가 두 번째 종류의 문제라고 믿습니다. 만일 「킹제임스 성경」의 본문이 네 차례의 중대한 개정 작업을 거친 것이 사실이라면, 기존의 영어본문에 기초해서 진전되고 있는 성경 개정 작업에 반대하는 것은 실로 그릇된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이 공격에 대해 진지하게 답변을 해야합니다. 과연 이 문제에 대해 충분히 답변을 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이 책을 쓴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1. 1611년 당시의 인쇄술
만일 하나님께서 주후 1611년에 「권위역 성경」을 통해 영어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셨다면(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근거해서 이 성경이 무오류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 근거가 번역자들의 필기자료일까요? 혹은 인쇄공들에게 보낸 교정쇄일까요? 만약에 그런 것들이 근거가 된다면, 이러한 종이뭉치들은 이미 소실되고 없기 때문에 우리의 권위도 근거를 상실하고 맙니다.
어떤 분은 인쇄기에서 첫 번째로 찍혀 나온 책에 권위가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책 또한 분명히 지상에서 사라지고 없습니다. 사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이 그 당시의 인쇄 작업 방식에 따라 인쇄되었더라면, 맨 처음에 인쇄된 책은 인쇄 상태가 좋지 못했음에 틀림이 없으므로 폐기 처분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첫 번째 인쇄할 때 만들어진 책들 중에서 남은 것들뿐이며, 사실 이렇게 남아 있는 책들은 다른 모든 「킹제임스 성경」을 비교하는 표준으로서 종종 지목되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 책들이 표준이 될까요? 초판을 찍어냈던 초기의 인쇄공들이 인쇄 실수를 하지 않으리란 법이 있단 말인가요?
이 문제를 분석하기 전에 처음부터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손에 들고 있는 "보존된 영어 성경 본문"에 대한 권위는 "사람이 만든 그 무엇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있다!"는 점입니다. 인쇄공들의 실수로 틀린 데나 고친 데가 있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본문이 망쳐진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앞으로도 사람들은 많은 실수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이 늘 틀리고 실수하기 쉬운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엄청난 능력과 사랑으로 확실하게 자신의 성경 본문을 보존하실 것입니다. 자, 그러면 1611년 당시 인쇄공들의 고충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킹제임스 성경」을 처음으로 인쇄하기 161년 전인 1450년경에 독일의 요한 구텐베르크(Johann Gutenberg)가 인쇄기를 발명하기는 했지만, 1611년에 「킹제임스 성경」을 인쇄할 때 인쇄공들이 사용하던 장비는 인쇄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에 비해 거의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인쇄는 여전히 느리고 어려웠습니다. 모든 활자를 한 번에 한 글자씩 손으로 조판하였으니 - 성경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한 글자씩 조판했음 - 어떤 책에서도 인쇄공에 의한 실수들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움뿐만이 아니라, 1611년에 「킹제임스 성경」의 첫 판을 인쇄했던 인쇄공들은 참조할 수 있는 이전 판조차 없었기 때문에, 「킹제임스 성경」의 초판에는 여러 가지 인쇄상의 실수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런 실수들은 결코 현대 성경 역본 편집자들이 자의적으로 행한 본문 교체와 같은 것이 아니며 단지 단순한 인쇄상의 실수들로서, 심지어 현대화된 인쇄기의 이점을 모두 살려 만든 최근의 현대 성경 역본에서조차 이따금씩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쇄상 실수였던 것입니다. 비록 이런 실수들이 성경을 무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후기 판에서는 이런 것들을 마땅히 정정해야 했습니다.
현존하는 두 개의 「권위역 성경」 인쇄 원본은, 1611년 당시에 인쇄상의 실수 없이 성경을 인쇄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 두 판본들은 옥스퍼드에서 인쇄되었고, 둘 다 같은 해인 1611년에 인쇄되었습니다. 즉 같은 해에 두 번 출판되었던 것입니다. 동일한 인쇄공들이 일을 했고, 동일한 인쇄기로 인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판본들을 엄밀히 비교해 보면, 본문들 간에 대략 100 여 개의 인쇄상 차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알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 비평가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출판되어온 지난 400 여년 동안, 소위 네 번의 개정 작업이 있었다고 억지 주장을 하며, 그 결과 본문상의 변화로 간주할 수 있는 약 400여 군데의 단서를 발견했다고 억측을 부립니다. 분명히 학자마을에는 무엇인가가 심히 부패되어 있습니다! 자, 이제부터 이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소위 「킹제임스 성경」 본문상의 개정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검토해 봅시다.
2.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이 네 차례나 개정되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
여기서 언급하는 자료의 상당부분은 「권위역 영어 성경(1611), 그 이후의 재판과 현대판들」(The Authorized Edition of the English Bible(1611), Its Subsequent Reprints and Modern Representatives)이라는, 유명한 성경학자 스크리브너(F.H.A. Scrivener)의 책으로부터 발췌한 것입니다. 이 책은 그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매우 학자 티를 내는 책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1884년에 이 책을 출판한 스크리브너가 1881년 「영어개역성경」위원회의 위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는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 권위로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의 책은 「권위역 성경」을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킹제임스 성경」의 "개정"이라는 것을 다루고 있는 스크리브너 책의 첫 부분에 있는 상세한 기록은 참으로 매우 놀랄만합니다. 소위 처음에 「킹제임스 성경」을 두 번이나 대거 개정했다는 것은 원판이 인쇄되고 난 뒤 27년 안에 일어났습니다. 독자께서 아셔야 할 것은 그 당시에 영어가 매우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케임브리지에서 인쇄된 1629년 판 「킹제임스 성경」이 첫 번째 개정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개정'(revision)이 아니라, 단순히 초기의 인쇄상의 실수들을 정성껏 고친 '교정'(correction)이었을 뿐입니다. 1629년판은 「킹제임스 성경」 원판이 번역된 지 18년 후에 완성되었을 뿐 아니라,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을 맡았던 워드 박사(Dr. Samuel Ward)와 보이스 박사(Dr. John Bois) 두 사람이 그 판의 인쇄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원 번역을 맡았던 이 두 사람들보다 더 초기의 실수들을 잘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로부터 9년이 지난 뒤에, 다시 케임브리지에서 소위 '두 번째 개정'이라 부르는 또 다른 판이 나왔습니다. 그때까지 워드와 보이스 박사 모두 살아 있었지만, 이 때 그들이 그 일에 참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1881년의 「영어개역성경」(English Revised Version) 편집에 직접 참여했던 스크리브너조차도, 케임브리지 인쇄공들이 한 것은 1611년에 「킹제임스 성경」이 처음으로 인쇄되었을 때 인쇄공들의 실수로 빠진 단어나 절들을 원래대로 하고, 명백한 인쇄상의 실수들을 교정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시인하였다는 점입니다.
후에 자세히 기술하게 될 한 연구에 따르면, 「킹제임스 성경」 본문에서 약 400 여 군데 교정된 것 중 72%가 원판이 인쇄된 지 27년 만인 1638년의 케임브리지 판에서 완료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소위 처음 '두 차례의 개정'이라 불리는 것은 사실 초기 인쇄상의 실수들을 정화하기 위한 두 단계로 구성된 하나의 교정 공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위 '마지막 두 차례의 개정'이라 불리는 것들도 철자의 표준화에 필요한 두 단계로 구성된 또 다른 하나의 교정 공정이었습니다. 이 두 단계 교정 공정의 판들 중 처음 것은 1762년에 시작되어 7년의 기간을 거쳐 완성이 되었고, 두 번째 것은 1769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본주의 학자들이 개정판에 번호를 매길 때, 한 번보다는 두 번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공정에서는 본문 교정이 거의 필요치 않았습니다. 소위 '수천 개의 변화'(changes)라 불리는 것들은, 이미 확립된 정확한 본문에다 철자가 변함에 따른 형태 맞추기 작업에 불과했습니다. 즉, 철자상의 변화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철자상의 변화는 뒤에 논의할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킹제임스 성경」이 '네 차례의 개정'을 거쳤다는 것이 한낱 기만행위요, 머리 속에서 지어낸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만 기억해 둡시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많든 적든지 간에 변화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 변화들에 대해서는 무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자, 이제부터 이런 변화들의 특성이 어떠한 것인지 함께 검토해 보도록 합시다.
3. 소위 '수천 개의 변화'라는 것에 대하여
누군가가 「킹제임스 성경」의 최초 인쇄원본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분을 박물관으로 데리고 갔다고 가정해 봅시다. 분명히 여러분은 성경이 전시되어 있는 유리상자로 가서 유리를 통해 펼쳐져 있는 성경을 들여다 볼 것입니다. 비록 책장을 넘겨보지 않아도 여러분은 그 성경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성경과 매우 많이 다르다는 것을 쉽사리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안의 단어들을 거의 읽을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는 낱말들조차도 아주 이상하게 쓰여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전의 관람객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1611년 원판이 인쇄된 이래로, 「킹제임스 성경」도 수많은 변화를 겪었구나!"라는 인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신을 똑 바로 차리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단지 매우 교활한 책략에 의해 조롱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았던 그 차이들은 실상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 증거를 조사해 보십시다.
인쇄상의 변화들(Printing Changes)
엄밀한 검토를 위해 변화들을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인쇄상의 변화들', '철자상의 변화들', 그리고 '본문상의 변화들'. 먼저 '인쇄상의 변화들'에 대해 살펴봅시다. 1611년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사용했던 활자체는 고딕 활자체였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에 나오는 영어 단어들의 활자체는 아마도 로마체나 타임즈 로마체일 것입니다. 고딕체는 때때로 그것이 독일에서부터 유래되었기 때문에 독일체라고도 부릅니다. 부디 독일에서 처음으로 인쇄기가 발명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고딕체는 중세기에 손으로 작성한 필사본의 글씨체와 비슷하게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그 인쇄체만이 유일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체는 꽤 일찍 발명되기는 했지만, 유럽 전역에 걸쳐 가장 유력한 인쇄체가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고딕체는 최근까지도 독일에서 계속 사용되어 왔습니다. 1611년 당시 영국에서는 로마체가 이미 대중화되었고, 곧 고딕체를 앞지를 전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원판 인쇄공들은 고딕체가 로마체보다 더 아름답고 표정이 풍부하다고 생각했기에 고딕체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체로 바꾸어야 하는 일이 머지않아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1612년에 로마체를 사용한 첫 「킹제임스 성경」이 인쇄되어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내에 인쇄된 성경들은 모두 로마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활자체의 변화는 글씨의 형태나 크기를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성경의 본문을 고치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고딕체에 친숙하지 못한 현대 독자들은 그 것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딕체 |
로마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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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상의 일반적인 몇몇 변화들 외에도, 몇 개의 특별한 글자들의 변화를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딕체 's'는 대문자로 사용되거나 혹은 단어의 끝에 사용될 때, 마치 로마체의 's'처럼 보여 문제가 별 없습니다. 그러나 단어의 첫머리나 단어의 중간에서 소문자 's'로 쓰일 때는 마치 'f'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also'는 'alfo'가 되고, 'set'는 'fet'가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변화는 독일체 'v'와 'u'에서 발견됩니다. 고딕체 'u'가 로마체 'v'처럼 보이는 반면에, 고딕체 'v'는 로마체 'u'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w'를 '더블-브이'(double-v)라 하지 않고 '더블 유'(double-u)라고 부르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좀 혼란스러워 보이지요? 물론 익숙해지면 괜찮습니다. 따라서 1611년판을 보면 'love'는 'loue'로, 'us'는 'vs'로, 그리고 'ever'는 'euer'로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사실 철자상의 변화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단순히 활자체의 변화일 뿐입니다.
또 다른 예로 고딕체 'j'는 'i'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Jesus'(예수)는 'Iefus'(중간의 s가 f로 변했음에 유의하십시오)가 되고, 'joy'는 'ioy'가 됩니다. 심지어 고딕체 'd'의 굵은 종선이 뒤에서 원으로 굴려지면, 그리스어 델타(?)와 비슷하게 됩니다. 이런 철자상의 변화들이 소위 「킹제임스 성경」이 안고 있는 소위 "수천 개의 변화"라고 불리는 것들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본문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킹제임스 영어 성경」을 공격하는 자들이 우리를 어둠 속에 가두어두려고 사용하는 연막장치에 불과한 것입니다.
철자상의 변화들(Spelling Changes)
「권위역 성경」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또다른 종류의 변화란 정서법(orthography) 또는 '철자상의 변화'입니다. 대부분의 역사서들은 현대 영어가 15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611년경에는 현대 영어의 기본 단어들과 문법적 구조가 이미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철자는 그 당시까지도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1600년대의 철자는 매우 변덕스러웠습니다. 정확한 철자 같은 것은 아직 없었고, 잘 확립된 어떤 철자 규정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어떤 작가들은 종종 같은 책에서, 때로는 같은 페이지에서 조차도 같은 단어를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은 결코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고, 모두 교육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1600년대가 철자표기의 천국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단어들의 철자는 정해진 형태를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18세기 후반에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의 철자도 표준화되었던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이 갖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과 1611년의 인쇄본 사이에 어떤 종류의 철자 변형들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철자의 차이점을 목록화 할 수는 없을지라도, 몇 가지 특징들은 상당히 공통성을 띠고 있습니다. 부가적으로 들어간 'e'들은 종종 'feare', 'darke' 그리고 'beare' 같이 단어들의 끝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중 모음은 오늘날보다도 더 일반적이었습니다. 여러분은 'me', 'be' 그리고 'moved' 대신에 'mee', 'bee' 그리고 'mooued'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중 자음은 더욱 흔한 것이었습니다. 'ranne', 'euill' 그리고 'ftarres'는 오늘날의 철자법에 따르면 어떤 단어가 될까요? 여러분이 맞출 수 있는지 시도해 보십시오. 그것들은 오늘날 철자법에 따르자면, 'ran', 'evil' 그리고 'stars'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인쇄상의 그리고 철자상의 변화들이야말로 「킹제임스 성경」 안에 있는 소위 '수천 개의 변화'라고 불리는 것들의 대부분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어떤 식으로도 결코 본문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솔직히 현시대에 천주교의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성경들에서 공공연하게 만들거나 발견할 수 있는 진정한 본문 변개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본문상의 변화들(Textual Changes)
「킹제임스 성경」도 개정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 예로 제시하는 대부분의 변화들에 대해서는 위에서 충분히 해명을 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의 본문과 현재 발간되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 본문 사이에 실제로 본문 상의 차이점이 있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물론 이 두 개의 본문간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들은 결코 개정에 의한 변화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대개 초기의 인쇄 실수들을 정정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사실임을 세 가지로 입증해 보일 수 있습니다: (1) 변화들의 특성, (2) 성경 전체를 통한 변화들의 빈도, (3) 이런 변화들이 생긴 때.
먼저 「권위역 영어 성경」이 처음으로 인쇄되던 때부터 생겨난 변화들의 특성을 알아봅시다. 1611년 판 본문으로부터의 변화들이라고 간주되는 것들은, 이런 변화들의 특성들을 고려해 볼 때, 분명히 인쇄상의 실수였습니다. 그것들은 절대로 성경 말씀의 해석을 바꾸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본문의 변화가 아닙니다. 첫 번째 인쇄 할 때 어떤 단어들은 때때로 뒤집어졌습니다. 때때로 복수가 단수로 쓰이기도 하고, 단수가 복수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어떤 단어 대신에 그와 비슷한 다른 단어가 대신 들어가 잘못 쓰이기도 했습니다. 드물게는 한 단어 혹은 심지어 한 절이 삭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략된 것들은 너무나 명백했으며, 현대 번역판 성경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리적 차이는 전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진실로 「킹제임스 성경」 본문에서 인쇄상의 실수들을 정정한 것과 오늘날의 많은 인본주의 학자들이 정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크리브너는 자신의 책의 부록에서 "KJV 1611년 판"과 "후기 인쇄본들" 간의 변형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저는 아래에 이렇게 정정된 것들의 예를 실었습니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 예들은 스크리브너의 저서의 왼쪽 페이지에 나오는 첫 번째 정정 사항을 연속적으로 취한 것입니다. 먼저 "1611년 원본"의 본문이 있고, 그 다음에 "현재의 본문"이 있으며, 마지막으로 처음 정정된 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 this thing - this thing also(1638)
2. shalt have remained - ye shall have remained(1762)
3. Achzib, nor Helbath, nor Aphik - of Achzib, nor of Helbath, nor of Aphik(1762)
4. requite good - requite me good(1629)
5. this book of the Covenant - the book of this covenant(1629)
6. chief rulers - chief ruler(1629)
7. And Parbar - At Parbar(1638)
8. For this cause - And for this cause(1638)
9. For the King had appointed - for so the king had appointed(1629)
10. Seek good - seek God(1617)
11. The cormorant - But the cormorant(1629)
12. returned - turned(1769)
13. a fiery furnace - a burning fiery furnace(1638)
14. The crowned - Thy crowned(1629)
15. thy right doeth - thy right hand doeth(1613)
16. the wayes side - the way side(1743)
17. which was a Jew - which was a Jewess(1629)
18. the city - the city of the Damascenes(1629)
19. now and ever - both now and ever(1638)
20. which was of our father's - which was our fathers(1616)
지금 여러분은 지난 375년 동안 「킹제임스 성경」 본문에 생긴 변화들 중 5%의 내용을 보셨습니다. 보셔서 금방 판단하시겠지만, 이것들은 현대 역본들의 '본문변개'(alterations)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것들은 사실상 인쇄상 실수들을 정정한 것이었고, 그래서 현대판 성경들의 본문변개와 비교한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여러분 스스로 위의 목록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심각한 교리적 차이를 지닌 것이 하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스크리브너의 부록 전체를 살펴볼 때, 그것이야말로 그가 교리의 변경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변경 사항이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으라"(Seek God)라고 해야 할 곳에서 "선(善)을 찾으라"(Seek good)고 한 1611년판 「킹제임스 성경」의 시편 69편 32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정말로 인쇄상의 실수였음을 두 가지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good"과 "God"의 철자가 유사하다는 점은 피곤한 식자공이 교정쇄를 잘못 읽어 본문에 틀린 단어를 찍을 수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두 번째로, 이 실수는 너무도 명백해서 원판이 인쇄된 지 6년 후인, 그리고 소위 '첫 번째 개정'이라 불리는 것이 나오기도 전인 1617년에 이미 제대로 수정되었다는 것입니다. 1611년 「킹제임스 성경」 본문에 여러 차례의 주요한 개정 작업이 있었다는 신화가 이제 서서히 사라지고 있으나, 아직도 조금 더 설명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변화들의 특성은 이런 것들이 인쇄상의 실수들이었음을 보여주며, 또한 변화의 빈도 역시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 인본주의 학자들은 1611년판에 만들어진 수천 개의 개정 사항들이 마치 최근의 현대 성경 역본들에서 발견되는 수천 개의 개정 사항들과 동등한 것인 양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위 「킹제임스 성경」본문의 '수천 개의 개정'이라 불리는 것들의 대부분은 활자체 또는 철자상의 변화였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분명히 지루했던 초기의 인쇄공정에 따라 생긴 인쇄상의 실수들을 정정한 것이었습니다.
위에 제시한 목록의 표본은 스크리브너가 얼마나 꼼꼼하게 모든 변형들을 목록화 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렇게 꼼꼼한 학자가 대단한 주의를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1611년 「킹제임스 성경」과 현대 「킹제임스 성경」 간에는 단지 400 여 개의 차이뿐이 없음을 기억하기 바라며, 또한 이런 차이점마저도 인쇄상의 실수라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1611년에 인쇄된 두 개의 옥스퍼드 판들 사이에도 인쇄상의 실수로 서로 100 여 개의 차이가 있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이 대략 1,200장으로 되어 있으므로, 1611년판과 현재 여러분이 구할 수 있는 판과 비교하면 1장당 평균 변형은 0.33개로서 3장 당 1개 꼴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것들은 "chief rulers"를 "chief ruler"로 "And Parbar"를 "At Parbar"로 고치는 것과 같은 변화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형들이 단순히 인쇄상의 실수들을 고친 것이라는 증거가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고, 그것들을 인쇄한 후 매우 빠른 시기에 모두 정정했다는 점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 변화상의 특성과 빈도는 현대 역본들의 본문변개와는 명백히 다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변화들이 일어난 시기 자체가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줍니다. 400여 개의 정정 사항들 중 대다수는 원판이 인쇄되고 난 후 몇 년 내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예로 위의 수정 사항 목록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20개의 정정 사항 중 1개는 1613년에, 또 1 개는 1616년에, 또 1617년에, 8개는 1629년에, 5개는 1638년에, 1개는 1743년에, 2개는 1762년에, 1개는 1769년에 정정되었습니다. 따라서 20개의 정정 사항 중 16개 즉 80%가 1611년의 초판 인쇄 후 27년 내에 정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이 여러분을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위 「킹제임스 성경」 개정작업이란 것은 결코 오래 동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스크리브너 책의 부록의 다른 페이지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킹제임스 성경」 본문 정정 사항의 72%가 1638년경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킹제임스 성경」 개정에 대한 시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킹제임스 성경」 본문 변화는 명백히 인쇄상의 실수에 대한 것뿐입니다. 본문 변화의 빈도는 3 페이지당 1번 꼴로 드문드문 일어났으며, 본문의 인쇄상 실수들의 75%가 처음 인쇄된 지 27년 내에 정정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세부 사항들은 지난 400년간 「킹제임스 성경」에는 번역상의 오류를 바로잡거나 언어를 현대화시킨다는 의미의 진정한 개정작업이 없었다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단지 개정판이 있었다면, 초기의 식자 공정상의 오류를 바로잡아 준 판본이 있을 뿐입니다.
1611년 「권위역 성경」의 정확한 분문 - 단어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 에 대한 권위는 결코 현존하는 초판 원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정확한 본문에 대한 권위는 다름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필원본'이라는 것에 대해 입씨름하며 서로 다투게 될까봐 '자필원본'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번역본 성경의 교정쇄 원본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권위는, 항상 그러하였듯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주님께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4. 전도서에서의 변화들
전도서에 이루어진 변화들에 대해 깊이 연구해 보면, 위에서 언급한 원칙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필자는 이 분야의 연구를 수행함에 있어, 미국 알라바마주 밀브룩의 리즈 박사(Dr. David Reese)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리즈 박사는 최근에 인쇄된 「킹제임스 성경」과 넬슨 출판사가 출간한 「1611년 킹제임스 성경」, 즉 '1611년 원판을 재쇄한 성경'을 비교함으로써, 전도서에서 다음과 같은 4개의 변형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다음의 표에는 먼저 인용 구절이 있고, 그 다음에는 넬슨사의 '1611년 원판 재쇄 성경 본문'이 있고, 다음으로 최근의 「킹제임스 성경」 본문과 이 본문에서 변화가 만들어진 연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
전도서구절 |
넬슨사 본문 |
현재 판의 본문 |
정정된 연도 |
1 |
1:5 |
the place |
his place |
1638 |
2 |
2:16 |
shall be |
shall all be |
1629 |
3 |
8:17 |
out, yea further |
out, yet he shall not find it; yea fathe |
1629 |
4 |
11:17 |
thing is it |
thing it is |
? |
이러한 변화들에 대해서 몇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네 번째 변형 사항은 매우 꼼꼼하고 정확한 학자였던 스크리브너조차 지적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변화는 넬슨 출판사가 재쇄할 때 잘못 인쇄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사실 넬슨사는 원판을 복사하지 않고 일대일 대응으로 재식자한 것이었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이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입니다. 전도서 8장에서 정정된 부분에서 생략된 구절은 원판을 정정한 것 중 가장 긴 것 중 하나입니다(위 표의 세 번째 것). 그러나 그것이 이미 1629년에 정정되었음에 주목하십시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인쇄 실수들의 빈도는 전도서의 총 12장에서 4개이므로 평균치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사실은 전도서 전체가 1638년경까지의 인쇄 실수들을 정정하지 않는다 해도 현재 인쇄되어 시중에 나오고 있는 판들과 똑같다는 점입니다. 부디 「킹제임스 성경」이 나온 것이 지금부터 거의 400년 전이라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성경은 고딕체에서 로마체로 인쇄되었습니다. 따라서 1638년 이후 지난 350년 간 전도서에 이루어진 모든 변화 - 저는 '모든 변화'라고 확신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 란 단지 철자가 표준화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같이, 1629년과 1638년에 출간된 케임브리지 판들의 주목적은 초기 인쇄 실수들을 정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762년과 1769년에 나온 판들의 주목적은 철자법을 표준화한 것이었습니다.
5. 다른 개정본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일
이제 여러분은 1611년에 출간된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개정작업을 거치지 않았으며, 단지 인쇄와 철자법상의 실수나 변화를 정정하는 작업만을 거쳤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개정'이냐 '정정'이냐 하는 것이 무슨 중요한 차이를 불러일으킬까요? 이 문제는 참으로 여러 면에서 매우 중요한 데, 특히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소위 근본주의학자라 하는 이들이 '과거에도 킹제임스 성경이 개정되었다는 거짓 신화'를 이용하여 자신들이 수행하는 본문 위조를 정당화시키려 한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뉴킹제임스 역본」(New King James Version)의 편집자들은 최근 들어 이러한 선전 장난을 최대한도로 이용한 장본인들일 것입니다. 「뉴킹제임스 역본」의 서문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근 400년간 여러 번에 걸친 영어 번역상의 개정을 통해 「킹제임스 성경」은 전세계 영어권의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존경을 받아왔다."
그들은 각종 미사여구를 사용하여, 자기들이 새로 내어놓은 「뉴킹제임스 역본」이 지난 375년 간 계속해서 진행되어온 "킹제임스 성경 개정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강력히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직접적으로 언급한 말을 통해 그들이 암시하려는 바는 참으로 거짓된 것입니다. 이 점을 입증하기 위해 다시 전도서로 가 봅시다.
「뉴킹제임스 역본」에서 전도서 1장을 검토해 보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과 「뉴킹제임스역본」사이에 대략 50개 정도의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서, 철자법의 변화들, 예를 들어 'cometh'를 'comes'로, 'labour'를 'labor'로 등으로 바꾸는 것은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만일 이런 것들도 다 포함시키면, 전도서에만도 600여 개 정도의 변화가 있고, 성경 전체에서는 무려 60,000개 정도의 변화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제가 눈에 띄는 모든 변화를 포함한 것에 대해 저를 비난한다면, 여러분의 말이 맞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지 1611년 「킹제임스 성경」을 분석하면서 식별할 수 있는 변화들의 종류를 세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공정한 일이 아닙니까?
지금까지 「킹제임스 성경」이 계속해서 개정되어온 관례에 따라 최근에 "새로 개정된 킹제임스역본"이라 불리는 책 안에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개 사항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학자들은 「뉴킹제임스역본」이 「킹제임스 성경」의 개정판 시리즈 중 다섯 번째 개정판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소위 네 번의 "개정판"이 만들어진 지난 375년 동안에는 단지 400여 개의 변화가 있은 반면에, 다섯 번째 개정판이라는 「뉴킹제임스역본」에는 무려 60,000개의 변화가 생겨났는지 제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다섯 번째 개정판이라 불리는 「뉴킹제임스역본」이 처음 네 번의 개정판에 있었던 정정 내용의 약 150배에 달하는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도무지 상식 밖의 이야기가 아닙니까?
변화의 빈도도 믿어지지 않을 뿐더러, 변화의 특성 또한 매우 심각합니다. 많은 변경 사항들이 언뜻 보면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은 그 대부분이 심각한 것들입니다. 「뉴킹제임스역본」의 편집자들은 현대판 성경역자들이 저지른 심각한 실수들의 대부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수용할 정도로 매우 교활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일반적인 근본주의자들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부분의 본문들을 겁없이 마구잡이로 바꿔 버렸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뉴킹제임스역본」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습니다. 이제 그들이 전도서에서 행한 매우 악한 변개 사항들의 예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다음의 표에서 인용구절과 「킹제임스 성경」의 본문, 그리고 「뉴킹제임스역본」의 본문이 주어져 있습니다.
구절 |
킹제임스역본(KJV) |
뉴킹제임스역본(NKJV) |
1:13 |
sore travail/심한 고통 |
grievous task/ 괴로운 일 |
1:14 |
vexation of spirit/영을 괴롭게 하는 것 |
grasping for the wind/바람을 잡으려는 것 |
1:16 |
my heart had great experience of wisdom/나의 마음이 지혜라는 큰 경험을 얻었다. |
My heart has understood great wisdom/나의 마음이 큰 지혜를 깨닫게 되었다. |
2:3 |
to give myself unto/내 자신을 주려고 |
to gratify my flesh with/내 육신을 즐겁게 하려고 |
2:3 |
acquainting/친숙한 |
guiding/안내하는 |
2:21 |
equity/공평 |
skill/재주 |
3:10 |
the travail, which God hath given/ 하나님께서 주신 산고 |
the God-given task/하나님께서 주신 일 |
3:11 |
the world/세상 |
eternity/영원 |
3:18 |
they themselves are beasts/그들이 짐승임을.... 드러내시리니 |
they themselves are like beasts/그들이 짐승과 같음을... 시험하시리니 |
3:22 |
portion/몫 |
heritage/유산 |
4:4 |
right work/옳은 일 |
skillful work/교묘한 일 |
5:1 |
Keep thy foot/네 발을 지키라. |
walk prudently/조심하여 걸으라. |
5:6 |
thy voice/네 목소리 |
your excuse/네 변명 |
5:8 |
he that is higher than the highest/ 가장 높은 분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자 |
high official/고관 |
5:20 |
God answereth him/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
God keeps him busy/하나님께서 그를 바쁘게 하신다. |
6:3 |
untimely birth/조산 |
stillborn child/유산된 아이 |
7:29 |
inventions/발명 |
schemes/계획 |
8:1 |
boldness/대담함 |
sterness/험상궂음 |
8:10 |
the place of the holy/거룩한 자의 장소 |
the place of holiness/거룩함의 장소 |
10:1 |
Dead flies cause the ointment of the apothecary to send forth a stinking savour/죽은 파리들은 약제사의 연고로 하여금 지독한 냄새를 발하게 한다. |
Dead flies putrefy the perfumer's ointment/죽은 파리들은 향수 제조자의 연고를 부패시킨다.
|
12:9 |
gave good heed/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다. |
pondered/깊이 생각했다. |
12:11 |
the masters of assemblies/회중의 스승들 |
scholars/학자들 |
위의 표의 내용은 전도서에 있는 변경 사항들을 보여주는 극히 일부분의 예이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그들이 어떤 일을 행했는지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의 특성인 '공평'이 '재주'로 바뀌었습니다(2:21). '세상'이 '영원'으로 바뀝니다(3:11). 하나님 없는 인간은 더 이상 짐승이 아니라 단지 짐승과 같을 뿐입니다(3:18). 전도서 5:8에서는 하나님 즉 "가장 높은 분"이 고관으로 대체되어 성공적으로 제거됩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는 학자들을 바쁘게 만드십니다(5:20). 아마도 위에 언급된 변화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마지막에 소개된 "회중의 스승들"이 "학자들"로 바뀐 것입니다. 「뉴킹제임스역본」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말은 몰이채와 같고, 학자들의 말은 잘 박힌 못과 같으니, 한 목자가 준 것이로다."
"The words of the wise are like goads, and the words of scholars are like well-driven nails, given by one Shepherd. NKJV)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의 말은 몰이채와 같고, 회중의 스승들이 박은 못 같으니, 다 한 목자가 준 것이로다."
"The words of the wise are as goads, and as nails fastened by the masters of assemblies, which are given from one shepherd. KJV)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내용이 많이 다릅니다. 「뉴킹제임스역본」에서는 회중의 스승들이 학자들로 대치되어, 마치 학자들이 목자의 말씀의 원천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킹제임스역본」에서는 말씀의 원천이 한 목자, 곧 하나님임을 보여줍니다. 물론 「뉴킹제임스역본」의 학자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말씀의 원천으로 생각해 주길 바라겠지만,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뉴킹제임스역본」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킹제임스 성경 개정 작업", 즉 "인쇄나 철자법 상의 실수나 변화를 바로 잡은 개정판"이 결코 아닙니다. 「뉴킹제임스역본」은 전혀 새로운 번역인 것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이 글의 목적은 결코 현대 역본 성경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진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의 목적은 근본주의 집단에 맴돌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과 관련된 그릇된 주장, 즉 학자들이 부풀려 놓은 거짓 신화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 신화는 다름이 아니라 「뉴킹제임스역본」및 기타 그와 유사한 역본들이 1611년 이래로 꾸준히 이루어진 "킹제임스 성경 개정판"의 연장선상에 있는 또 다른 개정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이론은 곧 심각한 문제에 부딪히고 마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설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킹제임스 성경」에는 결코 그들이 주장하는 것 같은 본문상의 개정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네 차례의 주요 개정 작업을 거쳐 본문을 바꾼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뉴킹제임스역본」은 이전의 개정판들의 연장 판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넬슨사 역본"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뉴킹제임스역본」의 판권을 넬슨사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확신을 가지셔도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손에 있는 「킹제임스 성경」은 결코 '개정된 것'이 아니라 '정화된 것'입니다.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이 성경이 우리를 위해 "영어로 보존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본문의 정확성에 대한 권위는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의 초판 인쇄본에 있는 것도 아니요, 제임스 1세의 인품에 놓여있는 것도 아니며, 엘리자베스 시대 영국 문학의 뛰어난 업적에 있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그리스어 공인본문」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영어 권위역 성경」(AV)이라는 절대무오한 말씀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겠다고 하신 약속과 그분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 시간에 그분의 말씀이 있습니다. 리건 박사의 이 귀한 소책자는 다음의 주소로 1 달러를 보내시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Trinity Baptist Temple Bookstore, 5709 N. Broadway, Knoxville, Tennessee 37918, USA, (615) 688-0780
질문 6 [TOP]
▶ 최고의 사본들이 새로운 번역본들을 뒷받침한다고 하는데요?
☞ 아닙니다. 최고의 사본들은 오히려 권위역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을 뒷받침해 줍니다.
새로운 번역본들(개역 성경들)은 5,000 개가 넘는 성경 본문 필사본 중 단지 다섯 개 정도에 의해서만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킹제임스 성경의 비평학자들은 이 필사본들이 권위역 성경의 번역자들이 사용한 필사본들보다 낫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두 가지, 즉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자산인 바티칸 사본(Vaticanus)과 시내 사본(Sinaiticus)은 실수 투성이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시내 사본은 10 명이나 되는 다른 작가들에 의해 정정되고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바티칸 사본에서는 매우 조잡한 솜씨의 증거가 발견됩니다. 때(time)와 단어들(words) 그리고 절(phrase) 전체가 연달아 두 번 반복되거나 완전히 삭제되어 있습니다. 바티칸 사본 전체는 펜을 들고 각 글자마다 수정을 가한 어떤 인물 혹은 인물들에 의해 훼손되어졌고, 그런 인물들의 정체를 규명하는 것조차 매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두 사본들 모두 성경에서는 볼 수 없는 영감되지 않은 비성경적인 책들(외경)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실수들을 잔뜩 갖고 있지만 이 신뢰할 수 없는 필사본들은 사용된 재질에 있어서는 아주 우수합니다. 그것들은 훌륭한 제본과 질 좋은 동물 가죽으로 페이지들을 엮었습니다. 그것들의 무가치한 본문에 비해 그 외양은 실로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책 표지로 그 책을 판단할 수 없다"라는 속담을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 표지들은 매우 아름다우나 그 본문들은 비난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이같이 잘 알려진 개악(corruptions)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신미국표준역(NASV)이나 신국제역(NIV)같은 많은 새 번역 성경의 기반이 됨으로써, 결국 이런 번역 성경들을 오류투성이로 그리고 신뢰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 의해 대표되는 필사본들은 최고의 질을 가진 본문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고의 사본들이 바로 킹제임스 번역가들이 사용한 사본들임을 알게 됩니다.
질문 7 [TOP]
▶ 만일 영어로 된 완전한 성경이 존재한다면, 불어나 독일어, 혹은 일본어나 한국어 등으로 된 완전한 성경도 있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한 민족'에게 '한 언어로 '한 가지 일' 즉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분 자신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든 언어마다 완전한 성경 번역이 있어야만 한다는 억측은 잘못 된 것이며, 지금까지 증명된 하나님의 관행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 설명은 세 부분, 즉 [구약 성경], [신약 성경], [성경 전체]로 나뉩니다:
(1) 구약 성경 :
에스라서와 다니엘서 몇 부분을 제외하고 구약 성경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거룩하게 유다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 또한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분 나름대로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하나의 민족에게 하나의 언어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현대 학자들에 의해 위협을 받으실 분이 아니므로 구약 성경이 기록된 시대에 지구상에 존재하던 이집트어, 갈대아어, 시리아어, 이디오피아어 혹은 어떤 다른 언어들로 그분 자신의 말씀을 제공해야 할 의무를 느끼지 않으셨습니다. 구약 성경은 독점적으로 유다인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다교로 개종해야만 했었습니다. 또한 그런 일들에 대해 넉넉한 대책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2) 신약 성경 :
신약 성경이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는 것 또한 용인된 사실입니다.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보통사람들이 사용하던 코이네 그리스어(Koine Greek)로 기록되었습니다. 또 다시 우리 주님께서는 영감을 통해 그 당시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로 완전한 원문을 주실 이유가 없음을 명백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는, 그분의 책이 이스라엘과 같은 한 민족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대신에 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졌습니다(마 28:19). 그분께서 신약 성경의 언어로서 그리스어를 선택하신 이유는 그것이 그 당시 온 세상에서 가장 유력한 언어였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3) 신구약 성경 전체 :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세계에 공통된 언어로 합치려고 하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언어로서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어뿐이었습니다. 영어는 16세기 후반까지 수세기에 걸쳐 발전해 왔습니다. 그 무렵 영어는 지구상 그 어느 언어도 누리지 못했던 탁월한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만 남았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완전한 책의 마무리를 위해서 이 완전한 언어를 선택하셨습니다.
먼저 영국 그리고 뒤를 이어 미국은 지구상의 구석구석에 영어를 제 1 혹은 제 2 외국어로 확립시켜 가며,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국가로서 온 세상을 휩쓸었습니다. 오늘날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라들도 자기 국민들에게 여전히 영어를 가르쳐야만 합니다. 심지어는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서방 세계에 적대적인 나라들조차도 자기의 사업가나 군사 요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두 언약(Two Testaments,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묶기 위해 영어를 택하심으로써 온 세계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를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구약 성경을 위해 단지 하나의 언어를 선택하셨고, 신약 성경을 위해서도 단지 하나의 언어를 선택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분께서는 그러한 두 개의 언약을 단지 영어라는 하나의 언어로 묶으심으로써 그분 자신의 관행을 일관되게 지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어를 선택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위대한 사명을 수행할 명령을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그분께서는 거실에 있는 커피 테이블에 차분히 펼쳐놓아 우리의 손님들에게 우리가 "매우 종교적임"을 알리도록 하기 위해 완전한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첫날부터 책갈피에 꽃을 넣어 납작하게 하거나 혹은 우리 가계(family tree)를 그 안에 기록하도록 그 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읽도록 그것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팔에 끼고, 그 책 안에서 밝혀진 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복음을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이 세상과 나누기 위해 그 책을 주신 것입니다.
자, 빨리빨리 복음을 전합시다!
질문 8 [TOP]
▶ 성경의 사본들의 출처는 어디인가요?
☞ 현존하는 성경 필사본의 대부분은 두개의 계열 혹은 군(群)으로 나뉩니다. 이 계열들은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디옥이라는 도시들에 의해 대표됩니다.
단지 두 개의 성경, 즉 하나님의 성경과 마귀의 것이 존재합니다. 성경에 대한 견해도 단지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합니다. 전적으로 완전하다는 견해이든지 혹은 불완전하다는 견해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사본의 형태와 그들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볼 때, 이 두 성경은 중동 지역의 매우 다른 장소들에서 발원합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디옥이 그것입니다. 어떤 장소가 우리에게 완전한 성경과 정확한 이데올로기를 주며, 어떤 장소가 우리에게 마귀의 성경과 부정확한 이데올로기를 주는가를 식별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러한 연구는 성경이라는 한 가지 원천 때문에 아주 쉽게 이루어집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또다시 언급하겠지만, 우리는 신앙과 행위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우리의 최종권위로 받아들입니다. 그러하기에 누구나 먼저 해야 할 일은 성경을 연구하여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어떻게 생각하시며 시리아의 안디옥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할 때, 우리가 따라 가야할 기본 규칙은 "첫 번째 언급의 법칙"(the law of first mention)이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대체로 어떤 사람이나 장소가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부분의 문맥이 그 사람이나 장소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에 관한 우리의 연구에 있어서, 우리는 이집트에 대해 성경말씀이 취하는 태도를 결코 무시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집트(애굽, Egypt)
(1) 성경에서 이집트는 창세기 12:10-12에서 제일 먼저 언급됩니다.
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이집트로 내려가 거기에 거하려 하더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이집트에 가까이 와서 들어가려 할 때에 자기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이제 보라, 내가 알기에 그대는 보기에 아름다운 여인이라.
12 그러므로 이집트 사람들이 그대를 볼 때에 말하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려두리니
창 12:1-3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소위 '아브라함과의 언약'이라고 알려진 것이 주어짐을 봅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그들의 소유로서 양도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창 12:10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고국에 있었던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갑니다. 12절에는 이집트인들이 그를 죽이고 그의 아내 사래를 강탈할지도 모른다는 아브라함의 두려움이 나타납니다. 분명히 긍정적인 문맥이 아니지요?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이집트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이 매우 부정적임을 봅니다.
(2) 출애굽기 1:11-14에서 우리는 유다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들이었음을 발견합니다.
11 이에 그들이 작업 감독자들을 이스라엘 자손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주어 괴롭게 하였더니, 그들이 파라오를 위하여 국고 도시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니라.
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그들이 더욱 번성하고 커지므로 이집트 사람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인하여 근심하며
13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더 엄격히 섬기게 하고
14 고된 노예생활로 그들의 삶을 괴롭게 하니 곧 흙이기는 일과 벽돌 굽는 일과 들에서의 온갖 섬기는 일이라.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섬기게 한 모든 일이 엄격하였더라.
사실상 이집트의 통치자였던 파라오(바로)는 15-16절에서 유대의 모든 남자 아기들이 죽임을 당할 것임을 포고합니다.
15 또한 이집트 왕이 히브리 산파들에게 말하더니 그 중 하나의 이름은 십브라요, 다른 하나의 이름은 부아더라.
16 그가 말하되, 너희가 히브리 여인들을 위하여 산파의 일을 할 때에 해산대를 살펴보아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릴지니라, 하였으나
이 구절도 명백히 부정적인 것을 암시하지 않습니까?
(3) 출애굽기 20장에서, 이집트 땅에서 자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여 내신 후,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목소리로 그분께서 이집트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2절에서 그분께서는 이집트를 "속박의 집"(house of bondage)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속박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주로다."
이것 역시 또 한 번의 부정적인 언급이며, 이번에는 이것이 직접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4) 신명기 4:20에서 모세는 이집트를 "쇠용광로"(the iron furnace)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 용광로 곧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사, 이 날의 너희와 같이 자신을 위하여 상속 백성으로 삼으셨느니라."
(5) 신명기 17:16에서 이스라엘은, 미래에 그들이 왕을 갖게 될 때, 그들의 왕이 이집트와 상업적인 거래를 해서는 안된다는 명령을 들었습니다.
"왕이 된 자는 자기를 위해 말들을 많이 늘리지 말 것이요, 말들을 많이 늘리려고 백성을 이집트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주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후로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 하셨음이며"
(6)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시록 11:8 에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비난하기 원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예루살렘을 소돔과 이집트에다 비유하십니다.
"그들의 죽은 몸이 그 큰 도시의 거리에 놓이리니,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고 하며 곧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이상의 간략한 연구는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살펴 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이 이집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우리는 성경에서 알렉산드리아가 단지 네 번 언급되며, 네 번 모두 다 나쁘게 언급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1) 알렉산드리아는 사도행전 6:9에서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그 때에 리베르티 사람과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 하는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논쟁을 벌이더니"
스데반과 더불어 변론하며 실제 그를 죽였던 무리들 가운데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온 유다인들이 있었습니다.
(2)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사도행전 18:24에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폴로라 하는 유다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여기서 우리는 영적으로 매우 열심이 있었으나 복음에 관해 잘못 알고 있었던 아볼로라 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유다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은 모르는 채 그는 에베소에서 침례자 요한의 침례에 대해서만 가르쳤습니다(행 18:25, 19:3). 아볼로는 그때까지도 구원받지 못했으며 그가 개종시킨 자들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후에, 아볼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의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었으며(26절), 그의 메시지가 완전해지게 됩니다(28절). 그러나 두 번째 언급된 곳에서도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잘못된 성경 가르침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3)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세 번째와 네 번째 언급 역시 매우 비슷합니다. 바울이 사도행전 21장에서 체포되고 카이사르에게 변론을 요구한 후, 그는 알렉산드리아로부터 배를 타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로마로 보내집니다(행27:6).
"거기서 백부장이 이탈리아로 항해 중인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 우리를 거기에 태우니라."
(4) 로마로 항해하는 도중 바울이 탄 배는 폭풍우로 인해 가라앉게 됩니다. 멜리데라 하는 섬에서 석 달을 보낸 후 그는 또 다른 배를 타고 죽음을 향한 길로 보내집니다. 바울을 죽음으로 몰고 갈 이 두 번째 배는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석달 뒤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의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기호(記號)는 카스토르와 폴룩스더라."(사도행전 28:11)
위에서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성경의 네 군데 언급들이 모두 부정적임을 알았습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성경의 판결이 좋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100년 경에 아테네로부터 철학과 교육을 받아 들였고(행17:16), 그 이후에 세상 철학과 학문의 중심지로 불리워졌음에 주목해야 겠습니다(골로새서 2:8). 거기에는 철학자였던 판테누스(Pantaenus)에 의해 설립된 성경 학교가 있었습니다. 판테누스는 성경을 모두 철학적으로 그리고 알레고리로 해석했습니다. 철학적이라 함은 그가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진리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경의 무오류함을 믿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봄으로써 그는 아담, 노아, 모세, 다윗 같은 사람들은 단지 유다인들의 시(詩)에나 존재하며 실재의 역사적 인물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와 후에 오리겐(Origen)에 의해 그 학파의 우두머리로 칭송받게 되었습니다.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그의 회의론을 공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순수한 복사본들(pure copies)을 받는 즉시 그의 뒤틀린 사상과 병행하도록 성경을 개조한 사람은, 교육과 철학이라는 두 개의 마취제에 미혹된 오리겐(Origen)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성경 비평학자들의 아버지이며, 누가복음 24:40, 사도행전 8:37과 요한일서 5:7 같은 구절들을 삭제해 버린 필사본들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경은 완전하며 무오류하다"고 단숨에 말한 뒤에 곧바로 "성경에는 실수들과 오역들이 있다"고 진술하는 많은 근본주의 학자들이 앵무새처럼 되풀이되는 알렉산드리아 철학의 창시자이기도 합니다. 부패한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에다 맨 처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 바로 이 실성한 이데올로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이 부패한 것이므로 마땅히 폐기처분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성경에 오류가 있으므로 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 철학은 더더욱 교활하고 위험하기 짝이 없으므로 참된 성경 신자들이라면 마땅히 배격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안디옥(Antioch)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 안디옥은 알렉산드리아가 나오는 똑같은 책의 같은 장인 사도행전 6장에서 처음으로 언급되는데 알렉산드리아와 비교해 보면 전혀 다른 맥락으로 나타납니다.
(1) 사도들은 오늘날 우리가 "집사"(deacons)라고 알고 있는 "돕는 자들"의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그 직분을 맡아야 하는가를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 6:3,4: " 3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정직하다는 평판이 있고 성령님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직 계속해서 기도와 말씀 사역에 헌신하리라, 하니"
그 뒤 사도행전 6:5에서 일곱 사람이 선택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쁘게 여기고, 믿음과 성령님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안디옥 출신의 유다교 개종자 니골라를 선택하여"
첫 번째 집사들 중 한 명인 니골라가 안디옥 사람이었음을 주목하십시오. 이것이 단순한 일치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집사들 가운데 니골라만이 그 고향이 제시된 집사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또한 안디옥이 성경에서 처음 언급된 곳에 알렉산드리아가 언급된 것도 절대로 우연이 아닙니다. 그리고 같은 구절에서 안디옥은 긍정적인 견지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는 부정적인 견지에서 처음 언급되었음을 아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안디옥에 대한 다음 몇 개의 적절한 보기들은 하나님께서 신약 교회의 중심지로서 안디옥을 선택하심에 대하여 보여주는데 물방울 같은 증언으로 시작해서 홍수 같은 증언으로 그 끝을 맺습니다.
(2) 안디옥은 사도행전 11:19-21에 나타납니다.
"한편 스데반으로 인하여 일어난 핍박으로 말미암아 널리 흩어진 자들이 멀리 베니게와 키프러스와 안디옥까지 여행하며 오직 유다인들에게만 말씀을 선포하는데 그 가운데 키프러스와 구레네 출신의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그리스파 사람들에게 말하여 주 예수님을 선포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오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핍박을 피해 도피한 크리스천들 중 한 무리가 도피한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이 안디옥에 도달했을 때, 사도행전 10장의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문을 연 사건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21절에서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안디옥에서 힘있게 일하셔서 "상당수"가 구원받았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초의 이방인 대각성 운동이 안디옥에서 일어났음을 보게 됩니다.
(3) 사도행전 11:22-24에서 바나바(위안의 아들; the son of consolation 행 4:36)가 안디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아보기 위해 안디옥에 파견됨을 보게 됩니다.
"이 일에 관한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의 귀에 들어가매 그들이 바나바를 보내어 멀리 안디옥까지 가게 하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권면하여 마음에 작정을 하고 주께 붙어 있으라 하니라. 바나바는 선한 사람이요, 성령님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많은 백성이 주께 더하여지더라."
(4) 사도행전 11:25,26에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떠나서
26 그를 만나매 안디옥으로 데려와 그들이 일년 동안 그 교회와 함께 모임을 갖으며 많은 백성을 가르치더니,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첫 번째로 우리는 바나바가 젊은 개심자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도행전 9:26,27에서,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바울의 개종을 변호해 주었던 이가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열심있는 한 젊은 개종자가 다소에 가서(행 9:30), 잊혀져 가는 것을 보고 슬퍼하였습니다. 사울을 찾아낸 뒤, 바나바는 그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오지 않았습니다(그리고 확실히 알렉산드리아도 아닙니다.). 그는 그를 신약 교회의 영적 수도인 안디옥로 데리고 왔습니다. 바울의 된 바 모든 것이 이 경건한 노성도의 친절한 행동 덕분이었습니다.
(5) 사도행전 11:26에서 우리는 거듭난 신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크리스천"이라 불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자들이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부를 때마다 안디옥의 우리 영적 선조들과 영적인 연대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안디옥과 크리스천의 관계는 플리머스록(Plymouth Rock: 청교도 조상들이 상륙했다고 하는 미국 플리머스 지방의 사적지)과 미국인의 관계와도 같은 것입니다.
(6) 27,28절에서,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북쪽에 있는 안디옥으로 보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무렵에 대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가운데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일어나 성령을 통하여 보여주기를 온 세상에 두루 큰 흉년이 있으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때에 그렇게 되니라."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몇 해 전 사도행전 1:8에서 그곳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던 제자들의 고향일 뿐입니다.
(7) 사도행전 11:29,30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안디옥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신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보내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저마다 자기 능력대로 유대에 거하는 형제들에게 구호금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구호금을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맡겨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신약교회의 본거지에 대한 성경의 마지막 언급은 아닙니다.
(8) 하나님께서 복음선포를 위해 온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결심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예루살렘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습니다(물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대신에 안디옥에서 자신의 충성스런 종들을 찾으셨습니다.
"안디옥에 있는 교회에 대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의 루기오와 사분영주 헤롯과 함께 양육을 받은 마나엔과 사울이라.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하여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 이에 그들이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 위에 손을 얹고 보내니라."(사도행전 13:1-3)
따라서, "크리스천"이라는 명칭이 안디옥에서 기원한 것같이, 성경에 언급된 첫 번째 전도여행 또한 안디옥에서 발원했음이 명백합니다. 이 위대한 임무를 완수하고 나서,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에 보고서를 보내거나 그 도시를 관광하는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안디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말씀을 버가에서 선포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를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이 두 사람이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그들을 맡겼던 곳이라. 그들이 도착하여 교회를 함께 모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또 그분께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되풀이하여 말하고 거기에서 제자들과 함께 오랫동안 머무니라."(사도행전 14:25-28)
안디옥에 대한 마지막 두 개의 언급을 살펴보면, 안디옥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는 것임을 확증해 줍니다.
(9) 사도행전 15:23-27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에 관한 결정 사항의 통지를 위해 두 명의 대표를 안디옥에 보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 두 사람 편에 이와 같이 편지하니라. 사도들과 장로들과 형제들은 안디옥과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우리가 들은즉 우리로부터 어떤 사람들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혼란에 빠뜨리고 너희 혼을 뒤엎으며 말하되, 너희가 반드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 하나, 우리는 그들에게 그런 명령을 준 적이 없으므로 한 마음으로 모여 사람들을 선택하여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로 보내는 것을 좋게 여겼나니 이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자들이니라. 그리하여 우리가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그들도 너희에게 이 일을 입으로 전하리라."(사도행전 15:23-27)
임무를 마친 후에 유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라는 안디옥에 남기로 하였고(역주 - 한글개역성경에는 34절의 내용 즉 '실라는 거기에 그대로 머무는 것을 기뻐하더라.'(Notwithstanding, it pleased Silas to abide there still)이 없음.), 바울의 두 번째 전도여행의 선교 동역자로서 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10) 물론 두 번째 전도여행도 예루살렘에서 발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5:40이 설명해 주는 대로,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던 안디옥에서 발원했습니다.
안디옥의 어떤 점이 하나님께서 신약교회의 중심부로 선택하실 정도로 매력적이었을까요? 안디옥은 로마, 아테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처럼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그 자신을 이방종교, 이방학문과 이방철학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것이 주목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안디옥이 위에서 언급된 도시들이나 심지어 예루살렘과도 달리, 그 당시 알려졌던 세계의 거의 정확히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고, 동-서 무역로의 교차지점에 세워졌다는 점에 비중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심지어 안디옥은 오론테스 강을 경유한 항구도시임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기독교의 본거지로서의 활발한 기능을 위해 매우 중요한 속성들입니다. 아마도 바울 서신들의 자필원본들의 대부분은 안디옥에서 쓰여졌을 것입니다.
2세기에 루시안(lucian)이라는 한 제자가 안디옥에서 성경학교를 세웠습니다. 루시안은 이교도 철학을 불신하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의 학파는 성경의 신성과 권위를 찬미했으며, 성경을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들이 가르쳤던 것처럼 상징적으로서가 아닌,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므로 안디옥은 성경 필사본의 바른 계열의 기원점일 뿐 아니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그리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데올로기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마음은 선하나 "알렉산드리아식" 교육을 받은 수많은 목회자들이 안디옥 성경(킹제임스 성경)을 높이고는 있지만, 성경이 완전할 수 없다는 알렉산드리아적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에 있어 이러한 이집트의 확신 때문에 시편 12:6,7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 완전한 성경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옳지 못한 태도로 옳은 책(성경)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들의 이집트 선조들이 행했던 똑같은 실수들과 개악들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도록 예정될 것입니다.
누가 성경의 충고를 무시하고도 실패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 솔로몬은, 이집트를 멀리하고 말(horse)을 늘리려고 이집트에 내려가지 말라(신 17:16)는 성경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열왕기상 3:1에서 그는 이집트 왕 파라오의 딸과 혼인했습니다. 열왕기상 10:28에서 그는 이집트에서 말(horse)들을 사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열왕기상 11:3,4에서 우리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 따르는 것으로부터 돌아섬을 보게 됩니다. 5-8절에서 그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9-43절에서 하나님께서 그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이 말을 사기 위해 이집트에 내려가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찌 감히 그 곳에 내려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도 이집트에 대한 성경의 관점을 무시하고서는 일들을 잘 해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솔로몬보다 더 지혜롭습니까?
질문 9 [TOP]
▶ 오리겐은 누구입니까?
☞ 성경 변개의 장본인으로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믿음과 동일한 믿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소수 본문"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들어진 "국지적 본문"(A Local Text)이었고, 그 곳에서 유세비우스는 대음모자 콘스탄틴 황제(Emperor Constantine)의 요청을 수행하기 위하여 50개의 복사본을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세비우스는 참된 크리스천들이 공통적으로 받아들인 순수한 본문을 사용하기 위해 안티옥으로 가지 않았고, 대신에 이집트에 있는 교육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거기에서 "학자들의 수정판"을 얻었습니다다.
그렇다면 왜 유세비우스는 안티옥 대신에 알렉산드리아를 선택했을까요? 그 주된 이유는 그가 이집트 학자인 오리겐을 열렬히 추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리겐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아드만티우스 오리게네스(주후 185~254년)는 성경 본문 부패의 주장본인입니다. 현재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회사 자체가 로마카톨릭 교회사이므로, 대부분의 신학교 교과서나 참고서들은 오리겐을 가리켜 "위대한 크리스천 학자요, 고대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던 신학자"라고 잘못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리겐은 한때 그리스의 아테네 철학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한 이단자로서 판명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예수님께서 '창조된 하나님'이었습니다는 이단교리를 퍼뜨렸습니다. 이같은 오리겐의 믿음에 대해 「뉴스탠다드 백과사전」(New Standard Encyclopedia), 제9권은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오리겐의 사상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그의 '로고스(Logos) 교리'였다. 이 사상은 요한복음 1장 1-5절과 기타 다른 기독교 저술 안에도 나타나 있으나, 특히 오리겐은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루었다. 그리스 철학에서 로고스란 창조의 신적 원리와 이성세계의 질서에 대한 이름이었는데, 오리겐은 이 원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적용시켰다. 그는 아들을 아버지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듦으로써, 그리스도를 세상에 이성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로고스'로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오리겐은 실제로 이 땅에서 사시며 가르치시기도 하셨던 사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무시하였다. 이같은 교리는 4세기경의 이단 그룹인 아리우스파의 교리 정립을 위한 토대를 제공해 주었다."
다시 말해 오리겐은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은 것이 아니고 하나의 피조된 신으로 믿은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땅에 거하셨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오리겐의 저술에는 많은 모순들이 있는데, 바로 이같은 사실은 부패한 사본들 속에 들어 있는 모순들을 설명해 주는 열쇠가 됩니다. 간혹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다가도, 이내 돌아서서는 그것을 부인하곤 했습니다.
사실 오리겐은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을 변개하고는 "말씀(the word)은 한 신(a god)이었습니다."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과 '신'을 소문자로 쓴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같은 믿음은 참으로 우리 세대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고수하는 그릇된 교리에서 나온 믿음과 동일한 것입니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같은 자신들의 교리를 부패한 알렉산드리아 사본의 요한복음1장 1-5절과 3장 13절에서 취하고 있는데, 바로 이 오리겐이라는 인물이 자기 자신의 이단교리를 합리화하기 위해 "보편적 본문"을 변개 시켜 여호와의 증인들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오리겐이라는 인물이 성경 사본의 변개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므로, 우리는 그의 생애와 작품, 그리고 철학 및 성경 변개 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A. 오리겐의 삶
오리겐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부유하게 살던 크리스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젊은 나이에 교사로서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의 삶은 세르베루스 황제의 박해가 있었던 주후 202년경에 극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순교했고 그의 가정은 가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 뒤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도망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오리겐은 18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클레멘트가 창설한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의 교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천재였으며 수많은 책들을 모으고 읽고 저술했으며 또한 영지주의자였던 암브로스의 책들을 소장했습니다. 그는 또한 이교도로서 신플라톤주의를 창설한 사카스 밑에서 공부했고, 매우 금욕적인 삶을 살았는데 신발도 신지 않고 맨 땅에서 잤으며 스스로 거세했던 매우 특이한 인물이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박해를 당하면서도 그는 개인적으로 매우 용감했고 인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주후 213년에 로마를 방문했으며 그 뒤 알렉산드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어 주후 215-219년 사이에는 팔레스타인의 캐사레아로 이주했습니다. 후에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온 그는 주후 231년까지 거기에 거하다가 알렉산드리아의 지도부와의 마찰로 인한 출회로 영구히 그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232년에 그는 캐사레아에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에 버금가는 학교를 세웠고, 데시우스트라얀 황제의 모진 박해로 인해 캐사레아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B. 오리겐의 믿음
비록 오리겐이 초기의 위대한 교부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마저도 그가 교리적으로는 정통이 아니었음을 인정합니다.
1. 그는 영지주의적 신념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2. 그는 플라톤 철학에 심취했습니다.
3. 그는 종종 구약성경을 신비적으로 해석했고, 신약성경과 더불어 비유적으로 해석했습니다. 이에 대해 저명한 학자 피커링은 마쉬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운 철학에 비추어 볼 때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 불합리하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면, 오리겐은 곧바로 문자적 해석을 버리고 비유 해석을 택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성경이란 기록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겐 거의 쓸모가 없다.' 이 말은 곧 자기가 느끼는 바가 바로 성경이 의미하는 바라고 오리겐이 생각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피커링, 「신약성경본문의 본질」(The Identity of the New Testament Text), 1977, pp. 140, 192)
4. 그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기록을 부인했고, 오히려 영혼이란 영원 전부터 계속해서 존재해온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5. 그는 또한 죽음 이후에 사람의 혼이 그 사람의 행위에 따라 좀더 고차원의 혹은 저차원의 생명으로 바뀐다는 윤회사상을 믿었습니다.
6. 그는 또한 보편적 구원을 믿었으며, 악한 자들도 형벌을 받은 후에는 즉 연옥에서 고통을 받은 후에는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7. 그는 또한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고 별이나 달도 혼을 갖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8. 그는 결국에는 마귀들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9. 그는 목사를 제사장(혹은 신부)으로 부른 사람들 중 하나이며 주교들이 큰 죄를 용서하는데 한 몫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10. 대부분의 교부들이 성경대로 '전천년주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교회가 세력을 확장해서 평화를 가져온다는 '후천년주의'를 신봉했습니다.
C. 오리겐의 작품
오리겐은 그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서 온 기독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 평생에 6,000 여권의 책을 저술했고 초기 교부들이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글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의 50% 정도가 그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니케아 종교회의 이전의 7명의 중요한 교부들이 신약성경을 인용한 것 중에서 오리겐의 것이 약 18,000개나 될 정도로 그는 왕성한 저술 활동을 했습니다.
1. 오리겐의 대규모 작품
a. 그는 성경의 거의 모든 책에 대한 주석서를 썼다.
b. 그가 저술한 「De Principiis」라는 책은 조직신학 책이다.
c. 그가 지은 「셀수스에 반대하여」(Against Celsus)는 변증학 책이다.
d.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헥사플라」(Hexapla)이다.
2. 「헥사플라」 : 구약성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
「헥사플라」(혹은 '6주 성경')는 여섯 개의 난에 여러 가지 언어로 기록된 성경 즉 '폴리글롯'으로 오직 구약성경만을 담고 있습니다. 이 여섯 개의 난 마다 각각 다른 구약 역본이 들어 있습니다. 시가서 같은 경우에 그는 서너 개의 다른 번역을 더 추가하여 '8주 성경' 혹은 '9주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a. 「헥사플라」는 50 개로 구성된 매우 큰 폴리오 책으로서 그 분량이 자그마치 6,500쪽이나 된다.
b. 이 책은 주후 250년경에 완성되었다.
c. 그는 7명의 속기사들과 7명의 필사하는 사람과 함께 일했다.
d. 첫째 난은 히브리 본문으로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소라 본문과 거의 같다.
e. 둘째 난은 히브리어 본문을 그리스어로 음역한 것을 담고 있다. '음역'이라 함은 다른 말의 문자를 사용하여 원어 단어의 소리대로 적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히브리 단어인 "샬롬"(Shalom)과 그리스 단어인 "뱁타이즈"(baptize)는 음역한 것이며, 만일 이 말들을 번역하면 "평화"(peace)와 "푹 담근다"(dip)가 된다.
f. 셋째 난은 아퀼라가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다.
g. 넷째 난은 시마쿠스가 번역한 그리스어 역본을 담고 있다.
h. 다섯째 난은 오리겐의 작품으로 현재 「70인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i. 여섯째 난에는 테오도티온의 그리스어 역본이 있다.
j. 「헥사플라」는 주후 638년까지 캐사레아의 도서관에 있었으나 그 뒤 모슬렘들의 침략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k. 「헥사플라」는 단지 그 일부분만 복사되었고, 특히 「헥사플라」의 다섯째 난은 「바티칸 사본」(B 사본), 「시내 사본」(알레프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A 사본), 「에프레미 사본」(C 사본) 등에 남아 있다.
D. 신약성경 본문에 미친 오리겐의 영향
오리겐은 성경본문 비평가들이 소위 "가정하여 수정하는 기법"이라 부르는 기법을 사용하여 종종 신약성경 사본을 자기 마음대로 뜯어 고쳤습니다. 이 기법은 한 마디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본문을 고치라는 것입니다. 오리겐이 플라톤 철학의 관점에서 일했으므로, 그의 작품은 참으로 신약성경 본문을 망가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신실한 성경학자였던 딘 버건은 다음과 같이 오리겐의 신약성경 본문 비평의 멋있는 예를 들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기록한 마태복음 19장 17-21절에 대한 주석에서, 예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매우 포괄적인 요구조건으로 하나님의 명령 전부를 다 포함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오리겐은 추측했다. 왜냐하면 부자 청년이 '이 모든 명령은 제가 어려서부터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의 말을 그대로 인정하셨다. 그런데 만일 그 부자 청년이 자기 이웃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했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율법 전체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한 마디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자 청년의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이라고 대답하시면서, 그 부자 청년이 아직 완전치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오리겐은 사실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 말씀이 원래의 마태복음에는 없었던 것이라고 추정했다. 다시 말해 그는 후대의 어떤 서기관이 이 구절을 집어넣었다고 믿은 것이다."
위의 예를 통해서 우리는 저 유명한 오리겐이라는 본문 비평가가 자기가 받은 본문에 만족해하지 않고, 스스로 무엇인가를 상상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본문에 가감을 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오리겐보다 더 자유롭게 본문을 수정한 학자들이 많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으며, 바로 이런 사람들의 영향으로 부패한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등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질문 10 [TOP]
▶70인역(LXX)이란 무엇입니까?
☞ 누군가가 상상해서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먼저, 70인역에 대한 기존의 추측부터 정의해 보도록 합시다. 히브리어 성경(구약, the Old Testament)을 그리스어로 번역하여 공식적인 그리스어 번역본을 만들고자 한 계획이 '아리스테아스의 편지'(the Letter of Aristeas)라 불리는 한 고문서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 편지에 따르면 이 그리스어 번역본이 유다인들의 공식 성경으로 받아들여지고 히브리어 성경을 대체할 만큼 권위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추측컨대 이 번역 작업에 참여한 72인의 유다인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선별되었을 것입니다.
그 작업이 행해진 가상의 장소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며, 번역의 추측 연대는 대략 B.C. 250년 경인데, 이 시기는 B.C. 397년 구약의 마감 시기와 그리스도의 탄생 시기인 B.C. 4년 경(달력상으로 4년의 오차가 있기 때문) 사이에 있었던 약 400년 간의 침묵기간 중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상으로 70인역이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번역본은 '셉튜아진트'(Septuagint), 혹은 '70 장로들의 번역'으로 알려져 왔으며, L=50, X=10, X=10, 합하면 70이라는 값을 지닌 로마(?) 숫자로 표시됩니다. 그런데 72 명이 번역했다는 그 번역본을 왜 칠십이인역(LXXII)이라 부르지 않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소위 '아리스테아스의 편지'라 불리는 이 서신이 이 불가사의한 문서 즉 '70인역'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물인데, B.C. 250년 혹은 그 전후로 구약 전체를 번역한 그리스어 필사본은 현재 확실히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다 역사의 어디를 보아도 그런 일을 고려했다거나 진행시켰다는 기록은 전무합니다.
이런 전설적인 문서의 존재를 입증할 수있는 확실한 증거를 제조하라는 압력이 오자 학자들은 급히 A.D. 200년 경 오리겐의 육단 성경(헥사플라, Hexapla)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70인역(LXX)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때보다 거의 450년이나 지나서 기록된 것이며 신약 성경이 완성된 후 100년도 훨씬 지나서 기록된 것입니다.
오리겐의 헥사플라 두 번째 단은 오리겐 자신(결코 72인의 유다 학자의 번역이 아닌)이 그리스어로 구약을 번역한 것이며, 그밖에도 '벨과 용'(Bel and the Dragon), '유디스서'(Judith), '토비트서(Tobit)와 같은 위조된 책들과 로마 카톨릭만이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하는 다른 외경들조차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70인역의 허상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은 오리겐이 헥사플라의 제5단에다 직접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단지 70인역을 복사한 것뿐이라고 주장하려 들 것입니다. 이 주장이 정당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 주장이 옳다면, 빈틈없는 유다 학자 72인이 외경들을 - 심지어 그것들이 쓰여지기도 전에 - 그들의 작품 속에 첨가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역주: 유다교는 지금도 외경을 거부하고 있으며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인정함).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 때는 오리겐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이러한 위조된 글들을 제멋대로 첨가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계 22:18).
이렇게 조금만 주의해서 살펴보면 헥사플라 제5단이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오리겐의 사역본(私譯本)이며, 정체가 탄로날 수밖에 없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유세비우스(Eucebius)와 필로(Philo), 이 두 사람이 그리스어 모세오경(Greek Pentateuch)을 예로 들면서 이처럼 전설 같은 책의 존재를 주장하지만, 구약 전체나 혹은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어떤 번역본으로 언급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엔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필사본이 하나도 없습니까? 있긴 합니다. 하나의 작은 파편에 불과한 라일랜드의 파피루스 458번(the Ryland's Papyrus, #458)인데, B.C. 15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명기 23-28장의 내용을 담고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부서진 채 발견된 이 파편들의 존재로 인해 유세비우스와 필로는 "모세오경 전체가 어떤 성경기록관(서기관)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유다인의 역사를 알리기 위함이었다."라는 망언을 한 것 같습니다. 이 파편들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공식적인 그리스어 번역본으로서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B.C. 250년 경 그 번역 작업을 위해 선발된 72인의 유다 학자들은 B.C. 150년에는 실력 없는 미숙한 학자들로 판명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번역된 지 100년 후에는 그 번역본이 쓸모 없게 되어 다시 새로운 번역본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오리겐의 헥사플라', '라일랜드의 458번' 그리고 '유세비우스와 필로의 주장' 등은 변명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들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더욱 신뢰할 수 없습니다.
그 첫 번째 충돌은 '아리스테아스의 편지' 자체에서 발견됩니다. 한 가지 아이러니컬한 것은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그 편지가 아리스테아스라는 이름의 사람이 썼다는 것을 믿지 않을 뿐더러, 아예 어떤 이들은 그 편지의 저자가 사실 필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편지의 저작 연대가 '기원 전'이 아니라 사실은 '기원 후'라는 것을 말하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편지를 쓰게 된 속셈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오리겐의 헥사플라 제5단을 70인역(LXX)의 복사본으로 믿도록 속이고자 함일 것입니다. 그 용의주도한 계획은 외견상으로 볼 때 '확실히' 성취되었습니다.
만약 아리스테아스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는 극복할 수 없는 두 가지 난관에 부딪혔을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첫 번째 난제는, 각 지파에서 대표적인 학자 6명씩을 선발하기 위해 그가 어떻게 열 두 지파의 위치를 알아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차례의 패배와 포로생활을 통해 뿔뿔이 흩어져 살아왔기 때문에 12 지파의 경계선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의 12 지파를 하나하나 구별할 수는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만일 그가 12 지파를 식별할 수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들 72인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런 번역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 모든 유다인들은 성경기록을 취급하는 공식 책임자가 신명기 17:18; 31:24,25,26과 말라기 2:7에서 입증되듯이 레위 지파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나머지 11 지파의 어느 지파도 감히 그런 금지된 계획에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2) 성경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다인들이 그들 주위의 이방 민족들과 거룩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할례, 안식일 성수, 깨끗케 하는 세세한 법조항들과 고유의 여러 가지 법들을 고유한 전통으로 삼아 왔습니다.
이와 더불어 히브리인들의 언어 계승의 열심에서도 이방 민족과 구별되고자 하는 동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오늘날의 중국이나 인도에 거주하는 유다인들은 여전히 자기 자녀들에게 히브리어 외에 다른 언어를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고 있고, 이디오피아의 팔라샤 유다인들(역주: 흑인들; Falasha Jews)은 자기들이 유다인들의 언어를 이어받았다는 증거로서 히브리어를 간직하고자 힘쓰고 있으며 그 때문에 그 나라의 여타 부족들과 구별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유다인들 즉 이방인을 개처럼 여기는 민족이 자기들의 유산인 히브리어를 버리면서까지 지극히 거룩한 재산인 성경을 이방인의 언어(그리스어)로 기꺼이 번역하려 했다"는 학자들의 이러한 모순된 이야기를 믿을 만큼 순진하십니까? 그런 가정은 지극히 불합리하며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것입니다.
누군가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수많은 구약 인용들이 70인역(LXX)과 일치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된 거죠?"
그들이 알고 있는 70인역(LXX)이란 바로 오리겐의 헥사플라 제5단을 가리킬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약 성경의 인용 구절들은 절대로 70인역(LXX) 혹은 헥사플라에서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 있는 구약의 인용들은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방식을 통해 구약으로부터 자신의 작품 안에 자유롭게 인용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그분께서 누군가 꾸며낸 70인역(셉튜아진트)에서 단 한 구절도 인용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의문이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왜 학자들은 70인역의 존재를 부정하는 반박할 수 없는 이러한 진실에 대항하면서 이 거짓된 70인역의 존재는 그처럼 쉽게 받아들이는 걸까요?"
그 대답은 슬프지만 단순합니다.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이 대단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 대한 간단한 지식을 습득하는 데만도 수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될 뿐더러 학문연구 수단으로 충분히 정통하기까지는 더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이와 비교할 때 그리스어에 대한 지식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그리스어로 된 구약의 공식 번역본이 존재했다면, 성경 비평가들은 히브리어로 성경을 연구해야 하는 고충을 겪지 않아도 되고, 단 번에 성경비평학 분야에서 그 영향력을 세 배로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그런 얄팍한 근거를 토대로 셉튜아진트(70인역)의 존재를 수용하는 것은 단지 교만과 탐욕에 기초를 둔 행위일 뿐입니다.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비평가들은 70인역 같은 위조 문서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총애하는 70인역이 히브리어 본문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번역본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서는 "어떤 번역본도 원어와 같은 권위를 갖지는 못한다."라는 이유로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 걸까요?
이러한 학자들의 일구이언을 통해 우리는 "원어들을 학습한 적이 없는" 즉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를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 위에서 자신의 학자적 위치를 고수하고, 스스로 권위를 지키고자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만일 여러분이 그런 논리를 받아들이려 한다면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군요.
질문 11 [TOP]
▶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킹제임스 성경을 사도 바울이 인정한다면, 나도 인정할 수 있다."
☞ 이 말은 성경신자들의 믿음을 비꼬아서 그들을 당혹스럽게 하려는 사람들의 상투적인 말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도 바울이 인정했다는 것은 정확한 사실입니다(11번 질문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성도 누가가 사용했을 단 하나의 성경도 킹제임스 성경임을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1:1,2에서 누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 데오빌로여, 내가 작성한 이전 보고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를 시작하심부터 친히 선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님을 통하여 명령들을 주시고 들려 올라가신 날까지의 모든 일을 기록한 것이니이다."
"먼저 쓴 보고서"란 물론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이름의 신자에게 썼던 누가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데오빌로는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을 개인적으로 만나 본 적이 없는 초기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령인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확실히 그는 주님에 대한 기사에 가장 정통한 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비평이 무엇이든 간에 사도행전 1장 2절에서, 누가는 그 유명한 네슬레판 그리스어 신약 성경과 신미국표준역성경(NASV)에 사형선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누가는 그의 "먼저 쓴 보고서"가 무릇 예수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기 시작하신 때로부터 "그분께서 승천하신 날까지"의 전모를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최초 행적은 누가복음 2:41-5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이 예수님께서 요셉과 그분의 모친이 예루살렘에서 나사렛으로 되돌아올 때 예루살렘에 뒤쳐져 남아 있었던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1과 상호관련을 맺습니다. 4복음서 중에서 예수님의 공생애(그리스도께서 서른 살에 침례를 받으시고 난 이후의 행적; 마 3:16, 막 1:9, 요 1:29-34) 이전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책은 누가복음밖에 없습니다.
또한 누가복음의 기사는 24:51의 예수님의 "승천"을 마지막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2의 "그가 승천하신 날까지"라는 말씀과 상호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그의 복음서가 예수 그리스도의 맨 처음 하신 일로부터 시작해서 그분의 승천하심으로 끝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복음서에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이같은 기사들이 삭제되고 없는 그리스어 필사본들 및 다른 필사본들은 그 기록 연대에 관계없이 그 신뢰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어 본문인 네슬레 23판에는 "Kai anepheroto eis ton huranon"(그리고 하늘로 올리우셨다)이라는 그리스어 단어들이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삭제해 버린 근거에 대해, 비평장치로 쓰인 난하주에는 그 출처를 다름아닌 시내 사본, D 사본, 52번으로 알려진 하나의 대문자 사본과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단 한개의 팔림섹트(Palimpsect: 쓰여 있던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 사본)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올리우셨다"라는 구절은 B, C, E, F, G, H, L, S, T, V, Y, Z, Delta, Theta, Psi 사본들과 P75(파피루스)와 더불어 Omega 사본, 그리고 대부분의 잔존하는 증거들에서 모두 발견됩니다. 그런데도 단 두 개의 사본(바티칸 사본과 시내사본을 말함 역주)에 근거해서 베일에 가려진 로크맨 재단 즉 NASB 등을 펴내는 보수주의 학자들만이 신미국표준역본(NASV)에서 누가복음 24장 51절을 삭제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NASV는 실로 믿을만한 번역이 못됩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의 현대 번역판 성경들 가운데 이 '보수주의' 학자들의 NASV만이 유일하게 '자유주의' 학자들의 개역표준역 성경(RSV)과 더불어 그 구절을 삭제하는 데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RSV의 공산주의적 자유주의자들과 NASV의 보수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가지고 승천하지 않으셨다는 데 완전히 의견일치를 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가 신미국표준역본(NASV)과 킹제임스 성경을 검토해볼 수만 있다면, 필경 신미국표준역본(NASV)은 거짓임을 선언하고, 즉시 킹제임스 성경만을 믿을만한 것으로 선포할 것입니다. 솔직히, 킹제임스 성경을 누가가 인정한 이상, 나도 인정할 것입니다.
질문 12 [TOP]
▶ 저는 킹제임스 성경의 이탤릭체로 쓰여진 부분이 역자들에 의해 첨가된 것이므로 삭제되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들을 정말로 삭제해야만 합니까?
☞ 우리가 만일 킹제임스 성경의 이탤릭체 부분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삭제해야 한다면, 그것들 모두를 삭제해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 모두를 성경기록으로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이탤릭체들을 삭제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1.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새 언어의 문장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 단어들을 보충해야만 한다는 것을 압니다. 모든 번역자들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이러한 일을 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정직한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에 의해 보충된 단어들을 이탤릭체로 표시하였던 것입니다.
보기 #1 :
킹제임스 성경의 시편 23:1은 "주는 나의 목자시니"(The LORD is my shepherd)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있는 'is' 는 역자들이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보충한 것입니다.
신국제역(NIV)의 시편 23:1도 "주는 나의 목자시니"(The LORD is my shepherd)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양 쪽 번역자들이 똑같이 문장을 완성하려고 같은 단어를 보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이 보충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해 이탤릭체로 표기하였던 것입니다.
보기 #2 :
킹제임스 성경의 요한복음 1:8은 "그는 그 빛이 아니요, 그 빛을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니라."(He was not that Light, but was sent to bear witness of that Light)로 되어 있습니다.
뉴킹제임스 성경(NKJV)의 요한복음 1:8도 "그는 그 빛이 아니요, 그 빛을 증거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니라."(He was not that Light, but was sent to bear witness of that Light)로 되어 있습니다.
또 다시 양편의 번역자들은 뜻을 통하게 하기 위해 자기들의 번역에 단어들을 보충했습니다. 이 경우엔 "was sent"라는 구를 보충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그 보충 부분을 명시해서 이탤릭체로 기록한 쪽은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현대의 "자칭" 학자라 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따르는 관례에 대한 혹평 대신, 그들의 보충 부분을 이탤릭체로 넣은 정직성과 윤리에 대해 칭송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2. 성경비평 학자들은, 근본주의자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탤릭체 부분을 제거할 수 있으나 다 제거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대개 그들은 고린도전서 14장에 있는 "unknown"(알지 못하는)같은 단어가 있는 구절을 보면 난처해합니다(고린도 교인들이 행했던 방언은 '알지 못하는 방언'이었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었던 사도행전 2장의 방언과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KJV의 번역자들은 분명히 그것을 '알지 못하는 방언'<unknown tongue>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역주). 그들은 이 구절의 이탤릭체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위와 같은 말들을 생각 없이 내뱉으면서 문제의 그 단어를 제거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상황을 더욱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그 이탤릭체 단어가 본문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단 한 개의 이탤릭체 단어만을 성경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이탤릭체 단어 모두를 성경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이탤릭체 단어들이 모두 삭제된다면 뜻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탤릭체는 삭제하고 다른 것들은 그대로 두는 일은, 어떤 단어들은 없애고 어떤 단어들은 남겨야만 하는지를 알려주는 거룩한 영감(Divine Inspiration)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설교자나 구령자 혹은 학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성경에서 어떤 단어들을 거부해야만 하고 또 어떤 단어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거룩한 영감을 통해 계시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의 무릎을 자기들에게 꿇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너무나 어리석어서 그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의견을 숭배해야 한다면, 과연 누구를 숭배해야 하지요?
"거룩한 영감을 받은 공인 성경 교정자"(Official Divinely Inspired Bible Corrector)직을 얻으려고 수백 명의 성경 비평학자들이 경합을 벌이고 있습니다. 과연 누가 행운의 사람이 될까요? 우리는 그를 어떻게 뽑아야 할까요? 그리고 모든 크리스천들이 그의 선언에 따르리라는 순진한 생각을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어쨌든 그의 선언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이택릭체들이 성경에 속하고 또 어떤 것들이 빠져야 하는지 알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즉 문제되는 구절들을 극복하기 위해 골칫덩이 단어들을 조심성 없이 제거해 버릴게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며 성경 읽기를 해야 할 것입니다.
3. 사무엘하 21:19은 이탤릭체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할 필요성을 옹호해주는 전형적인 예들 중에 하나입니다.
"또 다시 곱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움이 있더니, 거기에서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동생을 쳐죽였는데 그의 창 자루는 베틀채 같았더라."
"And there was again a battle in Gob with the Philistines, where Elhanan the son of Jaare-oregim, a Beth-lehemite, slew the brother of Goliath the Gittite, the staff of whose spear was like a weaver's beam"
여기에서 만일 이택릭체인 'brother'를 생략해 버린다면, 성경은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말하게 됩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사무엘상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음을 알고 있지요. 결국 우리는 이탤릭체를 제거함으로써, 타락한 모든 자들이 "성경에 모순이 있다"고 즐겨 말하는 그런 성경을 갖게 될 것입니다.
물론, "영감을 받은 성경 교정자"는 아마 사무엘하 21:19의 이택릭 문구를 삭제할 필요는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어떤 단어를 삭제하고 또 어떤 단어를 보존해야 하는지 도대체 누가 안단 말입니까?
4.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경을 위해 선택하신 단어들을 손대지 말아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름 아닌 사도 베드로와 바울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먼저, 성경(물론, 킹제임스 성경)을 집어 시편 16:8을 읽어보십시오.
"내가 주를 항상 내 앞에 모시나니 그분께서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I have set the LORD always before me: because he is at my right hand, I shall not be moved."
아마도 여기에서 여러분은 "그분께서 계시다"(he is)라는 두 낱말이 이택릭체라는 사실을 주목하셨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사도 베드로가 신약 사도행전 2:25에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그분을 가리켜 말하되, 내가 항상 내 얼굴 앞에 계신 주를 미리 보았나니, 그분께서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For David speaketh concerning him, I foresaw the Lord always before my face, for he is on my right hand, that I should not be moved":
여기서 우리는 사도 베드로가 시편 16:8에 나오는 이탤릭 부분과 나머지 부분 전체를 모두 다 인용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이탤릭체를 그대로 두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이들은 베드로는 신학교육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한 학문 없고 무식한 사람(행 4:13)이었기에 성경(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서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지적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도 우리는 똑 같은 현상을 발견합니다.
신약 성경의 또 다른 저자였던 바울은 종종 자기의 글 속에서 구약 성경을 인용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는 다른 이들이 직접 히브리어 본문에서 인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구약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인용 구절들 중에 몇몇은 히브리어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20에서 바울은 이사야서 65:1을 인용합니다.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말하되,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내가 발견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으되"
"But Esaias is very bold, and saith, I was found of them that sought me not; I was made manifest unto them that asked not after me."
이사야 65:1 : "나는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었으며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발견되었으니....."
"I am sought of them that asked not for me; I am found of them that sought me not:......"
바울이 이사야서 65:1에 있던 것인 양 인용했던 "∼ 자들에게"(them that)라는 단어는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서만 이탤릭체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are" 라는 단어를 번역자들이 보충한 시편 94편 11절 말씀을 인용한 고린도전서 3장 20절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사람의 생각들이 헛된 것임을 아시느니라"
"The LORD knoweth the thoughts of man, that they are vanity."
"또 다시, 주께서 지혜자들의 생각들이 헛됨을 아신다, 하셨느니라"
"And again, The Lord knoweth the thoughts of the wise, that they are vain."
그러나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9:9에서 신명기 25:4을 인용한 부분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너는 곡식을 밟는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시는 것이냐?"
"For it is written in the law of Moses, Thou shalt not muzzle the mouth of the ox that treadeth out the corn. Doth God take care of oxen?
신명기 25:4 : "소가 곡식을 밟을 때에 너는 그 소의 입에 마개를 씌우지 말지니라."
"Thou shalt not muzzle the ox that treadeth out the corn"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단지 권위역 성경에서만 이택릭체로 발견되는 "the corn"이란 단어를 마치 히브리어 원문에 있었던 것같이 인용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만일 히브리어 원문을 번역한 것이라 추정되는 가상적인 "그리스어 70인역"(셉튜아진트역)을 바울이 인용한 것이라고 누가 주장한다면, 우리의 딜레마는 더 커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첫째, 만약에 그런 그리스어 번역본이 존재했다면(역사 문헌으로 입증된 적이 없다!), 어떤 권위로 번역자들이 이 단어들을 삽입할 수 있었는가?
둘째, 만약 그것들이 번역자들에 의해 첨가된 것이라면, 바울의 인용 자체가 과연 그것들을 영감된 것으로 확증해 주는 것인가?
여러분이 이런 중요한 문제를 놓고 숙고하시는 동안에, 우리는 예수님께서도 킹제임스 성경으로 보이는 어떤 것으로부터 구약을 인용하셨다는 것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자필 원본'에 들어 있지 않은 단어를 인용하셨음을 봅니다. 사실, 그것은 킹제임스 성경의 이탤릭체에서만 발견되는 단어입니다. 다음의 신명기 8:3을 읽으십시오.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주리게 하시고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And he humbled thee, and suffered thee to hunger, and fed thee with manna, which thou knewest not, neither did thy fathers know; that he might make thee know that man doth not live by bread only,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eth out of the mouth of the LORD doth man live."
여러분은 이택릭체로 된 'word'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원문에 있지 않다는 데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어 원문 신명기 8장 3절을 검토해 보아도, 'wor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dabar'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탄과 싸우실 때 신명기 8장 3절을 마태복음 4장 4절에 인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But he answered and said, It is written, 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proceedeth out of the mouth of God.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킹제임스 성경이 이탤릭체로 표시한 단어를 포함한 구절 전체를 인용하고 계십니다! 어떤 아마추어 학자라도, 그리스어 신약 성경에서 'word'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단어인 'rama'의 한 형태인 'ramati'를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비평학자들이 "글쎄, 킹제임스 성경을 사도 바울이 인정한다면, 나도 인정하지요."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것처럼, 진정한 성경신자라면 "글쎄요, 킹제임스 성경을 사도 베드로와 바울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신 이상 나도 당연히 인정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이탤릭체에 대해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그것들 모두를 삭제해라.
(2) 근본주의 성경 비평가들 중 한 명을 "거룩한 영감을 받은 공인 성경 교정자" 직에 임명하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드렸을 충성과 모든 비중을 그의 판결에 두어라.
(3) 우리의 거룩하게 영감 받은 성경에만 있는 모든 단어들을 그대로 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틀림없이 정확하실 것이다라고 신뢰하라.
우리는 이 셋 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질문 13 [TOP]
▶ 영적 거장들 중에 다른 번역본들을 사용했던 사람은 없었나요?
☞ 있습니다만, 그들은 모두 완전한 성경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성경이 완전하다는 생각을 경멸하는 많은 사람들이 "위대하다"고 여기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 정정하는 일을 통례적으로 행하면서, 성경의 절대무오성을 믿는 자들을 공개적으로 공격합니다. 또한 소위 킹제임스 성경의 '실수들'이란 것을 학생들에게 보여주는 크리스천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들도 상당수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이런 위대한 사람들과 기관들이 틀릴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여전히 복을 주시는가?"하는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대한 해답 역시 신앙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최종권위가 되는 성경에 있습니다.
열왕기하 17장에서, 우리는 비참한 상태에 처한 이스라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앗시리아(Assyria)에게 정복당하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열왕기하 17:23). 앗시리아 왕은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땅에 정착시켰습니다(열왕기하 17:24).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고로 그분께서 사자들(lions)을 그들 가운데 보내사 그들을 죽게 하셨습니다(25절). 그 결과 그들은 유대 제사장들을 불러 "그 땅의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해야 하는지를 그들에게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열왕기하 17:26-28). 그 결과는 32절과 41절에서 발견됩니다. 성경은 "그들이 주님도 두려워하였고, 자기의 신들도 섬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현상은 우리의 근본주의 목회자들과 대학들 가운데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근본주의 목회자들이 실제로는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으면서도 감히 믿지 않는다고 시인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강단에 서서 성경을 들고 허공에 대고 외칩니다. "이 책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입니다." 라고. 그러나 강단을 내려서면 그들은 "자기의 신들을 섬기면서" 성경에서 실수라고 생각되는 점들을 개인적으로 지적하며, 그들이 막 강단에서 말했던 것을 진실로 믿는 사람들을 비웃습니다. 이것은 위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얼굴을 가진 것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결코 강단에 서서 성경의 완전성을 믿노라고 말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자기들의 정말로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경우 자기들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들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여러분은 그들이 강단에 서서 "저는 이 책이 불완전하게 번역되었고 실수가 많다고 믿으며 이 지구상에는 완전한 번역성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런 정직한 고백을 한다면 그들은 "끝장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들"(lions)은 그들이 단지 입술로만 주님을 인정할지라도 그들을 완전한 성경 앞에 무릎꿇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크리스천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들도 "우리 학교에 오면 완전한 성경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은 파괴될 것이며, 성경이 오류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자기의 신들을 섬기게 되면," 자기들의 캠퍼스 정문 앞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자들"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에 대해 확신합니다",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만을 사용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 학교를 선전할 정도로만 "주님을 두려워합니다." 학생들이 일단 들어온 후에는, 즉 학생들이 그 학교에 자신을 위탁한 후에는, 그들은 교묘히 완전한 성경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파괴시키고, "오래되고 좋은 유익한 킹제임스 성경"(good old King James)이 "오류로 가득 찼다"고 세뇌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너무나 겁이 나서 "그 땅의 하나님"과 그분의 책인 킹제임스 성경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아시며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질문 14 [TOP]
▶ 1611년 이전에는 참 성경이 어디에 있었나요?
☞ 그 이전에는 안디옥 계열 필사본들에 속한 성경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완전성을 공격하는 비평학자들은 이 질문이 성경신자들을 '어리벙벙하게'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유사 이래 현존하는 성경 사본들의 절대 다수는 줄곧 안디옥에서 발견된 본문들이었습니다. 이것들은 몇 가지 형태 즉 원래의 그리스어 사본, 혹은 AD 150년 경의 구 라틴 벌게이트(Old Latin Vulgate, 제롬의 개악된 벌게이트<Jerome's Latin Vulgate>와 혼동하지 마십시오), 혹은 서기 157년 경에 번역된 시리아의 페쉬타(Peshetto) 역본 등으로 그 당시까지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자료들을 한데 모아 일반인들의 손에 쥐어 준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런 자료들을 한데 모아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시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신뢰할만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질문 15 [TOP]
▶ 권위역본(AV) 역자들은 자신들이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했나요?
☞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그들이 영감 받을 수 없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위원들은 논쟁의 여지없이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었으며, 그들이 수행할 일에 대해서도 탁월한 자격요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학문적으로도 그들의 방대한 지식에 의해 자격요건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더더욱 그들의 본이 되는 삶에 의해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학문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 위원회를 구성한 사람들 중에 어떤 이는 한 달 간의 휴가기간을 사용하여 외국어 하나를 완전히 마스터했으며; 어떤 이는 페르시아어 사전을 편찬했고; 어떤 이는 전문가를 위한 수리 측정자를 고안해냈으며; 어떤 이는 건축가였고; 어떤 이는 동양 언어들에 정통했으며; 어떤 이는 그리스어로 공개 토론을 했고; 어떤 이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그리스어와 수학을 가르쳤으며; 또 어떤 이는 '히브리어를 마스터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두뇌의 지식은 그것이 열정 어린 경건한 마음과 융화되지 않는다면 저주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영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온갖 학위들을 자랑하면서도 실생활과 개인전도에 실패하고 있는 오늘날의 수많은 학자들보다 그들이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로마 카톨릭 교도들과 변론하여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회심시키는 구령의 열정으로 유명한 축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경건생활과 가정의 경건생활에 많은 시간을 드렸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복음전도 사역에 드리고 있었고, 심지어 고(故) 엘리자베스 여왕 선교 사절단을 맡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한 분은 백삼 세까지 살았는데, 그의 생애 말년에 두 시간을 가득 채워 설교를 한 후, 회중을 향해 "나는 더 이상 여러분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고 말하자, 회중이 한 목소리로 "제발 계속해 주십시오"라고 외쳤고, 그리하여 그는 계속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상세히 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들 모두는 인간미 넘치는 인격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킹제임스 성경의 헌정사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국내외적으로 교황주의자들에 의해 비방을 받게 되는 것은, 무지와 어둠 속에 갇힌 자들에게 더더욱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알려야 하는데도 우리가 빈약한 도구들이 되어서 제대로 쓰임 받지 못한 때문이요; 또 다른 한 편으론, 자기 길을 가며 스스로 만든 틀 속에 안주하고 자기의 모루 위에 스스로 두들겨 만든 무가치한 것들에만 치중하는 자만심에 빠진 우리 형제들 때문에 우리가 비방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뛰어난 인품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스스로 하나님의 영감(divine inspiration)을 받았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랬다면, 그런 주장은 자만심 가득한 마음의 증거로 그들의 명예 훼손자들을 크게 기쁘게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심지어 자기들이 끝마친 일 즉 성경 번역에 대한 완전성을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성경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번역위원들의 일을 통제하실 수 없었으며, 또 통제하시지도 않으셨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 대답 역시 믿음과 실행에 관한 모든 문제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에서 찾아야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침례자 요한이 그가 엘리야인지 아닌지 레위인들에 의해 질문받았을 때(요 1:21), 그는 자신이 엘리야가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1:7-14과 17:10:13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이 오리라고 한 엘리야였음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침례자 요한이 거짓말을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까? 더더욱 아닙니다.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한데, 요한은 엘리야였으나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예를 통하여, 사람은 자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할 수 있으나, 그 자신은 그것을 모를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도 자신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룩하게 인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질문 16 [TOP]
▶ 오늘날의 학자들이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보다 나은 번역 능력을 구비하지 않았을까요?
☞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니올시다'입니다.
첫째로,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던 사람들의 학식은 글자 그대로 오늘날 학자들이 능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잘 설명해 주는 유용한 책 두 권이 있습니다. 그 주제에 관해 진지하게 연구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라나타 출판사의 맥클루어(Alexander McClure)가 쓴 [번역자들에 대한 회고](Translators Revived)와 베이커 북하우스(Baker Book House)의 페인(Gustavus Paine)이 쓴 [킹제임스 역본 배후의 인물들](The Men Behind the King James Version) 등이 그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위원들은 전무후무한 능력을 갖춘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지적능력에 대한 약간의 소개가 바로 앞의 질문의 답변에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오늘날의 학자들이 권위역 성경의 학자들과 동등하다거나 그들을 능가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모순이며, 어리석은 일입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세상이 타락한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열역학 제2 법칙에 의해, 도덕성도 1611년 이래로 계속 타락했습니다. 심지어 대기(atmosphere)마저도 악화되고 있는데, 왜 우리가 교육만큼은 점점 더 나아지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까? 교육을 숭배하는 자들이나 그런 동화 혹은 신화를 믿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체제와 함께 교육도 타락해 왔으며, 따라서 근 400년 전의 학자들에 필적할 만한 학자들을 배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질문 17 [TOP]
▶ 제임스 왕은 영국에 있는 교회들이 사용하도록 자신이 위임한 번역서의 권위를 인가해 주었습니까?
☞ 아닙니다. 그가 번역 자체를 인가했을지언정, 번역성경의 사용에 대해 인가한 적은 없습니다.
20세기의 사람이, 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거의 400년 전의 상황을 추측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은 크리스천들이 통상 자기 나라 말로 된 성경을 한 가지 이상 가지고 있고, 성경 이외에도 성구사전이나 다양한 주석, 갖가지 '크리스천' 서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6세기와 17세기초의 세계는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당시 영국의 일반인들에겐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입수할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은 교회 제단에 묶여 있었습니다. 1536년에 틴데일(William Tyndale)은 평민의 언어인 영어로 성경을 출판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제임스 왕이 영어성경 번역을 위해 1603년에 54명의 번역자를 발탁했을 때, 그는 곧 출간될 그 번역본을 교회들에서 사용하도록 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성경이 사실상 교회들을 위해 번역된 것이 아니었다면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용도는 단 하나만 남게 됩니다. 다름 아닌 평민들에게 그 성경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손에 평범한 성경(the common Bible)을 든 평범한 사람(the common man)보다 더 위대한 세력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질문 18 [TOP]
▶ 제임스 왕이 킹제임스 성경을 교회들이 사용하도록 허가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그 성경은 누구를 위해 번역된 것입니까?
☞ 평민들을 위해서입니다.
성경의 완전성 여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어왔지만, 이런 논쟁에서 간과된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성경이 있어야 하는 첫째가는 이유가 다름 아닌 평민을 위해 성경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평민들이 없었다면, 성경이 평민의 언어로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이 경우에는 여하한 종교단체라도 포함하여)는 항상 성경을 접해 왔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교회가 성경을 갖게 됨으로써 일반적으로 성직 계급자들의 자존심만 커졌고 또 성경 자체가 양떼들을 "주관하기" 위한 용도로 잘못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민들의 손에 성경을 쥐어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말 등에 거지를 태우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는 완전한 성경이 주어졌을 때의 평민들의 반응을 매우 잘 묘사한 말입니다.
평민은 세계를 움직이는(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힘입니다. 그는 군대로부터 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을 충원하는 데 필수적 존재입니다. 그는 소비자이며, 결코 소비자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식료품점이나 주유소가 아닙니다. 그는 누가 자신의 인생을 지배하는가에 거의 관심이 없이 그저 정부으 말에 고분고분 따릅니다. 그의 에너지는 그를 통제하는 사람들의 이득을 위해 활용됩니다. 그러나 그에게 정부의 권력이 주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비록 통치할 자들을 투표하도록 허락은 받지만 그 자신은 정부 체제 밖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같은 일은 교회생활의 영역에서도 사실입니다. 그는 자기 교회 목사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자기 인생에 대한 창조주의 뜻을 알지 못하도록 막을 권리는 없습니다. 이 분야에 있어서 수세기 동안 가장 큰 폭력을 휘둘러 온 것은 역시 로마 카톨릭 교회였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카톨릭 교도와 다른 사람들을 성경에 대한 무지 속에 감금해 왔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일반적으로 사제들로부터 평신도들은 스스로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만일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인 하나가 자신의 언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서,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게 되면, 그 교회의 신부(神父)가 그에게 얼마나 크게 노할 것인지를 여러분은 가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경과의 전쟁은 주로 두 가지 방법으로 수행되어 왔습니다.
1. 사람들이 성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여 그들을 무지 속에 감금해 두라.
2. 하나님의 성경을 카톨릭 성경들 중 하나로 대체시켜라.
성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방법도 두 가지입니다. 첫째, 평민(평신도)은 성경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사제나 사제의 개인적 해석에 복종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쓰일 수 없는 비카톨릭국가에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그 정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체로 정착시킨 후 물리적으로 성경의 모든 사본을 몰수해서 파괴해 버립니다. 반대자들은 물론 죽임을 당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수세기 동안 대단히 성공리에 이 방법으로 평민들이 성경에 접근하는 것을 막아 왔습니다.
성경을 제거하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은 그것을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만든 다른 것으로 대체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참된 성경을 몰수함으로 생긴 빈 공간을 메꾸기 위해 자주 사용되곤 합니다.
역사상 이 방법은 여러 차례 수행되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서기 150년경에 안디옥에서 번역된 구 라틴어 성경 - 그냥 벌게이트<the Vulgate>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공통의, 평민의"라는 의미의 라틴어 "vulgar"에서 나온 말임 - 의 인기와 위협을 보았을 때, 그들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변개된 사본으로부터 번역한 그들 자신의 라틴어 성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 작업은 제롬(Jerome)이라는, 이 일을 별로 내켜하지 않는, 로마 카톨릭 학자에게 억지로 떠맡겨졌으며, 신속하고도 파렴치하게 똑 같은 '벌게이트'(The Vulgate)라는 이름으로 서기 380년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무가치한 책은 근 800년 동안 참 성도들로부터 외면을 당해 왔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원래의 바른 성경인 구 라틴 벌게이트 모두를 불태워버림으로 "경쟁자를 완전히 제거"해 버릴 때까지 말입니다. 물론 구 라틴어 성경을 제거한 결과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전권을 휘두르던 중세 암흑시대의 도래였습니다. 오늘날 구 라틴 벌게이트(바른 성경, 150 A.D.)에 대한 좋은 평을 듣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서기 380년에 만들어진 로마 카톨릭 교회의 라틴 벌게이트(제롬이 개조한 것)인줄 착각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입수할 수 있는 대부분의 현대 영어 번역성경들(한국의 대부분의 성경들도)도 이같이 변개된 로마 카톨릭 필사본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에게 이 성경들은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제임스 왕은, 그가 그것을 알았든지 몰랐든지 간에, 보통사람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소유물인 영어로 된 참 성경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위협을 느낀 로마 카톨릭 교회는 1582년 프랑스의 라임(Rheims)에서 킹제임스 성경에 대항할 그들 자신의 영어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었습니다. 제임스 왕과 그의 번역위원회는 자신들의 번역이 영국을 벗어나서 세상 끝까지 가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평범한 사람들은 그 성경이 전세계를 휩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음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일반인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완전한 성경을 빼앗길 심상치 않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수행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도는 물리적으로 킹제임스 성경을 변개된 로마 카톨릭 사본들에서 번역한 성경들로 대체시키는 것이며, 이것은 거의 지난 100년 동안 진행되어 오고 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힘도 없고 가치도 없으나 참 성경을 대체시키는 일에는 적격입니다. 슬프게도, 킹제임스 성경은 많은 구원받은 근본주의 성경교사들과 목회자들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는데, 그들은 성경을 "정정"할 수 있다는 권위의식(로마 카톨릭 교황과 같은 권위의식)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중요한 변화는 교회와 신학교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첫 단계는 "진압 단계"로서 그 희생자는 킹제임스 성경을 반대하는 수많은 선전으로 인해 완전한 참 성경을 받아들일 경우 정신적인 압박을 받게 됩니다. 이 방법 때문에 비록 자기 손에 성경을 소유했을지라도, 그의 머리 속에는 더 이상 참된 성경이 존재치 못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자기의 성경을 아직까지 물리적으로는 빼앗기지 않았지만, 두뇌로부터는 이미 도둑맞았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세뇌 단계"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들, 성경교사들, 그리고 특별히 "크리스천" 매체들에 의해 수행됩니다. 크리스천 라디오 방송국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킹제임스 성경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읽기", 매일의 암송구절, 그리고 심지어 누가복음 2장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까지,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하고 여타의 모든 성경들을 사용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듣는 이들의 잠재의식으로부터 참 성경을 빼앗는 일입니다. 참 성경을 버린 수많은 목회자들이 새로운 역본을 가지고 설교할 때, 종종 "못 배우고 무식한"(행 4:13) 교인과 충돌하는 모습을 여러분도 보셨을 것입니다. 비록 그 교인은 새 역본에 대한 목회자의 판매 전술을 이론적으로 논박하진 못해도, "도대체 성경 같지가 않군요"라고 말로 되받아칩니다.
이젠 라디오나, TV, 혹은 신학교에서조차 끊임없이 다른 역본 성경들만을 들려줌으로써, 젊은 크리스천 세대들은 "참 성경"이 어떤지를 잠재적으로나마 아는 혜택조차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다시피, 로마 카톨릭 교회와 근본주의자들 중에 나타나고 있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전체주의 영(totalitarian spirit)의 진정한 적은 단지 성경만이 아닙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진정한 적은 평민들의 손에 쥐어진 성경과 평민들의 심장입니다. 마귀가 가장 혐오하며 지옥으로 보내고 싶어하는 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여러분은 손에서 성경을 도둑맞았습니까? 여러분의 두뇌로부터는 어떻습니까?
질문 19 [TOP]
▶ 어떤 사람은 "내가 킹제임스 성경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까?
☞ 아닙니다.
성경은 어떠한 죄인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항상 무오류하고 완벽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로 영생을 주시지만, 성경은 우리에게서 아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물론 다른 번역 성경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언젠가 어떤 사람이 [현대인을 위한 복음」(Good News For Modern Man)을 사용하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했으므로, 그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이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가 [현대인을 위한 복음]이란 책을 통해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이 그 번역 성경 안에 있는 수많은 오류들 중 하나도 정정해 놓을 수 없습니다.
제 친구 중에 성경(KJV)이 무오류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리빙 바이블」(Living Bible)을 사용하는 어떤 사람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습니다. 그가 믿었던 그 순간 「리빙 바이블」이 무오류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 성경은 완전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만약 「리빙 바이블」을 통해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성경이 완전해졌다면, 그가 후에 킹제임스 성경을 선택하게 되면 그 완전함을 잃게 되는 걸까요?
따라서 어떤 사람이 여러분이나 저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어떤 성경을 사용했느냐에 관계없이, 킹제임스 성경은 절대무오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전혀 구원을 얻지 못했을지라도, 킹제임스 성경은 여전히 완전하고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질문 20 [TOP]
▶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입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한 성경을 믿는 자들이 아마도 분열시킬 수 있는 유일한 교회는 성경이 완전하다고 믿지 않는 교회들일 것입니다.
때때로 잘못된 고발은 오해 때문에 발생합니다. 때로는 새빨간 거짓말에 근거한 경우도 있습니다. 완전한 성경을 믿는 사람들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들이라는 불합리한 논리는 불행히도 전적으로 악의에 찬 거짓말에 근거한 것입니다. 슬프게도, 교회 분열의 충격적 경험을 겪은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모든 교회의 분열이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하다고 믿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가장하여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 분열은 돈 문제로부터 새 설교단에 어떤 색을 칠할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어떤 이유에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문제의 실상은 크리스천들이 슬프게도 로마서 14장과 누가복음 17장 1-5절에서 발견되는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분열은 킹제임스 성경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려 드는 것은 전혀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질문 21 [TOP]
▶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자들은 모두가 이름을 들어가면 남을 헐뜯는 '험담가들'이 아닌가요?
☞ 그렇지 않습니다.
최근 몇 년 간, 완전한 성경에 대한 논의가 피터 럭크만 박사(Dr. Peter S. Ruckman)에 의해 전문적으로 다루어졌습니다. 럭크만 박사는 고등교육을 받은 성경교사이자 목회자이며, 안디옥 사본들이 가장 신뢰할만한 것으로 믿는 분입니다. 그는 성경의 완전성을 받아들이는 안디옥 이데올로기로 성경을 보는 분입니다.
럭크만 박사의 스타일은 성경의 권위에 관한 한 한 치의 양보도 없으며, 성경 비평학자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매우 단호합니다. 대부분의 성경 논의들에 대한 그의 접근방법은 은혜의 방법인데 많은 크리스천들은 그런 은혜스러움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라는 단 하나의 논의를 대할 때 그의 접근 방법은 사도 바울(고후 10:10)이나 위대한 영국의 학자 존 윌리엄 버건(John William Burgon)과 비슷합니다.
럭크만 박사와 같은 학자적 자질이 부족한 채 완전한 성경을 주장하고 지지하는 소수의 무리들은 반대자들을 공격하는 그의 신랄한 스타일을 닮아 보려 했지만 결국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습니다. 대부분의 킹제임스 성경신자들은 럭크만 박사의 스타일이 그들의 본래 스타일이 아니므로 무턱대고 럭크만 박사의 스타일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질문 22 [TOP]
▶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성경을 '숭배'하고 있는 것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성경을 숭배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에 원본들을 파괴하신 것이 아닐까요?
☞ 그들은 결코 성경책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또한 '아니요' 입니다.
최근 몇 년 간 완전한 성경을 비평해 온 비평학자들은 크게 좌절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KJV)에 대항하는 그들의 모든 논의가 역사적 사실에 의해 체계적으로 붕괴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학자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성령님께서 킹제임스 성경을 변함없이 축복하신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성경 신자들을 '비방하려는' 절망적인 시도로써, 두 가지 질문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성경책을 숭배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처럼 그 책(the Bible)에 대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구원한다"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원하신다고 설교합니다. 그들은 성경 전체에다 마크를 하기도 하고 참조가 되는 주석이나 짧막한 글들을 적어 넣기도 합니다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감히 예수 그리스도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이 성경을 경배한다는 그릇된 오해를 뒷받침할만한 구체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누명은 불행히도 정직함에서가 아닌 악의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이 성경을 숭배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 원본을 파괴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께 있어 원본의 유일한 가치는 그 안의 말씀들(words)이었기에 원본이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을 허락하신 것이며, 그 말씀들(words)을 사본으로 보존하셨습니다. 원본은 그 목적을 수행하자마자 곧 필사되었으며, 하나님이나 그분의 백성들은 더 이상 원본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오늘날 원본이 어떻게 해서 '기적적으로' 나타난다 해도, 성경 신자들은 그것에 별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큰 관심을 끌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책을 숭배하는 자들이 있다면, 아마도 원본에 대단한 비중을 두고 있는 오늘날의 성경 비평학자들일 것입니다.
질문 23 [TOP]
▶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이단이 아닙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을 이단 종파로 누명을 씌우는 것은, 그들이 성경을 숭배한다고 하는 누명과도 유사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성경 비평학자들의 좌절감과 악의에서 파생된 동일한 결과입니다. 슬프게도, 그들이 사실들로서 자신들의 옳음을 입증하지 못한다면, 자연히 그 누명은 인신공격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이단 종파들이 두 가지의 명백하고도 중요한 특성을 지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단 종파를 정의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첫 번째로 이단 종파의 특성은 모든 신도들에 대한 결정 사항을 지시하는 중앙본부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매우 독립적이며, 심지어는 그들끼리도 성경 외에 여타의 교리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들의 중앙 권위는 오로지 성경뿐이며, 겨로 어는 특정한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대부분의 이단 종파는 그들의 신도들이 반대편 신앙을 연구하여 그것으로 개종할까봐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는 재료나 책들을 금지하는 엄격한 규칙을 만듭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진실과 사실들이 권위역 성경의 편이기에,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비평연구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이 책도 성경 비평학자들의 모든 비난에 정정당당히 맞서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오늘날 신학대학과 종합대학들이 완전한 하나의 성경을 지지하는 모든 책을 제거하기 위한 종합/연합 정책을 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책도 언젠가는 그들의 목록에 오르겠지요. 이러한 사실은 실제로 누가 '이단 종파'이고 누가 아닌가를 보여주는 깜짝 놀랄만한 것입니다.
질문 24 [TOP]
▶ 킹제임스 성경을 완전하다고 믿는 것이 '이단'입니까?
☞ 아닙니다.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킹제임스 성경신자가 성경의 무오성을 믿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단'으로 규정되는 것은 재미있긴 하지만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웹스터(Webster) 사전에 의하면 "이단'(Heresy)이란 "진리 혹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신앙에 반하는 교리나 견해"를 말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입니다. 저는 종종 사람들에게 "저는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이라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 성경책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면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보여줄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비평학자들도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들에게 가서 그들이 '믿는' 절대무오한 성경책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면, 그들은 절대무오한 성경은 지구상에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실로 우리 킹제임스 성경 신자들은 그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그들로부터 '이단'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단"이라는 딱지는 험담가들의 느낌을 정직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젊은 신자들에게 겁을 주어 그들이 절대무오한 성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입니다. 성경 비평학자들의 의도는 열심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이단'의 딱지가 붙으리라는 두려움을 줌으로써, 성경 비평학자들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실제로는 믿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사실이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널리 인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비평학자들는 여러분이 제시하는 모든 성경에서 오류를 찾아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과연 누가 정말로 이단일까요?
질문 25 [TOP]
▶ 딘 버건(Dean Burgon)은 어떤 인물입니까?
☞ 그는 19세기의 탁월한 성경학자였습니다.
존 윌리암 버건(John William Burgon: 1813 - 1888)은 학문에 있어서 란슬롯 앤드류스(Lancelot Andrews: 1555 - 1626)와 로버트 딕 윌슨(Robert Dick Wilson: 1856 - 1930)같은 탁월한 사람들과 어깨를 겨루는 굉장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영국 치체스터 대학의 학장(Dean)으로 있었으므로 그 이후로 딘 버건(Dean Burgon)이라 불리게 된 것입니다.
딘 버건 박사는 알렉산드리아 본문을 채택하여 영어개역성경(Revised Version)을 펴낸 웨스트코트(Westcott)와 호르트(Hort)와 동시대인이었습니다. 그는 공인본문(the Textus Receptus)의 지지자였고 그것을 반대하는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무기력한 논의를 과감하게 응징한 사람이었습니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와는 달리, 그는 이론이라는 모래 위보다는 사실이라는 탄탄한 기초 위에서 얻어진 모든 결론을 믿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는 데는 돌멩이 하나도 남기지 않았으며 진리를 옹호하는 데 있어서는 잠시도 쉬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중한 학자였으며, 재치 있는 위트와 신랄한 혀로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그리고 다른 모든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을 전쟁터에서 몰아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본문에 대한 반대 논의, 마가복음의 마지막 12절(16:9-20), 기타 문제시되는 부분들에 대한 찬성 논의들은 현대 학자들이 그와 동시대인들이었다 하더라도 결코 반박할 수 없었음을 잘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은 힐스(Hills), 풀러(Fuller) 그리고 럭크만(Ruckman) 등과 같이 킹제임스 성경 옹호자를 지칭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는 권위역 성경의 무적의 용사로 알려졌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정직하고, 객관적이며, 진정한 학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작품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질문 26 [TOP]
▶ 신학교육이 성경논쟁을 종식시키는 데 도움이 될까요?
☞ 아닙니다. 거의 틀림없이(99%의 확률) 신학교육은 한 학생의 완전한 성경에 대한 믿음을 혼동케 하거나 파괴시킬 것입니다.
신학교육에는 많은 혜택이 있습니다. 신학생은 사역하는 것과 교회를 세우는 것 등에 대하여 매우 귀중한 수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리에 약한 학생은 믿음 안에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신학교 시절의 우정과 경험들은 종종 지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하나님께서 완전한 성경을 주셨다'는 믿음은 종종 신학교육의 은혜(beneficiary)라기보다는 희생물(victim)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대부분의 신학교들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나 알렉산드리아식 교육의 희생자가 된 선량한 사람들을 교수로 많이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정확한 사본 계열에 대해서는 옳게 판단을 했지만 알렉산드리아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의식중에 성경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성으로는 수중에 있는 단 한 권의 성경이 정말로 완전하다는 믿음을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종종, '킹제임스 성경만' 혹은 '공인본문만'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학교들조차도 여전히 이러한 만성병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학생들은 성경의 완전성을 주장하는 신학교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성경을 자주 정정해야만 한다는 모순되는 소리를 들으며 혼동에 빠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 빈번하게, 그는 그 통렬한 비난의 말에 굴복하여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비평자가 될 것입니다. 그가 만약 학교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대개 그는 "광신자"로 낙인찍히거나 배척받거나 심지어는 퇴학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신학교육이 유익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교육이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학생의 믿음을 거의 강화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질문 27 [TOP]
▶ 다른 번역본들을 사용하는 크리스천들이나 목회자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일까요?
☞ 혹자는 '하나의 성경'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싫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본인의 대답입니다.
마가복음 9:38-41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던 사람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창조물들로부터 사랑과 경배를 받기 원하십니다. 신학교 학생들이 킹제임스 성경에 대해 잘못 인도된 것처럼, 많은 목회자들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무척 사랑할지 모르지만, 무지해서 혹은 속아서 잘못된 성경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물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만 그릇된 성경을 사용하는 그 사람도 언젠가는 성경문제에 직면해 시비를 가려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옳은 것'을 선택했다면, 그들의 믿음은 더욱더 강건해질 것이고, 그들은 다른 성경들을 사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설교하는 도중에 성경을 '정정하려는' 시도를 대개는 그만 둘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 자기들의 '출신 신학교'(Alma-Mater)가 틀렸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되고, 그들은 결국 성경이 잘못된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저는 한 설교자가 "저는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하다는 가르침을 받아들이지만 제 '출신 신학교'가 그 입장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지지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때때로 그들은 동료들 사이에 서서 자신들의 명성에 미칠 손해를 저울질해 보고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을 지지할 수가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대학 교수로서 알렉산드리아 계통의 신학교에서 안디옥 입장을 취했을 때 경험할지도 모를 재정적인 손해를 상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여러분은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이유에서건 킹제임스 영어성경이 완전하다는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은 그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게 됩니다. 대개 이같은 경멸은 지적인 확신보다는 방어 수단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려 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인 그가 단순히 책에 불고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복종하기를 거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인생에서 성경의 권위를 거부한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서 그 시대의 학자들과 같지 않고 권세 있는 분(마 7:29)으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질문 28 [TOP]
▶ 킹제임스 성경은 영감된 것인가요, 아니면 보존된 것인가요?
☞ 자필원본들은 물론 영감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필원본들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성경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인 것입니다.
성경의 영감(inspiration)과 보존(preservation)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최선의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영감(Inspiration)이란 하나님께서 백지(파피루스나 양피지같은) 한 장에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의 말씀을 적게 하신 것입니다. 보존(Preservation)이란 하나님께서 이미 기록된 말씀들을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까지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이 두 행동 모두 거룩하며 시편 12:6,7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보증하신 것입니다.
6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오니, 흙 도가니에서 단련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7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이 말씀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시편 12:6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원본이 완전함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십니다. 비록 그것들이 살인(모세와 다윗), 간음(다윗), 우상숭배(솔로몬) 그리고 주를 부인함(베드로) 등의 가증스런 죄들로 인해 잘못되기 쉬운 인간들에 의해 쓰여졌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 기록자들의 죄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원본 전부가 영감된 완전한 것이라는 것은 오늘날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근본주의자들은 단지 그 '자필원본(original)'만이 완전한 것이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는 사본(copies) 혹은 그 사본들의 번역본(translations)밖에 가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번역본'이 원본의 완전한 사본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대해 분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본들과 번역본들은 영감받지 않은 사람들의 산물이며, 따라서 이것들은 모두 실수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잘못된 신조를 고집하고 있습니다. 이 그릇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어리석음은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감된 말씀을 기록하도록 죄인들을 사용하셨다고 믿으면서, 같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해서 죄인들을 사용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은 상당히 모순되고 설명하기 힘든 일입니다. 틀림없이 자신의 말씀에 영감을 주실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것들을 보존하실 만큼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분께서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그런 능력을 상실하셨으리라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힘든 일이겠지요.
2. 왜 하나님께서는 자필원본을 영감을 통해 만드시고는 그것들을 잃어 버리셨을까요? 왜 완전한 성경을 우리가 아니고 오래 전에 살았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그리고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주셨을까요? 그들은 주님을 직접 보았으며 들었으며 만졌습니다(요일 1:1).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누군가 완전한 성경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구세주로부터 거의 이천 년이란 세월이 흐른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바로 그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자필원본을 보존하려고 계획하지 않으셨다면, 왜 그것에 영감을 주셨습니까? 혹자는 그분께서 오늘날의 성경 안에 여러 군데의 잘못된 것들을 허락하셨다고 믿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필원본에 있어서도 그 같은 실수들을 허락하신 것이 아닐까요? 혹은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에 대한 비평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본들에서 실수를 막으실 수 없으셨다고 믿는 것입니까? 이같은 생각들은 하나님을 이것은 하실 수 있고 저것은 하실 수 없는 반쪽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3. 그것은 검증될 수 없는 '임기응변식' 신앙입니다. 즉, 이미 잃어버린 원본들을 완전하다고 믿는 편이 덜 손해나는 일일테니까요. 그것들은 이미 상실되었으므로 아무도 그들의 그런 믿음에 실제적으로 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얄팍한 설득을 고집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틀리다고 증명하기에 필요한 증거물(원본)이 상실되었으므로, 결코 자기들이 틀리다고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오늘날 누구나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성경에 대해 똑같은 믿음을 적용한다면, 그들은 분명히 자기들의 신앙을 옹호하다가 결국 피투성이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완전한 영어성경을 믿지 않으면서 단지 원본의 완전함만을 믿는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4. 완전한 성경이 보존되었다는 교리에 대항하는 그들의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몸소 대답하실(행 1:8) 만큼이나 성경에 의해 보증을 받고 있습니다. 시편 12:7은 명백하게 말합니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이 말씀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
"Thou shalt keep them, O LORD, thou shalt preserve them from this generation for ever!"
따라서 우리는 친히 영감을 주셨던 말씀을 그 말씀 그대로 온전히 보존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능자께는 실로 그것이 별로 큰 어려운 일이 못됩니다.
겁먹은 근본주의자들은 시편 12:7에서 발견되는 성경적 가르침에 대해 두 가지 공격을 가합니다.
1. 그들은 "7절의 그것들(them)은 말씀들이 아니라 유다인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후 자기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시편 12:7에서 그같이 말하는 번역본들을 부리나케 출판합니다. 신국제역(NIV)에서 이 구절을 봅시다.
"오 주여, 주께서는 우리를 안전히 지키사 그런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영원히 보호하시리이다"
"O LORD, you will keep us safe and protect us from such people forever."
이것은 참으로 무책임하고 부정직한 번역입니다. 여기에서 'to keep'을 의미하는 히브리어는 'shamar'인데, 신국제역(NIV)의 번역자들은 2인칭 단수 미래로 나타나 있는 "thou shalt keep"을 "you will keep us"로 번역했으며, 3인칭 복수인 'them'을 1인칭 복수 'us'로 번역해 버렸으니 그것은 오역의 본보기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원본의 본문을 정확하게 보존한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은, 신뢰할 수 없는 NIV가 아니라 킹제임스 성경임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12:7의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른 바 유다인들의 보존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들을 보존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직접적인 언급은 시편 12:6에 묘사됩니다.
2. 종종 믿음이 너무나 연약해 시편 12:6,7을 문자 그대로 진리로 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크리스천은 경건하게 시편 119:89을 인용할 것입니다.
"오 주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정착되었사오며"
"For ever, O LORD, thy word is settled in heaven."
그리고 나서 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자신의 완전한 성경을 보존하신 곳은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밀짚더미 속에 숨어버리는 모습이란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원본을 하늘로 가져가시려고 이 땅에서 완전한 원문에 영감을 주셨다고 믿는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분께서 원문을 쓰신 이유가 하늘로 가져가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대답은 너무도 간단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주어진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완전한 성경을 기록하신 후에 그들이 그러한 완전한 성경으로 인한 유익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늘나라 도서관에 보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만일 그 완전한 책이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하늘나라에 감금되어 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두 번째로, 시편 12편 6절은 땅에 있는 그분의 말씀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땅이 아닌 다른 곳에 그것들을 보존하시는 것은 전혀 보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본에 완전하게 영감을 주셨고, 수 세기가 흘러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같은 말씀들을 보존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들(하나님의 말씀들)은 권위역 성경에서 발견됩니다.
부언:
'영감된 번역본들'에 관한 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의 진리, 즉 킹제임스 성경에 간단 명료하게 나타나 있는 창세기 22장 8절의 이중 진리가 뉴킹제임스역, 신국제역 그리고 신미국표준역 같은 서투른 번역본들에서는 상실되어 있다는 점을 덧붙여 알려드립니다.
질문 29 [TOP]
▶ 그렇다면 번역에도 영감이 있을 수 있나요?
☞ 네. 하나님께서 번역에도 여러 차례 영감을 주셨습니다.
창세기 42 - 45장은 요셉이 그의 형제들과 재회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셉이 구사한 말은 히브리어가 아니라 이집트어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42:23에서 보듯이 명백한 사실입니다:
"요셉이 통역자를 통해 그들에게 말한 고로 그들은 요셉이 자기들의 말을 알아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창 42:23).
물론 '낱말까지 완벽하게'(word perfect) 축어적으로 번역할 수 있는 번역은 없습니다. 이것은 기정화 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요셉이 이집트어로 말했던 그 내용이 구약 필사본에 기록될 때는 히브리어로 번역되었다"는 것과 "그 번역이 완전한 일대일 대응의 축어적인 단어 번역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영감을 주셨습니까? 이집트어로 말했던 요셉입니까? 아니면 이집트인 통역관의 구두 번역이었습니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우리가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에서 보는 바, 모세가 기록했던 번역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셨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영감을 주신 것이라면, 요셉의 '원래 진술'은 그의 이집트인 통역관에 의해 혹은 모세의 번역에 의해 훼손되었을까요? 아니면 '진보적인 영감'(progressive inspiration)을 비난하는 많은 근본주의자들을 자신의 면전에서 자취를 감추도록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영감을 주사 '영감 된 번역'을 기록하도록 하신 걸까요?
이와 동일한 질문이 모세가 바로(파라오)와 대결하는 장면에서도(출애굽기 4장-14장) 제기됩니다. 하나님을 대변해 모세가 이집트 왕과 말할 때는 왕의 본토어인 이집트어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기록할 때는 자신의 말이나 바로의 말을 모두 히브리어로 번역해서 기록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어느 것에 영감을 주셨습니까? 지구상에 그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모세의 이집트어 구두 진술 복사본인가요? 아니면 모세의 히브리어 번역인가요?
영감된 번역에 대한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됩니다.
사도행전 22 장을 보면, 바울은 자기를 박해하는 유다인들에게 히브리어로 말합니다(행 21:40; 22:2). 1절로 21절까지의 증언은 바울이 모두 히브리어로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말을 히브리어로 기록한 사도행전 22장의 현존하는 필사본은 전무합니다. 누가는 이 모든 것을 그리스어로 기록했습니다. 자 하나님께서 어느 것에 영감을 주셨습니까? 바울의 말(히브리어)인가요? 아니면 누가의 '진보된 영감'(히브리어의 그리스어 번역)인가요?
그 답은 간단하며 디모데후서 3:16에 있습니다:
"모든 성경(All scripture)은 하나님의 영감(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구절에 나오는 'script'라는 어근을 가진 'scripture'라는 단어의 어원은 '기록 된'(written)이란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 포함된 여러 개의 번역(제가 지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도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일 어떤 근본주의자가 영감 된 번역을 고의적으로 믿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와 같은 성경의 관행에 역행해야만 할 것입니다.
질문 30 [TOP]
▶ 킹제임스 성경은 그리스어를 영어로 옮긴 일개 번역본에 불과합니다. 과연 옮긴 것이 원래의 것만큼이나 좋다고 할 수 있습니까?
☞ 옮긴 것이 원래의 것만큼 좋을뿐더러 훨씬 더 좋습니다.
성경은 세 가지 '옮김'(translations)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 세 경우 모두 옮긴 것이 원래의 것보다 개선되었습니다. 성경이 우리 믿음과 행위 전반의 문제에 있어서 최종권위이므로, 우리는 '단순한 인간'의 어떤 의견보다 성경의 '관행'을 상위 권위로 인정해야 합니다.
1. 첫 번째 옮김(translation)은 사무엘하 3:7-10에서 발견됩니다.
7 사울에게 첩이 있었더니 그 이름은 리스바요, 아이야의 딸이더라.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말하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에게로 들어갔느냐? 하니
8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로 인해 심히 노하여 말하되, 내가 개의 머리뇨? 내가 유다를 대적하고 이 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당신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 대한 허물로 나를 비난하는도다.
9 주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가 그에게 행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넬에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노니
10 그 맹세는 곧 이 왕국을 사울의 집에서부터 옮기고,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위에와 유다 위에 다윗의 왕좌를 세우는 것이라, 하매
사무엘상 31장을 보면 사울이 죽은 후, 사울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은 다윗 대신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합니다(삼하2:8,9). 이스보셋과 아브넬의 관계가 악화되자, 아브넬은 심히 노하여 이스라엘이 이스보셋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질 것'(translate)에 대해 말합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 열 두 지파 모두를 다스리게 하시려는 주님의 의도는 사무엘하 3장 9절의 아브넬의 말을 볼 때 명백해집니다. 따라서 다윗에게로의 이스라엘 왕국의 '옮김'(translation)은 두 왕국으로 나누어져 한쪽은 다윗이 올바르게 통치하고, 다른 한쪽은 이스보셋이 옳지 않게 통치하던 '원래 상태'보다 나아졌습니다(첫 번째 언급의 법칙을 기억하십시오.).
2. 두 번째 옮김(translation)은 골로새서 1:13에서 발견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어두움의 권능에서 건져내사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으니"
여기서 '옮김'(translation)은 잃어버린 바 되었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 안으로 전환된 것을 말합니다. 편견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보게되면, 누구도 이러한 옮김(translation)이 '원래 상태'보다 엄청나게 향상된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3. 세 번째 '옮김'(translation)은 히브리서 11:5에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김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를 옮기신 고로 찾지 못하였느니라. 그는 옮김을 받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는 증거를 가졌느니라."
'translate' 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단지 다섯 번 쓰였습니다. 사무엘 하에 한 번, 골로새서에 한 번, 여기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 나머지 한 번이 나옵니다. 아무리 성경지식이 희박한 크리스천이라도 창세기 5장의 에녹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에녹은 대언자요,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던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는 죽음을 경험하게 할 필요가 없는 자였으므로, 에녹은 육신을 입고 죽지 않은 채 하늘로 �겨졌습니다. 이러한 에녹 개인의 경험은 고린도전서 15장, 데살로니가전서 4장, 디도서 2장과 성경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으며, 이는 소위 크리스천들이 '휴거'(The Rapture)라고 말하는 것의 축소판입니다. 성경은 '휴거'(Raptur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미래 현상에 대한 더 적절한 이름은 '복스러운 소망'(The Blessed Hope)(디도서), 혹은 '끌어올림'(The Catching up)(데살로니가전서), 혹은 '우리의 옮김'(Our translation)(히브리서) 등이 될 것입니다.
에녹의 옮김(translation)이 '원래 상태'보다 향상된 것이 분명하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최종권위인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모든 옮김(translation)이 원래의 것보다 향상된 것임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순수하게 성경을 믿는다면,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 별 무리가 없을 것이지만 만일 여러분이 학문에 최고 가치를 두거나 혹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한다면, 동의할 수 없었던 성경의 사실들을 거부했던 것처럼, 성경의 이 사실 또한 거부할 것입니다.
우리는 신미국표준역(NASV)과 신국제역(NIV)의 번역자들이 자기 개인의 선입견으로 인해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었을 때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위에서 언급된 그 어느 구절에서도 'translation'이란 단어를 허락할 수 없었다는 점에 주목해야겠습니다. 즉 그들은 'translation'이란 단어를 빼고 대신에 다른 단어로 대체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따르시렵니까, 성경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말입니까?
질문 31 [TOP]
▶ 다른 성경에는 근본적인 교리들이 없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다른 성경들을 나쁘다고 말할 순 없지 않나요?
☞ 어떤 번역본에서 발견되는 어떠한 기본 교리도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더욱 명쾌하고 더욱 빈번히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킹제임스 성경이 그 분야에 있어서 최고인 것입니다.
다른 번역본들에서도 근본적인 교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 교리가 원래 킹제임스 성경으로부터 발원한 것임을 잊고 있습니다. 다음의 교리들은 다른 번역본들에서도 발견되나, 킹제임스 성경에서 보다는 그 의미가 더 약화된 몇몇 교리입니다.
1. '그리스도의 신성'이 사도행전 3장 13절, 26절 그리고 4장 27절, 30 절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대신 하나님의 '종'이라 부르는 신미국표준역(NASV), 신국제역(NIV), 뉴킹제임스역(NKJV)에 의해 희석되어 버렸습니다.
2. 지옥(Hell)의 교리는 누가복음 16장 23절에서 희석되어, NKJV와 NASV에서는 '지옥'(Hell)이라 하는 대신 'Hades'(음부)로 음역됩니다.
3. 사도행전 8장 37절의 본문이 삭제되어, NIV와 NASV에는 이디오피아 내시의 구원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4. NASV의 누가복음 24장 51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기록되어있지 않습니다.
5. NIV와 NASV에서는 예수님의 처녀 탄생이 부인되고 있고, 누가복음 2장 33절에서는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라 불립니다.(이같은 신성모독이 어디에 있습니까?)
6. 삼위일체의 교리가 요한일서 5장 7절에서 제거되거나 문제시됩니다. NIV와 NASV에서는, 그 구절을 삭제하고 6절을 나누어 엉터리로 7절을 만들어 냈고, NKJV에서는 그 신빙성이 의심스럽다는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이것들은 오늘날 현대 번역본들의 본문에 있는 단지 몇 개의 변개 사항들입니다. 모든 목록을 남김없이 기재한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다른 성경들에 대한 이러한 비평을 두고 "별 것 아닌 것을 문제삼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현대판 성경들에서 어떤 특별한 교리를 200번 발견했다면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똑같은 교리를 그보다 더욱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고, 결국 킹제임스 성경이 교리 면에서도 훨씬 더 권위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질문 32 [TOP]
▶ 킹제임스 성경이 정말 완전하다면, 어떻게 그렇게도 많은 목회자들과 학자들이 틀릴 수가 있나요?
☞ 다수는 언제나 틀렸습니다.
마태복음 7:13,14에서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성경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다수는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드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비좁아 찾는 자가 적음이라."
이 구절은 우리에게 지구상의 사람들의 다수는 언제나 그릇 되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지옥에 갈 것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무심코 한 번 볼지라도 다수는 항상 틀림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노아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홍수에 죽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멸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수가 출애굽기 32장에서 아론의 송아지를 숭배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수가 예레미야같은 대언자들의 직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 기간 동안 그분을 부인했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삽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항상 겸손한 마음을 지닌 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께서 드러내신 진리를 인정했습니다. 성경 '학자들'과 목회자들의 다수가 킹제임스 성경을 부인하는 사실은 전적으로 성경적이며, 그것은 또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질문 33 [TOP]
▶ 로마서 8장 26절에서 '성령님'(the Holy Spirit)을 '그것'(it)이라고 칭하는 것은 오역이 아닙니까?
☞ 로마서 8장 26절에서 그리스어 '프뉴마'(pneuma)를 '그것'이라고 번역한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완전함을 대적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이 주장은 실로 미약한 주장에 불과하며 이러한 주장에 대한 논박은 다음 세 가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첫째로 그리스어 자체와, 두 번째로 성경 비평학자들의 위선적 행위와 그리고 세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으로부터 나옵니다. 성경이 신앙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최종 권위이기 때문에, 주님의 증언은 상당한 영향력을 갖습니다.
먼저 로마서 8장 26절에서 '그것'(itself)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spirit)이라는 의미의 'pneuma'입니다. 실로 '영'은 공기와 같기 때문에(창 1:7; 요 3:8) 우리는 공기의 작용에 의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공기에 의해 움직이는'(pneumatic)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모든 그리스어는 개개의 뚜렷한 성(性) 즉 남성, 여성 혹은 중성을 갖습니다. 남성은 관사 'o'로, 여성은 'a'로, 중성은 'to'로 표시됩니다. '영'(spirit)이란 단어인 'pneuma'는 중성이며, 이 사실은 심지어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1학년 학생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많은 열등한 번역본들에서 'pneuma'를 '그분 자신(himself)'으로 번역한 것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이고, 킹제임스 성경이 'pneuma'를 '그것(itself)'으로 번역한 것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비평학자들은 그것이 마치 그리스어의 '오역'인 것인 양 킹제임스 성경을 비웃기 좋아하므로, 그리스어를 알맞게 번역한 이것을 그들이 비평하는 것은 정말로 위선적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모욕할 뿐 아니라 무지하게도 'pneuma'를 '그분 자신(himself)'으로 부적절하게 번역한 NASV, NIV 그리고 NKJV 같은 다른 번역본들을 찬양합니다.
두 번째로, 킹제임스 성경 로마서 8장에서 성령님을 '그것'이라 한 것에 대해 분개하는 비평학자들은 자기들의 위선과 하나님의 성경에 대한 경멸하는 태도를 더욱더 드러내기 위하여, 사도행전 17장 23절에서 하나님을 'What'(비인격체)으로 부른 NASV와 NIV 같은 번역본들을 적극 장려할 것입니다. 여기서 권위역 성경은 하나님을 'Whom'(인격체)이라고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가의 여인에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20세기 학자들의 위협을 전혀 받지 않는 예수님께서는 22절에서 여인에게 주저 없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경배하고 우리는 경배하는 것을 아노니, 이는 구원이 유다인에게서 남이니라."
"Ye worship ye know not what: we know what we worship: for salvation is of the Jews."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what' 즉 '알지 못하는 것'이란 누구 혹은 무엇입니까? 그 다음절에서 그분의 말씀이 더욱더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But the hour cometh, and is, when the true worshipers sha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for the Father seeketh such to worship him"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를 아무 문제없이 'what'이라고 지칭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20세기 거대한 학자들의 집단은 그것을 전혀 새로운 것으로 번역했을 것입니다. 사실상 그들은 자기들끼리의 평상시 대화에서는 성령님을 중성으로 칭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것을 따르시렵니까?
질문 34 [TOP]
▶ 킹제임스 성경에도 처음엔 외경이 포함되지 않았습니까?
☞ 실리긴 했었죠. 그러나 참고자료로 실린 것입니다.
「권위역 성경」을 향한 공격 중 또 다른 하나는 「권위역 성경」의 초기판들이 구약과 신약사이에 외경을 포함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변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외경들이 「권위역 성경」 번역자들에 의해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던 일곱 가지 이유를 나열해 보겠습니다.
외경이라고 번역된 "어포크라이퍼"(apocrypha)라는 말은 원래 "숨겨진"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으나, 주후 450년경부터는 구약 시대의 "정경이 아닌 책들"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외경문제의 핵심은 로마카톨릭 성경 안에 포함된 몇 가지 책들이 과연 성경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1. 외경의 성격
외경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던 약 400년간의 기간에 기록된 15 개의 '유다인들의 문학작품'입니다. 이것들 중 어떤 것들은 역사적 가치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 비논리적이고 그 저자를 알 수 없으며, 또 그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이나 권위를 받았다는 주장이 없습니다. 또 어떤 것들은 그 내용이 전설적이며 공상 만화 같기도 합니다. 이 책들 중 몇 개는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에 유다인들의 우상 숭배를 금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현존하는 외경은 다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2. 외경의 책들
다음은 15 개의 외경 책들의 명단입니다. 그 이름은 대한성서공회에서 발간한 「한글공동번역」에서 취했습니다.
|
외경 이름 |
연대 |
내용 |
1 |
솔로몬의 지혜서 |
주전 30년 |
교훈 |
2 |
집회서 |
주전 132년 |
교훈 |
3 |
토비트 |
주전 200년 |
종교 소설 |
4 |
에스드라상(*) |
주전 150년 |
역사, 전설 |
5 |
마카베오상 |
주전 110년 |
역사 |
6 |
마카베오하 |
주전 100년 |
역사, 전설 |
7 |
유딧 |
주전 150년 |
로망스 소설 |
8 |
바룩 |
주후 100년 |
예언 |
9 |
예레미야의 편지 |
주전 200년 |
예언 |
10 |
에스드라하(*) |
주후 100년 |
예언 |
11 |
에스델 |
주전 130년 |
전설 |
12 |
아사랴의 기도
(혹은 세 아이의 모래), |
주전 100년 |
전설 |
13 |
수산나 |
주전 100년 |
전설 |
14 |
벨과 뱀(원래는 벨과 용) |
주전 100년 |
전설 |
15 |
므낫세의 기도(*) |
주전 150년 |
전설 |
(*) 천주교에서도 이 책은 외경으로 인정하지 않음.
3. 외경의 수용
ⓐ 유다인들은 결코 외경을 자기들의 구약성경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 프로테스탄트 중 어떤 이들은 외경이 삶의 예와 예의 범절 등을 위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으로 여긴다.
ⓒ 로마카톨릭교회는 위의 표에서 '에스드라상하서'와 '므낫세의 기도'를 뺀 나머지 12권을 정경으로 인정하며, 따라서 구약성경이 39권이 아니고 51권이라고 주장한다(참고로 「한글공동번역」에는 '예레미야의 편지' 역시 빠져 있다.)
4. 외경을 포함하는 사본들
ⓐ 「70인역」 : '에스드라하서'를 제외한 나머지 책들 포함
ⓑ 「알렉산드리아 사본」(A 코덱스) : 위의 외경들 외에도 '마카베오 3서 및 4서' 포함
ⓒ 「바티칸 사본」(B 코덱스) : '마카베오상하서' 및 '므낫세의 기도'를 제외한 나머지 포함
ⓓ 「시내 사본」(알레프): 여러 권 포함
ⓔ 「체스터 비티의 파피루스」 : '집회서' 일부분 포함
ⓕ 「사해 사본」 : 그리스어로 쓰인 몇몇 외경 포함
5. 트렌트 공회
외경은 1546년 4월 8일 카톨릭교회의 트렌트 공회에서 공식적으로 '카톨릭교회의 성경'으로 채택되었습니다. 트렌트 공회란 주후 1545-1563년 사이에 연속적으로 세 번 열린 카톨릭교회의 공회를 지칭하는 것입l니다. 이 공회가 열리기 28년 전인 1517년에 마틴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을 뒤엎으려는 "반종교개혁"의 중심 기구가 바로 트렌트 공회였으며 주로 예수회(Jesuits, 제수이트)가 이 모임을 주도했습니다. 이 공회에서 교황은 다음의 세 가지를 정하여 공포하였습니다.
ⓐ 카톨릭교리의 정의
ⓑ 카톨릭교리의 개혁
ⓒ 이단의 말살
그 당시 종교 개혁자들이 내세운 표어 중 하나는 '오직 성경으로'(Sola-Scripture)였는데, 카톨릭교회 역시 이와 똑같은 구호를 외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거짓 교리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구약성경에다 외경을 추가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트렌트 공회는 다음과 같이 선포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위에서 언급한 책들을, 카톨릭교회에서 해왔던 것처럼, 모두 다 성경의 정경으로 받아드리고 읽지 않으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외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비성경적인 카톨릭교리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 연옥: 마카베오하서 12장 39-45절
ⓑ 구제(즉 자선 행위)에 의한 구원: 집회서 3장 30절
이외에도 자살을 인정한다든지(마카베오하서 14장 43-46절), 비참한 노예제도를 인정한다든지 (집회서 33장 24-28절), 윤회(솔로몬의 지혜서 8장 19,20절)를 인정하는 구절들이 있으며,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을 몰래 죽이거나 마술을 통해 신비주의를 행하는 것 등을 인정하는 구절들이 있어, 우리 프로테스탄트들이 믿는 성경과 상치됩니다.
트렌트 공회 이후 1582년에 로마카톨릭교회가 펴낸 「라임스/듀에이 역본」은 원래의 구약성경 39권에다 위 표의 15개 외경 중 12개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런데 트렌트 공회는 매우 교묘하게 외경을 포함시키는 일을 진행하여, 외경 15권 모두를 포함시키지 않고 특히 에스드라하서를 뺐는데, 왜냐하면 그 책의 7장 105절에서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6. 초기 영어 성경에 외경이 포함된 이유
초기 영어 성경에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대개 외경이 포함되었습니다. 그 이유 중 첫째는 중세시대에는 많은 이들이 대개 외경을 가치 있는 책으로 수용했기 때문이었고, 「킹제임스 성경」과 같은 경우에는 성경 분석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외경을 넣었든지 간에, 영어 성경에서 외경은 부록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정경이 아님을 밝히는 분명한 글과 함께 성경책에 포함되었습니다.
ⓐ 「틴데일 성경」(주후 1525년)은 외경들만을 따로 떼어내어 "영감 받지 않은 책들"임을 분명히 밝혔다.
ⓑ 「커버 테일 성경」(주후 1535년)도 「틴데일 성경」과 마찬가지로 했으며, 아예 다음과 같은 설명을 곁들였다.
"외경 : 고대 교부들이 성경의 다른 책처럼 권위를 부여받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은 책들이며, 또한 히브리인들의 정경에도 포함되지 않은 책들이다."
ⓒ 「마태 성경」(주후 1537년)과 「태버너 성경」(주후 1539년)은 외경을 구약과 신약성경 사이에 부록으로 넣었다.
ⓓ 「킹제임스 성경」(주후 1611년)은 「비숍 성경」 (주후 1568년)과 마찬가지로 외경을 부록에 넣었으나, 1629년부터는 외경을 빼기 시작하여 1827년부터는 부록에서도 아예 삭제되었다.
많은 이들이 '성경 안에 외경을 부록으로 넣었다'는 것과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성경에 넣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혼동에 빠져 있습니다. 다음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성경 안에 외경을 부록으로 넣었다'는 것은 신구약성경이 모두 66권으로 구성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며, 외경은 성경 안에 들어 있는 지도책과 같이 단지 참조 자료라는 것입니다. 초기 영어 성경들의 경우가 거의 다 이러합니다.
반면에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여 성경에 넣었다'는 것은 신구약성경이 모두 78권으로 구성되었음을 말하며, 이 경우에는 책의 목차에 아예 외경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외경이 모두 구약성경 정경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카톨릭교회가 발간하는 성경은 모두 다 후자로 되어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참고로 「Catholic Study Bible」이나 「New American Bible」 등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성경에 외경을 부록으로 넣은 경우' |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한 경우' |
구약성경 39권 |
구약성경 51권 |
외경(부록) |
신약성경 27권 |
신약성경 27권 |
부록이 없음. |
외경은 성경이 아니라고 분명히 못박았음. |
부록이 없고, 대신에 외경이 구약성경 중 일부분으로 들어가서 구약성경이 총 51권으로 구성됨. |
7. 외경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
ⓐ 이 책들은 전이나 지금이나 유다인들이 정경으로 인정한 적이 한번도 없다.
·요세푸스는 분명히 이 책들을 구약성경에서 제외시켰다.
·주전 20년에서 주후 50년까지 살았던 필로 역시 이것들을 언급하거나 인용한 적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 중 어느 누구도 외경을 인용한 적이 없다.
·어떤 이들은 히브리서 11장 35절이 마카베오하서 7장과 12장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이 구절은 왕상 17:22와 왕하 4:35를 인용한 것이다.
·유다서 14절이 외경 에녹 서신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구절은 에녹의 말을 인용할 따름이며, 분명히 성령님께서는 에녹이 한 말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에녹 서신을 인용하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딤후 3:8이 외경을 인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성령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에 과거에 있었던 이집트의 마술사의 이름을 언제든지 보여 주실 수 있으므로 이 구절 역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야브네 공회에 모인 유다인 학자들은 외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 대부분의 교부들이 외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 외경의 어느 책도 스스로 영감 받았음을 주장하지 않는다.
ⓕ 외경의 많은 책들이 역사적, 지리적, 연대기적 실수들을 포함하고 있다.
ⓖ 외경의 많은 책이 성경 말씀과 모순이 된다.
ⓗ 외경의 책들의 형식은 전설적이며 공상 만화 같다. 어떤 이야기들은 매우 괴기적이며 마귀와 연관이 있다.
ⓘ 외경의 책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권위와 같은 뚜렷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모두 그리스어로 기록된 외경들은 - 라틴어로 현존하는 단 한 가지만을 빼놓고- 동양의 예의범절, 언어, 견해와 역사 등에 대해 설명을 주는 "고대문서"로서의 가치만을 지닐 뿐입니다.(251) 결국 우리는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외경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쓰여진 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단지 부록으로 넣었음을 알게 됩니다.
질문 35 [TOP]
▶ 다른 성경을 사용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 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원의 단순성을 둘러싼 사실들은 성경이 가장 많이 왜곡된 부분에서조차도 손상되지 않은 채 발견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크리스천의 무기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12절 과 디모데후서 3장 16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것은 새로운 크리스천을 적절히 자랄 수 있게 하는 양식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강력하며 양날이 선 어떤 칼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고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시는 분이시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새로 태어난 아기들로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할지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이 젖으로 자라게 하려 함이라."
이런 면에서 새 번역 성경들은 취약점을 드러냅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된 구절들이 많은 새로운 번역본들에서는 바뀌어서 힘없는 성경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번역본들로 구원을 얻는 것은 가능하나, 구원받은 사람이 성장하여 마귀와 대적하기는 매우 힘이 들 것입니다.
질문 36 [TOP]
▶ 사해 사본(the Dead Sea Scrolls)이 킹제임스 성경을 쓸모 없는 것으로 만듭니까?
☞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합니다.
사해 사본 두루마리는 1947년에 여리고 근처의 쿰란 동굴에서 아랍인 양치기 소년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 본문들은 사실 킹제임스 성경과 일치합니다. 이 사실은 완전한 성경을 던져 버리고 싶어하는 학자들에게는 그리 매력적인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발견된 방법의 아이러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 이외에 그것은 대개 무시됩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이미 사해 사본 두루마리와 일치하는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 없었습니다.
질문 37 [TOP]
▶ 제가 성경을 읽을 때 'thee'와 'thou' 같은 고어들로 인해 곤란을 겪게 되면 어쩌죠?
☞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고기를 주시나, 그것을 잘라 먹여주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다음의 사실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심혈을 기울여 완전한 원문에 영감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구약과 신약 성경을 조합하시고 그것의 신빙성을 문서로 입증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로마 카톨릭 압제자들과 알렉산드리아 철학자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보존하셨습니다. 이 과정은 그분 자신의 가장 충성스런 종들의 생명과 가정과 가족들의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학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에게 세계어(영어)로 완전하고도 순전하게 그것을 번역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thee'와 'thou' 등이 고어라고 하며 불평하고 있군요. 제발 그 불평을 그치고, 고기를 먹는 수고는 여러분이 감당하십시오!
질문 38 [TOP]
▶ 뉴킹제임스 성경(NKJV)은 안디옥 사본들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킹제임스 성경(KJV)보다 개선된 것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 그렇지 않습니다.
뉴킹제임스 성경과 영어성경과의 관계는 알렉산드리아 필사본들과 그리스어 성경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뉴킹제임스 성경은 '성경이 완전할 리가 없다'는 - 그들이 설교할 때 뭐라고 말하든 상관이 없음 - 개탄스러운 교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과 무기력한 지성인들이 순수한 본문을 변개하고 개정해서 만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다른 현대 번역본들과는 달리 뉴킹제임스 성경은 개악된 알렉산드리아 필사본들이 아닌 정확한 안디옥 필사본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 번역 작업을 실행한 사람들은 성경을 불완전하다는 관점에서 봅니다. 그들은 그들의 직업이 그것에 달려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이 혐의를 맹렬히 부인하지만, 사실 그들은 어떤 성경도 완전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 자신의 뉴킹제임스 역 성경조차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어 성경은 이미 소실된 것이며 - 하늘 나라에 '안치된' 것이며- 성경의 '말씀들'이 아니라 '사상들'이 잊혀지는 것을 막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 바로 학자들의 사상이라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번역위원회에 소속된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훌륭한 설교자요 목사들일지는 모르지만 그 같은 사실이 그들에게 성경을 정정할 권한을 부여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정직함이 완전한 것을 향상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을 더 좋게 만드는' 대신에, 그들은 단지 가까스로 큰 애를 써서 '완전한 것을 더럽혀 놓았을 뿐입니다.'
우리는 '현대판' 성경 번역위원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상당한 명성을 가져다준다(마 23:5-7)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질문 39 [TOP]
▶ 뉴스코필드 성경도 킹제임스 성경인가요?
☞ 뉴스코필드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이 아닐 뿐 아니라 '스코필드 성경'(구 스코필드 성경)과도 다릅니다.
뉴스코필드 성경이 스코필드 성경과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그것은 스코필드 박사(Dr. C. I. Scofield)가 뉴스코필드 성경을 편집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1921년에 작고했으므로 매우 '특별한 섭리에 의한' 부활이 없이는 1921년에 죽은 사람이 1967년에 책을 편집한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출판업자는 이 새로운 '판'에 대해, '스코필드 주석 성경'은 스코필드 박사가 1909년에 처음으로 출간한 후 1917년에 자료를 보충해서 다른 판을 출간했다는 점을 들어 변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고친 것일 뿐, 다른 이에게, 더구나 그가 죽은 지 45년 후에 그의 이름을 사용해 자기의 작품을 자유롭게 고칠 수 있도록 백지수표를 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익스피어의 '맥베드' 끝 부분을 고치고서 세익스피어의 허락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정직하지 못한 행위일 것입니다.
두 번째로, 편집자들은 스코필드 박사가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하며 편찬 작업에 포함시켰던 스코필드 박사 주석의 특성을 바꾸는 데 있어서 지나칠 정도의 자유를 행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부정직한 "1967년판 뉴스코필드 성경" 서문에서 이러한 변화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뉴스코필드성경: "이 개정판은 다음과 같은 부분이 개선 향상되었습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한 본문상의 주요 단어 변화(따로 음성표기를 하지 않고); 철자에 악센트 부호나 발음기호를 직접 표시하는 방식(selt-pronunciation)의 새로운 편집; 저자, 주제, 그리고 연대의 명시 외에 소제목 등을 포함한 성경 각 권의 도입 부분들의 개정; 각주들에 대한 해설, 몇몇 각주들의 삭제 그리고 많은 새로운 각주들의 추가; 난외 주들의 보강; 전체적으로 새로운 연대표; 새로운 색인; 이 판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용어 색인; 새 지도들; 그리고 더욱 읽기 쉬운 인쇄체. 이러한 특성들 중 몇 가지는 아래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입으로 자기들이 스코필드 박사의 본문(킹제임스 성경), 성경 각 권의 도입부분, 주석, 난외의 주, 연대기와 그밖에 많은 특성들을 개정했음을 인정했습니다. 과연 스코필드 박사가 이러한 개정들을 승인해 주었습니까?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엔돌의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 올렸던 것처럼 위원회의 9명의 위원들이 그(스코필드)를 불러 올릴 수 있었다면 혹시 모르지만 말입니다! 사실 그 출판사는 그런 변화들이 개정위원들이 자의로 선택한 것이었음조차 인정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견해는 전체 위원회의 신념이나 사고를 반영한다"
이러한 속임수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 가지의 예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침례(Baptism)에 대한 사도행전 8장 12절의 뉴스코필드 성경의 주석을 살펴봅시다.
"침례는 사도 시대 이래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공동체 안에 소속된 주요 그룹들 사이에서 실행되어 왔으며 주의 만찬과 더불어 두 가지 규례로 알려져 있다. 교회 역사의 초창기에는 침례의 세 가지 다른 유형이 사용되었는데: 성수살포(sprinkling, 뿌리기); 관수례(pouring, 붓기); 그리고 침수(immersion, 담그기)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9 명의 개역자들(스코필드 박사가 아닌)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참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분리하여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제가 한 가지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어느 한 그룹을 '프로테스탄트'라고 정의한다면 나머지 한 그룹은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당연히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란 말입니까?).
두 번째로, 9 명의 배도한 개정가들은(스코필드 박사가 아닌) 성경적인 증거도 없이, 크리스천들이 침례뿐만 아니라 물을 뿌리거나 부음으로써도 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거짓 주장을 합니다. 이러한 주석이 1967년도 스코필드 성경 안에서 발견됨을 기억하십시오. 그 책은 표지에서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스코필드 박사)이 편집에 참여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1917년의 진짜 스코필드 성경에서는 사도행전 8장 12절에 대해 그 책의 편집자인 스코필드 박사는 뭐라고 했을까요? 아무런 주석도 없습니다. 그런 주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옳은 일입니다! 뉴 '스코필드' 성경은 스코필드 박사 본인이 그의 생애 어느 때에도 승인한 적이 없는 추가된 '스코필드' 주석 본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정직한 것인지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뉴스코필드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이 아니라는 증거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서 "KJV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말하는 난외주들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뉴스코필드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이 아니며, 그것은 스코필드 성경도 아닙니다.
최근에 뉴스코필드 성경의 크기나 형태가 스코필드 주석 성경과 더욱 비슷하도록 바뀌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진짜 스코필드 성경을 원하는 많은 크리스천들이 실수로 뉴스코필드 성경을 구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판매는 수지맞는 사업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질문 40 [TOP]
▶ 신국제역(NIV)은 믿을만한 것입니까?
☞ 아닙니다.
신국제역(The New International Version)은 에버하르트 네슬레(Eberhard Nestle)에 의해 1979년에 출간된 그리스어 성경 제26판에 기초한 것이며, 또한 그것은 1969년의 네슬레의 제23판에 기초를 둔 신미국표준역(NASV)과 더불어 이집트 사본 계열에 속합니다. 이것들과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들(뉴킹제임스 성경과 뉴스코필드 성경을 제외하고, 이 둘은 이 책에서 개별적으로 다루었음)은 모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에 의해 더럽혀진 필사본들의 산물입니다.
NIV와 NASV에서 발견되는 몇몇 개악들은 근본주의 교리들에 대해 다룬 이전 질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 작업은 이러한 실수 투성이 번역본들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을 빠짐없이 연구한 것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
"나쁜 나무에서 어찌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 있으리오"(마 7:17,18).
질문 41 [TOP]
▶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얻을 수 없었던 필사본들이 1611년 이래로 상당수 발견되었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킹제임스 성경에 강점이 됩니까? 약점이 됩니까?
☞ 그것들은 킹제임스 성경을 뒷받침해주는 강점이 됩니다.
1611년 이래로 많은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나, 그것들이 새로운 본문을 발견하게 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수많은 비평학자들은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에게 없었던 '새로운 증거'라고 주장하면서,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현대 비평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유용한 오늘날의 모든 독본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611년 이후에 발견된 사본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시내 사본이며, 이것은 심각한 결점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 증거물은 1841년 콘스탄틴 티센도르프(Constantine Tischendorf)에 의해 시내산 기슭의 성캐더린 수도원 -천주교 사원임을 기억하십시오-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시내사본이 역시 변개된 필사본인 바티칸 사본의 자매본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둘 다 매우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시내사본이 권위역 성경이 번역된 지 200년이 지난 후에 발견되었을지라도,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에게는 이미 1481년에 발견된 바티칸 사본과 1582년의 영어성경인 예수회 성경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본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에게 없었던 유용한 본문이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 42 [TOP]
▶ 현대 번역판 성경들이 이해하기에 더 쉽지 않습니까?
☞ 아닙니다. 어떤 것들은 읽기에는 쉬울지 모르나 그 어느 것도 이해하기에 쉽지는 않습니다.
현대 번역판 성경들을 판매하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 광고 전략 중 하나는 장래의 고객들에게 그것들이 이해하기 쉽게 번역되었다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일단 고객이 된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이 '고어로 된' 킹제임스 성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감사한 마음으로 현대 영어성경을 구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이제부터 성경에 관한 한 무지의 삶을 살겠다고 자신들에게 선고해 버린 것입니다. 현대 영어 번역본들은 읽기엔 쉬울지 모르나 이해하기엔 용이하지 않습니다.
간단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오늘날 성경 판매대 위에 있는 현대 번역본들 중 한 두 가지라도 다음의 몇 가지 사항들에 적용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킹제임스 성경의 '고어'와 'thee' 그리고 'thou'가 성령님께서 크리스천들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데 정말로 거침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 신미국표준역(NASV), 신국제역(NIV), 뉴킹제임스역(NKJV)과 현대인의 영어성경(TEV)과 같은 현대 영어 번역본들이 더 이해하기 쉽다면, 그것들을 읽을 때 성령님의 메시지가 크리스천들에게 보다 더 자유롭게 흘러넘치고, 하나님의 사람들의 각자의 삶 속에 보다 훌륭한 영적인 승리들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런 일은 일어나고 있지 않음이 명백한 현실입니다.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이 19세기나 심지어 20세기초의 킹제임스 성경을 읽고 양육 받았던 크리스천들보다 더욱더 세속적이며 예수 그리스도께 덜 헌신적이라는 것은 객관적인 관측자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현대 역본들이 확실히 '이해하기 쉬운' 성경이었다면 죄와 세상 그리고 육욕과의 전투에서 놀랄만한 성공을 거두었어야 했지만, 이런 일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2. 두 번째로, 만약 현대 영어 번역본들이 정말로 이해하기에 더 쉬웠다면, 하나님께서 그 중에서 최소한 하나라도 사용하셔서 이 나라에 큰 부흥을 일으키심으로 인해 그것들에 대한 감사를 표하셨어야 하지 않을까요?
'옛스런 고어체'로 적힌 킹제임스 성경이 성령님의 원하시는 사역들에 거침이 되어왔다면,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자신의 백성들이 이해하기에 더 쉬운 다른 번역본을 사용하려 할 때 큰 복을 주셨어야 한다는 것은 유년 주일학교 학생이라도 다 아는 일일 겁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오늘날의 현대 번역본들 중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종류의 영적 각성(오순절 은사운동 등의 비성경적인 것을 제외하고는)도 일어나지 않았음은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현대 번역본들은 크리스천 학교에서도 부흥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사실, 1901년의 ASV를 선두로 시작된 현대 영어 번역본들의 등장이 이루어진 이래로 미국에서는
1. 하나님과 기도가 공립학교로부터 배척을 당했고,
2. 낙태가 합법화되었으며,
3. 전국적으로 동성연애가 "기호에 따른 하나의 생활 양식"으로써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졌고,
4. TV와 VCR을 통한 도색 문화의 가정 침투와,
5. 아동 유괴, 만연된 호색 문학의 득세,
6. 마약이 하나의 유행함과 더불어
7. 사탄숭배의 기세는 드높아졌습니다.
이것을 '부흥'으로 간주한다면, 오히려 그러한 일들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킹제임스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새 번역본이 성공했음을 주장하는 데 사용되는 단 하나의 기준은 그것이 얼마나 잘 팔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타락한 매디슨가의 판매 방식 -오직 이윤 추구만을 위해 과대광고도 마다하지 않는 -은 크리스천들에게 마땅히 경종을 울리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TV에 현혹된 사람들은 그런 광고에 순종이나 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합니다. "그건 유익한 것임에 틀림없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사고 있잖아?"
현대 번역본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없습니까? 있긴 합니다. 확실히, 출판사들은 수백만 부의 성경을 찍어내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들만 이익(?)을 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한국도) 크리스천들은 영적으로 곤핍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성경이 아닌 자기들이 좋아하는 '성경 심리학자'(Bible psychologist)에게로 갑니다. 미국은(한국도) 매춘부처럼 되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도덕적으로 부패했습니다(에스겔 16:49).
보다 이해하기 쉬운 것'이 가져온 영적인 도움과 희망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희망은 커녕 바로 그러한 번역본들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절망적 상태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질문 43 [TOP]
▶ 성경혼란의 배후에는 마귀의 역사가 있는 게 아닐까요?
☞ 물론입니다.
많은 성경 비평학자들은 킹제임스 성경에 대한 전투의 배후에 마귀가 숨어 있다고 다소 분개하여 외치는데, 이것은 대단히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배후에 마귀가 숨어 있다는 그들의 말은 옳지만, 성경에 대한 완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마귀에 의해 지시를 받고 있다는 그들의 추측은 어떻습니까? 이것이 옳은 추측일까요? 성경전쟁의 역사를 되돌아봅시다.
1611년 초판이 인쇄된 이후 킹제임스 성경의 인기는 상승해 왔습니다. 제임스 왕이 영국의 교회들에게 그것을 사용하도록 강제적인 법령을 선포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수년 내에 이전에 번역된 모든 위대한 번역본들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작금의 번역본들처럼 매디슨 가의 방식으로 과대 광고되지도 않았지만, 이내 영국 국민들과 영국의 식민지 시민들의 손과 마음으로부터 다른 모든 번역본들을 쓸어내 버렸습니다.
대영제국을 정복한 후 그것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갔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그것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깃발 아래 이미 심겨진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확고한 거점을 뒤엎어버렸으며, 그 후 자신의 이상대로 나이 어린 미국의 숨결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의 진리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성경에 기초한 교육 체계의 설립을 유도했으며, 자유의 전형과 개인의 자유를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한 사상들을 우리의 헌법에 포함시키는 것은 너무도 낯선 것이어서 단지 정부의 '실험'으로밖에 묘사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의로운 설교자들을 임명했고, 그들은 도보로 그리고 말을 타고, 광야를 개척하며 어느 곳이든 복음과 올바른 삶의 진리를 전파했습니다. 그것의 결과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국가..."라고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즉 참 미국의 출현을 의미하지요). 이 일이 완수되자 그것은 이방 세계 정복에 올랐으며, 신학교(프린스톤, 하버드, 예일)들을 설립하였습니다. 선교 단체가 만들어지고, 열정을 가진 젊은 선교사들이 오직 킹제임스 성경과 하나님의 성령님만을 의지하며 전세계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들이 사탄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사역자들 그리고 그 능력을 성공적으로 모방했던 그가 하나님의 성경이 도전 받지 않은채 세계를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었습니다. 그(사탄)는 웨스트코트(Brook Foss Westcott)와 호르트(Fenton John Anthony Hort) 같은 그의 하수인을 통해 1884년에 자신의 번역본인 영어 개역성경(Revised Version)을 출간했습니다(신약 성경은 1881년에 출판되었음). 1611년과 1884년 사이에 산발적으로 사적인 번역본들이 나오긴 했어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받은 성경을 대체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는 개역 성경(RV)이라 불린 이 새 번역본이 첫 번째였습니다.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성경을 대체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개역성경을 지지하는 자들의 주장은, 거의 400년 간 성경의 권위와 무오성에 관련하여 벌어졌던 전쟁 중 하나님의 백성들의 심장을 향해 쏘아진 첫 총탄이었습니다.
1901년에는 후에 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 ASV)이라 불리게 된 미국개역성경(the American Revised Version, ARV)이란 총탄이 다시 쏘아 올려졌습니다. 사실 ASV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표준'(standard)이 될 수 없기에 그 명칭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비판하기 좋아하는 미국 신학자들의 총아였던 이 번역본은 23년 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적으로 거부하게되어, 그 판권이 팔려야 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처럼 들리십니까?.
ASV는 더 개정을 거친 후, 1954년에 개역 표준역(the Revised Standard Version, RSV)으로 재 출판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무수히 반복되어 왔는데, 몇몇 이름만 말하자면 1960년에는 신미국표준역(the New American Standard Version, NASV)이, 1967년에는 뉴스코필드역(the New Scofield Version, NSV)이, 1978년에는 신국제역(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이, 그리고 1979년에는 뉴킹제임스역(the New King James Version, NKJV) 등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향해 발사된 이 모든 새 번역본들은 예외 없이, 성경의 완전성이라는 전제를 부인하는 알렉산드리아 철학의 산물이며 결국 사탄의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들의 상당량이 개악된 알렉산드리아 필사본으로부터 복사된 것입니다. 순수한 안디옥 필사본들로부터 번역된 것도 소수 있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에 의해 오염되었습니다.
이것은 출판분야에서 나타난 사탄과의 전쟁이며 그것만이 그의 공격의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특기인 '전 후방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을 이용했습니다. 자기의 알렉산드리아 필사본들이 출판물을 통해서 대중화되는 사이에, 그는 신학교 안에서, 그리고 신학교를 통해서 그의 알렉산드리아 철학을 조장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근본주의 신학교에 입학한 진지하며, 젊고 순수한 신학생들은 교실에서 성경의 무오성에 도전을 주는 r런 강의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에는 성경의 완전함에 대한 극구 칭찬을 듣습니다. 이처럼 동일한 연사들이 영어성경의 권위를 절하시키며 심지어는 비웃기까지 하면서도, 자기의 학생들에게는 자기들이 '자필원본'의 무오류성을 믿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도 '근대주의자'도 아니라는 확신을 언제나 심어줍니다. 모든 배도자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감추기 위해 실재하지 않고, 구할 수도 없으며, 신비적인 존재인 자필원본을 들고 나옵니다.
얼마 후 성경의 완전성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의 '모교'(Alma Mater)에 전적으로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받은 교육에 의해 의기소침하게 되고 무장해제 된 젊은 졸업생들은 미국 곳곳의 설교단 위에 서서, 교수들에게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약한 비평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게 됩니다. 그들은 기꺼이 알렉산드리아 철학의 인쇄기로부터 갓 나온 새 번역본들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크리스천이 "이 성경 즉 예전에 소실된 고대 유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한 권의 성경인 킹제임스 성경이 완전한 말씀이다"라고 주장하며 그들에게 다가가면 - 사실 그들도 교육을 받기 전에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교육의 혜택으로 인해 이를 빼았겼음 - 그들은 큰 위협을 느끼고, 그를 '광신자'나 '이단 교도'로 몰아 쫓아내려 합니다.
진지한 눈빛으로 그들은 성경의 완전성을 믿는 믿음으로 가득 찬 크리스천에게 최종적으로 의문을 제기합니다.
"당신은 마귀가 이 성경 논쟁을 이용해서 크리스천들을 분열시키고, 주님의 뜻을 훼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이죠"라는 답변을 한 뒤 그는 "그러나 결코 나의 동료들은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있지 않음을 나는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부언:
아직 좀더 생각해 볼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우리의 믿음을 따르게 되면, 목회자는 설교단에 서서 성경을 읽고 앉아 있는 다른 이들도 그와 동일한 성경을 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일치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성경을 수정하고자 하는 자들의 말을 따르게 되면, 모두가 각기 다른 성경을 읽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큰 혼란입니다. 그렇다면 혼란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누구겠습니까?(고전 14:33).
그것은 마귀입니다.
질문 44 [TOP]
▶ 웨스트코트와 호르트는 누구입니까?
☞ 구원받지 못한 성경 비평학자들입니다.
웨스트코트(Brook Foss Westcott, 1825-1903)와 호르트(Fenton John Anthony Hort, 1828-1892)는 거듭나지 않은 성공회 목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성경도 완전하지 않다"는 알렉산드리아 철학에 완전히 심취되어, 킹제임스 성경과 안디옥 계열의 그리스어 본문인 공인본문(the Textus Receptus)에 대해 악의와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불신앙에 대해선 본인의 책 [성경의 뿌리와 역사](도서출판 두루마리 刊, 1999)에서 문서로써 그 증거들을 충분히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행위로든 믿음으로든 사람은 하늘 왕국에 이를 수 없다고 믿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하늘 왕국이 사람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웨스트코트는 공산주의를 신봉했기에, 그 체제를 실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가 '코에노비움(coenobium)'이라고 불렀던 대학 캠퍼스의 공동체 생활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들이 조직하고 '유령 길드'라고 이름 붙인 단체를 통해 그런 일을 많이 시도했습니다. 웨스트코트는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고 장려했을 뿐만 아니라, 둘 다 마리아 숭배자들이었으며 웨스트코트는 심지어 자기의 아내 사라를 '마리아'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호르트는 다윈과 진화론의 숭배자요 옹호자였습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더라도,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안디옥 본문에서 떠나 알렉산드리아의 주술에 빠지게 되었고 또 그들이 1871-1881년의 영어성경 개정위원회를 지도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선정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알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알렉산드리아 사본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그리스어 본문 - 비록 출판하지도 않았고 공인본문보다 훨씬 열등한 것이었지만 - 을 편집한 다음, 그것을 성경 개정위원회 가운데 비밀리에 조금씩 조금씩 반영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권위역성경의 '개정'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영어성경이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최근에 와서야 학자들은 사본 역사에 관한 그들의 불안정한 이론들을 검토하고 그들의 논의가 설득력이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슬프게도, 이 두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기쁨과 평화를 맛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질문 45 [TOP]
▶ 그리스 태생의 학자라면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므로 영어성경을 고칠 수 있는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그리스어와 현재 그리스에서 통용되고 있는 현대 그리스어간에는 서로 호환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영어성경을 정정하기에 더 적합할 것이라는 그릇된 추측은 좋게 말하면 유머가 넘치는 것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인이든 누구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성경을 고치라는 영감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인에게서 그리스어로 무엇을 하라"라는 주장은 그리스인의 책을 팔아주어 그를 부자가 되게 할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질문 46 [TOP]
▶ 럭크만주의자(Ruckmanite)란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 럭크만주의자(Ruckmanite)란 성경 비평학자들이 자기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1921년에 태어난 럭크만(Peter Sturges Ruckman)은 수년 간 성경 필사본의 역사에 대해 공부했고 밥 죤스(Bob Jones)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수십여 개의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직접 세우기도 했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에 있는 펜사콜라 성경학교의 교장이자 설립자이기도 한 그는 수백 명의 설교자와 선교사 그리고 크리스천들을 훈련시켰으며, 또한 40권이 넘는 책과 성경 주해서들을 지었습니다.
그는 의심할 바 없이 이 세대에 킹제임스 성경을 위해 가장 거침없이 말하는 투사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경을 완전하게 보존하지 않으셨다고 가르치는 -시편 12:6,7 말씀에도 불구하고 - 성경 비평학자들이 극히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무기고는 비범한 지력과 성경 필사본에 대한 수년간의 연구 그리고 신랄한 언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분의 강렬한 설교 스타일은 오늘날의 여자같이 소심한 '주의 군사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므로,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와 혹은 그가 제시하는 사실들과의 대립을 회피합니다.
모든 성경 비평학자들은 자기들도 "성경이 실수가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임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집회에 참석한 어떤 사람이 럭크만 박사의 저서들 중에서 한 권을 집어들고 읽고는, 성경의 완전함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정말로 그렇게 믿는 사람간의 차이점을 밝히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은 개인적으로 성경 즉 킹제임스 성경이 절대적이고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순진한 그들은 목사들이 가르치는 '성경 개선' 혹은 '성경 정정'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되었을 때, 자기들의 목사가 자기들을 가리켜 럭크만주의자(Ruckmanite)라고 비난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럭크만(Peter S. Ruckman)박사에 대해 들어본 적조차 없는데도 말이지요.
이같은 공공연하게 럭크만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단순히 자포자기에서 나온 공격전술일 뿐입니다. 크리스천 가운데 어는 누구도 "사람을 추종하는" 죄를 범하길 원치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성경 비평학자들은 만일 성경신자들을 "사람을 추종하는 자들"로 고소할 수만 있다면, 그들이 자기들의 신념을 버리고 겸손히 자기들의 말을 따르리라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전에 나는 자신이 럭크만주의자라고 불릴 것이 때문에 성경신자들과 하나가 되는 것을 거부했던 목회자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나는 어떤 사람도 따르지 않아요"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경건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는 후에 나에게 자신이 칼빈주의자(Calvinist)라고 말하더군요.
따라서 비진리가 난무하는 오늘날에 성경이야말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진실로 믿으며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앙과 신념이 위협을 당하고 있음을 느끼는 사람들에 의해 럭크만주의자로 일컬어 질 수도 있습니다.
질문 47 [TOP]
▶ 그리스어 사본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금덩어리'(Nuggets)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금광 전체를 소유할 수 있는데도 왜 고작 "금덩어리"만으로 만족하려 하십니까?
목회자들이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같은 원어에서 찾아내려 하는 '금덩어리'의 대부분은 사실 그들의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임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성경을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금덩어리'를 찾아내려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동안 그리스어에서 아무도 찾아낸 적이 없는 대단한 것을 하나님께서 자기들만에게 보여주시리라고 믿는 매우 오만한 믿음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금덩어리'를 찾아내게 되면, 그들은 자기들만이 가진 매우 놀랄만한 그리스어에 대한 '실력'으로 동료 목회자나 성도들을 감화시키려고 합니다.
비록 그들이 설교단에 서서 성경을 들고는 "이 성경은 완전합니다."라고 외치지만, 사실 그들은 영어 성경이든 그리스어 성경이든 세상에 있는 성경은 아무 것도 완전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성령님께서 자신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이해하게 도우시도록 갈망하면서 읽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그분께서 그리스어를 좀 더 낫게 번역할 방법을 자신들에게 보여주시기를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시기에 그들은 대개 학교에서 배운 "그리스어 게임"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 게임은 그리스어 정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그리스어 게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우선적으로 거짓 학자나 우쭐대려는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이란 단순히 「스트롱의 성구용어색인」(Strong's Concordance) 이나 혹은 「영의 성구용어색인」(Young's Concordance) 등을 소유하는 일입니다. 이런 "성구용어색인"의 뒤에는 성경에서 사용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목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 단어의 아래에는 그 단어가 「킹제임스 성경」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번역된 예와 목록이 있습니다. 이제 원어에서 '금덩어리'를 캐려고 열심을 내는 학자나 설교자가 해야 할 일이란 단지 거기에서 번역된 영어 용례를 서로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하플로테스'(haplotes)라는 그리스어를 하나 택합시다. 이 단어는 「권위역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방식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리스어 '하플로테스'(haplotes)의 번역 용례
|
구절 |
번역 예 |
1 |
고후9:11 |
Bountifulness(풍부함) |
2 |
고후9:13 |
Liberal(너그러운) |
3 |
고후8:2 |
Liberality(너그러움) |
4 |
롬12:8, 고후1:12 |
Simplicity(단순함) |
5 |
엡6:5, 골3:22 |
Singleness(단일함) |
자, 이제 우리의 열심 있는 학자가 자신의 뛰어난 지성을 과시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하플로테스'가 번역된 다른 구절을 찾는 일입니다. 예를 들기 위해 먼저 에베소서 6장 5절을 택하겠습니다(위 표의 5번 용례).
"종들아, 육체에 따른 너희 상전들에게 두려워하고 떨며 단일한 마음으로(in singleness of heart)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고......"(엡 6:5)
그는 설교 시간에 자신이 미리 준비한 '희생물', 즉 위의 구절에 대해 해석하면서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이 구절을 서투르게 번역했다고 몇 마디 혹평을 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달리 번역될 수 있는 단어들 중 하나를 취해 - 예를 들어 위 표의 3번이나 혹은 4번 - 그 구절에 집어넣습니다. 물론 그런 과정 속에서 「권위역 성경」 번역자들이 원어를 매우 서투르게 번역했다고 여러 차례나 지적하며, 자기가 선택한 단어에 대한 장점들을 장장 10-15분에 걸쳐 상세히 설명합니다. 물론 그가 나중에 로마서 12장 8절의 말씀을 설명할 때는, 즉 같은 그리스어가 위 표의 4번처럼 "단순함"(Simplicity)으로 번역된 곳에서는, 역으로 5번을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장점에 대해 설명할 것입니다.
7"혹 권면하는 자는 권면하는 일로 하고, 주는 자는 단순함으로(Simplicity),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12:8)
물론 이 때에도 그는 다시 한 번 하나님 말씀의 번역자들이 이 구절을 서투르게 번역했다고 혹독하게 그들을 비난하겠지요. 그런데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의 말을 듣는 청중들은 이 일이 이처럼 손쉽게 이루어진 줄도 모르고, 그의 지성과 그리스어에 대한 놀라운 이해력으로 인해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를 쳐다봅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의 오류를 지적해 줄 재능 있는 목회자나 교수를 만난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느낍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얄팍한 '그리스어 속임수'에 걸려 넘어가게 되고, 결국은 자신들같이 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설교자가 소유한 그리스어에 관련된 도구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존경받을만한 자신들의 스승만큼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나리오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가 직접 경험했으니까요. 자칭 성경학자라 하는 사람이 설교하는 것을 들으면서 저는 그가 너무도 쉽게 청중을 속이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로마서 8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한 절을 읽으며 그는 어떤 특별한 단어에 가서는 멈추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를 오역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선택한 단어의 장점에 대해 10-12분 동안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중들은 어리석게도 이 사람의 "원어 실력"으로 인해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저는 "설교 경연대회"에서 14살 짜리 소년이 그같은 일을 하는 것을 본적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런 일은 사실 15불 짜리 성구용어색인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저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또 다른 사람의 설교를 듣게되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열심 있는 설교자 역시 로마서 8장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도 같은 절을 읽고는, 그 전날 다른 전문가가 끄집어냈던 똑같은 단어에 가서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슬프게도,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를 적절하게 번역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가 전날 저녁에 제가 들은 바 있는 그 설명을 재탕하는가 보려고 재빨리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똑같지는 않더군요. 이 유별난 학자는 문제시되는 단어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번역되어야만 한다고 지적했으니까요.
그런 후에 그는 전날 저녁의 판매원처럼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선택한 단어나 혹은 전날 저녁 제가 들은 바 있는 그 전문가가 선택한 단어보다 자신이 선택한 단어가 갖는 장점들에 대해 장황히 설명했습니다. 저는 참으로 놀랐습니다! 두 명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전혀 다른 두 개의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이 유일하게 일치한 점은 아마도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오역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존경받는 견해를 재빨리 학문 쓰레기 더미 위로 내던져 버리고, 하나님께서 1611년에 선택하사 자신의 책에 기록하신 단어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원어에서 '금덩어리'를 찾는 두 번째 방법은 그리스어에 대해 이해력이 부족한 사람이 위와 같은 일을 할 때에 줄곧 사용하곤 하는 방법인데, 이 경우에 그들은 "성구용어색인" 대신에 "그리스어 사전"에서 단어를 선택합니다. 이 경우에도 결과는 항상 동일하여 「킹제임스 성경」은 오역 투성이로 매도당하고, 청중들은 설교자의 원어 실력의 깊이에 압도당합니다. 그들은 성경교사들의 그리스어 실력과 겨루어 보려고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성경에 대한 이해력이 그보다 훨씬 못하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세 번째 형태의 '금덩어리'는 원어 성경학자들이 만들어낸 완전한 허위 진술에서 발견됩니다. 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예로 그리스어 '아가페'(agape)와 '필레오'(phileo)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킹제임스 성경」 요한복음 21장 15-17에서 모두 '사랑'(lov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15 "그들이 식사를 한 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말씀드리되, 예, 주님,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되, 내 어린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6 다시 두 번째 말씀하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가 말씀드리되, 예, 주님,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하시고,
17 세 번째 말씀하시되,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그분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말씀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이 되어 말씀드리되, 주님,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오니,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 양들을 먹이라."
웬만큼 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이라면 아마도 거짓 학자들이 이 구절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한두 번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어에서 '아가페'(agape)라는 단어가 "깊고 은밀하며 자기를 돌보지 않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필레오'(phileo)라는 단어는 "일상적인 친구 사이의 사랑"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뒤 우리의 설교자는 영어 단어(혹은 한국어 단어)의 제한된 표현에 대해 거의 눈물을 자아낼 정도로 한탄을 하며 자기의 주장을 폅니다. 다시 말해 영어로는 이 구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주님께서 사실은 이렇게 물어 보신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아가페'(agape, 즉 깊고 은밀하며 자기를 돌보지 않는 사랑)로 사랑하느냐?"
이에 대해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이들은 주장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phileo, 즉 일상적인 친구간의 사랑)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 뒤 원어 성경 추종자들은, 주님께서 원하시던 대답을 듣지 못하셨기에 베드로에게 다시 물어보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아가페'(agape)로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그런 깊은 관계에 자신을 맡기기를 꺼려했기 때문에, 다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phileo)로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이쯤에서 우리의 성경 교정자는 큰 슬픔에 잠기신 주님께서 베드로의 헌신이 부족함을 이해하시고는, '아가페' 대신 '필레오'라는 그리스어 단어로 질문을 바꾸셨다고 말합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필레오'(phileo)로 사랑하느냐?"
그러자 이같이 갑작스런 변화에 베드로는 깜짝 놀라 자신이 주님께 영적으로 성실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설교자는 자신 있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슬픔에 잠긴 베드로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주님을 '필레오'(phileo)로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우리의 거짓 교사는 이 구절의 깊은 뜻을 의미가 빈약한 영어나 한국어를 사용해서는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다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또 다시 저 신뢰할만한 '그리스어'는 영어나 한국어가 전달해 줄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게됩니다!
참으로 위의 예는 '원어 찬양'을 하는데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그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하나의 큰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단점이란 다름이 아니라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위의 정의가 사실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이제부터 저는 저의 선입견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견해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아가페'와 '필레오'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경 기자들이 신앙과 행위의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에서 사용한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세밀하고 정직한 연구에 근거하여 사실을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이야기인즉 이렇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아가페'와 '필레오'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없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이 두 단어를 늘 바꾸어가며 사용하곤 했습니다. 그리스어 문법책이나 그리스어 교사들 그리고 그리스어 설교자들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속한 신학대학의 교수나 혹은 목사가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해 잘못 가르쳐서 여러분이 이같은 속임수에 빠지게 되었다면, 즉시 여러분의 선입견을 가지고 저의 주장을 반박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렇게 경건하고 지식이 많은 교수들이 틀릴 수 있겠는가?"
저는 이 사실을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겠습니다. 모든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 바울,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제가 대조를 위해 택할 수 있었던 신약성경의 다른 기자들로부터 나올 테니까요. 그러나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결코 그들만이 저를 지지하는 최후의 증인들은 아닙니다. 최종적이고도 가장 확실하게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분은 바로 독자 여러분입니다.
수년 동안 저는 제가 말씀을 전하는 성경 사경회에서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거짓 가르침에 관하여 성도님들에게 한 가지 시험을 치르게 했습니다. 그 시험지는 다음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용기가 있다면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과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다면, 자유롭게 그 시험 문제에 대답을 해 보십시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이제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1부에서는, 신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가페'와 '필레오'를 사용하신 용례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리스어 신약성경」이나 「스트롱의 성구용어색인」혹은 기타 다른 어떤 도움에 의지하지 마시고, 단지 영어 성경 비평학자들이 제시한 '아가페'와 '필레오'에 대한 정의를 사용하십시오. 자 이제 인용문을 읽으십시오. 그 뒤 예수님께서 그 구절에서 '아가페'를 말씀하셨을지 혹은 '필레오'를 말씀하셨을지 깊이 생각해 보시고 결정을 내리십시오. 그런 다음 '아가페'라고 생각되면 'A'를, '필레오'라고 생각되면 'P'를 인용 구절 옆에 있는 공란에 적어 넣으십시오.
제2부도 제1부와 동일한데, 단지 신약성경의 다른 기자들이 기록한 용례들을 사용했다는 것만 다릅니다. 제1부와 마찬가지로 '아가페'에 해당되면 'A'를, '필레오'에 해당되면 'P'를 적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단지 원어 성경학자들이 이 단어에 내린 정의를 사용해서 시험을 치러야만 합니다. 결코 추측으로나 예감으로도 하지 말고 그들의 정의를 따라 시험 문제에 정직하게 답을 적으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끝마쳤으면, 이 글의 뒤에 있는 해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시험 방법:
1. 인용된 성경구절을 읽으십시오.
2. '아가페'(agape)와 '필레오'(phileo)를 선택하시고 인용문 뒤의 괄호 안에 'A' 혹은 'P'를 적어 넣으십시오. 여러분이 배워온 대로 하시면 됩니다.
원어성경학자들이 내린 단어의 정의
♥ 아가페적 사랑: 깊고 친밀하며 자기를 돌보지 않는 사랑
♥ 필레오적 사랑: 일상적인 친구간의 사랑 |
제1부 : 예수님께서는 아가페와 필레오를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
구 절 |
번 역 |
대 답 |
1 |
눅11:42 |
하나님의 사랑은 간과함이로다. |
|
2 |
요5:42 |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 안에 없음을 아노라. |
|
3 |
마10:37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
|
4 |
계3:9 |
내가 너를 사랑한 줄을 알게 하리라. |
|
5 |
계3:19 |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고 |
|
6 |
마23:6 |
연회장에서 가장 윗자리를 사랑하고 |
|
7 |
요12:25 |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 |
|
8 |
눅11:43 |
높은 자리를 사랑하는 너희 바리새인들아 |
|
9 |
요5:20 |
아버님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
|
10 |
요16:27 |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
|
제2부: 신약성경의 다른 기자들은 아가페와 필레오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
구 절 |
번 역 |
대 답 |
1 |
딤후3:4 |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
|
2 |
요11:5 |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사랑하시더니 |
|
3 |
요20:2 |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 |
|
4 |
고전16:22 |
만일 누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
|
5 |
롬5:8 |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느니라. |
|
6 |
고전16:24 |
나의 사랑이 너의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
|
7 |
딤후1:7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권능의 영과 사랑의 영과 |
|
8 |
롬12:10 |
형제 사랑으로 서로 애정을 가지고 |
|
9 |
살전3:12 |
서로를 향하여 사랑이 많아지고 |
|
10 |
딛2:4 |
여자들이 자기 남편들을 사랑하며 |
|
11 |
엡5:28 |
남자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
|
12 |
벧전2:17 |
형제를 사랑하며 |
|
13 |
히13:1 |
형제 사랑을 계속하자 |
|
14 |
딛3:4 |
우리 구주 하나님의 사랑과 |
|
15 |
요일2:5 |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안에서 완전케 되나니 |
|
여러분이 이 시험을 정직하게 치렀다면, 스스로 머리 좋다고 교만하게 생각하는 성경비평학자들이 우리에게 속임수로 팔아먹은 거짓말을 예수님도 신약성경의 기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금방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원어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작은 금덩어리'가 사실은 '금덩어리'가 아니라 '놋덩어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기만당한 사람들 마음 속 외에는 이런 '금덩어리'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누구를 믿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그리스어 교수입니까?
이제 이 글을 끝내기 전에 한 가지 분명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요지는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이 번역한 것을 틀리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음을 보여주려 함이었으며, 결코 「그리스어 신약성경」이나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어로 된 필사본이 있었기에 「킹제임스 성경」이 나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사실이며, 따라서 원어를 무시한다는 것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어로 된 필사본이나 성경을 최종 권위로 믿지 않고, 영어로 된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 권위로 믿습니다. 물론 이 글을 처음 대하는 독자께서는 이같은 진술에 대해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간단하게 몇 가지 예를 들어가며 우리가 말하는 바 최종 권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대개 중학교에서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다 아시는 일이겠지만 사실 영어 사전을 펴보면 어떤 단어든지 한 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보통 대 여섯 개, 많은 경우는 열 개가 넘는 때도 있습니다. 원어 역시 마찬가지로 한 단어가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어떤 원어 단어가 주어졌을 때 그 단어의 여러 가지 뜻 가운데서 과연 어느 것이 그 문장에 맞는지 누가 결정할 수 있을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결코 원어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특정한 원어 단어를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저희가 말하려는 바 최종 권위의 문제인 것입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한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신학이 달라지고, 심지어 이단 교리가 생기기도 합니다.
최근 들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알렉산드리아 본문이 전적으로 부패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입증되면서, 「그리스어 공인본문」(TR)을 최종 권위로 삼으려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우리는 이렇게 믿는 분들을 "TR 주의자"라고 부릅니다. "TR 주의자"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올바른 본문으로부터 나왔으므로 가장 좋은 영어 성경이라고 분명히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킹제임스 성경」이 번역본이므로 결코 최종 권위가 될 수 없으며, 「TR」만이 최종 권위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주장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타협적인 입장에 불과한데, 그 이유는 이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면 성경 말씀이 성도들의 최종 권위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어 학자들이 최종 권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공인본문」 즉 'TR' 안에 있다면, 도대체 누가 어떤 특정한 그리스어 단어를 무엇으로 번역할지를 결정한단 말입니까? 예를 들어, 그리스어 '하데스'(Hades)라는 단어를 살펴봅시다. 이 단어는 "죽은 자가 가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죽은 자의 몸이 가는 곳을 의미할 때는 '무덤'(Grave)으로, 믿지 않고 죽은 자의 혼이 가는 곳을 의미할 때는 '지옥'(Hell)으로 번역됩니다. 이 특정한 단어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에서 모두 11번 쓰였으며, 「킹제임스 성경」은 그 중 10번을 '지옥'(Hell)으로 그리고 나머지 1번은 '무덤'(Grave)으로 번역했습니다.
어떤 이가 "TR 주의자"라면(혹은 그리스어 학자라면),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하데스'를 번역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 자신이 성경의 최종 권위가 되어 그 중 6번은 '지옥'으로 5번은 '무덤'으로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 권위로 믿을 때는, 이미 '하데스'라는 단어를 하나님께서 10번은 '지옥'으로, 그리고 나머지 1번은 '무덤'으로 확정해 주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하데스'의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최종 권위라고 믿는 믿음의 전부입니다.
이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분명히 원어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필사본의 중요성을 인정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올바른 그리스어 및 히브리 본문을 사용했다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번역 작업 속에서 원어 성경 외에도 '라틴 역본', '시리아 역본', 그리고 이전의 영어 역본 등도 부지런히 비교하고 검토했습니다. 만일 독자께서 여러 종류의 「TR」들간에 서로 차이나는 부분들을 다 모은다면, 그 양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TR」을 완전한 성경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TR」이 단지 신약성경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성경 번역자가 특정한 원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는가에 따라 그 내용이 매우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번 원어 성경이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될 수 없음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다음의 유명한 전도서 구절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1:14, 「한글개역성경」)
이 구절 외에도 전도서에는 '바람을 잡는다'는 표현이 9번이나 더 나옵니다(전1:17, 2:11, 2:17, 2:22, 2:26, 4:4, 4:6, 4:16, 6:9). 이 구절의 '바람'에 해당하는 원어는 '루아흐'로서, 이 단어는 '바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 사람의 '영', 사람의 '호흡' 등을 표현하는데도 사용되었습니다. 즉 이 단어는 '바람'으로도 해석이 되고 '영'으로도 해석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대부분의 현대 역본들이 위의 전도서 구절을 다 '바람을 잡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은 이 구절을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번역했다는 사실입니다.
원어는 동일하므로 이같은 차이가 생긴데 대해 원어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이 예를 통해 다만 저는 성경 번역자가 같은 단어를 문맥에 따라 어떻게 번역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자 그렇다면 전도서의 문맥상 어느 번역이 맞을까요? 저희는 전도서 기자가 말하려는 요점이,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이 번역한 대로,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어 우리의 영을 괴롭게 하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결국 전도서 기자는 끝장인 12장 13절에서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즉, 이 모든 것이 영의 문제지 결코 바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는 이런 번역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주는 번역이라고 믿으며, 이런 의미에서 「킹제임스 성경」이 우리의 최종 권위라고 담대히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15-17
아가페(AGAPE) 對 필레오(PHILEO)에 대한 답 |
제1부 : 예수님께서는 아가페와 필레오를 어떻게 사용하셨는가?
|
구 절 |
번 역 |
해 답 |
1 |
눅11:42 |
하나님의 사랑은 간과함이로다. |
A |
2 |
요5:42 |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 안에 없음을 아노라. |
A |
3 |
마10:37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
P |
4 |
계3:9 |
내가 너를 사랑한 줄을 알게 하리라. |
A |
5 |
계3:19 |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고 |
P |
6 |
마23:6 |
연회장에서 가장 윗자리를 사랑하고 |
P |
7 |
요12:25 |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 |
P |
8 |
눅11:43 |
높은 자리를 사랑하는 너희 바리새인들아 |
A |
9 |
요5:20 |
아버님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
P |
10 |
요16:27 |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
P |
제2부: 신약성경의 다른 기자들은 아가페와 필레오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
구 절 |
번 역 |
해 답 |
1 |
딤후3:4 |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
P |
2 |
요11:5 |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사랑하시더니 |
A |
3 |
요20:2 |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 |
P |
4 |
고전16:22 |
만일 누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
P |
5 |
롬5:8 |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시느니라. |
A |
6 |
고전16:24 |
나의 사랑이 너의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 |
A |
7 |
딤후1:7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권능의 영과 사랑의 영과 |
A |
8 |
롬12:10 |
형제 사랑으로 서로 애정을 가지고 |
P |
9 |
살전3:12 |
서로를 향하여 사랑이 많아지고 |
A |
10 |
딛2:4 |
여자들이 자기 남편들을 사랑하며 |
P |
11 |
엡5:28 |
남자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
A |
12 |
벧전2:17 |
형제를 사랑하며 |
A |
13 |
히13:1 |
형제 사랑을 계속하자 |
P |
14 |
딛3:4 |
우리 구주 하나님의 사랑과 |
P |
15 |
요일2:5 |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안에서 완전케 되나니 |
A |
질문 48 [TOP]
▶ 공인본문(The Textus Receptus)은 1633년에 가서야 등장했는데, 1611년에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이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번역될 수 있습니까?
☞ 잘못 알고 계신 것입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에 사용되었던 그리스어 본문은 역사를 거슬러 모세, 다윗, 바울, 요한 그리고 다른 영감받은 저자들까지 그 범위가 확장됩니다. 역사를 통해 그것은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수년 간 신약 성경의 그리스어 본문은 상당수의 서로 다른 편집자들에 의해 조합되었습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들은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로버트 스테파누스(Robert Stephanus)와 엘지버 형제(the Elzevir Brothers), 아브라함과 보나벤쳐(Abraham and Bonaventure) 등 입니다.
에라스무스는 다섯 가지 판의 신약 성경을 출판했습니다. 1516년의 첫판에 이어, 마르틴 루터가 그의 역사적이고, 매우 중요한 독일어 번역판에 사용했던 1519년 판이 나왔습니다. 그의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판은 1522년, 1527년 그리고 1535년에 나왔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작품은 훌륭했고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모범이 되었습니다.
로버트 스테파누스는 1546년, 1549년, 1550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1551년에 걸쳐 네 개의 판을 내었습니다. 데오도르 베자도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여러 판 출판했으며, 1565년, 1582년, 1588년, 그리고 1598년에 각각 하나씩 모두 네 개의 판을 출판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2절판으로 인쇄되었는데, 그것은 종이 한 장을 접어 4 페이지 분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또한 1565년, 1567년, 1580년, 1590년, 그리고 1604년에 다섯 개의 8절판 책을 출판했습니다. "8절판"이란 종이 한 장이 여덟 개의 다른 페이지를 갖도록 인쇄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식으로 인쇄된 책들은 2절판 책들보다는 지면의 크기가 더 작아지는 경향은 있었으나, 때로는 두 권 혹은 그 이상의 권수로 작품을 인쇄해야만 했습니다. 1598년의 베자 판과 1550년, 1551년의 스테파누스 판은 킹제임스 번역자들에 의해 주요한 출전으로 사용되어졌습니다. 몇년 후에 엘지버 형제가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1624년, 1633년, 그리고 1641년에 출판했습니다. 그들은 에라스무스의 표준을 따랐던 베자의 판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그들은 1633년 판 서문에다 지금까지의 본문들을 개선한 명성 만큼이나 유명한 문구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 문구는 라틴어로 "textum ergo habes, nunc ab omnibus receptum..."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수용된(Received) 책으로부터 입수한 본문에 따르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공인본문("Received Text" 혹은 "Textus Receptus")이라는 제목이 탄생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이 비록 권위역 성경이 번역된 지 22년 후에 만들어진 이름이라 하더라도, 그 공인본문이 안디옥에 기원을 둔 진정한 그리스어 본문과 같은 뜻의 말이 된다고 봅니다.
성경 본문의 명칭들 |
안디옥 계열 |
알렉산드리아 계열 |
안디옥 본문(Antiochian Text)
비잔틴 본문(Byzantine Text)
시리아 본문(Syrian Text)
다수 본문(Majority Text)
보편적 본문(Universal Text)
종교개혁 본문(Reformation Text)
황제 본문(Imperial Text)
전통본문(Traditional Text)
공인본문(Textus Receptus)
|
알렉산드리아 본문(Alexandrian Text)
이집트 본문(Egyptian Text)
국지적 본문(Local Text)
헤시키안 본문(Hesychian Text)
소수 본문(Minority Text)
|
질문 49 [TOP]
▶ '공인본문주의자'(TR Man)와 '킹제임스성경주의자'(KJV Man)는 어떻게 다른가요?
☞ 'TR 주의자'는 안디옥으로부터는 필사본들을, 이집트로부터는 철학을 따온 사람입니다.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에 관한 질문 8에서 이 지역들로부터 각각 두 가지 사실을 끌어낼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지역성을 통해 우리는 필사본들을 유도해냈고, 그런 필사본들을 판단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도출해 냈습니다.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오리겐의 비평의 손길에 의해 더렵혀진 변개된 사본들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성경은 거룩하나, 완전치는 않으며 실수가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얻습니다.
안디옥으로부터 우리는 공인본문(Received Text 혹은 Textus Receptus)으로 승화되어 최고조에 이른 사본들의 순수 노선을 얻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은 거룩할 뿐 아니라 완전하며 실수가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얻습니다.
1. 대부분의 성경 비평학자들은 성경이 완전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알렉산드리아의 이데올로기). 또한 그들은 대개 안디옥 사본보다 알렉산드리아 사본이 더 우수하다고 주장합니다.
2. 킹제임스 성경 신자는 안디옥의 사본들 혹은 공인본문(TR)을 알렉산드리 사본보다 훨씬 더 우수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절대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 어떠한 실수(error)나 오역(mistranslations)도 없으며 개선되어질 수도 없다는 안디옥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입니다.
3. 'TR 주의자' 또한 안디옥 사본들이나 공인본문을 알렉산드리아 사본보다 우수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TR 주의자'는 안디옥 사본들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이데올로기를 취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떤 번역본에 대해서도 '실수가 없는 완전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개 그는 킹제임스 성경이 가장 좋은 번역본이지만, 그것도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일반적으로 사도행전 12:4에 부딪히게 되고, 그것이 오역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가당착은 부정직하고 좋지 못한 마음의 결과라기보다는 그릇된 교육의 결과입니다. 대부분의 'TR 주의자들'은 알렉산드리아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중에 받아들이도록 속아온 다른 사람들로부터 교육을 받아 왔습니다.
아래 편지는 역자가 과거 미국의 펜사콜라 성경침례교회의 도너반 목사님께 공인본문주의와 킹제임스성경주의의 차이점에 대해 질문했을 때 받은 답변편지로서,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리라 사료되어 번역 게재한 것입니다.
형제님께
저는 그리스어 공인본문(Textus Receptus, TR)과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차이를 묻는 형제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리 펜사콜라 성경침례교회(피터 럭크만 목사 시무)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TR주의자'가 아닌데, 본 편지에서는 그 중 몇 가지 이유만을 설명 드리려 합니다. 최근 들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알렉산드리아 본문이 전적으로 부패된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입증되면서, TR을 표준으로 삼으려는 운동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타협적인 입장에 불과한 것은, 그같은 입장은 권위의 문제를 성경책이 아닌 사람에게 두게끔 만드는 결과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어떤 이가 TR주의를 취한다면, 그는 킹제임스 성경이 올바른 본문으로부터 나왔으므로 가장 좋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은 강조점과 최종권위를 그 특정한 그리스어 본문에 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하게 되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에 있느냐는 처음 질문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TR 안에 있다면, 도대체 누가 어떤 특정한 그리스어 단어를 무엇으로 번역할지를 결정한단 말입니까? 예를 들어, 그리스어인 '하데스'(Hades)는 신약 성경에서 11번 쓰였는데, KJB에서는 그 중 10번이 '지옥'(Hell)으로,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은 '무덤'(Grave)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는 KJB이 최종권위라는 사실과 KJV이 이미 그 단어가 어떻게 번역되어야만 하는가를 결론지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가 TR주의자라면, 그는 '하데스'의 번역을 자기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즉 그 사람 자신이 성경의 최종권위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KJB의 번역자들이 올바른 그리스어 본문을 사용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작업 속에서 그것 외에도 라틴역, 시리아역, 영어역 등도 사용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러 종류의 TR들간에 서로 차이나는 부분들을 다 모은다면, 그것들이 1611년 이후에 재쇄되어 온 KJB들의 차이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완전한 성경인 KJB을 보존하는 과정에서 그리스어 절충 본문을 사용하셨다고 믿습니다. 당신이 또한 'TR'을 완전한 성경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는 'TR'이 단지 신약 성경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TR'은 여러 종류의 그리스어 사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핫지스(Hodges), 웨이트(Waite), 버건(Burgon)과같은 사람들은 'TR'주의를 취하지만, 우리는 KJB 영어성경주의를 취합니다. 앞으로 영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TR 등으로부터 나오게 될 한국의 성경은 KJB의 역자들이 그들의 작업 속에서 행했던 것과 비슷하게 되리라 사료되며, 나는 그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TR',과 'KJB'의 차이점에 대한 설명을 대신하려 합니다.
1994년 4월 7일
미국 펜사콜라 성경 침례교회
브라이언 도너반(Brian Donovan) 목사
질문 50 [TOP]
▶ 킹제임스 번역자들이 성공회의 유아 세례자들과 한 패거리일 뿐이라는 게 사실입니까?
☞ 아닙니다.
권위역 성경을 번역했던 모임의 사람들은 성공회와 청교도 교회 출신의 성경신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들의 인품과 능력은 일찌기 위에서 증명한 바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단지 성공회의 유아세례를 주는 자들과 한 패거리였다."는 말은 애석하게도 사실무근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인신공격이며, 궁극적으로는 신자들의 마음속에서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를 빼앗아가려는 바람 때문에 생겨난 말입니다.
이쯤에서 킹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이 그렇지 않았음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들은 다윗처럼 간음한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다윗처럼 살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열왕기상 11장에 나오는 솔로몬처럼 그들 자녀를 그모스와 몰록에게 제물로 바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처럼 주님을 격렬히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같은 단점들은 위에 언급한 성경기자들 중 어느 누구에게 무례하게 행하려고 지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기로 선택하신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있어 우리가 좀더 은혜로워야겠다는 것을 말하려고 지적했을 뿐입니다.
질문 51 [TOP]
▶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믿는 것은 내 '모교'가 택한 입장과 상반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여러분은 "충성의 우선 순위"에 있어서, 여러분의 학교보다도 당연히 우위에 있어야 할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먼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서 여러분은 모교(Alma Mater)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교라는 단어는 "처녀"라는 뜻의 히브리어 "almah"와 "어머니"라는 뜻의 그리스어 "meter"의 조합어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Alma Mater"라고 하면 그건 "처녀 어머니(처녀)"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 용어는 명백히 말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처녀 어머니"(Virgin Mother)를 가졌다고 외치며 다니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가 다녔던 대학" 혹은 단지 "나의 학교"라는 좀 더 긴 표현을 쓰는 편이 예수 그리스도께 좀 더 많은 존경심을 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학교가 여러분을 교육시키기 위해 겪었을 시간, 노고, 노력에 감사해야 합니다. 교육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여러분을 위해서 한 일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감사"를 고려한다 해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은혜를 입은 것만큼 여러분의 영혼이 대학에 은혜를 입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일단 졸업한 뒤에도 자신의 확신에 통제를 받을 정도의 굴욕적인 태도로 학교에 대해 "영원토록 감사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위협하여 "대학교 방침대로 끌고"가려고 압력을 가하기 위해 마련된, 대학 학장으로부터 온 "친애하는 청년 목회자에게"라는 편지에 대해 3종 우편물 이상의 비중을 두어선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지속적으로 여러분에게 "우리가 너를 위해 한 모든 일"을 자꾸만 상기시키려 하는 학교는 여러분의 자유함이 아니라 구속됨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요구나 주장하는 바를 "정중히" 무시해 버리는 데 대해 전혀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여러분이 학비, 방과 후 식사, 그리고 교육에 관련된 다른 경비들을 자비로 지불하는 학교에 다녔다면, 소위 말하는 여러분 학교에 대한 "빚"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학교와 지도자들의 "희생, 선견지명, 헌신 등등"에 전심으로 감사할 수는 있겠으나, 여러분의 빚은 여러분이 마지막 학비를 냈을 때 끝났습니다. 여러분이 받은 학위는 그들이 자선을 베풀기 위한 선물로서 여러분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희생, 선견지명, 그리고 헌신"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분의 학구적인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며, 현금에 의해 지불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학교는 그것이 "멋진" 행위가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학위를 수여하진 않았습니다. 그들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에, 여러분에게 학위를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원했던 요구들을 채워주면서 그것을 벌어들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폐를 지불한 것을 포함해서(어떤 경우에는 이자까지 더하여).
그래서 만약 여러분의 학교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완전한 성경을 여러분이 찾았지만, 여러분의 학교나 "동창생"(그리스어 alumni-"개화된 사람들"?)과 불화하게 될까 두려워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진 "빚"은 진짜이지만, 여러분이 학교에 진 "빚"은 단지 상상에 지나지 않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느 쪽과 불화하는 게 더 좋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학교입니까? 그들이 동시에 같을 수는 없습니다.
질문 52 [TOP]
▶ 킹제임스 성경이 원본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고 믿는 것은 '진보적 계시'가 아닙니까?
☞ 아닙니다.
'진보적 계시'(Progressive Revelation)란 용어는 성경 비평학자들이 성경신자들을 위협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도록 하는 데 사용하는 전략에서 나온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영감은 자필원본에서 끝이 났다. 따라서 단순한 번역이 자필원본보다 더 많은 것을 알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새로운'계시 즉 '진보적 계시'를 믿는 것이다."
과연 "진보적 계시"라는 것이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편견, 견해 혹은 "신념"의 비중을 갖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최종 권위"만이 무엇이 믿기에 적당하고 적당치 않은지를 공적으로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명백한 질문은 이렇습니다: "성경에 '진보적 계시'에 대한 예가 있습니까?"
"최소한 두 군데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 줄 것을 요구하기 위해 바로 앞으로 갑니다. 그는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대표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표적과 기적을 행합니다. 경쟁의 초기에는 바로의 마술사들고 모세와 "기적 대 기적"으로 겨루기 위해 노력합니다(출애굽기 7:11,12,22 과 8:7). 우리는 바로의 주요한 두 명의 술객들이 얀네(Jannes)와 얌브레(Jambres)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명의 이름은 출애굽기의 마흔 여덟 장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구약의 서른 아홉 권 중 어디에도 그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실 그들의 이름은 14 세기가 지난 후에야 '드러납니다'("계시",딤후 3:8). 우리가 그것을 "진보적 계시"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음은 열왕기상 17장 1절을 보도록 합시다. 이 구약 성경의 구절에서, 우리는 엘리야 선지자가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이슬이나 비가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열왕기상 18장 41절에 보면 "자기의 말에 따라" 엘리야는 이스라엘에서 삼년 반 동안의 가뭄을 거두었습니다. 잠깐만요. 제가 "삼년 반"의 가뭄이라고 했습니까? 그런데 열왕기상에는 어느 곳에서도 그 가뭄의 기간에 대해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4장 25절에서 "삼년 육개월"이라고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엘리야의 가뭄이 얼마나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삼년 육개월"이란 정보는 야고보서 5:17에서도 반복됩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한 사건의 일부가 구약에서 기록되고, 그 나머지가 수 세기가 지난 후 신약에서 드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소 "진보적"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성경 비평학자들의 이번 주장만큼은 참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이 난 김에 만일 여러분이 출애굽기 17장 6절에서 모세가 내리친 반석이 어떤 종류인지 알고 싶다면, 출애굽기에서 답을 찾지 말고 시편 114편을 읽으십시오.
질문 53 [TOP]
▶ 저는 킹제임스 성경을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믿는 것이 "역사에 근거를 둔 입장"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 "역사에 근거를 둔" 견해는 성경을 절대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변개하려 드는 자를 보고 슬퍼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신들만이 "진정한" 교회라고 주장하는 데 사용하는 논의들 중 하나는 "전통"에 대한 권위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전통을 성경과 동일시합니다. 이것은 1545년에 트렌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로마 카톨릭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이 공의회에서 전통은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 위치로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공회는 그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공식적으로 저주했습니다.
불행히도 "근본주의" 성경 정정가들은 전통의 "권위"에 의지하려는 로마 카톨릭 교호의 고유한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너무나 이상하게도 그들은 똑같은 이유 즉 성경으로부터 권위를 빼앗으려는 이유로 그러한 일을 합니다. 물론 근본주의 성경 정정가는 자기가 설교단에서 "전통"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 자기 회중들의 머리 속에서 "경종"이 울리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통"이라고 말하는 대신 "역사에 바탕을 둔 근본주의적 견해란..."이라고 말하며 자기의 청중들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역사적 견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물론 전통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누군가가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임을 믿는 것은 역사에 바탕을 둔 근본주의적 견해가 아닙니다."라는 연약한 논조로 이야기하는 것을 듣게 될 때 경계하십시오! 여러분은 영적으로 로마 카톨릭 성향을 띤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수 없다면, 여러분이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 그가 여러분을 저주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십시오.
질문 54 [TOP]
▶ 우리는 역본 문제를 거론해야만 합니까?
☞ 여러분이 그 문제에서 무엇인가를 믿는다면 해야합니다.
설교를 통해 진정으로 완전한 성경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하여 듣게 될 때 많은 크리스천들은 "난 역본 문제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뒤로 숨고는 경건한 척하며 이 문제를 회피하려 합니다.
여러분이 시종일관 여러분의 견해를 똑같이 유지한다면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즉, 완전한 성경의 존재 여부에 관한 문제가 여러분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분에게는 다음의 어떤 사항도 문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사 7:14 ).
2.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요일 5:5).
3. 예수 그리스도의 죄를 대속하신 죽음(롬 5:8).
4.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가지신 부활(고전 15:4).
5. 행위가 아닌 단지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엡 2:8,9).
6. 예수 그리스도의 전천년적 재림(살전 4).
7. 문자 그대로의 하늘왕국의 존재(요 3:13).
8. 문자 그대로의 지옥의 존재(마 9:42-44).
9.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의 인정(창 1:1).
이것은 결코 자칭 "근본주의자들"이 붙잡고 있는 확신들을 정리한 목록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성경으로부터 취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사려 깊고 이성적인 사람이 성경으로부터 도출된 것은 문제삼으면서, 그 모든 문제의 출발점이 되는 성경의 완전성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만약 성경이 그 안에 오류를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확신의 바탕이 되는 이런 구절들이 옳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혹자는 "나는 정확하게 번역된 성경이라면 인정한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좋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몰몬교도도 믿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번역된"성경이 어디에 있는지 판결을 내릴 자가 누구입니까?
성경 자체에 대해선 "문제"삼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으로부터 나온 교리를 "문제"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근본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됨으로 발생하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친구, 가족, 그리고 동료들의 거부반응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여러분은 얼마만큼이나 담대하십니까?
질문 55 [TOP]
▶ 성경문제를 논할 때 "박사들"의 학식을 존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 그들이 그들의 학위에 걸맞는 교육을 받았다면, 그래야겠지요.
오늘날 교회는 "박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박사들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이 편찮으시다"라는 농담이 들립니다. 박사 학위에는 단 두 종류가 있습니다. 취득학위와 명예학위가 그것입니다. 취득학위(an earned doctorate)는 교육상의 학위입니다. 그것은 단과대학 혹은 종합대학에서 그러한 학위를 따기 위해 학교의 요구 사항들을 모두 채운 졸업자에게 수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학문 분야의 성취를 뜻하며 그 졸업자가 그 지식의 폭넓은 분야에 정통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취득 학위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M.D. Doctor of Medicine(의학박사)
Ph.D. Doctor of Philosophy(철학박사)
Th.D. Doctor of Theology(신학박사)
Ed.D. Doctor of Education(교육학 박사)
명예 학위는 말 그대로 대학에 대해 봉사 활동이나 혹은 괄목할 기여를 한 남녀에게 그 명예를 기리기 위한 방도로써 수여하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명예학위가 그 학위 수여자를 그 분야에서 즉석으로 전문가로 만드는 것은 아님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명예 학위를 받은 사람이 받기 전보다 성경 사본들에 관하여 더 많이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명예일 뿐이지 학구적인 학위는 아닌 것입니다. "명예 학위"를 가진 외과 의사에게 수술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 문제들에 관한 명예 학위 소유자들의 의견은 취득 학위를 가진 사람의 연구결과를 능가하지 못할 것입니다. 혹은 학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중에 유용한 증거들을 모두 철저히 연구한 이들도 있습니다.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명예학위는 태권도의 "명예 검정띠"와도 같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집안에서는 차고 다닐 수 있지만 실제로 도둑과 싸우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죽게 될는지도 모르지요. 다음은 몇 개의 명예학위들 명단입니다.
D.D.Doctor of Divinity (신학박사, 위의 Doctor of Theology와는 다름)
D.MusDoctor of Music (음악박사)
D.Sc.Doctor of Science (이학박사)
L.H.D.Doctor of Human Letters(인문학박사)
Lit.D.Doctor of Literature (or D.Lit) (문학박사)
L.L.D.Doctor of Laws (법학박사)
Litt.D.Doctor of Letters (문학박사)
학위의 이 두 형태는 제각기 중요성을 지닙니다. 명예학위는 공훈의 상징이며 그로써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나 학교를 위해 수행한 가치 있는 행적에 대해 개인에게 명예학위를 수여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취득학위는 학자를 부르는 학계의 칭호이며, 실질적인 교육의 업적에 의거한 것입니다.
질문 56 [TOP]
▶ 성경 역본들을 놓고 다투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을 강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그분의 말씀을 열심을 다해 지키는 것 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강조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여러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1. 여러분 생각에 성실하고 타당하다고 여기는 방법을 이용해서(레 10:1-3을 보십시오)
2.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성경적 권고들을 가능한 한 엄격히 지키려고 노력함으로써 사랑을 보일 수 있으며 이것은 평생 동안 이룰 노력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을 구분 짓는 표시 중 하나가 "그분의 말씀들을 지키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단지 그분께서 하라고 하신 것들을 지키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사실 '사랑'은, 요한복음 8장 51, 52절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그분께서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들'(words)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다시 이렇게 이야기할지 모릅니다. "그건 단지 그리스어 원문의 말씀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호 애재라, 이런 말은 단지 여러분을 더 깊고 더 치명적인 함정으로 유인할 뿐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성경의 예가 이를 잘 설명할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는 도중 "큰 물고기"에게 삼킨 바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나 1:17).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큰 물고기"가 "고래"라고 밝히셨습니다. 우리는 현재 유전학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의 가치에 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바로 이 성경 구절에 이르면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분의 입술로부터 나온 말씀을 훔칩니다. 모든 새 역본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고래"를 한결같이 "물고기"로 고칩니다. 이 일은 그들이 중학교 생물학 시간에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다"라고 배웠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보기에 모순을 가진 것 같은 성경 - 그 자체로써가 아니고 그들의 중학교 생물학 교사가 불어 넣은 머순 - 과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라는 것도 모를 만큼 지식도 없고 배우지도 못한 우리의 구세주와 직면하고는 어찌할 줄 몰라 당황하여 쩔쩔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장 마태복음 12장 40절로 달려가서는 성경 즉 신앙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자기의 최종권위가 되는 책과 예수님 곧 자기의 "주님"이시요, 구주이신 분의 입술에서 "고래"라는 단어를 빼버립니다.
마태복음 12장 40절에 나오는 "고래"에 해당되는 그리스어는 "ketos"이며 "물고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ichthus"입니다. 물론 이것들은 같지 않지요.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0절, 17장 28절 같은 곳에서 "ichthus"라는 그리스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만약 원하셨다면, 그분께서는 분명히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도 그것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로서 성경를 "강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여기서 두 개의 중요한 성경적 진리들을 간과합니다. 첫째로, 그는 요나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비해 두신 "큰 물고기"에 의해 삼킴을 당했음을 간과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담이 단 하나의 생물을 제외하고 기타 다른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창세기 2장 19, 20절에서 나머지 창조물에게 이름을 주기 전에 이미 창세기 1장 21절에서 고래에게 이름을 주셨습니다(역주 - "하나님께서 큰 고래들을 창조하셨다."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th"는 창세기 1장 21절에 나오는 큰 고래들을 한글개역성경은 다른 알렉산드리아 역본들처럼 "큰 물고기"로 번역해서 실수를 범함). 이 사실은 고래가 창세로부터 이미 "예정"(창 1:21; 욘 1:17) 된 것임을 의미합니다. 이런 중요한 사실은 성경 교정가들조차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사실이지요.
하나님을 돕겠다는 작은 "원조자"가 무시하는 두 번째 진실은,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고래"에서 "물고기"로 바꾼 것으로서, 이는 요한복음 14장 23절의 "내 말들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깨뜨리는 것으로 심각한 죄에 해당됩니다. 성경을 "정정하는 것"은 마치 흐르는 모래를 밟은 것과 같습니다. 헤어나오려고 발길질을 심하게 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그 속으로 더 빨리 빨려 들어가게 됩니다.
따라서 NASV, NIV, NKJV와 나머지 새 번역성경들의 편집자들은 "ketos"를 번역하는 일에서도 틀렸을 뿐 아니라, 요한복음 14장 2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명령 또한 무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고래)를 말씀하시고, 여러분의 목사, 부모, 혹은 교수가 다른 것(물고기)을 말할 때, 여러분은 인간의 견해를 거부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감싸고 옹호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질문 57 [TOP]
▶ 성경과 그리스어 사전이 모순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사전을 던져 버리십시오.
종종 하나님의 성경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있는 단어가 잘못 번역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권위 있는 그리스어 문법책이나 사전을 예로 들것입니다. 이것은 다소 어리석은 것으로서 신앙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성경을 최종권위로 받아들인다는 그들의 소문난 주장과 충돌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사전이라든가 오류가 없는 그리스어 문법책을 주시겠다고 하신 적이 없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는 단지 우리에게 완전한 성경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신앙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최종권위로 받아들이겠다는 각오 하에, 우리 모두는 그리스어에 대한 성경의 입장을, 그리스어 참고서들을 만든 오류투성이 인간 저자들의 견해보다 훨씬 더 권위 있고 정확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질문 58 [TOP]
▶ 공인본문의 편집자인 에라스무스는 "충실한" 로마 카톨릭 교도였나요?
☞ 후에 공인본문으로 알려진 그리스어 본문을 편집했던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당혹하게 만든 인물이었고, "충실한" 로마 카톨릭 교도이기에는 너무도 형편없는 본보기였습니다.
성경의 본문이나 사본 등에 대해 논의하게 되면 언제나 에라스무스라는 이름을 접하게 되며, 그 때마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가 인본주의자였다." 혹은 "그는 전형적인 로마카톨릭교도였다."라는 주장을 하곤 합니다. 한 마디로 이같은 주장을 하는 이들의 요점은 '인본주의자'나 '카톨릭교도'가 만든 성경의 본문에 기초를 둔 KJV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 필라델피아 제십장로교회의 유명한 목사이자 성경 무오성에 관한 국제 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보이스(James M. Boice) 목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공인본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해 공공연하게 나쁘게 말하며, 「공인본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 중 하나가 바로 "에라스무스가 인본주의자였다."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말을 정확히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공인본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KJV의 기초가 된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을 만든 에라스무스가 실제로 인본주의자였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지난 400년간 온 땅에 퍼져 복음의 빛을 발한 KJV 본문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위와 같은 주장을 펼쳐왔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근본주의 대학인 밥존스 대학의 커스터(Stewart Custer) 교수 역시 「KJV 논쟁에 대한 진실」이라는 글에서 에라스무스에 대해 동일한 견해를 펼칩니다.
"「공인본문」은 1516년에 로마카톨릭 인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그리스어 신약성경」과 함께 시작되었다."
비난을 받았지만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난 다른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러한 견해 역시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언뜻 보면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런 견해가 이미 역사적으로 정립된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수많은 증거들은 에라스무스란 인물이 "로마카톨릭 인본주의자"를 능가하는 매우 비범한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들처럼, 에라스무스에 대한 이해에도 어떤 불확실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들이 완전하지 못하고 또 충분치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450년이라는 긴 역사의 시간이 가로 놓여 있습니다. 현존하는 기록들은 여러 각도에서 해석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역사가나 기록자의 편견에 따라 한 쪽으로만 해석되곤 합니다.
우리는 결코 에라스무스가 영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역시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문제들 - 심지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던 다윗 왕과 같은 완전한 사람도 지니고 있던 문제들 - 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변명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근본주의적 크리스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분명히 에라스무스에게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완전치 못한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따라 자신이 보고 있는 분명한 잘못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은 것, 이교도들의 학식을 열렬히 동경한 것, 각종 성사, 교황제도, 사제 제도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로마카톨릭교회의 명백한 잘못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것 등등.
그러나 이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에라스무스를 "로마카톨릭 인본주의자요, 부주의한 성경본문 편집자"로 낙인찍는 것은 참으로 잘못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에라스무스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리기 위해 그의 생애와 신학에 대한 서적들을 찾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두 개의 중요한 책들을 찾아냈습니다. 첫 번째 책은 베인튼(Roland H. Baiton)이 저술한 「기독교계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Christendom)이고 다른 책은 1894년에 출간되어 지금은 절판된 프로드(J. A. Froude)의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서신」(Life and Letters of Erasmus)입니다. 우리는 이외에도 여러 가지 역사적 기록들을 검토했으며, 그 결과 소위 복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에라스무스를 부정적인 인물로 내모는 것이 매우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에라스무스에 대해 그처럼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단 한가지 이유는 자신들이 신뢰하지 않는 「그리스어 공인본문」과 관련해서 에라스무스가 처음으로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을 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의 생애와 서신을 통해 그가 결코 비난받을 만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 주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다음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창조된 후 약 6,000년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완전치 못한 사람들을 자신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최종 종착지가 어디인가, 즉 천국인가 지옥인가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는 일에서 에라스무스를 선택했는가 선택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논의를 할 때도, 과연 에라스무스가 구원받은 사람이었는지 혹은 영적인 사람이었는지 하는 것 자체가 그리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구약성경의 발람, 삼손, 솔로몬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 중에서 발람은 구약성경 보존의 임무를 맡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삼손과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에 직접적으로 불순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사용하셨으며, 특히 발람과 솔로몬의 경우에는 이들을 통해 영감된 성경기록을 이 세상에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통로로 쓰인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서 44, 45장을 보면 하나님의 종이라 불림을 받은 페르시아(바사)의 고레스 왕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재건을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가 이교도들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나의 목자요, 내가 기뻐하는 것을 수행하리라......주가 자신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고레스에게 말하노니, 내가 그의 오른손을 잡고......그 앞에서 가며......" 이사야서 45장 4절을 보면, 고레스가 구원받지 못한 인물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고레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네가 나를 알지 못하였어도......"
우리가 말씀드리려는 바는 비록 에라스무스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 가지 옳지 못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 사실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경 보존을 위한 통로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자료를 통해 독자들께서도 확신하게 되겠지만, 우리는 역사적 기록들을 통해 에라스무스가 구원받은 사람이요, 매우 영적인 사람이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인본주의자였다."라는 주장에 대해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려 합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어떤 사람을 '인본주의자'라고 정의 내리는 관점에서 볼 때 에라스무스는 결코 '인본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인본주의자'라 하면, 사람을 하나님 위에 놓으며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인본주의자들은 무신론자요, 진화론자들입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결코 그런 범주에 들지 않습니다. 사실 '인본주의자'라는 말은 16세기 이후로 그 뜻이 크게 변했습니다. 16세기 이전의 '인본주의자'라는 말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 점에 대해 영국 "트리니태리안 성경협회"(Trinitarian Bible Society)의 브라운(Andrew Brown)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젊어서부터 죽을 때까지 철저한 '크리스천 인본주의자'였다. 르네상스 시대와 종교개혁 시대에는 '인본주의자'라는 말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무신론적 진화론자'를 의미하지 않았다. 중세가 로마카톨릭교회의 '우민정책'으로 인해 말 그대로 암흑시대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인본주의자들은' 고대문학, 문화, 교육 등에 큰 관심을 갖고서 좀더 높은 수준의 시민 생활을 추구하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스테파누스, 베자, 칼빈 등이 모두 인본주의자였으며, 이같은 인본주의자들의 이상이 기독교의 복음과 합쳐져서 암흑시대를 벗어난 16세기 이후의 서구 문명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분명히 에라스무스는 로마카톨릭교도였지만 그는 또한 개혁자였다. 그는 카톨릭교회의 권리 남용과 심각한 부패에 대해 크게 비판했으나, 카톨릭교회를 내부에서 개혁해야 하며 거기에서 분리되어 나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히 프로테스탄트들과 카톨릭교도들 모두에게 칭송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 중 몇몇은, 비록 그 안에 가끔씩 옳지 못한 교리가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영적인 것이었다. 특히 그가 지은 「크리스천 군사를 위한 안내서」는 너무나 유익한 책이어서 영어 신약성경을 출간한 틴데일이 영어로 옮길 정도였다."
사실 1997년도에 출간된 「대영백과사전」을 펴보면, 틴데일같이 성경을 연구하고 번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 평민들의 손에 쥐어준 프로테스탄트 학자도 '휴머니스트', 즉 '인본주의자'로 분류되어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 유명한 백과사전의 편집자들 역시 그 당시에 고전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사람들을 '인본주의자'로 분류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에라스무스의 행적을 조사하여 과연 그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인본주의자'였으며 동시에 복음을 깨닫지 못한 '로마카톨릭교도'였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대영백과사전」에 따르면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는 1466년(혹은 1469년)에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고, 1536년에 일흔 살의 나이로 죽었으며, 16세기 경 유럽에서 최고의 학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시적 의학술과 함께 전염병이 사람의 평균 수명을 대략 30-40년으로 제한하던 그 당시, 그가 그처럼 장수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에라스무스가 아직 소년이었을 때 전염병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그와 그의 형은 삼촌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양육비 부담을 회피하고자 하는 삼촌이 그들을 수도원으로 보냈습니다. 청년시절 에라스무스는 데벤터라는 도시에서 그 당시 최고의 학문을 전수 받게 되었고, 그가 지닌 매력과 예의범절 그리고 재치 있는 지혜로 말미암아 큰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그는 확실히 비범한 지능의 소유자였으며 수많은 책을 저술한 작가였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열 시간 걸려서 하는 일을 단 한 시간에 끝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영 박물관내 도서관의 많은 부분이 에라스무스 개인이 저술하거나 편집한 책으로 쌓여 있을 정도로 그는 많은 작품을 저술했습니다.
에라스무스를 논하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성경의 기초를 쌓았다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부터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매우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형제들(Brethren of the Common Life) 사이에서 자라났으며.... 그의 평생동안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했다."(라이온의 「기독교의 역사」(History of Christianity), p.359)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라이온이 지은 「기독교의 역사」라는 책이 「그리스어 공인본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온은 에라스무스가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들 안에서 양육을 받아 평생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처럼 성경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종교개혁 이전이나 이후에 로마카톨릭교도들에게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이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에라스무스의 믿음과 영은 천주교보다 성경에 더 가까이 있었습니다.
자, 그럼 '인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온 에라스무스의 성경관이 어떠했는가를 그 자신의 말을 통해 살펴봅시다.
"나는 매우 연약한 여인이라도 복음서와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스스로 읽고 깨닫기를 바라며......그런 말씀들이 모든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사람뿐만 아니라 터키 사람이나 이슬람 사람들이 읽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나는 또한 쟁기질하는 소년이 쟁기질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노래하고, 옷을 짜는 사람이 옷 짜는 기계소리에 맞추어 이 말씀들을 흥얼거리며, 여행하는 사람이 이 말씀들을 통해 여행의 무료함을 달랠 수 있기를 바란다.....우리는 다른 공부를 한 것으로 인해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 다가올 때 성경 말씀을 읽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 귀한 말씀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죽으셨다 다시 일어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여주며, 그분이 바로 우리 옆에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Famine in the Lord」, Norman Ward, p.38)
이와 같은 진술문은 결코 16세기에 살았던 '천주교 인본주의자'의 확신이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성경 말씀을 전해 주려는 매우 고귀한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에라스무스의 가장 훌륭한 점은 보통 사람들을 향한 그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엄격히 '계급화 된 사회'에서, 그는 일반인들의 손에 성경을 쥐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신념의 사람이었습니다. 「제롬의 라틴어 역본」이 로마 제국이라는 철저한 계급조직의 명령에 의해 번역된 데 반해,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라틴어 역본」 과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그 당시 일반인들의 손에 주어주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로 번역했던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성경이 단지 향기를 내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가 번역한 성경을 집에서 읽는 자마다 그 것으로 인해 큰 유익을 얻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는 "농부, 재단사, 여행자, 그리고 심지어 회교도들조차" 손에 성경을 잡고 읽는 것을 보기를 오랫동안 갈망해 왔다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후에 그는 자신의 상급 동료들이 놀라 자빠지도록 심지어 "석공과 매춘부와 포주들"까지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장성한 후에 그는 카톨릭교회의 어거스틴파 사람들이 가장 좋은 장서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 파에 속하게 되었으며, 1492년에는 공식적으로 카톨릭교회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어거스틴파 교도들의 기준에 따르자면 참으로 유별난 데가 많았습니다. 그는 교회축제일 전야의 철야기도를 지키기를 거부했고, 금요일에 고기 먹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않았으며, 사제로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로서의 역할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비록 로마카톨릭교회가 그의 몸을 구속하고 있었으나, 그의 영과 혼은 그런 틀에서부터 벗어나 언제나 자유로웠던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많은 작품을 썼으며 그 안에서 자기가 속한 로마카톨릭교회의 부조리와 무분별한 행동에 대해 반기를 들고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교황의 권력과 사제단, 그리고 수도승들의 허랑 방탕함을 호되게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수도승들이 돈을 만지지는 않지만, 술과 여자에 대해 성실하지 못함을 성토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성직자들의 내연관계와 로마카톨릭교회가 소위 '이교도'라 부르는 자들을 다루는 잔악성에 대해 공격했습니다. 로마카톨릭교회의 공공연한 사악함에 대항하여 저술한 「야만인들에 대하여」(Against the Barbarians)라는 제목의 소책자는 실제로 이런 것들을 신랄하게 비판한 그의 많은 작품들 중 하나입니다.
한편 그는 율리우스 교황을 비롯한 여러 교황의 독재를 계속해서 비난했습니다. 그는 종종 교황 율리우스가 이끄는 '성전'(聖戰)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전쟁에 비유하곤 했습니다. "'율리우스'(교황)가 율리우스(카이사르) 역을 얼마나 잘해내고 있는가!"란 유명한 말 역시 그가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게다가 그는 "로마 교황의 이같은 독재는 기독교를 좀먹는 해충"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에서 교황좌(座)를 제거해 버릴 것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교황이 지옥에 간 것으로 묘사한 신랄한 풍자의 글이 익명으로 배포되었을 때, 그 글을 지은 사람이 에라스무스라는 것은 온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비난을 잠재울 양으로 천주교 지도자들은 그에게 추기경직을 수여하려 했지만 그는 그같은 노골적인 뇌물을 거절했습니다.
"온 유럽은 수도승들의 무지와 사제들의 미신 등을 적나라하게 밝혀 놓은 에라스무스의 저서들로 인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요동했다......이에 교황은 그에게 추기경 자리를 주어 그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으나, 자신의 양심과 타협할 수 없었기에 그는 이같은 제안을 계속해서 거부했다."
그가 이같은 교황의 제안을 계속해서 거부했다는 것은 이미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며, 여러 가지 기록들은 그가 자유롭게 남아서 성경을 연구하고, 기록하고, 번역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런 제안을 거부했음을 보여 줍니다.
"에라스무스는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나 학자나 인쇄공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를 버리려 하지 않았다."(「 기독교계의 에라스무스」, p.103)
"완숙한 지경에 다다른 학자 에라스무스는 그 시대의 별이었으며, 그 명성으로 인해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유복하게 살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국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마무리 짓기로 결정했다."
한편 에라스무스는 천주교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온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이 천주교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라틴어 신약성경」은 카톨릭교회의 「라틴 벌게이트」와 너무나 다른 곳이 많아서, 사람들은 에라스무스의 「라틴어 신약성경」이 로마카톨릭교회의 「라틴 벌게이트」를 드러내 놓고 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번역이 옮음을 보여 주는 각주들을 만들었으며, 이런 각주에는 부패한 카톨릭 사제들을 겨냥한 뾰족한 가시들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로마카톨릭교회는 에라스무스가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의 작품들을 비난했습니다. 그가 제롬의 번역본을 반대한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어 사본이 4세기경에 오리겐 등에 의해 개악(改惡)되었다는 것을 간파했고, 제롬의 번역본이 4세기초에 쓰여진 알렉산드리아 필사본인 「바티칸 사본」에 기초를 둔 것임을 알았습니다.
한편 그는 로마카톨릭교회의 권위를 주장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성경구절들을 제롬과 달리 번역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롬은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을 "고해성사하라. 하늘의 왕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번역했는데 반해 에라스무스는 "하늘의 왕국이 가까웠으므로 회개하라."고 달리 번역했습니다. 어느 번역이 맞는지는 독자 여러분께서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에라스무스는 또한 성경비평학자들과 인본주의학자들이 그 신빙성을 의심해온 마가복음 16:9-20과 요한복음 8:1-12의 말씀을 충실히 옹호한 사람이었습니다.
밀러(Andrew Miller)라는 역사 학자는 그 당시에 로마카톨릭교회의 「라틴 벌게이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 밑에서,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모든 지적능력을 동원하여 참으로 힘든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편집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16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라틴어 신약성경」과 함께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났는데, 그가 만든 「라틴어 신약성경」에는 카톨릭교회의 「라틴 벌게이트」의 오류들이 수정되어 있었다."
사실 이같은 작업은 그 당시에 아무라도 감히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출간되자 사방에서 그의 작품을 공격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도대체 왜 그는 종파분쟁을 일으키는 그리스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신성하고 전통적인 라틴어를 간섭하려 하는가?' 라고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여 말하였다. '도대체 누가 카톨릭교회의 「라틴 벌게이트」 에 수정을 가하여 그것을 향상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 당시에 카톨릭교회의 「라틴 벌게이트」 역본에 대해 의심을 갖는다는 것은 로마카톨릭교회가 매우 큰 범죄로 여기는 것들 중 하나였다." (「Miller's Church History」, Andrew Miller, Bible Truth Publishers, 1980, p.696)
한편 에라스무스의 성경 주석 역시 카톨릭교회의 왜곡된 모습에 대일격을 가했습니다.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에라스무스가 일하던 시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의 저서들과 「그리스어 신약성경」 출간은 곧장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이라는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람입니다. 이같은 그의 업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며, 더더구나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나 '로마카톨릭교도'가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종교개혁'으로 인해 로마카톨릭교회가 힘을 잃게 되었고, 그 결과 지난 400년간 온 세상에 선교사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또한 이같은 놀라운 개혁이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에라스무스라는 사람을 일으켜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을 편집하게 하셨다고 믿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다섯 판에 걸쳐 출판했습니다. 그것들은 주후 1516년, 1519년, 1522년, 1527년, 그리고 1535년에 연속해서 나왔습니다. 첫째 판의 번역 및 출간 작업은 1515년 3월 15일에 시작되었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516년 3월 1일에 출간되었습니다. 그 당시 바젤에는 프로벤이라는 인쇄업자가 있었는데, 그는 스페인 학자 스투니카가 저술하여 1514년에 시메네스 추기경에 의해 처음으로 인쇄되었으나 1522년에 가서야 공식적으로 출간된 「컴플루텐시안 폴리글롯」이라는 최초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이 출간되기에 앞서 자신이 처음으로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간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라스무스를 고용하여 그 일을 하게 했고 결국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컴플루텐시안 폴리글롯」보다 먼저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출간된 첫 번째 판은 그리스어 본문과 라틴어 번역본이 동시에 들어간 두 가지 언어로 구성된 성경, 즉 '디아글롯'이었습니다.
한편 두 번째 판은 첫 번째 판을 조금 개정한 것으로 마틴 루터의 「독일어 성경」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판은 소위 "사도 요한의 쉼표"라 불리는 요한일서 5장 7절의 말씀을 삽입시킨 것으로 인해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5장 7절은 "하늘에 증거 하시는 세 분이 계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한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라는 것으로, 이 구절은 모든 알렉산드리아 본문에서 삭제되었고 오직 KJV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명백한 구절입니다. 비록 자신이 수집해서 소장하고 있던, 주후 15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량의 비(非)그리스어 자료들에서는 요한일서 5장 7절의 본문이 들어 있었으나, 그는 자신의 첫 번째 판과 두 번째 판에는 요한일서 5장 7절 말씀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신약성경 본문에 이 구절을 포함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권위를 입증해 줄만한 최소한의 그리스어 필사본도 없이 이 일을 했다가는 큰 반대에 부딪치게 될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번째 판에서와 같이 자신의 두 번째 판을 출판할 때, 요한일서 5장 7절을 포함하는 그리스어 필사본이 하나라도 발견되면, 그 다음 판에 이 구절을 반드시 포함시키겠다고 약속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가 편집한 첫 번째 판과 두 번째 판 「그리스어 신약성경」이 나오자 카톨릭교회에서는 요한일서 5장 7절이 들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 그는 15세기경의 사본을 찾아내게 되었고, 자기가 약속한 대로 이 구절을 신약성경에 포함시켰고, 그 뒤 이 구절은 영원히 「그리스어 공인본문」에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KJV에 남아 보존되게 된 것입니다. 이 구절은 「구 라틴 벌게이트」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와 고대 왈덴시안들의 성경, 테플 성경 등 10 여 개의 증거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증거들의 특징은 이들이 한결같이 비잔틴 계열이 아니라 라틴 계열이라는 점입니다. 영지주의 -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 분파 -등에 심취한 알렉산드리아 학자들이 저술한 알렉산드리아 본문에는 이 구절이 빠져 있으나, 삼위일체를 인정하여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확증한 니케아 종교회의의 결과를 따른 라틴 계열의 기독교계는 처음부터 「구 라틴 벌게이트」를 사용하면서 이 구절을 지지했습니다. 결국 영지주의자들과 아리안주의자들이 성경본문을 맹렬하게 공격해서 요한일서 5장 7절의 말씀을 없애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섭리를 통해 비잔틴 계열이 아니고 라틴 계열의 사본 및 역본들을 통해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KJV의 이 구절을 반대하는 소위 근본주의 학자라 하는 사람들은 에라스무스가 새로 발견한, 요한일서 5장 7절을 포함하고 있는 두 개의 필사본이 에라스무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릇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비난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서,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에라스무스 당시에도 옹호를 받지도 못했습니다.
에라스무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또한 그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이 너무나 짧은 기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부실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며 16세기 최고의 그리스어 학자였다는 점을 이해하면 이같은 비난은 사실 그 근거를 잃게 됩니다. 또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그가 기원이 오래 되지 않은 몇 개의 사본들에 근거해서 성경 본문을 만들었으므로 그의 작품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다음의 표는 그가 사용한 사본들을 보여줍니다.
사본 번호 |
사본 시기 |
신약성경 부분 |
비고 |
1 |
11세기 |
사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
비교용 |
2 |
15세기 |
사복음서 |
본문으로 채택 |
2ap |
12/14세기 |
사도행전, 서신서 |
본문으로 채택 |
4ap |
15세기 |
사도행전, 서신서 |
비교용 |
1r |
12세기 |
계시록 |
계시록만 |
맞습니다. 그는 주로 두 개의 사본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사본의 개수나 시기가 아니라 그 사본이 어느 계열에 속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온 유럽을 여행하면서 많은 사본들을 수집하여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더욱이 카톨릭교회의 사제였으므로 카톨릭교회가 수집한 수많은 사본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는 바티칸 도서관에 「바티칸 사본」이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본은 이미 1481년에 바티칸 도서관에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신약성경 사본에 두 종류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고, 따라서 모든 사본을 「바티칸 사본」과 일치하는 사본과 비잔틴 계열의 사본으로 분류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윌켄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또한 얼마든지 「바티칸 사본」을 참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로마에 있는 봄바시우스라는 교수와 계속해서 서신을 교환했기 때문이었다. 그 교수는 에라스무스가 원하는 부분의 본문을 보내주었다. 한편 1533년에 에라스무스에게 「바티칸 사본」의 여러 부분을 보내주면서 「바티칸 사본」이 「공인본문」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다름이 아니고 카톨릭교도인 세풀베다였으며 그는 365 부분에 달하는 「바티칸 사본」본문을 그에게 보내주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바티칸 사본」이 위 표의 1번 사본과 같다는 것을 간파하고는 무시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가 「바티칸 사본」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존시켜주신 본문이 어떤 것인가를 확신했으며, 그같은 확신에 따라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편집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프로드가 지은 「에라스무스의 생애와 서신」을 통해 에라스무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온 세상 사람들이 원어로 된 신약성경, 즉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자신의 새로운 라틴어 역본과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으며, 지성인들을 일깨워 성경 말씀이 실제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풍금이 내는 소리같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 했다."
"마침내 이 작업은 끝이 났고,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과 라틴어 역본이 인쇄되었으며, 기독교가 전하는 생생한 사실들과 그리스도와 사도들, 그들의 역사, 생애, 가르침 등이 온 세상에 밝히 드러나게 되었고, 온 세상이 이로 인해 크게 놀라게 되었다.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신도들은 온 세상을 변화시킨 성경의 기독교와 교황, 추기경, 종교재판, 각종 거짓신화로 가득한 천주교를 서로 대조 비교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이 일은 영적으로 볼 때 엄청난 지진이 발생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스스로를 고자로 만드는 사람들에 관한 마태복음 19:12 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평생동안 독신 생활을 하겠다는 서약을 하려는 유혹을 받거나 혹은 그런 서약을 하도록 위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서약을 한 사제들은 창녀에게 갈 수 있는 허가를 받게되며, 단지 아내를 두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에 얽매이게 될 뿐이다. 또한 그들은 첩을 둔 채로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해서 아내를 두게 되면 화형에 처해진다. 따라서 자기 자녀들을 독신 사제로 만들려는 부모들은 그들이 어릴 때에 거세를 시켜서 탐욕의 늪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성경기록관과 바리새인들에 관한 마태복음 23장에 대하여, 만일 동정녀 마리아의 우유가 돈을 벌기 위해 전시된 것을 성자 제롬이 본다면 무어라고 말할까? 어떤 이들은 '여기에 성 프란시스의 모자가 있다.'고 하며, '저기에 동정녀 마리아의 겉옷이 있다.'고 말하며, 혹은 '성자 앤의 빗이나 캔터베리의 성자 토마스의 신발이 있다.'고 말한다. 사제들과 수도승들의 침묵과 위선을 통하여, 또한 일반 백성들의 무지를 통하여 이런 일들이 -즉 회칠한 무덤같이 겉만 번지르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주교들조차도 이런 멋있는 쇼에 일조를 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포고령을 통해 이런 불법들을 승인하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있다, 저기에 그리스도가 있다.'는 마태복음 24:23의 말씀에 대해, 나는 직접 내 눈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볼로냐에 있다가 로마로 간 것을 보았다. 그는 행렬의 맨 앞에서 마치 그리스도처럼 당당하게 행진해 갔다. 과연 베드로가 믿음으로 온 세상을 정복했던가? 아니면 무기나 군대나 혹은 기타 다른 전쟁하는 기계들을 사용하여 온 세상을 정복했던가?"
"고린도전서 14:19에 있는 '알지 못하는 언어'에 대하여, 그들(사제들 및 수도승들)은 현재 우리 교회에서 '알지 못하는 언어'로 찬트를 부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지난 여섯 달 동안 사람들이 그 생활을 바꾸어야 한다는 설교를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단 한차례도 전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 마땅히 자신들의 죄를 회개해야할 사람들이 그 목구멍에서 이상한 소리를 냄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헛된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1:6의 헛된 논쟁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죄의 형태에 대해 논하는 일에 전혀 피곤해 하지 않는다. 즉 그들은 이 죄가 영혼을 좀먹는 것인가? 아니면 영혼에 흠이 되는 것인가? 등을 논한다. 도대체 한 마디로 죄를 미워하라고 단순히 말하면 되지 않는가? 유명하다는 신학자들이 겨우 이런 일에 대해 의논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다루는 주제들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참으로 헛된 일이다. 기독교를 가르친다고 공언하는 이 신학자들은 실제로 자신들의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이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디모데전서 3:2의 말씀에 관하여, 사도 바울은 감독의 직무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격들을 나열했다. 그런데 지금은 결혼을 하지 말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살인, 근친살인, 근친상간, 해적행위, 동성연애, 도둑질 같은 것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결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지금 수많은 사제들이 있지만 그들 중 동정인자들은 거의 없다. 수많은 사제들이 욕심에 빠져 심지어 근친상간 등을 행한다. 따라서 욕정을 참을 수 없는 자들은 합법적으로 아내를 얻어서 살수 있게 하여 이처럼 더러운 오염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들은 그 당시 카톨릭교회의 교리와 원리 등에 대해 숙고한 뒤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의 각주에다 적은 기록들입니다. 이들 중 어떤 것들은 신약성경 첫판부터 기록되었으며 나머지는 판이 갱신되면서 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위의 글은 결코 만평이나 논쟁거리를 담은 소책자에 실린 글이 아닙니다. 이런 기록들은 신약성경 본문과 함께 기록된 것으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기독교와 이같은 기독교를 대신한 카톨릭 주의의 미신을 비교하고 비난하려는 목적으로 그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것입니다.
그는 천주교의 의식과 예식, 신학, 철학, 사제들의 인격 등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수세기만에 처음으로 그들의 참상을 온 세상에 밝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주교와 신부와 수도승들은 심판대로 끌려와 교황이 출간을 허락하지 않은 책, 즉 모든 책 중에 가장 거룩한 책을 통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그의 책처럼 열광적으로 팔린 책은 없었습니다. 프랑스에서만 순식간에 수 만 부가 팔렸을 정도였습니다. 삼손이 필리스티아인들(블레셋 사람들)의 여우에 불을 붙이자 불이 순식간에 번져 나간 것처럼, 에라스무스가 일으킨 경각심의 불은 온 유럽으로 번져나갔습니다.
후에 「공인본문」으로 알려지게 된 그리스어 본문의 기초가 된 본문을 편집했던 에라스무스는 교황을 당혹케 만든 인물이었고, "충실한" 로마카톨릭교도이기에는 너무나도 형편없는 본보기였습니다. 에라스무스가 로마카톨릭교회에 대해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카톨릭교회가 가르치는 바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와 더불어 그 교회의 신조들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구원은 각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 문제이며 오직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구원에 대한 로마카톨릭 주의의 방식에 대해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교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판을 치니 복음을 설명할 시간조차 없을 지경이다."
그러면 에라스무스가 말하고자 했던 복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자신의 설명을 들어보도록 합시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의 긍휼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그분의 피가 우리의 구원을 인치셨습니다."
그는 교회의 어떤 의식도 개인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는 회개한 강도가 간 길이 바로 "낙원에 이르는 길"이며, 단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세상이 내게 대하여, 내가 세상에 대해 못 박혔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현시대의 '인본주의자들'이 에라스무스의 글과 같은 것을 쓸 수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현시대의 '인본주의자들'은 그 무엇보다도 성경 자체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에라스무스는 결코 현대인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현대 역본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그를 '인본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는 결코 오늘날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인본주의자'도 아니며 또한 무지에 갇힌 로마카톨릭교도도 아니었습니다.
"당신들은 베드로나 바울을 기쁘게 하려 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본받으라. 그렇게 하는 것이 로마에 열 번 순례여행을 다녀오는 것 보다 더 나을 것이다. 당신들은 나무나 돌로 만든 그리스도의 형상을 존중히 여긴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복음서에 기록해 주신 것을 통해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일이다. 당신들은 소위 예수 그리스도의 겉옷이나 수건이라 불리는 것들에 대해서는 크게 흥분하면서도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는 꾸벅꾸벅 졸고 있지는 않은가? 나무 십자가를 집에다 갔다 놓고 기뻐하는 것보다는 그분을 믿는 것이 훨씬 더 나은 것임을 잊지 말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자기 입술을 예수님의 입에 댄 가룟 유다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그리스도의 유품 등은 결코 당신의 구원과 상관이 없다. 한마디로 당신들의 소유와 관심과 염려를 모두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두어야 한다. 그분은 자기를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자기를 위해 살거나 죽지 않았으며, 우리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행하셨다."
"우리는 죽음과 육신과 세상과 사탄에 대해 승리할 것을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들의 사면과 이생에서의 백 배의 결실, 그리고 그 이후의 영생을 약속하셨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가? 우리의 선한 공로와 행위 때문인가? 결코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은혜로 인함이다. 그분께서 우리의 의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안전하다. 그분께서는 우선 아담의 타락을 이겨내시고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자신의 피로 우리의 구원을 인치셨으니, 이 모든 것은 대언자들(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순교자의 증거에 의해 확증된 것이다.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같은 확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성령님의 인치심을 주셨다. 벌레만도 못한 우리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칭의가 되시며, 승리가 되시고, 소망이 되시며, 안전이 되신다. '우리에게 한 아이가 났으니......' 라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것이다. 바로 그분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의 병을 고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다. 바로 이 분께서 우리를 위해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의 고통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었다가 부활해서 승리하신 것이다. 또한 그분은 지금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다."
이같은 역사적 고증들을 통해 우리는 로마카톨릭교도가 아닌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에라스무스의 마음과 영혼을 보고 듣게 되며, 또한 하나님을 배격하는 '인본주의자'가 아닌 크리스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로서 우리는 에라스무스가 비록 로마카톨릭 주의의 범주 안에 남아있기는 했지만, 성경을 믿은 신자요, 개혁자였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 시대의 가장 성경적인 무리로 여겨진 '재침례교도들'(Anabaptists)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는 이미 1523년경에 그들을 '재침례교도'라 불렀고,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종종 "16 세기의 유일한 재침례교도"라고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에라스무스가 '근본주의'(fundamental)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끝으로 에라스무스가 프로테스탄트였음을 증명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는 1535년 바젤로 다시 돌아가서 프로테스탄트 친구들과 함께 거하며 로마카톨릭교회와는 아무런 연관도 맺지 않고 지내다가 그 다음 해에 죽었습니다. 특히 카톨릭 신자라면 죽을 때 반드시 받아야 하는 '종부성사'도 거절한 채,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Dear My God!)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으며, 바젤의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이 선구자 에라스무스의 시신을 프로테스탄트 교회 안에 안치하였고, 그 역사는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에라스무스는 1536년 7월 11일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결코 '충실한 카톨릭교도'라고 간주할 수 없는 프로테스탄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의 프로테스탄트 성향 및 기질로 인해 그가 받게 된 가장 큰 찬사는 그가 죽은지 23년 후인 1559년에 주어졌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교황 바오로 4세가 에라스무스의 저작물들을 모두 금서 목록에 올려놓은 일이었습니다.
성경이 평범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손에 들려 읽혀지기를 원했던 그의 순수한 소망을 아신 하나님께서 일반인들을 염두에 두고 번역된 영어 성경, 즉 KJV의 기초로서 에라스무스가 저술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을 사용하셨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흔히들 "에라스무스가 품은 알을 루터가 부화시켰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 말에는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개혁자들은 에라스무스의 성경, 그의 저서들, 그리고 로마카톨릭 주의의 협박에 저항하는 그의 태도로 무장하였기 때문입니다. 루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나의 운명이 그의 운명과 연관된다 하더라도, 나는 할 수 있는 한 루터의 편입니다." 그는 루터를 위해 여러 편의 글을 썼으며, 구원은 전적으로 행위가 아닌 은혜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그의 의견에 전심으로 동의했습니다. 또한 그는 로마카톨릭교회의 고위 성직자들로부터 루터를 이교도로 선포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나 거절했습니다. 만약 당대 최고의 석학인 에라스무스가 루터를 공격하기 위해 그의 펜의 힘을 사용했었더라면, 교황과 그의 하수인들이 할 수 있었던 힘없는 압력보다도 더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의 확신에 따라 그들을 옹호했고 단지 루터의 예정설을 믿지 않았기에 이 점에 대해서는 펜과 잉크로 종교 개혁자들을 비난했습니다.
한편 에라스무스가 만든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을 개정한 편집자들 역시 프로테스탄트 성경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어 신약성경」판을 만들어 내는 일에서 에라스무스의 뒤를 따른 사람들은 에라스무스와는 달리 완전히 카톨릭교회와 결별한 철저한 성경신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박해를 받으며 카톨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이 완전히 개정되어 「공인본문」이 나오게 되었고, 이 「공인본문」을 기초로 해서 -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이 아니고 - KJV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에라스무스를 '인본주의자'니 혹은 '로마카톨릭교도'니 하며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것은 결국 에라스무스를 통한 마틴 루터, 요한 칼빈 등의 '종교 개혁'을 무너뜨리려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요한 웨슬리, D.L. 무디, 요나단 에드워드 등 프로테스탄트 부흥을 가져온 모든 이들이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고증을 통해 이제 우리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을 편집하는 동안, 에라스무스는 그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같은 확신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고대 및 중세를 통해 신약성경 본문을 안전하게 보존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인쇄해서 중세 이후의 사람들에게 주려 하실 때에도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으셨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을 믿는 성도들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할 확신인 것이다. 우리는 결코 에라스무스나 베자나 틴데일이나 혹은 제임스 왕이 완전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는 처음에 완전한 성경을 주신 그 하나님께서 그 성경을 완전히 보존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을 뿐이다."
질문 59 [TOP]
▶ 킹제임스 성경에는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습니까?
☞ 전혀 없습니다.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 60 [TOP]
▶ 나는 내 동료집단 내에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제가 킹제임스 성경을 지지한다면, 미래 승진에 손해가 될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성경의 입장에 서서 그분께서 당신의 앞날을 도우시리라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의 정직함을 내다 팔고는 개가 뼈다귀를 바라며 유순히 행동하듯이 당신도 동료들 앞에서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이 선택은 당신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질문 61 [TOP]
▶ 설명하기 어려운 모순된 내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믿음으로 권위역 성경의 완전함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입니다.
여러 해 전 부엌에서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니 근처에 있는 신학교에서 내가 가르치던 학급의 학생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교회 목사님이 킹제임스 성경에도 모순이 있음을 보여주셨다고 말했습니다(굉장한 '믿음의 사람'이겠군요.). 그는 내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그 모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할 때, 그 논쟁에 대해 익히 알고 있던 나는 이야기 도중에 말을 끊었습니다.
"아, 선생님께서는 거기에 대해 알고 계시군요?" 그가 물었습니다.
"물론이지요"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그 답이 무엇입니까?"그는 기대에 차서 재촉해 물었습니다.
"나도 모릅니다." 나는 그가 나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잘 알면서도,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나를 많이 신뢰했습니다.
나는 지금 그 청년에게 들려주었던 나의 답변을 여러분에게도 들려드리려 합니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 만약 저나 권위역 성경을 믿는 다른 신자가 성경 질문에 대한 답을 모두 알고 있다면, 친히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유한한 창조물 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많은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할 수 있고 또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을지라도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만약 우리가 성경 문제에 관한 질문의 답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면,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으로 인해 행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히 11:6; 고후 5:7). 저는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질문들이 항상 존재하리라 믿습니다. 성경의 절대무오성에 관한 최종 판결은 우리가 좋아하는 '믿음의 방어자들'의 지력이나 학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편 12편 6, 7절과 마태복음 24장 35절 등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결론이 내려지리라 믿습니다.
물론 권위역 성경을 지지하는 사람은 이러한 결론이 약간 불리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의 적들은 그것을 알고 우리가 입은 갑옷의 구멍난 부분으로 여기는 부분을 재빨리 자신들을 위해 이용하려 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최후 방어수단으로서 '믿음'을 의지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생각처럼 그렇게 모순되거나 불안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려운 구절들에 대해 "답을 찾기 위해" 인간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많은 신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보여주었던 대로,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일에 직면했을 때 그분(하나님) 안에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실 것이기에 전혀 모순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우리의 고집스러운 적들의 처분에 내맡겨 버리시지 않을 것이므로 분명 불안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성경의 완전함을 믿는 것은, 잃어버린 몇몇 원본들의 완전함을 스스로 믿는 것처럼, 나약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이 원본의 절대무오성에 대해 그렇게 충성스로운 이유는, 절대로 원본을 출판할 수 없다는 것과 따라서 자기들의 믿음이 시험을 받거나 나쁘게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들이 알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스스로 우쭐대는 우리의 형제들'로부터 모욕을 당할지라도, 보이지 않는 원본보다는 만질 수 있는 성경에 대한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답변해 줄 것입니다. 우리는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 62 [TOP]
▶ 킹제임스 성경에 정말로 오류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당신이 할 일은 시편 12편 6, 7절의 하나님의 말씀과 마태복음 24장 35절의 예수님의 말씀을 성경을 펴서 직접 확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1960년대에 커다란 교훈을 하나 얻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폭력적인 히피족들이 아베리카 뱅크의 사무실을 불사르는 것이 보도되었고, 다른 폭도들은 그 지역전체를 "타버려라, 아가야, 타버려라."하는 외침과 함께 철저히 파괴시켰습니다. 히피족들의 주장은 그 마을을 완전히 파괴해 버리고 새 마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배웠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전 여태껏 히피족들이 건물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히피족들이 어떤 건물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냉엄한 진리는, 당신이 권위에 반항하게 될 때 당신도 히피족들과도 같은 파괴 예술의 대가가 된다는 것입니다(벧후 2:9-15). 파괴에 푹 빠져있는 삶은 돌이키기가 어렵습니다. 이처럼 히피족들은 다른 사람들이 지어놓은 건물은 파괴할 수 있어도, 자기들이 파괴했던 것보다 더 향상된 건물은 지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권위에 대한 이러한 반항적인 증오는 또한 자칭 학자라고 하는 자들의 성경에 대한 맹렬한 공격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완전한 책을 파괴적으로 비평하는 데는 능숙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과 교회 일원들의 심령 속에서 그것을 재가 되도록 소각시켰지만, 자신들이 그토록 잔혹하게 비평했던 거룩한 작품과 견줄만한(더 낫지는 못할지언정) 그 어떤 것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영적 히피들(비평학자)의 속임수에 넘어가 킹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있다고 믿게 되었다면, 그들에게 그것을 대체할만한 완전한(다른) 성경을 보여줄 수 있는지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NIV 혹은 NASV 혹은 NKJV같은 "더 나은 번역서들"을 추천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시편 12편 6, 7절이나 마태복음 24장 35절에 기록된 성경이라고는 누구도 감히 주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추궁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어 본문'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가시덩굴처럼 뾰족한 주장으로 당신을 찌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원어에 대한 지식은 매우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사실 히브리어 혹은 그리스어를 읽고, 연구하며, 가르칠 실력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공인본문(the Textus Receptus)이나 알렉산드리아의 일부분을 글자 그대로 번역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들은 거기에도 무오류하다고 말할 수 없는 내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과 닮은꼴인 1960년대 말의 히피족처럼 헛간조차 다시 지을 수 없는 무능력함 가운데 연기 나는 폐허더미 위에 자기들이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 의해 킹제임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그 성경 적대자에 대한 여러분의 충성과 사랑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비평학자가 여러분의 아버지, 형제, 목사님, 교장, 대학 교수 혹은 여러분이 너무도 사랑하는 어떤 분이라 하더라도 여러분이 완전한 성경 문제에 대해 반대하거나 저항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 의해 권위역 성경이 오류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킹제임스 성경을 NIV, NASV, NKJV와 그리스어 본문들을 담고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그 사람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손가락의 반지에 입을 맞추며 말하십시오. "오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이 한 가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하나님은 반역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분이십니다.
질문 63 [TOP]
▶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한 말씀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믿음대로 행하십시오.
참으로 이 성경(AV 1611)이 하나님의 절대무오하고 완전한 말씀임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먼저 그것을 읽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될만한 변명거리를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께서 왜 그것을 여러분에게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역본들과 모든 주석서, 여러분의 '연구를 돕는' 모든 것들을 다 치워버리고, 단순히 하나님의 책을 읽으십시오. 그 책의 저자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셔서(고전 6:19,20) 여러분이 그 책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부터 읽기 시작해서 신약의 끝까지 읽으십시오. 적어도 하루에 10 페이지는 읽으십시오. 이것은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손에 성경책을 주시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기기 위해 약간의 곤란을 겪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계시록까지 읽기를 마친 뒤에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요한복음까지 또 읽으십시오. 자 한 번을 읽으셨습니까? 자 이제 다시 시작합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때까지, 여러분이 살아있는 동안 쉬지 말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경계하십시오!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는 느낌을 갖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역대상의 처음 아홉 장과 같이 그 본문이 "무미건조한"것으로 여겨지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독히 바쁜 날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단락 전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들 가운데 어떤 것도 성경 읽기를 중단할 타당한 이유는 못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상기 언급된 상황 아래서도 매일 10 페이지씩 읽기를 계속한다면 여러분은 우리 인간에게 알려진 인격 테스트 중 가장 큰 것 하나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무미건조한 날들 외에도 그 책이 여러분의 심령에 부드럽게 다가오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새로운 진리들을 깨닫는 날을 맞이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매우 개인적인 방법으로 여러분의 하나님과 구세주를 알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은 킹제임스 성경을 믿지 않는 여러분의 친구들과 교사들 혹은 설교자들을 적대시하거나 그들에 대해 지나치게 흥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책을 읽는 여러분들은 그들이 제기하는 대부분의 비난들에 대해 은혜 안에서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그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신뢰할만한 또 다른 복사본을 원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지식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 사실에 관하여 그들이 최종적으로 수용하느냐의 여부는 그들이 혹은 여러분이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책을 완전한 것으로써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은 힘든 결정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누구를 위해 충성할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들의 친구들과 모교인가?
여러분이 만약 설교자라면 여러분은 완전치 않은 그리스어 본문으로부터 소위 '금덩어리'라고 불리는 것들을 제거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떼들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성경에 대한 확신을 심어줄 수 있으며, 성경을 읽도록 격려하는 것이 여러분과 그들 모두에게 더욱 풍성한 만족을 주는 일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경 안에' 거하고 성경을 읽는 무리들은, '성경 안에' 거하며 그것을 읽는 목회자에게 절대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하고 너무도 존경하는 친구가 다른 역본을 사용하는 교수나 목회자라면 계속해서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하십시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책을 공격하거나 '고치려' 한다면, 그들의 메시지로부터 단지 그 부분만을 가려내십시오. 혹자는 여러분을 거부할지도 모릅니다. 또한 어떤 이는 여러분에게 압력을 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오래 동안 내가 잘못을 범했구나"라고 인정하는 것이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끝까지 그 성경을 거부한다면, 그들은 결국 여러분까지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계속해서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의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가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더럽히도록 허락하지는 마십시오. 우리는 어느 누구에게보다도 그분 곧 하나님에게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자, 완전한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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