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스크랩]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돌아옴. (삼삼 6:10-16절) "제직회헌신예배"

향기나무 김성휴 2007. 9. 11. 19:59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돌아옴.
                                                삼상6:10-16절, 197.429.444장.

  본문의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과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궤는 이스라엘 광야 교회에서 절대 보호와 안전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법궤의 행방은 곧 이스라엘 자체의 행방이었습니다. 이 법궤가 동하면 이스라엘도 동하고 이 법궤가 정하며 이스라엘도 정했습니다.

  이 법궤는 레위 지파 사람들에 의하여 취급되도록 하나님께서는 엄히 명령하였습니다. 이 법궤 속에는, 1)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있습니다. 이는 생명의 만나이신 예수의 상징입니다. 2)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이 있습니다.

  이는 새 계명의 로고스이신 예수의 상징입니다. 3)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지금 법궤를 두고 블레셋 방백들이 과연 하나님이냐 아니면 우연이냐는 판가름을 지으려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대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면 사람이냐고 시비를 거론합니다. 여기에 말 못하는 두 암소가 매개되고 있습니다. 이 암소들이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이스라엘의 본처인 벧세메스로 잘 가게 되면 과연 블레셋이 받은 재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요,

  그렇지 아니할 때 그것은 우연이라고 단정할 판국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 못하는 암소들로 하여금 블레셋인들이 믿는 우연이란 우상을 깨뜨려 버리기 위한 섭리를 하셔야만 했습니다.

1.소는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논과 밭을 갈려고 뽑은 소가 아니고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게 할 소입니다. 세상일을 하려고 하는 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소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에게 택함 받았다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모세가 불행했던 이스라엘의 아이들 가운데 택함 받는 것 같이,

  바울이 많은 사람 중 택함 받아 복음 증거 하는 것과 같이 베드로가 많은 어부들 가운데 제자로 택함 받은 것을 귀한 일입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 택함 받은 것은 귀한 일입니다. 1)이 사명에는 새 경험이 따라 왔습니다. 7절에 "멍에 매어 보지 아니한 소"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수레의 멍에를 메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궤 운반을 위하여 세상 멍에에 섞인 일이 없는 깨끗한 제물을 요구하셨는지 모릅니다. 2)이 사명에는 부정이란 아픔이 숨어 있습니다. 7절에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를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라고 하였습니다.

  엄마소의 젖과 새끼 송아지는 모두 하나님의 궤 운반이란 목적을 위하여 제각기 부정되어져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집이나 전토나 친구나 처자나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과 이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주보다 더 사랑하거나, 아들이나 딸을 주보다 더 아비나, 어미를 주보다 더 사랑하거나, 아들이나 딸을 주보다 더 사랑하거나, 십자가를 지거나 자기를 부정하지 아니할 땐, 결코 십자가 소명의 길을 걸을 수 없는 것입니다.(마10:37-39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정도, 육체도, 욕심도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그의 부름에 응할 수 없습니다.(갈5:24절). 3)이 사명에는 미로가 기다립니다. 8절하반절에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궤가 간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소를 끄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소들이 평소에 다녀서 본능적으로 익히 아는 길도 아닙니다. 생전에 처음으로 메는 멍에를 메고 처음으로 수레를 끌면서 낮 설은 길을 주인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가야만 하는 소명의 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 알지도 못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도 거룩한 길을 걸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에게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는 실로 미지의 행로들뿐입니다. 다만 소명에 따라 움직일 따름이었습니다.

  어쩌면 법궤를 위하여 부름 당한 이 암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명에 대한 온유적인 상징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렀다는 소명 의식이 있는 자는 우연이란 함정에 빠지지 아니합니다.

2.법궤를 맨 소의 충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소가 있습니다. 밭을 가는 소 짐을 나르는 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궤를 끄는 멍에를 메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런 멍에요 이 세상의 멍에 치고 이보다 더 자랑스런 멍에를 맨 소는 없을 것입니다.

  법궤는 나무로 만든 궤로서 그 안에 십계명 석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법궤는 오늘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법궤를 소처럼 메고 천성을 향하여 가는 부름 받은 자들이 바로 교회의 제직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멍에가 있습니다. 사업의 멍에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멍에도 있습니다 사람들도 모두 저마다 각기 다른 멍에를 메고 있습니다. 그러나 숭고한 멍에는 법궤인 교회를 이끌고 가는 멍에인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천 날을 사는 것보다 하나님 집에서의 한 날이 더 좋고 악인의 장막에서 주인 노릇 하는 것보다 하나님 전의 문지기라도 그것이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 제직은 교회의 문을 열고 닫는 숭고한 문지기입니다. 전도의 문을 열어 주고 이단의 쓴 뿌리와 세속적인 물결과, 불순한 사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는 문지기인 것입니다.

 

  이 숭고한 사명에 감사하고 감격해야 합니다. 제직으로서의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1)새끼를 떼고 울며 가는 소의 헌신입니다. 벧세메스의 암소는 어린 송아지를 떼어놓고 눈물이 앞을 가리워 울면서 갔습니다. 우리도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신령한 눈을 뜨고 벧세메스를 눈물을 흘리며 묵묵히 걸어가는 소를 바라봅시다. 우리는 여기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2)두 소는 보조를 맞추어 나아갔습니다. 법궤 수레를 끄는 소는 두 마리였으니 그 걸음이 맞지 않고는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두 마리 소의 여덟 개의 발이 맞추어 갔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충성도 혼자 하는 충성은 쉽습니다. 그러나 서로 맞추어 충성하기는 어렵습니다. 고집으로는 일이 되지 않습니다. 집사가 극성스러움으로 당회를 거스리면 안 됩니다.

 

   구역장은 교구장의 뜻을 맞추어야 합니다. 혼자만 극성스럽게 충성한다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리면 안 됩니다. 자기 혼자 걷지 말고 주님과 더불어 같이 맞추어 걸어야 합니다. 옛날 에녹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3백 년간이나 동행하였습니다.

  주님께 충성하려는 성도 여러분! 주님과 온 성도들과 같이 보조를 맞추어 봉사합시다. 3)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뒤에서는 젖을 먹는 어린 송아지의 어미소 찾는 소리가 들려오고 주위는 소란하고 복잡한 환경이었지만 소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도 않으며 앞만 향하여 갔습니다.

  먹을 것이나 산이나 사람을 구경하며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성도들이 좌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너무 은사 치우쳐도 안되고 신학적인 이론에만 치우쳐도 안 됩니다. 어느 한 가지만이 전부인 것처럼 고집을 부리거나 독선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 교회 저 교회를 넘나들지 말고 오직 한 교회만을 섬겨야 합니다. 이 제단 저 제단 왔다 갔다 하면 신앙에 병이 듭니다. 성경 공부한다고 다른 제단을 드나드는 자들은 바람이 듭니다. 성경을 좀더 알면 무엇하겠습니까? 성경 연구는 하나님 앞에 좀더 봉사하고 순종하고 축복 받으며 살려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연구 그 자체가 좋을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4)소는 끝까지 갔습니다. 소는 죽을 때까지 주인을 위하여 충성합니다. 한결같이 충성합니다. 소는 충성하되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변덕이 없습니다. 소는 또한 여름이나 가을이나 겨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충성하되 고집이 없습니다.

  우리도 충성하되 끝까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되 시종일관해야 합니다. 기분 좋으면 섬기고, 기분 나쁘면 그만두는 자가 없기를 소원합니다.

3.진리의 정도를 아는 소이었습니다. 12절에 "암소는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라고 하였습니다. "벧세메스"란 "태양의 집"이란 뜻입니다. 즉 "밝음의 땅"이란 뜻입니다. 벧세메스 길이 그의 정로입니다. 벧세메스는 유다의 경내입니다. 거기에 여호수아의 밭 큰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14절).

  "여호수아"는 "예수" 즉 "구원"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큰 돌"은 "반석"을 상징합니다. 두 암소는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을 향하여 수레를 끌었습니다. 이 바로 행하던 대로는 십자가의 길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가는 길입니다.(요14:6절).

  그 길이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는 하늘가는 길입니다. 그 길이 둘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길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길입니다.(마7:13절). 그 좁은 문은 바로 양의 문입니다(요10:1-). 그 길의 표식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그 길의 행방은 너무나도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뒤를 돌아볼 필요 없이 곧장 앞으로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정도입니다. 이유는 그 길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시온의 길입니다. 밝은 빛이 비취는 땅(벧세메스)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11: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누구나 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면서 주님을 따라 가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레미야 선지는 "사람이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않아서 잠잠한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주님이 멍에를 메되 젊어서 메고 가는 것이 더욱 좋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기독 신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을 배우면서 주님을 따라 가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신학적인 측면에서 (1)이제는 주님의 사람이 되어 주님과 공등체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2)이제는 주님의 거룩한 일에 동참한 동역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3)이제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사나 죽으나 주님과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라고 합니다.(롬14:7-8절).

  여기 본문에 소개된 벧세메소 가는 두 마리 염소는 오늘의 한국 교회를 받들어 봉사하는 주의 멍에를 메고 가는 충성된 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교회를 받들어 봉사하는 제직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앞만 바라보며 가는 소이었습니다. 12절에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향하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고 정정당당한 길로 갔다는 뜻입니다. 주의 멍에를 메는 자는 성경 말씀대로 가야 합니다. 신앙의 노선에는 좌도 없고 우도 없습니다.

 

   신앙 사상에 있어서는 우리는 극단의 신비주의도 배척하고 소위 진보적인 세속주의도 거부합니다. 오직 평범한 가운데 진리를 밝히신 주님의 설법에 의거하여 성서 중심의 순박한 신앙 생활을 위주하여 무명의 범부(凡夫)로서 천국의 백성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맡아서 일하든지 이유가 많습니다.

  이로우면 충성하고, 해로울 것 같으면 불순종하고 반항합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소는 여호와의 법궤를 메고 말도 없이 무언으로 수레를 끌고 갑니다. 이유도 없고 반항도 없었습니다. 말과 노새는 굴레를 씌우고 자갈을 물려서 제어하고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는 아이들이 끌어도 잘 따라오며 끌려가는 순한 동물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은 무조건 순종자에게만이 축복이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에 두 기둥이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야긴"이요, 또 하나의 이름은 "보아스"입니다.

  "야긴"이라는 말은 "곧게 세운다'는 말이요 "보아스"는 "능력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멍에 메는 자는 곧게 서고 그리고, 그 직분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힘을 주십니다. 그 힘으로 능력 있게 교회에서 봉사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벱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도착한 이 두 암소는 급기야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희생되고야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빌2:8절에 "죽기까지 충성하라"고 했습니다.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는 사명을 다 완수하고 여호수아의 밭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 것입니다.

  군인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자신감을 갖고 목표를 향해서 전진해야 합니다. 본문 가운데 암소는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갈 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마땅한 자세를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세상적인 유혹이나 범죄함에 빠지면 성도의 기쁨을 잃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면서 암소가 수레를 끌었던 것처럼 앞만 보며 나아갈 때 우리는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갈 때에(빌3:14절) 커다란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5.보조를 맞춘 소들입니다. 두 마리의 소가 여호와의 법궤를 메고 여덟 개의 발을 맞추어 한길로만 벧세메스를 향하여 걸었던 것입니다. 에녹은 300여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었다는 말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보조를 맞춰 갈보리 언덕까지 올라갔습니다.

  한 멍에를 메고 한 사명 밑에서 한 적을 둔 현실 교회의 사명자들은 서로 보조가 맞는지 묻고 싶습니다. 1)주님과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자기 혼자 제 마음대로 걷지 말고 주님으로 더불어 같이 걸어가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 무거운 십자가도 주님께서 같이 져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2)가족끼리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부부간에, 형제간에 화평의 보조를 맞춥시다. 한 솥의 밥을 먹고 한 자리에 잠을 자면서 딴 길을 걷는다면 그 가정은 불화의 가정이니 어찌 평화가 있으리요! 화목해야 합니다. 주님 모신 가정이면 불평이 있을 수 없으며 다툼이 없어야 합니다.

  3)교인끼리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한 하나님을 모시고 주님의 피로 구속을 받았으며 한 성령을 받은 신자로서 같은 믿음을 가진 교인끼리 무엇이 합치지 못할 일이며, 틈이 있을 것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말이 많고 평안한 날이 없으니 세상을 향해 소금이 되라 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먼저 소금이 되어야겠습니다.

  모름지기 교회는 주님을 중심하여 서로 보조를 맞추면서 같은 신앙과 복음의 노선을 걸어야 합니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 복음의 선명한 가치 밑에서 주님의 호령에 발맞추어 씩씩하게 보조를 함께 하여 걸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두 암소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행로이지만 갈팡질팡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로 갔다는 점에 대해서 주목할 만 합니다. 이는 주님의 멍에를 메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공정하게 살면서 사역해야 된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물욕, 명예욕에 영향받아 치우치지 말며 인정사정을 초월하고, 파벌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일을 바로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6.목적지까지 잘 도달한 소입니다. 험한 길, 높은 고개 고달프고 피곤하며 목마르고 배고 픔을 참고 견디며 터벅터벅 느린 소걸음이지만 쉬지 않고 걸어가서 미침내는 벧세메스 목적지까지 도달하였습니다. 무릇 시작은 쉬우나 성공이 어렵고, 출발은 있으나 종점 도달이 드문 것입니다.

  히3:14절에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딤후4:9절에 "내가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엡6:24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은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승리자란 끝까지 꾸준히 변치 않고 걸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을 뒤집는 듯한 큰 소리를 쳐도 10년 20년에 중도 폐지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남보기에는 소걸음이 느린 듯도 하고 별 큰 일을 못하는 듯 해도 변치 말고 중지하지 말고 물러가지 말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내게 준 내 멍에,

 

   십자가를 지고 주님 걸어가신 그 발자취 따라서 꾸준히 걸어가야 합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말입니다. 이 소가 하나님에게 택함을 받은 것은 여호와의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에게는 중대한 사명의 멍에가 있습니다.

  세상에 허다한 수레가 있고 발 가는 소의 멍에 수레의 멍에도 많지만 오직 이 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궤를 끄는 멍에를 메웠습니다. 영광이라면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없고, 중대하면 이보다 더 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사명! 사명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다 사명이 있습니다.

  자기 사명을 깨닫고 사는 사람은 뜻 있는 생활을 하고 힘있게 살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위로 하나님을 높이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복음을 널리 증거 하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인 성경 말씀을 잘 받들어 지키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수1:7-8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 말씀을 이행함에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7.희생되어 제물이 된 소입니다. 13절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목적지인 벧세메스에 도달하니 7개월만에 하나님의 법궤는 이스라엘 진에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기고 근심으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기쁨과 두려움으로 법궤를 맞이하고 수레를 꺾어 장작을 만들고 두 소를 잡아 각을 떠서 장작 위에 벌여 놓고 하나님께 번제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이 소의 최후입니다.

 

  사명의 멍에를 메고 제 갈 길을 다 가고 그 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렸으니 이 어찌 우리 주님의 생애와 그 십자가의 희생을 예표함이 아니겠습니까? 14절에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하였습니다.

 

   법궤를 운반한 소는 자기가 끌었던 나무 수레가 타는 불꽃 속에서 그 몸까지 제물로 태워 하나님께 드린 바 되었습니다.

8.말씀을 정리합니다. 사1:3절에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을 깨닫지 못하고 나의 백성을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제직 여러분! 본 교회 제직으로 임명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명한 천직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어서 받을 수 없다고 하신 분 없습니까? 하나님의 사역은 나는 부족합니다. 하고 고백한 사람이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뭐든지 맡겨주면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을 까 두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자는 쓸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직분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하여 교회가 부흥되고 내 사업과 가정이 평안함 가운데 늘 성장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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