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요셉에게 고백된 두 관원장의 꿈과
애굽왕 바로의 꿈
지금 다루어질 꿈 사건은 요셉의 꿈과 그 꿈의 성취의 중간에 일어난 꿈 사건으로써 매우 중요한 고리역할을 한 꿈 사건이다.
그 첫째가 요셉이 옥에 갇혔을 때, 함께 갇힌 바로의 두 관원장(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 사건이다.(창40:1-23) 둘째는 애굽왕 바로의 꿈 사건이다.(창41:1-57) 이 두 개의 꿈은 요셉의 꿈 성취를 목적한 꿈이라는데 깊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꿈에선 요셉의 꿈 해석 능력이 바르게 평가받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고, 둘째 꿈 사건에선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등극하게 되는 동기를 부여한 꿈이다. 특히 바로 왕의 꿈은 어느 누구도 해석할 수 없는 아주 신비한 것이었다.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나타내는 꿈 재료(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 충실한 일곱 이삭, 파리한 일곱 암소, 세약(細弱)한 일곱 이삭)가 특이하다. 아마 바로 왕은 평소 자신의 꿈에 나타난 꿈 재료를 충분하게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꿈의 해석 방법은 현대 심리학이 따라갈 수 없는 예고적이요, 예언적이요, 미래에 되어질 일들에 관한 것이었다. 관원장들의 꿈 역시 계시적 성향의 꿈으로써 곧 요셉의 꿈 해석이 성취되어 술 관원장은 복직되고 떡 관원장은 사형된다. 이런 꿈의 성향은 성경과 신화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민간 신앙이나 위인들의 탄생설화에서 너무도 자주 등장하는 미래 예고적 꿈이다. 그러나 성경의 꿈이 완전히 다르다는 증거는 성경전체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구원(구속)이란 사상에 매여있다는 점이다.
어떤 한 개인의 행복과 불행을 예고하거나 그의 성공이나 위대성을 부각시키고자 꾸어진 꿈이 아니라 구세주 예수란 주제와 만민의 생명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꿈이라는 점이 전적으로 다르다. 즉 [프로이트]의 말처럼 “꿈은 전적으로 이기적이다. 꿈은 오직 자기 소망의 충족이 목적이기 때문이다.”는 말과는 전혀 상관없는 꿈이 성경에 나타난 꿈이다. 바로 왕도 이건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말을 요셉이 해주지 않았으니까. 요셉도 자신의 꿈이나 바로 왕과 관원장의 꿈이 그런 역할을 위한 도구였다는 사실을 처음엔 몰랐을 것이다. 나중에 형들이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 왔다. 그들을 통해 가족 전체를 애굽으로 이주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을 것이다.(창45:4-8) 이를 위해 아버지의 편애가 필연적으로 나타나야 했다.(창37:1-4) 요셉의 고자질과 꿈꾼 이야기가 있어야 했다. 요셉이 도시락 심부름을 해야 했다. 애굽으로 팔려가 갖은 수모는 겪으면서 감옥에 갇혀야 했다. 영문도 모를 바로의 관원장들은 꿈을 꾸어 요셉에게 해석을 들어야 했다. 술 관원장들은 적절한 시기에 요셉을 천거해야 했다. 바로 왕은 꿈을 꾸어서 고민해야 했다. 그러나 요셉을 만나 천년 묵은 체증이 확 뚫리는 듯한 대답을 들었다. 그는 감동이 되어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등극시켜야 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하셨나? 바로 약속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그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이스라엘을 통해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야 했다. 그러기에 그런 엄청난 작전을 구사하신 것이다.
어찌 이런 비밀을 믿음의 눈이 아니고서 깨달을 수 있겠는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라깡], [융], [아들러]가 다 몰려와도 이 비밀을 캘 수 없다. 특별히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만 가지고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갈라놓으려는 시도만 계속할 뿐이다.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워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성만찬을 통해 예수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써 아버지의 권능 이상의 능력을 소유하려는 욕구 때문에 기독교가 발생했다는 이론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세계 속에 있는 종교의 씨앗을 믿음의 눈으로 발견하지 못한 때문이다.(요한 칼빈의 기독교강요 1권)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아들의 죽음은 원죄를 씻는 동시에 아들이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여 아버지의 받을 존경을 빼앗는다. 그래서 이제는 아들의 종교가 되었다”고 그의 저서 [토템과 타부]에서 주장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아버지의 종교, 아들의 종교가 분리된 종교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하나로써 믿어지는 종교란 사실을 [프로이트]는 도외시하였다. 그러나 [토템과 타부]라는 책을 통해 원시종교의 기원과 인위적으로 조작된 종교의 실상을 해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정신분석 안에 종교, 도덕, 사회, 예술의 시초가 동시에 들어있다는 말은 과장된 표현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신 종교다. 따라서 현대 성도들이 자신의 욕구(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충족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다면 모두 실패하는 신앙인이 된다. 기독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먼저 사랑을 표현하신 것이 강조된다. 따라서 성도는 모두가 희생과 고난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환영하고 그 길 위에서만이 참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길을 가기 위해 몸부림친다.
여기까지가 창세기에 다뤄진 7개의 꿈 사건을 성경적 관점과 정신 분석적 관점에서 살펴본 꿈에 대한 해석이다. 아쉽게도 창세기에 가장 많은 수의 꿈 사건이 다루어진 후 사사기가 나오기까지 꿈 사건이 전혀 다뤄지지 않고 있다. 이는 민수기 22:12, 20의 발람의 사술적 꿈 사건과 연계되어 신명기 13:1-5에 가서,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며 다른 신들을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꿈꾸는 자를 죽이라 왜?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고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기 때문에 꿈꾸는 자를 죽이는 게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는 것이라”고 한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즉 꿈을 꾸고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곧 거짓선지자와 동일시되면서 이단시되었기 때문에 꿈으로 받은 하나님의 기사에 대해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신명기 뒤에 나오는 여호수아였다. 여호수아서는 가나안땅에서의 정복 사업이 한창인 때의 기록이다. 더구나 이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셔서 세우신 장군 여호수아를 이끄셨고, 여호수아는 오직 하나님이 말씀만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출애굽기, 레위기 때를 보면 이해가 안 된다. 창세기 기사 다음에 이어진 출애굽기, 출애굽기 다음의 연결된 책이 레위기다. 그러나 이 역시 그 나름대로 의미가 부여된다. 즉 출애굽기는 말 그대로 구원의 현장을 스케치한 후 도색한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구원에 관해 상징화하거나 꿈이나 환상으로 표현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거의 모든 행동이 직접적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고, 내일, 일주일, 미래에 할 일마저 현실 속에 46․꿈의 해석
서 주어졌다. 그러나 꿈꾸고 해석해서 행동할 시간적 여유로움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야할 이유도 없었다. 출애굽기 전반부는 구원, 출애굽기 후반부는 구원받은 백성이 갖추어야 할 거룩한 예배 처소에 대한 기록이다. 출애굽기는 실제적 사건의 이야기다. 미래에 되어질 일을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이루어진 구원에 관해 보게 한다.
레위기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성결한 삶을 어떻게 유지시킬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명령으로 기록되어 꿈이나 환상으로 기록될 여지가 없다. 한 마디로 법조문이라 하면 이해하기 쉽겠다. 법조문을 꿈이나 환상처럼 기록하면 어느 누가 그것을 해석해서 지키겠는가? 쉽고 간단 명료하게 기록하여 읽게 하면 되는 것이다.
아마 [프로이드]나 심리학자들이 신13:1-5을 읽고서 뭐라고 했을까? 비과학적이며, 비인격적이라고 비난했을까? 아마 ‘어떻게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꿈꾸고 이야기한다고, 거짓선지자라고 죽여버리라고 하셨을까?’란 의문을 갖지 않았을까?
우린 성경의 단면만 보아선 안 된다. 마치 이 한 면이 전체를 포괄하는 것으로 오해해선 안 된다. 오히려 이 구절을 둘러싼 성경 66권이 이 구절을 포함한다. 하나님은 만민의 생명을 구원키 위해 택한 백성의 순수성을 유지케 하신다. 그 순수성을 결여시키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우상숭배다. 우상숭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성, 교제함을 파괴시킨다. 우상숭배로 가는 기초작업이 하나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작업이 누구에 의해서 자행되었는가? 바로 경건하다고 생각했던 신비주의자들이었다. 신비로움이라고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어차피 기독교는 신비스런 속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신비주의가 되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신비적 체험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면서 말씀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킬 때, 왜곡된 말씀을 전하는 자를 가리켜 거짓선지자라 한다. 이 거짓 선지자 중에서 꿈쟁이도 있었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꿈으로 하나님의 계시로 받았다고 증언하면서 하라는 말씀보다 자신의 꿈을 앞세우고 종당(終當)엔 하나님의 말씀보단 꿈을 더 믿으라고 할 게 아닌가? 그 꿈이 만약 악한 도구로 쓰여진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을까?
[프로이드]의 [꿈의 분석]에서 “꿈은 자기 소망의 충족”을 목표로 이루어지며 그것을 전환, 환치하여 전혀 다른 장면으로 꿈 재료가 배열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꿈은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취급하여 꿈을 통해 대다수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분석해낼 수 있다고 하였다.
사실 필자도 [꿈의 분석]을 읽고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이론을 잘 전개시킬 수 있을까? [프로이드]의 책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 권의 문학 작품을 읽는 것처럼 미지의 세계로 인도되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의 해석]이 단순히 인간의 심리상태나 파악해주고 그것을 토대로 [히스테리] 증세를 치료해주는 정도로 그치고 만다. 그러나 필자의 [꿈의 해석]을 통해서는 신앙자세를 바로 세워주고 하나님의 존재를 더 확실하게 인식시키는 쪽으로 사용되면 참 좋겠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취침 전 마음을 도덕적으로 깨끗이 할 의무가 있다.(p.40)"고 했다. 그러나 [프로이트] 자신이 도덕적 순결함이 있다고 주장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도덕성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데 어찌 자기 자신의 통찰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하나님 없는 도덕성은 생명력 없는 도덕성에 불과하다. 더구나 꿈에 대한 책임 소재 주장은 성경적으로 맞지 않다. 성경엔 꿈을 허무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꿈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가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기 위해선 욕망만 채우려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전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의 영토를 사로잡아 거룩한 성지(거룩한 땅)가 될 때 꿈이 영적으로 생성되지 않을까? 그리고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꿈은 최근 심적으로 중요한 체험과 유아기의 경험의 기억의 재현”이라 한다면 사람이 어릴 적부터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되어지고 훈련되어져서 진리가 그의 경험의 소산이 된다면 그의 꿈 역시 거룩한 꿈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물론 종교의 단점도 있다. 종교가 단순히 인간에게 주어진 감정을 억제하도록 억압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프로이드]가 주장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그러나 감정의 자연스런 표현방식을 가르치고 건전한 쪽으로의 승화를 통해 내적 성숙과 아울러 외적 성숙에 기여한다면 히스테리성 질환을 더 많이 줄여갈 수 있지 않을까?
'성경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돌아옴. (삼삼 6:10-16절) "제직회헌신예배" (0) | 2007.09.11 |
---|---|
[스크랩] 11. 소렉골짜기-벧세메스 (0) | 2007.09.11 |
[스크랩] 칼빈의 기도 (0) | 2007.01.27 |
[스크랩] 기도 (0) | 2007.01.04 |
[스크랩] Re:가계저주론 반대논리 (0) | 2006.1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