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의
[스크랩] 21세기와 개혁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1) -이승구 교수
향기나무 김성휴
2006. 11. 15. 17:00
21세기와 개혁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1)
이 승 구 박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21세기에도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계속 우리 주변에 있을 것이다. 즉, 21세기에도 전통적 기독교와 그 가르침을 포기하고 버리라는 입장에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을 것이며, 전통적 입장을 새롭게 수정하려고 하면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을 것이고, 후-현대주의적 상황(post-modern context)이라는 이 새로운 맥락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특별 계시의 내용에 충실하려는 입장에서 신학의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입장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이전의 신학적 입장과 방향을 수정하고 전혀 새로운 입장에서 신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들리기 쉽다. 그리고 사실 그런 입장에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하는 일들이 많이 있어 왔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주장은 반드시 이전 신학을 부인하고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자 한다. 오히려 기독교 신학이 참으로 기독교 신학이고 그 기독교 신학적 성격에 충실하려면, 특별 계시를 강조하는 기본적 입장에 더 충실할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장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나는 기존의 패러다임 변화를 요구하는 신학적 목소리를 (1)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수정을 요구하는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 (2) 기존 입장의 내용상의 수정을 요구하는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 그리고 (3) 개혁신학 내에서의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 앞의 두 가지 주장들이 왜 참된 신학의 패러다임이 될 수 없는 지를 밝히고, 개혁신학 내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입장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서 앞으로 우리가 우리의 상황 속에서 드러내 보여야 할 신학의 패러다임은 과연 어떤 성격의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I.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수정을 요구하는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
20세기말에 나타난 신학의 근본적 변혁을 요청하는 소리로서 21세기에도 그 요구가 계속될만한 것은
(1) 기독교의 유일성과 독특성을 버리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요구,
(2) 신학과 성경이 늘 보유해 가부장적 전제를 버리고 여성주의적 입장을 기독교와 연관시키면서 기독교 신학을 새롭게 하거나, "이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기독교"를 버리고 이제는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신학을 하려고 해야 한다는 주장,
(3) 전통적 현대주의의 자유주의 신학에 좀더 충실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
(4) 해방신학적 입장에서 다양한 신학적 관심에로 확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입장,
(5) 리요타르(Jean-Fran ois Lyotard), 데리다(Jacques Derrida), 라캉(Jacques Lacan) 등의 포스트모던주의에 근거하여 비실재론적 유신론과 비실재론적 종교를 발전시켜 주장하거나 해체 신학을 주장하는 입장, 그리고 이런 포스트모던주의를 수용하여 객관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해석학적 다원주의의 요청들일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생각들의 배후에는 전통적 기독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21세기에도 전통적 기독교의 가르침을 버리려는 입장에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 우리 주변에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입장들이 모두 한 점에서는 일치하니 그것은 전통적 의미의 기독교와 신학은 오늘날의 상황 가운데서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작업하는 신학의 예들 중의 하나로 우리는 David L. Edwards의 최근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는 사후 상태에 대해 쓴 근자의 책인 {죽음 이후: 과거의 믿음들과 실재적 가능성들}(After Death? Past Beliefs and Real Possibilities)에서 "종교적 기관들에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던 많은 것들이 분명히 잘못된 것 같으며, 많은 사람들이 믿어 오던 것이 단지 감상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DNA를 알고 두뇌 구조를 아는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 종말론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까지의 상당한 논의들을 검토하면서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은 과학의 범주 밖에 있고 오히려 '전체적 인생관'(a total view of life)에 속한다고 한다. 그래서는 실재(reality)와 더 깊은 관련을 지닌 죽음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려고 한다.
에드워즈는 이 문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시고, 계시고, 계신 것"(what Jesus Christ taught, did, was and is)에서 최고의 하나님 계시(the best revelation of God)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왜 최고의 권위를 두는 지는 의문시된다). 그리하여 그가 예수에게서 발견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지옥은 결국 개인이 자기의 멸절을 선택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부모 같은 사랑이 사후의 삶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원천이므로, 자유로운 사람이 자기 멸절(self-destruction)을 선택한 것에 대해 사후의 삶을 거부하는 것은 전통적인 지옥 표상들이 표상하던 바의 항존적이고, 깊고, 두려운 의미인 듯하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사후의 삶은 무엇일까? 그는 사후의 삶이 몸없는 영혼이 불변하게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보고,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과 같이 부활한 몸을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라고 보며, 하나님이나 자연에 합일하는 것도(absorption)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우리가 죽으면 시간이 영원에 의해 대체되고, 공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대체될 때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be embraced by God), 하나님께 가는 것(go to God)이 전통적인 하늘관(view of heaven)의 의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시공간이 없는 영원을 생각하고, 시공간이 없는 그 하나님의 영역에 우리가 속하게 되는 것이 사후의 삶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신학하는 일의 서론을 제시한 것으로 우리는 가레트 죠운즈의 {기독교 신학}을 들 수 있다. 늘 철저한 자유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는 가레트 죠운즈는 기독교 신학의 맥락으로 사회와 문화를 강조하면서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 기원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p. 145). 이런 입장의 신학적 입장을 좀더 폭넓게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으로 영국의 리버플 선언(the Liverpool Statement)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약 30여명의 영국 신학자들이 신학의 새로운 비젼을 제시한다고 하면서 1998년에 9월 26일과 27일에 리버플 호프 대학교 컬리쥐(Liverpool Hope University College)에서 모여 의논하고 발표한 것이다. 이 선언문에서 이들 신학자들은 우리의 장래를 형성할 신학과 종교학의 성격을 유럽적 사유 방식에서 문화적으로 주도적이며 해방 운동이 더 주도적인 상황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전통적 자유주의 신학(traditional liberal theology)와 관여하는 신학(p. 11), 과거의 자유주의 신학적 접근과 보수주의 신학의 접근의 실패 모두에서 교훈을 얻는 신학(p. 11), 그리하여 공공 영역(public sphere)에서 다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신학으로 보면서(p. 12), 이런 신학의 적극적이고 개방된 이상과 '종교와 신학 포럼'(Forum for Religion and Theology)의 형성을 제안한다.
이런 선언은 한편으로는 마땅히 신학계에 있어야 할 공통적 포럼의 형성과 상호 관용을 잘 주장하는 것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영국 신학계가 어느 정도 보수적 성향을 가져가는 것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결국 기독교와 신학의 근본적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이런 선언이 나온 동기와 상황을 설명하는 가레트 죠운즈의 글에서 더 잘 살펴 볼 수 있다. 그는 현 영국 신학계의 복음주의적 성향에 대해 매우 우려하는 글을 싣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위의 첫째 제안과 관련해서도 현대 영국 신학 가운데서 신학자들이 이 사회와 다른 학문 분과와 더 관련 깊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말하는 유일한 것이 이 리버풀 선언이라고 하면서(pp. 88f.) 이 제안이 그저 문화와 깊이 관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말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좀더 잘 이해하는 이들은 이것이 바르트주의적 보수주의에 대한 이 일단의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임을 잘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이 실재와 현상에 대한 칸트의 구별을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신학에 대해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p. 89). 칸트 이후에는 이 구별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there is no excuse after Kant for failing to appreciate this argument, p. 8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들이 요청하는 것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 자유주의자들, 급진적 정통주의자들, 복음주의적 보수주의자들, 교의적 신학자들, 포스트모던주의자들, 포스트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목소리의 대변자들이 다 함께 문자적으로 대면해서 서로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대화를 공유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한다(pp. 90f.). 그러나 그들의 선언은 가빈 드코스타(Gavin D'Costa)가 잘 지적한대로 "신자유주의적 개신교"(the neo-liberal protestantism)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클 굴더는 이런 철저한 자유주의 입장에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40년간 봉직해 온 영국 교회의 사제직을 사임하기도 했다. 이는 자신이 이제 포스트-크리스쳔임을 주장하는 다프네 햄프슨의 입장과 함께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정직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독특성을, 더 나아가 기독교를 포기하는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장은 결국 이런 결론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보다 좀 덜한 입장이 있을 수 있을까? 이를 생각하면서 두 번째 유형의 새로운 패러다임 주장에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보기로 하자.
이 승 구 박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21세기에도 오늘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계속 우리 주변에 있을 것이다. 즉, 21세기에도 전통적 기독교와 그 가르침을 포기하고 버리라는 입장에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을 것이며, 전통적 입장을 새롭게 수정하려고 하면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을 것이고, 후-현대주의적 상황(post-modern context)이라는 이 새로운 맥락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특별 계시의 내용에 충실하려는 입장에서 신학의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입장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이전의 신학적 입장과 방향을 수정하고 전혀 새로운 입장에서 신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들리기 쉽다. 그리고 사실 그런 입장에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야기하는 일들이 많이 있어 왔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주장은 반드시 이전 신학을 부인하고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님을 보이고자 한다. 오히려 기독교 신학이 참으로 기독교 신학이고 그 기독교 신학적 성격에 충실하려면, 특별 계시를 강조하는 기본적 입장에 더 충실할 것을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장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나는 기존의 패러다임 변화를 요구하는 신학적 목소리를 (1)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수정을 요구하는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 (2) 기존 입장의 내용상의 수정을 요구하는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 그리고 (3) 개혁신학 내에서의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 앞의 두 가지 주장들이 왜 참된 신학의 패러다임이 될 수 없는 지를 밝히고, 개혁신학 내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입장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서 앞으로 우리가 우리의 상황 속에서 드러내 보여야 할 신학의 패러다임은 과연 어떤 성격의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I.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의 근본적 수정을 요구하는 패러다임 변혁의 주장
20세기말에 나타난 신학의 근본적 변혁을 요청하는 소리로서 21세기에도 그 요구가 계속될만한 것은
(1) 기독교의 유일성과 독특성을 버리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종교적 다원주의의 요구,
(2) 신학과 성경이 늘 보유해 가부장적 전제를 버리고 여성주의적 입장을 기독교와 연관시키면서 기독교 신학을 새롭게 하거나, "이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기독교"를 버리고 이제는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신학을 하려고 해야 한다는 주장,
(3) 전통적 현대주의의 자유주의 신학에 좀더 충실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
(4) 해방신학적 입장에서 다양한 신학적 관심에로 확대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입장,
(5) 리요타르(Jean-Fran ois Lyotard), 데리다(Jacques Derrida), 라캉(Jacques Lacan) 등의 포스트모던주의에 근거하여 비실재론적 유신론과 비실재론적 종교를 발전시켜 주장하거나 해체 신학을 주장하는 입장, 그리고 이런 포스트모던주의를 수용하여 객관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해석학적 다원주의의 요청들일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생각들의 배후에는 전통적 기독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21세기에도 전통적 기독교의 가르침을 버리려는 입장에서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 우리 주변에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입장들이 모두 한 점에서는 일치하니 그것은 전통적 의미의 기독교와 신학은 오늘날의 상황 가운데서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작업하는 신학의 예들 중의 하나로 우리는 David L. Edwards의 최근 작품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그는 사후 상태에 대해 쓴 근자의 책인 {죽음 이후: 과거의 믿음들과 실재적 가능성들}(After Death? Past Beliefs and Real Possibilities)에서 "종교적 기관들에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쳤던 많은 것들이 분명히 잘못된 것 같으며, 많은 사람들이 믿어 오던 것이 단지 감상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DNA를 알고 두뇌 구조를 아는 현대에 와서는 기독교 종말론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까지의 상당한 논의들을 검토하면서 사후의 삶에 대한 믿음은 과학의 범주 밖에 있고 오히려 '전체적 인생관'(a total view of life)에 속한다고 한다. 그래서는 실재(reality)와 더 깊은 관련을 지닌 죽음에 대한 해석을 시도하려고 한다.
에드워즈는 이 문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시고, 계시고, 계신 것"(what Jesus Christ taught, did, was and is)에서 최고의 하나님 계시(the best revelation of God)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항상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왜 최고의 권위를 두는 지는 의문시된다). 그리하여 그가 예수에게서 발견한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지옥은 결국 개인이 자기의 멸절을 선택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부모 같은 사랑이 사후의 삶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원천이므로, 자유로운 사람이 자기 멸절(self-destruction)을 선택한 것에 대해 사후의 삶을 거부하는 것은 전통적인 지옥 표상들이 표상하던 바의 항존적이고, 깊고, 두려운 의미인 듯하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사후의 삶은 무엇일까? 그는 사후의 삶이 몸없는 영혼이 불변하게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보고,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과 같이 부활한 몸을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니라고 보며, 하나님이나 자연에 합일하는 것도(absorption)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우리가 죽으면 시간이 영원에 의해 대체되고, 공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대체될 때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be embraced by God), 하나님께 가는 것(go to God)이 전통적인 하늘관(view of heaven)의 의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결국 시공간이 없는 영원을 생각하고, 시공간이 없는 그 하나님의 영역에 우리가 속하게 되는 것이 사후의 삶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신학하는 일의 서론을 제시한 것으로 우리는 가레트 죠운즈의 {기독교 신학}을 들 수 있다. 늘 철저한 자유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는 가레트 죠운즈는 기독교 신학의 맥락으로 사회와 문화를 강조하면서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 기원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p. 145). 이런 입장의 신학적 입장을 좀더 폭넓게 공개적으로 선언한 것으로 영국의 리버플 선언(the Liverpool Statement)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약 30여명의 영국 신학자들이 신학의 새로운 비젼을 제시한다고 하면서 1998년에 9월 26일과 27일에 리버플 호프 대학교 컬리쥐(Liverpool Hope University College)에서 모여 의논하고 발표한 것이다. 이 선언문에서 이들 신학자들은 우리의 장래를 형성할 신학과 종교학의 성격을 유럽적 사유 방식에서 문화적으로 주도적이며 해방 운동이 더 주도적인 상황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전통적 자유주의 신학(traditional liberal theology)와 관여하는 신학(p. 11), 과거의 자유주의 신학적 접근과 보수주의 신학의 접근의 실패 모두에서 교훈을 얻는 신학(p. 11), 그리하여 공공 영역(public sphere)에서 다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신학으로 보면서(p. 12), 이런 신학의 적극적이고 개방된 이상과 '종교와 신학 포럼'(Forum for Religion and Theology)의 형성을 제안한다.
이런 선언은 한편으로는 마땅히 신학계에 있어야 할 공통적 포럼의 형성과 상호 관용을 잘 주장하는 것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영국 신학계가 어느 정도 보수적 성향을 가져가는 것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결국 기독교와 신학의 근본적 변혁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이런 선언이 나온 동기와 상황을 설명하는 가레트 죠운즈의 글에서 더 잘 살펴 볼 수 있다. 그는 현 영국 신학계의 복음주의적 성향에 대해 매우 우려하는 글을 싣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는 위의 첫째 제안과 관련해서도 현대 영국 신학 가운데서 신학자들이 이 사회와 다른 학문 분과와 더 관련 깊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말하는 유일한 것이 이 리버풀 선언이라고 하면서(pp. 88f.) 이 제안이 그저 문화와 깊이 관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말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좀더 잘 이해하는 이들은 이것이 바르트주의적 보수주의에 대한 이 일단의 자유주의자들의 비판임을 잘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이 실재와 현상에 대한 칸트의 구별을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신학에 대해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것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p. 89). 칸트 이후에는 이 구별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there is no excuse after Kant for failing to appreciate this argument, p. 8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들이 요청하는 것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 자유주의자들, 급진적 정통주의자들, 복음주의적 보수주의자들, 교의적 신학자들, 포스트모던주의자들, 포스트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다른 목소리의 대변자들이 다 함께 문자적으로 대면해서 서로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대화를 공유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한다(pp. 90f.). 그러나 그들의 선언은 가빈 드코스타(Gavin D'Costa)가 잘 지적한대로 "신자유주의적 개신교"(the neo-liberal protestantism)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클 굴더는 이런 철저한 자유주의 입장에서 자신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40년간 봉직해 온 영국 교회의 사제직을 사임하기도 했다. 이는 자신이 이제 포스트-크리스쳔임을 주장하는 다프네 햄프슨의 입장과 함께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정직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독특성을, 더 나아가 기독교를 포기하는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장은 결국 이런 결론에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보다 좀 덜한 입장이 있을 수 있을까? 이를 생각하면서 두 번째 유형의 새로운 패러다임 주장에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보기로 하자.
출처 : 명지새벽이슬
글쓴이 : 임왕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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