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의

[스크랩] 열린 보수주의와 개혁신학 -김영한 교수

향기나무 김성휴 2006. 11. 15. 16:57
열린 보수주의와 개혁신학

김영한(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장)
머리말

새천년 한국 개혁교회와 신학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어떠한 과제를 지니는 것인가? 한국 개혁교회와 신학은 역사적 종교개혁 신학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주어진 개혁교회의 전통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정통교리를 계승하면서 그것을 오늘날 주어진 새로운 천년이라는 문화적 상황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개혁신학은 한편으로는 역사적으로 주어진 귀중한 영적 교리적 전승을 받아 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오늘날 역사적 문화적 환경 속에서 새롭게 조명하여야 할 해석학적 과제에 직면해 있다. 그러므로 두가지 성격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보수적 성격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방적 성격이다. 이 두가지 성격을 조화롭게 펼쳐 나갈 때 개혁신학은 수구적 신학이거나 닫혀진 신학이 아니라 오늘날 시대와 대화하며 그 방향을 제시하는 열린 신학이 되는 것이다. 열린 보수주의(open conservatism)는 오늘날 한국 개혁신학이 나아갈 방향이요 새천년의 과제이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 보수 개혁신학이 영향을 받아온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을 평가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1. 근본주의의 새로운 평가

1) 근본주의 공헌: 20세기 전기의 근본주의 운동

19세기 말 미국의 기독교는 다윈의 진화론과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성서비판학의 영향으로 그 정체성을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때에 일어난 운동이 근본주의(Fundamentalist)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프린스톤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이 현대주의의 도전에 공동전선을 펴고 일어난 복음주의 운동이었다. 프린스톤의 위필드(B.B. Warfield)는 성경원본의 문자적 영감과 무오성을 강력히 변호했고, 무디(Moody)는 세대주의자들에 의해 개최된 사경회에서 임박한 재림과 회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들 보수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사수하기 위하여 1909년에서 1915년까지 [근본적인 것들](Fundamentals)이라는 12권으로 된 소책자들을 출판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근본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자유주의의 물결에 대항하여 기독교의 다섯가지 근본교리인 성경무오,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과 재림을 기독교의 근본적인 신앙항목으로 천명했다. 초기의 근본주의 운동은 정통개혁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세대주의자들 까지도 참여한 매우 포괄적 운동이었다. 당시에 보수주의는 근본주의와 다름이 없었다. 초기의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변호하고 사수하기 위하여 일어난 운동이라는 점에 있어서 그 역사적 공헌이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국의 개혁신학은 현대주의와 보수주의의 논쟁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이 근본주의의 입장에 서 온 것이다.

2) 근본주의 문제점

이러한 근본주의 운동은 1920년 초에 절정에 달하다가 1925년 이후 급격히 약화된다. 1922년 포스틱(Harry Emerson Fosdick)은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인가?"(Shall the Fundamentalism Win?)라는 설교는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논쟁에 큰 불을 질렀다. 그는 근본주의가 자유주의에 대하여 불관용한 태도를 비판하고 관용하기를 호소하였다. 이에 대하여 필라델피아 장로교회 목사 매카트니(Clarence Macartney)는 그의 글 "포스딕 박사에게 답함: 불신앙이 승리할 것인가?"(Shall Unbelief Win?)에서 "자유주의 운동이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있다" 하며 신앙의 "완고성과 편협성"이 오늘날의 교회에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 논쟁에서 교회정치적으로는 포스틱이 뉴욕 제일장로교회를 사임하게 됨으로써 졌으나 보수진보논쟁에서는 포용성과 관용을 호소한 포스틱이 많은 보수주의자를 그의 자유주의 진영으로 끌어 들렸다. 이 가운데 150명 목회자들의 서명과 함께 1924년 1월 오번 선언(Auburn Affirmation)이 발표되어 그해 5월 까지 1274명의 서명이 첨가되었다. 이 선언은 극우파의 배타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신학적 관용을 호소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프린스톤의 메이쳔(Grasham Machen)은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근본적으로 다른 두개의 종교임을 천명하고 하였다. 논쟁이 진행됨에 따라 보수진영에 관용주의자가 날로 갈수록 많아지게 되고 1925년 미국 장로교총회는 교단신학을 포용적이라고 가결하게 된다.

그리하여 근본주의는 이때부터 소수파로 전락하게 된다. 1930년 이후에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은 배타적이고 편협적이고 분파적인 운동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전투적 자세와 반지성적 자세를 취하여 개신교 주류에서 이탈하기 시작했고 적극적 사회참여는 복음전파의 열성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고 사회정의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1940년 [미국 기독교연합회](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가 설립되고 1948년에는 국제기독교연합회(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로 규모를 확대하였다. 매킨타이어(Carl McIntire)가 이끈 이 단체는 "배교의 어두운 시대에" "교회의 역사적인 신앙을 타협이나 회피함 없이 증거하기" 위하여 "전투적인 복음지향적인 반현대주의"를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며 분리주의적인 기관이 되었다. 1955년에는 성경장로교회가 이 단체에서 탈퇴하기를 결의한다. 이 단체는 분리에 분리를 거듭하여 이미 1960년대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한국의 보수장로교회도 이러한 미국 교회의 분열에 영향을 받아 예장교단만 백여교파로 갈라져 있으며 보수교회는 해외 복음주의 연합회(NAE, RES)에 연관을 맺었으나 죽산 박형용의 닫힌 교회정책에 영향받아 관계를 단절하기에 이른다. 근본주의 사고방식은 미국의 근본주의에 소속한 보수교회와 이에 영향받은 한국교회를 세계주류 교회의 흐름에서 고립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므로 헨리는 1957년 6월호 [오늘날의 기독교](Christianity Today)에 발표한 논문 "우리가 감히 논쟁을 새롭게 하는가?](Dare We Renew the Controversy?)에서 오늘날 근본주의가 처음운동에서 변질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역사적으로 근본주의란 하나의 신학운동이었다. 그러나 점차 이 운동은 하나의 이상한 생리와 무드를 조성했다. 이 운동의 초대 지도자들은 균형과 안정을 따른 원숙형이었으나 호전형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에 지도자들이 근본주의 운동을 차제분열의 와중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2. 근본주의의 개혁 - 열린 보수주의 : 정통주의 창조적 계승을 위한 세가지 과제

정통주의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오늘날 하나의 부정적 사고방식으로 자리 잡은 근본주의를 개혁해야 한다. 우리는 정통주의를 세가지 측면에서 재건하고자 한다. 하나는 근본주의의 거부와 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신정통주의의 거부와 비판이다. 셋째는 복음주의 좌파 사상에 대한 경계와 비판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적 진리에서 우로 치우쳤고 신정통주의는 좌로 치우쳤다.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성경적 진리를 너무나 협소하게 이해하려고 하고 있고 신정통주의(neoorthodoxy)는 성경적 진리를 자유주의를 향하여 개방하고 있다. 복음주의 좌파(the evangelical left)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근본주의의 개혁의 방향이란 근본주의가 가진 부정적 사고방식과 독선적 성격을 제거하는 바로 "열린 보수주의"(open conservatism)이다.

노년기 헨리는 1976년의 저서 [정체성을 찾는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 in search of Identity)에서 정통적 복음주의를 복권하기 위하여 근본주의의 사고방식을 배격한 것을 지난 때를 회상하면서 다음같이 피력한다: "복음주의 주요흐름으로 하여금 극우익 근본주의자들에 관하여 슬프게 하는 것은 그들의 개인적 율법주의, 진보교육의 중지, 성서비판 자체의 경멸, 신학토론의 논쟁적 태도, 에큐메니칼에 관계한 교단에 있는 자들에 대한 정죄적 태도, 기독교 반공주의와 기독교 자본주의로 정의된 무비판적인 정치적 보수였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을 우익적으로 정치화하면서 좌익적으로 정치화하는 것을 개탄하였다".

열린 보수주의는 근본주의가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교리를 옹호하고 기독교의 근본교리에 대하여 방어를 했다는 점에 있어서 신학적으로는 근본주의의 입장에 선다. 그러나 열린 보수주의는 근본주의가 근본진리의 수호에만 집착한 나머지 자기와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에 대하여 정죄하고 자신만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독선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우리 앞서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해결점을 시도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에게 배울 수 있다.

1935년이후 근본주의가 하나의 분리주의자로 전략하자 칼 헨리와 신복음주의자들은 새로운 운동을 일으켰다. 칼 헨리는 우익 근본주의의 문제점이 개인율법주의, 고등교육의 거부, 성경비판 자체의 유보, 신학적 논의의 논쟁화,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심판적 태도, 기독교 반공주의 와 기독교 자본주의라고 정의되는 무비판적인 정치적 보수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1941년에서 1943년에 미국 복음주의 협의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가 형성되었다. 이 협의회는 통일, 교육, 선교, 사회윤리와 정통주의의 방어를 위한 이념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리하여 1947년 풀러 신학교의 창립과 더불어 신복음주의운동이 역사적으로 탄생하였다.

열린 보수주의는 근본주의를 다음의 세가지 관점에서 거부한다. 첫째, 근본주의의 사랑이 결핍된 태도와 기질을 거부한다. 칼 헨리는 1947년에 신복음주의의 선언으로서 출판한 [현대 근본주의의 불안한 양심](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이라는 저서에서 근본주의를 파산으로 가져오게 한 것이 "거친 기질(harsh temperament)과 사랑부재와 다툼의 정신(a spirit of lovelessness and strife)"이었다고 지적한다. 근본주의의 일차적인 관심이란 교리적 논쟁이나 다른 교리를 가진 자에 대한 정죄나 비판이 아니라 구속에 대한 정통교리의 보존이었다. 그리고 성서의 무오교리가 첫째의 방어선이라고 본다. 근본주의는 성서의 최종권위에 대한 주장과 더불어 철학적 체계의 거부, 개인 없는 사회복음주의, 종말 없는 역사 철학, 기독교의 절대성을 약화시키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거부한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부정(否定)과 비판을 통해서 현상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긍정적인 세계관을 제시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근본주의는 종교적 운동에서 하나의 종교적 사고방식(a religious mentality)으로 변질되었다.
칼 헨리가 이미 지적한 바같이 근본주의에 비판적인 것은 신학적 문제라기 보다는 기질(temperament)이다. 근본주의자들은 불화의 분리정신의 잘못이 있다. 이것이 복음주의의 고립과 비효율성을 가져왔다. 사랑의 결여가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고 투쟁적이고 과격한 공격을 유발하였다. 그리고 개인적 윤리과 체험의 독단론, 분리적 책략을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1935년 모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분파는 미국 장로교회(American Presbyterian Church)가 된다. 1937년 이 교단은 정통 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과 성경장로교회(Bible Presbyterian Church)으로 분열된다. 1956년 다시 성경장로 교단은 다시 분열되어 개혁장로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와 복음주의 총회(Evangelical Synod)가 된다. 오늘날 한국의 보수장로교회가 100여개의 소종파로 나누어진 것은 근본주의의 과격분리주의(hyper-separatism)의 태도에 기인하고 있다.

둘째, 근본주의의 비지성적 경향과 비교육적 프로그램을 거부한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 이르기까지 미국의 근본주의는 학문을 무시했고 반지성적이었고 학문적으로 세련된 저서나 저널을 출판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근본주의는 신학에 있어서 구원의 성서적 계획을 설명하는 데만 머무는 환원주의적 경향에 머물고 자연과학에 대하여 지성적 솔직성을 결여한 몽매주의적 태도(an obscurantist attitude)를 가졌다. 그리하여 근본주의는 모든 학문성에 대하여 경시하는 태도를 지녔다.
미국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한국의 근본주의 교회도 이러한 학문적인 몽매주의에 빠졌다. 그리하여 한국의 보수교회와 신학이 이러한 미국의 근본주의 생리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열린 보수주의는 근본주의의 부정적 태도를 갱신하고자 한다. 열린 보수주의는 연구하는 목회, 학문적 연구와 저술, 신학적 문제의 명료화, 복음주의적 입장의 지성적 변증, 사적 공적 교육에 대한 기독교적 호소 등을 제안한다. 열린 보수주의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교육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성적 존경받음을 강조한다. 열린 보수주의는 어느 정도의 성경고등비평에 대한 개방과 성경무오에 대한 열려 있는 지적 변증, 역사의 본질 그리고 기독교 신앙과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제시한다.

셋째, 근본주의의 윤리적 무차별주의(ethical indifferentism)를 거부한다. 근본주의는 삶의 전 영역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적용에 있어서 실패했다. 근본주의는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를 향한 철저한 관심을 표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근본주의는 성서적 자료에 근거한 사회적 개인적 윤리의 적합한 체계를 산출하는 데 실패하면서 종말론의 사소한 문제 관해서는 너무나도 독단적이다. 자유주의가 성경 속에서 예언적 요소를 평가절하하여 역사적 메시지를 왜곡시키고 종말론을 비신화론화 한데 반해서, 근본주의는 문화의 전 영역에 대한 복음의 적법적 요구를 등한시 했다.
한국의 보수교회도 이러한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열린 보수주의는 지구촌의 난관에 대한 복음의 구속적 메시지의 타당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소박한 종말론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였다. 열린 보수주의는 세대주의적 열광주의 종말론을 비판하며 동시에 자유주의적 비종말론을 비판한다. 그리스도는 달력적인 시간에 예고하여 오시지도 않는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는 종말은 단지 지체될 뿐 종말이 슈바이쳐나 그의 학파가 말하는 것 처럼 신화론적 의상을 입은 것이 아니다.

열린 보수주의는 다음같이 근본주의의 비윤리성을 비판한다. 한국보수교회의 비윤리성은 "대부분 근본주의 설교에 있어서 사회악에 대처하는 것에 대한 거부이다". "근본주의가 악담하는 죄는 대부분이 배타적으로 개인적 죄이다". 열린 보수주의는 근본주의의 종말론이 갖는 윤리적 무차별성을 비판한다. "근본주의는 그것의 테두리 안에서 긍정적인 메시지를 드러내는 데 실패했다. 근본주의는 세계 역사의 실망적인 견해에 도피처를 찾고 현지구적 위기에 대한 복음주의의 적절성을 깍아내렸다". 세대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근본주의는 율법과 은혜의 이분법태도 그리고 현세상에 대하여 염세주의적 태도를 지니고 세상에 대한 의미있는 사회윤리 정립을 블가능하게 한다.

열린 보수주의는 근본주의의 실패를 지적하면서 근본주의를 다음과 같이 개혁해야 한다. 첫째, 교회가 위치한 현대 사회의 영적 어려움에 대한 구속적 메시지의 타당성을 일깨워야 한다. 둘째, 서로를 헐뜯는 상호비방과 교파 분열을 지양하고 같은 계열의 교파 끼리 재연합해야 한다. 셋째, 세계 복음화와 사회 복지의 도움을 위하여 연합사업을 하는 거대한 복음주의적 일치를 강조해야 한다. 넷째, 인권과 생명윤리와 환경보존과 사회정의를 위하여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개혁교회와 신학은 보다 새로운 윤리적 의식을 각성해야 한다. 세속적 모던 및 포스트모던 사상체계 보다도 더 높은 윤리적 기준을 제시할 뿐 아니라 인간성을 도덕적 성취의 가장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모범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3. 신복음주의의 새로운 평가

1) 신복음주의의 대두
신복음주의는 1930년대와 40년대의 근본주의운동이 신학적 역사적 학자적 자질, 그리고 문서활동을 결여하고 교파주의, 세대주의 종말론, 반문화주의와 반지성주의 그리고 반동주의, 소수의 모반자 운동에 빠졌으며 복음을 개인적인 종교체험으로 축소시켰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근본주의가 현대주의에 대하여 투쟁한 교리에 대하여 찬성하면서 단지 근본주의가 이러한 투쟁 가운데서 소홀히 한 복음전도와 사회적 문화적 변혁의 책임을 회복하려고 했다. 여기에 오켄가(Harold John Ockenga), 칼 헨리 등이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마스덴(George Marsden)이 그의 저서 [근본주의 개혁](Reforming Fundamentalism)에서 말하고 있듯이 새로운 방향에서 복음주의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으며 스스로를 근본주의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하는 복음주의에 활력을 주려는 자들이었다. 1950년대 역사적 복음주의운동을 새롭게 전개한다는 뜻에서 오켄가가 "신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으나 1960년대 들어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신(Neo)이라는 접두사가 가진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이 더 컸기 때문에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신"이라는 접두사를 빼고 본래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1979년 시카고 성경무오 국제연합회(ICBI)선언에서 보여주듯이 성경무오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2) 좌익 신복음주의의 위험성

신복음주의자들 가운데 복음주의의 정체성에서 이탈하고 있는 움직임이 있다. 해리슨(Everett Harrison)은 "성경의 영감이 바로 무오를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풀러(Daniel Fuller)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를 구분한다". 내쉬(Ronald Nash)는 "원본 무오" 사상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정"일뿐이라고 주장하며, 라이터(Robert P. Lighter)는 무오를 역사적 사실이나 문법적 구조 등 지엽적인 문제까지 확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나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램(Bernard Ramm)은 성경을 현대과학에 비추어 해석하고자 하면서 "점진적 창조론"을 주장한다. 카넬(Edward J. Carnell)은 처녀 탄생에 대해 과학적 이해를 시도하고 진화과정 자체를 하나님의 창조과정으로 보는 "유신론적 진화론"(theistic evolutionism)을 수용하고 메이쳔의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분리주의적 사고로 규정하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이들은 복음주의의 근본진리를 의문시 하기 때문에 이들은 좌익적 성향을 지니고 있으며 건전한 보수주의를 포기하고 있다.

3) 후기 보수주의의 좌경적 위험성

밀라드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은 그의 최근 저서 [복음주의 좌파](The Evangelical Left: Encountering Postconservative Evangelical Theology)라는 저서에서 분석한 1990년대의 미국 복음주의 현황의 분석에 따르면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자 가운데 램, 피노크, 그렌츠, 맥그렌던은 후기 보수주의(postconservativism)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램(Bernard Ramm)은 그의 최근의 저서 [근본주의 이후](After Fundamentalism)에서 바르트의 사상에 심취해가고 있음을 선언했다. 여기서 그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줄 무늬로 그려진 바르트는 그가 인격과 그의 저서에서 만난 실재 바르트가 아니다고 피력한다. 램은 바르트의 신학이야 말로 계몽주의에 대하여 항복하지 않고 대응하여 쓰여진 개혁신학의 재정립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바르트는 모든 사람에게 맞는 것이 아니라 계몽주의가 복음주의 신학의 위기를 야기시켰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하여 필요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는다. 그가 바르트를 변호하는 방법은 좌로부터 또는 우로부터의 비판이거나 간에 이들이 바르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피노크(Clark Pinnock)는 그의 저서 [길을 추적하면서: 복음주의 관점에서 현대 신학을 통과해서 우리의 길을 발견하면서](Tracking the Maze : Finding Our Way Through Modern Theology from an Evangelical Perspective)에서 신학을 위한 네가지의 권위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성서, 전통, 체험과 이성이다. 그리고 후기 보수주의의 성격을 다음 같이 언급한다. 첫째, 성서의 인간성에 열리고 결과적으로 성서비판을 인정한다. 둘째, 성서 안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결과적으로 신학적 다원주의에 대한 큰 관용을 가지는 것이다. 셋째, 특히 고려할만한 변화의 시간 안에서 전통의 가치에 대해 새로이 존중한다. 넷째, 신성과 시간에 대한 하나님의 개방성에 대한 열린 논쟁을 한다. 다섯째, 진화를 기원이 보충적인 설명으로 설명으로 간주하는 용의가 필요하다. 여섯째, 구원에 있어서 이중예정(double predestination)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필요하다. 사후에 만남(a postmortem encounter)이거나 그들이 가진 빛에 근거한 불신자의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멸망하는 자들이 끝임없는 고통인 지옥 대신에 소멸론(annihilation)에 대한 개방이다. 일곱째, 문화를 변혁시켜서 복음주의적인 사회복음 내지 해방신학에 어떤 것을 도출시키는 그리스도 이념에 열려 있다. 여덟째, 오늘날 기적이 일어남의 관념을 받아들이는 용의가 필요하다. 아홉째, 복음주의 교리를 고백하는 모든 자들과 협력해서 일하는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즘(an evangelical ecumenism)이 요청된다.

피노크는 여태까지의 명제적 신학(propositional theology) 대신에 이야기 신학(narrative theology)을 제시한다. 전자는 일차적이며 후자는 이차적이다. 이야기는 역동적이며 독자나 청취자로 하여금 명제들이 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야기에 들어 가도록 초청한다. 그래서 신학은 이야기를 추상적 명제로 번역하지 않고 기독교 이야기를 탐구하고 선포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피노크는 이단과 정통을 다시 재정의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단을 이야기를 파괴하는 어떤 것, 그리고 정통을 이야기를 살리며 그것을 말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하는 어떤 것으로 재정의해야 한다. 이러한 신학의 종류 안에서 자유주의 신자들이 현대 이야기를 말하고 보수주의 신자가 하나님의 능력있는 행위를 시연(試演)하는 공간이 있을 것이다". 피노크는 이야기 신학이 명제 신학 보다 지식과 실천을 더 잘 통합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기준을 명제의 내용이 아니라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정함므로써 기독교 교리의 정체성 확립에 결정적인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그렌츠(Stanley Grenz)는 램과 피노크보다 더 극단적이다. 그의 저서 [복음주의 신학의 수정](Revisioning Evangelical Theology)에서 그렌츠는 신학을 하는 새로운 접근을 제시한다. 그는 신복음주의는 복음주의의 유일한 표현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표현이라고 본다. 그는 복음주의의 정체성을 특별한 영성과 관련하여 정의하고자 한다. 교리는 체험에서 나오나 교리는 체험을 형성한다. 그렌츠는 체험과 교리의 상호관계성을 말한다. "복음주의의 덕성은 어떤 세대나 어떤 표현에서나 신학에 자리 잡은 체험적 경건이다". 그는 수정적 복음주의와 전통적 복음주의를 개조시킨다. 독일의 복음주의 신학자 보크뮐(Klaus Bockmuel)이 시도한 바 성서에서 발견되는 교리를 체계화 하는 것이 고전적 형식의 복음주의였다. 그는 피력한다 "이것은 성서의 권위를 바르게 붙잡고 있으나 이 접근은 수정된 복음주의 신학을 위한 촉매로서 기능할 수 없다". 이러한 고전적 접근은 자유주의자와 신정통주의자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렌츠는 피노크과 마찬가지로 서사적 접근(a narrative approach)을 제시한다. 이것은 역사 안의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신학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within the faith community)만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정된 복음주의 신학은 실재의 모델을 구축하기 위하여 신앙하는 공동체의 신앙 헌신에 대한 반성을 추구한다". 여기서 그렌츠는 교리의 본질에 대한 린데벡(George Lindbeck)의 후기자유주의의 이해에 명료히 동의하고 있다.

그렌츠는 전통적 복음주의가 단지 성서에서만 신학 자료를 찾는 것과는 달리 신학 자료를 세가지로 제안한다. 그것들은 성서와 신앙공동체와 현대문화이다. 그러나 그는 자료와 규범을 일치시킨다. 여기서 그렌츠는 신학의 자료와 신학의 규범을 구분하지 않고 일치 내지 혼동하므로써 성서 유일의 복음주의 원리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 자신도 문화에 너무나 적응하는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으나 그는 신학이 항상 특수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에서 그의 역할을 다했다고 함으로써 신학과 교리의 역사적 상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신학은 현대 문화에 너무 적응함으로써 복음주의의 정신에서 이탈하고 있다.

맥그렌던(James McClendon)도 그의 저서 [신학으로서의 전기: 삶의 이야기가 신학을 어떻게 다시 만드느냐]( Biography as Theology: How Life Stories Can Remake Theology)에서 모던 시대가 지나간 후 이제 신학의 새로운 형식, 포스트모던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맥그렌던은 상황주의와 규범주의 사이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길은 행동의 바른 과정을 찾는 것이다. 그것은 인격 독립적인 것(person-independent)이다. 예컨데, 숨어 있는 도피자들이 발각당하는 것에서 피하기 위하여 우는 아이를 죽여야 하는가 하는 토론에서 요셉 플레처(Joseph Fletcher)는 엄마들이 누구와 같으며 그들이 속한 그룹이 무엇과 같느냐에 관하여는 질문하지 않았다. 이러한 공리주의가 지배하는 곤궁윤리(quandary ethics)와는 대조적으로 변화된 상황 속에서 성품 윤리(a character ethics)를 제시한다. 여기서는 성품을 갖고, 성품의 인격인 것이 도덕적 선책을 하는데 선조건이다. 성품이란 개인적인 방식으로 생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의 성격(character-in-community)으로 더 잘 이해된다. 공동체는 많은 개인들에게 정보를 주고 개인들을 형성하는 어떤 확신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맥그렌던은 새로운 환경에서 신학의 중요한 기능이란 명료한 정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성품을 구현하는 인격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연구한다. 그리하여 기능적 기독론을 제시한다.

맥그렌던은 전기적 신학(biographical theology)과 명제적 신학(propositional theology)을 대조시킨다. 명제적 신학이 추상적 개념들을 다루는 데 반해서 전기적 신학은 삶자체, 다시 말하면 그리스의 삶을 다룬다. "전기 신학에서 중심은 삶 그 자체들이며 더욱 정확하게는 한 분의 삶. 그리스도의 삶이다" 여기서 그는 1세기에 살았던 예수의 삶과 그의 공동체 안에서 세상에서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삶을 구분한다. 맥그렌던은 연대기적으로 완전한 예수의 삶을 얻을 수는 없다고 한다. 맥그렌던은 콘젤만(Hans Conzelmann)을 따르면서 예수의 초상화는 그릴 수 없으나 예수의 성품은 알 수 있다고 한다. 맥그렌던은 1세기에 끝난 예수의 삶과는 가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사람은 지속적이다. 그는 공동체 안에 지속적으로 사신다. 맥그렌던은 다음같이 피력한다. "죽음에서 예수는 다시 사셨다. 이 사실에 정위되고 자라난 공유된 삶은 예수의 고독한 삶과 연속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자의 삶은 의미심장하게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일부다". 여기서 맥그렌던은 역사적 예수의 삶과 케리그마적 그리스도를 연결시키지마는 예수의 인격을 그의 성품에 환원시킴으로써 기능적 기독론의 입장에 머물고 있다.

4, 정통적 개혁신학의 나갈 길

1) 근본주의의 교리적 협착성과 분리주의 극복

한국교회는 근본주의적 교리적 협착성과 교파분열을 극복해야 한다. 여기에는 미국교회의 영향이 크다. 1937년 6월 미국 정통장로 교단은 분열되어 성경장로교회(The Bible Presbyterian Synod)가 설립된다. 분열이유는 전천년설(premillenialism)과 신자의 자유( freedom of believers)에 관한 이슈였다. 그리고 술 담배 불가 등 성결된 삶에 관한 문제가 교단의 분열을 일으킨 것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분열되어 성경장로교회에 의해 페이스 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가 세워진다. 페이스 신학교에서 1956년 카브난트 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가, 1980년 성경 신학교(Biblical Theological Seminary)가 분열되어 나온다.

그래서 칼 헨리는 복음주의가 미국사회 안에서 가져온 "사회적 고립주의"(social isolationism)와 영적 개인주의(spiritual evangelicalism)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블라쉬(Donald Bloesch)도 근본주의가 분파적 특성을 교리적 핵심으로 쟁점화 함으로써 분열을 촉진했다고 비판하였다. 블라쉬는 근본주의(fundamentalism)란 인간의 종교적 전통을 하나님의 계시의 차원과 동일한 차원에까지 고양시키고 환난기전 휴거, 7세대, 안식일 주의, 알콜, 담배, 춤과 연극등 부차적인 문제에 매달리는 서민종교일 뿐이다고 비판하였다. 영국의 신학자 제임스 바(James Barr)는 미국의 복음주의를 다음같이 비판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전체적으로 주목할 만하게 기독교의 전투적인 분파가 되어 왔다". 그러므로 칼 헨리는 근본주의가 배교자로부터의 분리를 강조함으로써 반동적 정신보다도 사랑의 결여 정신에 의하여 지배받았고 그리하여 파산선고를 받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미국교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이 신앙은 같지만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극우파 근본주의자들 보다는 신앙이 다른 자유주의자들을 동료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21세기의 복음주의적 개혁신학자들은 많은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

2) 근본주의적 반지성주의 극복

보수교회가 지니고 있는 근본주의적 요소는 반지성적이고 반문화적인 삶의 자세이다. 근본주의는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제한한다. 그리하여 신자로 하여금 구체적인 삶의 영역으로부터 도피하도록 한다. 한국교회가 지닌 이러한 근본주의적 사고는 세대주의에서 왔다. 근본주의는 내면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와 율법과 은혜를 극단적으로 분리하는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계시를 교리적 차원으로 축소시키고 기독교 신앙을 개인적 경건으로만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근본주의는 기독교 신앙이 문화와 사회생활과는 관련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한국 보수교회는 이러한 세대주의 영향을 받은 근본주의적 사고와 태도를 버려야 한다. 근본주의적 경향이란 신앙적 체험과 교리에 대한 이성적 설명을 거부하는 반계몽주의 (obscurantism)의 태도이다. 그리고 자기들만이 교리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적 "배타적 사고방식"(ghetto mentality)이다. 이러한 반지성주의는 부흥주의자들 가운데 이성적 설득보다는 익살과 대중적인 위트와 그리고 복음송가 그룹을 통한 경배와 찬양 속에서 감정적 호소와 즉흥적 결단에 호소하는 기독교 전파로 나타났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체험이 신앙의 전부가 된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이 지니는 지성적 측면인 가치관과 세계관과 인생관의 변화는 간과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지성적 반성을 강조해야 한다. "기독교 계시는 우주와 인간과 역사의 의미는 이해할 수 있는 지성적인 드러냄의 형식으로 초월적으로 주어진다." 칼 헨리(Carl F. Henry)가 표명하는 바같이 하나님의 계시는 초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불가지적인 것이 아니다. 계시는 지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전달된다. 계시가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신약성경은 히브리어로 주어진 것과 같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계시를 수용하여 계시의 로고스를 따라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헨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불가지론(agnoticism)이나 반계몽주의자에 반대하여 진리의 음미가능성을 천명한다. "어떤 자는 말하기를 계시나 진리의 실험은 아주 부적절하다. 인간 피조물은 질문없이 신적인 것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리의 실험은 아주 적절한 것이다".

개혁신학은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나 불트만의 실존신학이 주장하듯이 계시란 하나님과의 대면이요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계시가 지니고 있는 명제적 내지 개념적 요소(propositional or conceptual elements)를 부인하지 않는다. 물론 계시는 문학적 내지 묵시적 비유나 기적이나 표적이라는 신적 사건 등 비명제적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이러한 사건들은 명제적 형태로써 성경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주신 진리는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일단 우리가 세속적 이성을 떠나서 계시적 로고스를 향하여 열리면 이성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이성적 반성과 학문적 탐구를 개발해야만 한다.

5. 한국 정통적 개혁주의가 나갈 길 : 열린 보수주의 - 후기 죽산의 신근본주의적 경향의 극복

1950년대 초 죽산은 장공(長空)과의 보수진보의 논쟁에서 기독교 복음의 정체성과 교리의 사도성을 수호하고자 했던 점에서 한국교회 신앙과 신학의 방향을 정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이런 면에서 죽산(竹山)은 한국교회의 신학적 앞길을 보여주는 "지로적 신학자"였다. 그러나 1959년 WCC 참여여부 문제로 통합측과 결별한후 1960년이후 후기 죽산은 교회의 순결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그룻된 신학으로 인한 오염의 위험 때문에 신앙사상이 다른 자들과 기독교적 교제를 나누는 것도 꺼린 극단한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그 구체적인 예가 진보주의자들이 있는 WCC 참여에 대한 반대와 NAE, RES 탈퇴, 빌리그래함 전도방식에 대한 비판 등이었다. 이러한 죽산의 극단한 분리주의적 입장은 미국에서 1930년대 메이쳔의 별세이후 근본주의자들 사이에 형성된 미국의 과격 근본주의(hyper-fundamentalism) 내지 신근본주의 사고와 유사하다.

첫째, 죽산은 1950년대 말 WCC참여를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WCC 참여를 반대하는 세력은 WCC 참여를 지지하는 세력과 분리되는 교단 분열을 야기하였다. 그리하여 예장총회는 통합과 합동으로 나누어지고, 죽산은 통합과의 분리이후 근본주의 입장을 더욱 강조하기에 이른다. WCC안에는 진보주의 교회도 있고 보수교회도 있다. 그래서 죽산이 선교의 방법적인 문제를 두고 여태까지의 전투적 근본주의 입장을 견지하여 교회를 분열시킨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죽산이 교리적 순결성을 강조한 나머지 교회연합운동을 반대함으로써 교단 분열을 초래하게 된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죽산은 1970년대에는 신복음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신복음주의 운동의 모(母)기관인 NAE(WEF)를 전투적으로 비판하기에 이른 것이다. 죽산은 NAE를 "신복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비판하였다. 죽산은 "WCC 소속 교파들 안에 머물면서 개인적으로 바른 신앙을 지킨다는 국제적 연합"으로서 "WCC와 NAE는 결국 같은 노선을 견지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합동측은 1963년 RES(Reformed Ecumenical Synod)에 1968년 정식회원으로 기입했으나 죽산의 신복음주의 비판으로 신학적 좌경화라고 단정하여 1972년 RES에서 탈퇴하기에 이른다.

교리의 순결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죽산은 신복음주의를 비판하면서 "신복음주의자들이 WCC의 포용주의와 관용을 비평하는 동시에 ICCC의 배타주의와 협량을 비난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죽산은 WCC의 포용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좋으나 ICCC의 배타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옳지 않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극단한 분리주의적 입장은 그의 스승 메이쳔(Gresham Machen)도 지지하지 않는 입장이다. 메이쳔은 [기독교와 자유주의]에서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부인하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재림론의 차이, 세례의 방식의 차이나, 성례의 효과에 대한 견해 차이나 심지어는 카톨릭일찌라도 "그러한 지엽적인 차이라면 기독교적인 교제(christian fellowship)를 나누는 일은 지극히 가능한 일"이라고 하였다.

셋째, 죽산은 [현대신학 비평]에서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인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전도운동까지 비판하고 있다. 죽산은 이 운동이 "첫째,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역사적 분계선을 파괴하려는 고의적 조직적 시도"로서 "헤겔의 정, 반, 합의 원리를 따라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종합의 상징"이며, 둘째, 빌리 그래함 정책은 모든 분리운동에 직접적 반항이 되어 왔다"고 비판한다.
죽산은 후기에 와서 NAE, RES 등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운동과의 관계도 단절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불신 세계와 불신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교회의 일차적인 복음주의적 선교의 사명에서 물러선 순결성 보존이라는 컴플렉스에 빠진 고립적인 태도라고 하겠다. 이것이 현대주의와 배교주의가 밀려오는 시대의 예언자로서 죽산이 교회의 순결을 강조하였기에 그가 초지일관 가졌던 개혁사상에 어울리지 않는 신근본주의적 경향이었다.

이러한 신근본주의 경향은 오늘날 총신대의 교수들 사이에 있는 사상과 색갈논쟁에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밖에 있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부정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사상적 동지끼리 일어난 정죄논쟁이며. 같은 사상을 가진 형제끼리 상대방을 매도하는 비생산적인 소모전이며 이것은 한국 보수주의의 앞날을 암물하게 하는 것이다. 보수주의의 대적은 자기 친구나 동지가 아니라 자유주의이며 현대의 세속주의이다. 이들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확고한 근거와 처방을 가지고 오늘날 교회와 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복음주의적 개혁주의자들은 열린 보수주의라는 큰 방향아래 집결하여 새천년 한국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주도해나가야 할 것이다.

맺음말

한국개혁신학은 열린 보수주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열린 정통주의를 말한다. 여기서 열린다는 것은 자기의 절대화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자기의 교리를 하나님 말씀의 표준에 비추면서 겸허하게 교리가 지닌 오늘날의 의미를 해석학적으로 조명하는 신학이다. 그것은 근본주의의 부정적 사고방식을 개혁하고 신정통주의의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며 복음주의 좌파의 타협하는 정체성을 바로잡는 하나님 말씀의 신학이요 해석학적 신학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대화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를 뛰어 넘는 역동성을 지닌 신학이다.

출처 : 명지새벽이슬
글쓴이 : 임왕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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