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의
[스크랩] 20세기 기독교의 성찰과 새 천년 기독인의 역할 -이만열 교수
향기나무 김성휴
2006. 11. 15. 16:56
20세기 기독교의 성찰과 새 천년 기독인의 역할
1. 들어가는 말
한국의 기독교는 19세기 후반부터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것이 아니었고, 이웃 나라에까지 들어온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선교사들의 입국에 앞서서 성경을 먼저 번역하고 그 번역된 성경을 도입하여 전파하는 과정에서 수 많은 새 신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선교사의 입국에 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로 자생적인 기독교라고 할 것이다.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는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였다. 성장과 발전에 따라 한국에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변화와 성장, 나아가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세동점의 시기에 서양문화의 도관의 역할을 감당,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에 공헌하였고, 한말 일제하에는 애국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 해방 직후의 새조국 건설운동과 군부통치하에서는 인권·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기독교의 이러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최근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 매우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형비리의 뒤켠에는 기독교인들이 온존해 있고, 교회와 교단의 행태는 사회개혁의 추세를 역진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온갖 비행과 어둠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고, 화해와 치유의 역할보다는 분열과 상처의 근원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자연히 기독교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게 되어 뜻있는 기독지성인들과 교계 지도자들은 한국 교회의 개혁을 외친 지 오래 되었다. 더구나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기를 맞아 기독교는 구태를 벗어버리고 민족과 사회 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 글은 지난 20세기의 한국 기독교회의 모습을 성찰하고 새 천년기에 감당해야 할 기독인의 역할을 조명함으로써 새 세기 새 천년기를 향한 우리의 지향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2. 한국 기독교의 성장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한 한국 기독교는 1990년대에 들어서서 그 성장이 둔화 내지는 정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1945년 해방 당시에 382,800명이던 기독교인은 1955년 1,000,482명, 1965년에는 2,255,193명에 이르렀고, 1967년 2,899,108명, 1979년 5,986,609명, 1990년에는 1990년 11,427,485명, 1992년 12,571,062명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장 비율이 4%이상을 유지하다가 3%대로 떨어지는 것이 1993년이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의 대표적 교단이라고 일컬어지는 6개 교단은 93년부터 3년간 평균 1%이상 성장한 교단이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수용 이래 성장 신화에 끝없이 도전하던 한국 기독교는 1990년대를 고비로 점차 그 성장이 둔화되는 추세였으며, IMF로 일시 성장이 회복되는 듯 하지만, 둔화 추세는 경제적인 안정과 함께 다시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수용 이후의 기독교의 성장을 살펴보자.
2-1. 한말 기독교회의 성장
1879년 네 사람의 한국인이 만주에서 스코틀란드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신약성경의 한글번역 작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성경이《예수셩교젼셔》라는 이름으로 번역 간행되었다. 이와 함께 번역된 성경이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반포되면서 기독교 전도가 본격화되었다.
복음서를 처음 반포한 이들은 초기의 수세자들과 성경의 번역·출판에 관여했던 한국인들이었다. 성경 간행 때의 식자공 김청송(金靑松)은 압록강 북쪽 만주지역의 한국인들에게 전도, 한꺼번에 75명과 25명이 수세토록 하였고, 초기의 수세자요 성경번역자였던 백홍준(白鴻俊), 이응찬(李應贊) 등은 1882년경에 한반도에 복음 전파를 시작하였다. 서상륜(徐相崙)은 1883년 초에 서울에 도착, 2년간 비밀리에 복음전도활동을 전개한 결과 1885년 초에는 70여 명의 세례청원자들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당시 로스가 쓴 편지에서 밝혀졌다. 주목되는 것은, 로스가 편지를 쓴 날자가 미국계 복음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1885년 4월 5일보다 약 1개월 앞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수용된 것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복음에 자발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한 한국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은 그 뒤의 한국 기독교의 성장, 발전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1885년 선교사들의 입국은 한국기독교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90년이 되기 전에 한국에는 100명 이상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가 이미 두 개나 생겼다. 복음을 수용한 한국인들의 열심과 사명감에 불타던 선교사들의 정열이 어우러져서 이룬 성과였다. 한말 교인들의 수가 "폭발적인 증가"를 이룬 것은 네비우스(Nevius)정책이나 권서들의 활동을 포함하여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한말'이라는 시대적 상황이다. 이 무렵이면 기성 종교가 한국인들의 정신적인 공허를 메꾸지 못했다. 조선조의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은 형식적 예론(禮論)과 폐쇄적 화이론華夷論)으로 한반도의 주변을 감도는 세계사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였으며, 불교 또한 그 생명력을 상실한지 오래 되었다. 기독교는 이같은 기성종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한국인들의 공허한 심성과 세계사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한편 조선후기로부터 누적된 파벌정치와 개항이후에 형성된 민씨 정권의 세도정치는 관료집단의 조직적 부패를 만연시켰다. 관리의 선발과 인사에서 공정성이 깨어지고 매관매직 현상이 노골화되었고, 권력남용과 뇌물이 횡행하게 되었다. 봉사의 직분이 될 수 없었던 관직은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하는 이른바 '가렴주구'의 수단으로 오용되었다. 이 때 생명과 재산을 위협받는 의지할 데 없는 가련한 백성들은 이 새 종교에 의지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교회와 선교사들이 관리들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기독교 선교의 '제국주의성'과 한말 선교사의 '양대인화'(洋大人化)가 함께 거론되어야 한다. 한말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 기독교회로 몰려든 것은 이러한 사회적 정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둘째는 대외적 요인으로 청일전쟁(1894~95)과 노일전쟁(1904~05)을 들 수 있다. 청일·노일전쟁은 교인들을 증가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전쟁 중 교회는 마치 피난민 수용소와 같았는데, 이는 교회가 '외국인의 소유'로 간주되고 치외법권적인 영역으로 인식되어 외국인 특히 일본군에게 위협받고 있던 한국민중들이 그곳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보호받았던 민중들은 전쟁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교인들의 깊은 신앙을 보고 그 후에도 계속 교회를 찾게 되었다. 청일전쟁 중 가장 피해가 컸던 평양을 그의 선교지역으로 갖고 있던 마펫(S.A.Moffett)도 이같은 증언을 한 바 있다. 노일전쟁 때에도 경의선 철로 주변의 주민들은 "태반이 실소(失巢)에 처하여 길가로 쫓겨나는" 극한상황에서 그리고 일본군의 잔학성이 전쟁의 공포와 위험을 더 실감시키는 상황에서 많은 민중이 교회를 찾게 되었다. 노일전쟁 전후에 일본군의 포학성에 시달리던 거의 2만명의 의지할 데 없는 선천의 백성들이 교회로 들어왔다는 것은, 그 표현이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을 준다.
셋째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는 민족적 상황을 들 수 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군대를 해산하였으며,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 등을 차례로 빼앗아 갔다. 주목되는 것은 이 기간동안에 '대부흥운동'과 '100만명 구령운동'(Million Souls for Christ)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당시의 민족적 위기를 두고 부흥집회에 참석한 한 지방관리가 "지금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길 외에는 달리 아무 도리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했듯이, 한국 민족의 절망적인 상태가 이러한 교회성장의 새로운 계기로 만들어졌다. 한국교회에 성령강림을 체험케 했던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보다는 죄의 깨달음과 용서를 체험케 한 영적 신생과 성결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대부흥운동기간에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하여는 엇갈리는 평가가 있지만 대체로 성장추세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2-2. 일제치하의 기독교회의 성장
일제의 강점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기독교인들 중에는 '매국원흉제거'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 민족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하였지만, 한국교회의 주류는 평온을 유지하였다. 일제 통감부의 의도에 따라 선교사들이 정교분리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데다가 대부흥운동과 백만명구령운동을 통해 한국기독교인의 강력한 항일민족의식을 누그러뜨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한국교회는 비교적 조용한 성장을 기할 수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10년대에 감리교와 장로교의 경우를 들어 한국 기독교의 성장이 둔화 내지는 퇴보했다는 지이 있지만, 1912∼19년의 기간에도 평안남북도 지역에서는 교회의 성장이 침체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장은 일제초기의 기독교탄압에 대해 한국 기독교인들이 국망(國亡)의 설움과 시련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으로 전환시켜 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국망 이후의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교회부흥운동이 민족의식과 일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10년부터 싹이 터서 1915년부터는 매년 부흥회로 발전하여 1950년경까지 계속된 강화도의 마니산 부흥회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로, 강화도가 "가장 성공적인 선교" 지역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 부흥회를 통해서이다. 이 부흥회의 마지막 날에는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남여를 불문하고 돌 하나씩을 가지고 마니산에 올라가 참성단을 보수하면서 부흥회를 했다. 이 부흥회는 "단군의 건국정신 즉 '하나님 숭배'와 '홍익인간'정신을 존중하는 동시에, 조상 때부터 하나님께 제사드리던 참성단을 보수 재건하는 것을 도리어 기독교인의 마땅한 의무로 확신했던" 기독교인들이 '단군정신과 기독교 신앙의 공존지대'로서는 마리산 부흥회를 시도했던 것으로, 민족의식이 잘 표출되고 있었다.
3 1운동은 복음전파의 새로운 통로를 제시하여 기독교가 '두번째 급속한 성장 시기'를 맞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우선 3.1독립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놀라운 활략상과 관련이 깊다. 3.1운동에서 보여준 기독교계의 활동상은 많은 한국인들을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자세를 갖게 하였다. 때문에 복음전파는 벌써 옥중에서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옥고를 치르면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고 있었다
1920년대에 들어 교회가 성장한 또 하나의 계기는 부흥운동이다. 이 때의 부흥운동은 그 전과는 달리 특정한 개인의 카리스마적인 영적 지도력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그 전에는 부흥운동이 집단적 신앙체험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1920년대에는 장로교의 김익두(金益斗)와 길선주(吉善宙) 같은 부흥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점은 길선주, 이용도 같은 부흥운동 지도자들이 그 전에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경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1920∼30년대의 부흥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데, 이는 한국이 처한 민족적 시련을 딛고 일어서려는, 말하자면 암울한 민족현실을 극복하려는 기독교신앙의 한 표현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의 부흥운동은 "암울한 민족현실 속에서 나름대로 민중의 희망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세'·'재림'을 강조하는 내세지향적 성격과, '회개'·'신생'을 주제로 한 내면적 성격은 당시 고양되고 있던 사회주의 계열이나 교회 내의 진보적인 청년계층으로부터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부흥회를 통해 정착된 한국 기독교인들의 '내세지향적' '신비주의적' 신앙성격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교회의 존재양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20-30년대에는 감리교가 '백년전진'(The Centenary Advance)운동을, 장로교가 '진흥'(振興, The Foward Movement; 전진운동)운동을 각각 벌여 교회성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결과 1920년부터 1925년까지 5년간의 성장율은 30%에 달하였다. 1934년도 감리교와 장로교를 합한 교세는, 교회수 3,498, 한국인 전도인수 1,458, 선교사수 335, 교인총수 367,220명이었는데, 세례교인은 9년 전에 비해 거의 배 이상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교회핍박이 가속화되던 1938년 이후에는 그 성장이 저지되었고 2차대전이 발발하던 1941년 이후에는 세례교인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일제의 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세계에 유례없는 성장을 기록했는데, 장로교의 경우, 1910년에 39,384명이던 세례교인이 1942년에는 110,002명으로 늘어나 32년간에 279.3%나 증가했던 것이다.
2-3. 해방 후 한국교회의 성장
해방은 일제 하에서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았던 한국교회로서는 신앙의 자유를 맞는 계기가 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하던 '옥중성도'들이 출옥하여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면서 한국교회를 재건하는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해방이 되기 전 옥중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출옥 후에 한국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전도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전도자를 양성할 것"이라는 복안을 세운 바 있는데, 이것은 해방직후 신학교 설립과 전도운동으로 구체화되어 갔다. 해방이 되고 국토가 분단되자, 남과 북에서는 각각 교회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먼저 전도운동을 일으켰다. 1945년 12월 초에 열린 '이북 5도연합노회' 는 6개항의 결의안을 통해 그 조직의 성격과 방향을 정했는데 그 중에는 해방을 기념하는 전도운동을 일으키자는 내용도 있었다. 이 전도운동은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남한에서는 '남부대회' 이후 교파의 환원운동과 분열이 가속화되어 교회 성장을 위한 전도운동이 구체적으로 계획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긴 하지만, 교단분열이 교회성장의 한 계기가 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교단의 분열조짐들이 드러나는 상황 속에서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등장은 기독교계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한국인들은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인식하였고, 이승만은 기독신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해방직후에 기독교계는 상대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기독교적 정권의 등장으로 기독교 전도와 외형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성장운동은 한국전쟁(1950∼1953) 중의 여러 부흥운동을 통해 이루어져 갔다. 전쟁 중에 기독교회는 구국봉사활동과 피난민 구호활동을 벌이는 한편 교파별로 전도 부흥운동도 전개하여 큰 성과를 올렸으며 따라서 전쟁 중에 교세가 증가하게 되었다.
한편, 이 무렵에 범기독교세력의 성장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뒷날 한국교회의 질적 성장에 반드시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만 평가될 수 없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서구계 여러 교파가 전쟁구호물자와 함께 대거 이식되어 전도활동과 교단설립을 서둘렀고 이 중에는 이단종파도 있었다. 교파들의 경쟁적인 전도활동은, 한국을 수많은 교파들의 전시장으로 만들기는 하였으나, 한편 기존의 교파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전도방법을 통해 외적인 성장을 이루었던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예로, 오순절 계통의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의 급속한 외형적 성장을 가져오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1960년대에 들어 한국교회에 새로운 기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 군정 이래 정권에 유착하여 그 시녀노릇을 하던 한국교회, 또 외세의 조종과 지방색 등으로 분열과 파쟁을 거듭하던 한국기독교계는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교회는 분열과 파쟁의 추태를 지양하고 화해·일치의 모습으로 민족에 봉사하는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런 깨달음 때문인지, 기독교계는 연합(에큐메니칼)운동과 '민족복음화운동'으로 일치 정신을 고양시켜 나갔다. 1964년에 발기된 '한국복음화운동추진회'의 결성과 1970년대의 민족복음화를 위한 대전도대회, 19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와 '엑스폴로 74'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어서 1977년 8월 15일∼18일에는 여의도 민족광장에서 '77민족복음화를 위하여'라는 대전도집회가 열려 연인원 150만명이 동원되었는데, 이 때는 1965년, 1973년과는 달리 한국인 강사진들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이 해에 다시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1984년, 종래의 선교사(宣敎史)적 개념에 따라 '선교 100주년'이 된다고 하고 있을 때, 한국의 기독교인이 천만에 이른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계의 이같은 성장은 앞서 말한 대부흥집회가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는 한편 각 교단들의 성장정책 또한 크게 주효하였다. 예를 들면, 통합측의 '5천교회, 150만명'이나, 합동측의 '1만교회 10개년 계획', 가미교회의 '5천교회 100만신도' 운동이 그런 것이다. 또 목사후보생이 목사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3년간의 단독목회 경력을 요구하는 의무조항도 교회설립을 촉진하였다. 이런 정책들은 기독교의 외형적 교세는 확충되었을는지는 모르나, 사회에 대한 교회의 이미지와 목회자 윤리를 추락시켰으며, 1990년대 교회성장 둔화의 요인이 되었다.
1980년대에 전두환 군부독재정권 하에서 교회성장이 이뤄진 것은 사회비판세력이 전면적으로 봉쇄당하는 상황에서 종교심의 내면화와 중산층의 보수화의 추세를 이용, 심령의 공허를 메꾸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이들의 현실도피적 종교심리를 해외선교의 열심으로 집중시켜 나갔다. 또 1980년대 학원의 파라처치(parachurch)세력이 보수·복음주의 계통을 중심으로 성경공부운동을 활성화시켜 나갔던 것도 범기독교 세력의 성장에 공헌했다. 최근, 1970∼80년대에 진보·보수로 양분되었던 한국 기독교계를 두고, 당시 진보계통이 민주화와 인권, 반독재투쟁 등 사회구원적,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을 때에, 보수측이 개인구원의 차원에서 국내전도와 해외선교에 힘썼다고 평가하려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2-4.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
지금까지 살펴 본 한국교회 성장은 그 요인이 다원적이며 복합적임을 알 수 있다. 그 요인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성장의 외적 요인으로서 교회사 전개에 영향을 미친 복잡 다기한 위기적 상황들을 들 수 있다. 그런 위기적 상황들이 선교와 교회성장의 기회로 적절히 이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봉건말기의 구조적 모순과 외세의 침략이 겹쳐 위기의식이 고양되었고 종말사상이 확산되어 갔는데, 그러한 상황전개가 새로운 복음을 수용, 확산시키는 데 기회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발발한 이래 노일전쟁, 일제의 한국 강점과 의병투쟁, 3.1운동과 국내외 민족독립운동, 일제 말기 신사참배강요와 기독교탄압, 민족분단과 한국전쟁, 군사쿠테타와 군부독재정치, 산업화에 따른 빈부격차와 소외현상 등 한국의 근대사는 위기와 갈등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외적 요인들의 전개가 기독교 내부의 교회성장의 요인들과 상승적으로 작용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둘째, 한국의 선교 초기부터 제시된 선교원리로서의 Nevius정책과 그것을 구체화하여 추진한 일련의 선교과제들, 또 교육 의료 등의 연계된 선교사업들은 교회성장과 기독교세 확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점과 관련, Nevius정책을 채택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한 장로교계가 그렇지 않은 감리교계보다 교회성장이 뚜렷하였다는 점도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셋째, 복음화를 위한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교회성장의 초석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기도운동과 전도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1906년,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을 목격하면서 민족독립과 민족복음화를 위한 구체적인 기도제목을 갖고 시작한 새벽기도운동은 오늘날까지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한국기독교인이 산재한 세계 각처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 기도운동은 복음화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힘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운동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한국교회의 성장이 설명될 수 없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기도의 토대 위에서 복음화를 위한 전도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호별방문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축호(逐戶)전도를 비롯하여 각 교회와 교단들이 개별 혹은 연합적으로 전개한 여러 번의 전도운동은 전도의 사명감을 고양시키는 한편 많은 개종자를 얻게 하였다.
넷째, 1960년대 이후의 성령운동이다. 이 운동은, 같은 시기의 민족복음화운동과 같은 대형전도운동과 학원내의 파라처치 운동, 그리고 경제성장으로 여유를 갖게 된 중산층을 상대로 한 성경공부와 함께,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특히 성령운동과 함께 강조된 왜곡된 축복관이, 복음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인들을 들뜨게 만들어 한국 교회의 외적 성장을 가능하게 한 촉진제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은 곧 많은 사람들이 산업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세속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기독교에 귀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주도한 교파 교단이 성령운동과 직간접으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세속적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물질적 욕구와 세속적 지위를 축복과 관련시키고 중산층의 기득권 확보와 정치권의 야심을 기독교신앙으로 값싸게 담보하면서 '삼박자구원'의 논리에 스스로 빠져 들어가기도 했다. 빗나간 성령운동이 이러한 비(非)복음적 신앙행태를 부채질하였다. '복음화'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없지만 교회는 이들 세력에 의해서도 외적인 성장을 이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섯째 1970년대에 부쩍 늘어난 개척교회가 교회성장을 관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개척교회 설립은 교세확장과 교회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각 교단들은 한 때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목사후보생에게 일정기간 단독목회의 경험을 쌓아야만 목사로 안수하겠다는 정책을 강행하였다. 이 정책은 개척교회 설립을 부채질했고, 한 때 교단의 지원을 받으며 그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그 결과 교파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심화시켰고, 심지어는 한 아파트 상가에 여러개의 교회들이 난립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필요한 교파대립과 교회난립의 개탄할 현상은 현재 러시아 등 선교지에서도 가끔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교세의 실속없는 성장을 의미할지는 몰라도 진정한 '복음화'일지는 의문이다.
위에서 열거한 한국 교회성장의 요인들은 서로 유기적 연관성을 띄고 있다. 비록 그 요인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다시 종합하는 작업을 통해 한국교회의 오늘날까지의 성장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국기독교 성장의 요인 하나를 더 지적하는 것이 좋겠다. 그것은 교회성장 전개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면서도 지금까지 비교적 덜 알려진 한국기독교의 '성경기독교'적 성격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이것은 곧 성경이 한국 기독교 성장에 미친 영향이라 할 것이다.
여섯째, 성경의 번역 보급 그리고 사경회의 열심 등이 한국 기독교의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선교사 입국 이전에 외국에서 번역, 출판된 성경은 국내에 반입되는 과정에서 전도가 이뤄졌고 그것이 국내에 널리 보급되면서 한글운동이 일어났으며, 뒤이어 사경회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한국의 복음화사업은 결정적인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이같은 성경의 번역 출판 보급 성경공부 등의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한국기독교를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명명한 바와 같이, 바로 이 '한국기독교의 성경기독교적 성격'이 한국기독교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3, 한국교회의 성장둔화와 그 요인
1990년대 들어서서 한국교회의 성장 둔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성장과 '성장둔화'에 대한 주장이 엄정한 통계와 과학적인 분석을 거쳐 이뤄진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설사 1990년대에 들어서서 '둔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는 주장이, 검증을 거친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아직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성장둔화' 문제는 최근 여러 차례 학술토론을 거친 바 있었기 때문에, 다음의 논의도 일정하게 그런 논의들에 근거해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종교인구가 감소하는 것은 비단 개신교만의 문제는 아니고 종교 일반의 현상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교회 성장이 둔화하는 요인은, 사회적인 것과 기독교 내부의 문제로 대별하여 개조식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3-1. 사회적인 요인
첫째, 가장 큰 요인은 우리 사회가 경제 성장에 따라 긴장감이 해이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앞에서 한국 교회의 성장과정과 그 요인을 거론할 때, 환경적 요인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한국사는 기독교수용시기 이래 위기의 연속이었고 그것이 기독교의 성장에 외적인 요소로서 크게 작용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비근한 예로, IMF가 닥쳤을 때에 교회당 출입자 수가 늘어났고 대학입시철에 새벽기도회가 열심을 더했다는 것은 이를 방증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잘살게 된 환경의 변화는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한국 교회가 급성장하는 시기가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걸고 경제적 성장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을 때였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 살아보세'라는 슬로건이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을 때, 기독교계는 '성령운동'과 '삼박자 구원'을 강조하는 한편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슬로건을 같이 내세웠다. 양측은 타이밍을 맞춘 듯 절묘하게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었다. 경제가 일어나는 것은 '삼박자 구원'에서 강조하는 물질적 축복과 맞아 떨어졌고, '잘 살아보세'는 설교와 기도에서 강조하는 '금생(今生)의 복락과 내세의 천당'과 아우가 맞았다. 기독교는 그래서 1970-80년대의 국가의 기본정책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무역고는 세계 11위를 마크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한때 1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OECD에 가입함으로 선진국 문턱에 올라섰다.
물질적 풍요는 종종 정신적 황폐화를 불러오기도 하였다. 현세가 배부르고 따뜻해지면 내세에 대한 간절함이 덜하거나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도 살만 하면 하나님을 떠나 그 진노를 불러일으켰다. 앞서간 서양 나라들의 교회는 한국교회의 미래모형이 아니랄 수 없다. 기독교회와의 관계가 우리보다 훨씬 가까웠던 그들의 교회는 더 이상 우리에게 성장을 가르쳐 주지 않고 있다. 따라서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한국 교회 성장의 둔화현상은 기본적으로 경제성장의 당연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경제성장이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둘째, 종교의 기능적 대행물이 출현하여 더 이상 종교를 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은 1980년대 후반부터 그동안 교회가 수행해 왔던 기능을 대신해 주는 대행물을 급속히 발전시켰다. 관광지, 휴양지,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이 급격히 증가되었으며, 특히 서울 근교와 지방 곳곳에 콘도와 호텔이 세워졌고 각종 위락시설, 유흥시설이 마련되어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자가용 승용차의 급증과 도로망의 확충은 휴일에 고속도로와 국도로 행락 인파를 유인했다. 자가용과 여가는 서로 손잡고 인간의 향락성을 부추기는 반면 그 종교성은 점차 소멸시켜 갔다. 자가용과 비행기 등의 발달은 물질적 속도감을 만끽케 함으로써 종교적 정적성을 점차 빼앗아 갔다. 이와 함께 1988년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는 해외여행을 증가시켰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한층 바쁘게 만들었다. 분주해진 인간들은 휴식을 요구하게 되어, 종교적 수련을 쌓는 기회로 사용되어 왔던 정기 휴일은 이제는 휴식의 기회로 점차 바꿔지고 있다. 주말에 휴식이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집에 묶어두는 또 하나의 요인은 TV이다. 가구당 TV 보유율이 1975년의 30.2%에서 1990년의 97.2%로 늘어났고 시청율도 1977년 54.4%이던 것이 1993년에는 94.8%로 증가하였다. 1인당 평균 주당 TV시청 시간도 1977년의 14.3시간에서 1993년의 17.5시간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여가산업의 급속한 발달은 교회참여나 헌신을 약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버렸다.
종교에 대한 대체물은 여가산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주체사상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이념은 기성종교의 이념과 경쟁하거나 젊은이들에게는 그것으로 종교적 공간을 대체시키고 있으며, 정신의학과 상담기술의 발달은 커다란 정신적 치유효과를 보이면서 종교적 신유운동을 비웃고 있다. 실제로 비종교인이 종교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필요성을 못 느낀다(35.2%)"는 것이었는데 그 비율은 5년 전의 12.7%보다 훨씬 높았다. 이제 종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른 데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인구구조의 변화와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를 들 수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구비에서 젊은 층 인구는 감소하고 장년, 노년층 인구는 늘어나고 있는데, 젊은 층이 타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개신교회로서는 젊은 인구의 일반적인 감소와 장년, 노년인구의 일반적인 증가가 교회성장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 왔다.
한편 여성의 취업확대가 종교 인구를 감소시켰다. 흔히 박탈감을 더 경험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더 종교적인데 여성의 신도비율이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남성과 비슷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여성의 종교성은 남성의 종교성과 비슷하게 낮아지는데, 실제로 여성들이 취업하고 경력을 쌓는 일에 몰두할수록 종교에 대한 참여도는 감소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1980년대 이후 늘어나는 여성의 취업율(1980년 522만, 1985년 583만, 1990년 738만, 1994년 800만)은 여성의 종교참여와 종교적 관심을 약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교회의 성장둔화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3-2. 교회 내적인 요인
첫째 '거품교인'의 증가를 들 수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교회의 대형화 추세에 따라, 전도에 의한 실질적인 교인의 증가가 아닌 '수평이동'이나 '거품교인'들이 많이 늘어났다. 여기서 '거품교인'이란 믿음이 없이도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을 말한다. 거품교인'의 유형도 여러 가지여서, 체면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 경우, 기복신앙의 유혹에 따라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 실리추구적인 측면, 교육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경우, 친교장으로서 교회이용 등 이런 저런 목적으로 출석하는 교인의 수가 한국교회의 양적 통계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이른바 '거품교인'들이 경제성장에 따른 여가문화와 다변화된 사회에 관심을 돌림으로 통계상 교인 수는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또 이 교회 저 교회에 이중 삼중으로 통계에 잡힌 신자들의 수도 상당한 편인데, 정부통계와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둘째, 교회의 자기 정체성의 약화를 들 수 있다. 현대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 경제성장은 상대적으로 교회의 부유화를 초래하여, 세속화되고 있는 교회는 종교적인 기구로 전락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교제를 나누며 사랑과 희생, 봉사와 정의를 실천, 확산시켜 가는 공동체인데, 최근에는 이 같은 정체성을 점차 상실하고 세속적인 현실에 영합하는 한편 신흥 '종교 귀족'을 탄생시키면서 '종교적 왕국' 구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 목회자의 연성 상실을 들 수 있다. 목회자들은 교회 일과 세속적인 관심 때문에 매우 분주하다. 그 때문에 목회자는 기도하는 무릎을 상실하였고 성경과 신학을 심도 있게 연구하지 않아도 그 양심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안일한 성경연구에다 기존에 나와 있는 성경공부책이나 외국의 베스트셀러를 소개하는 대리자로 전락하고 있다. 매주일 설교를 준비, 공급하는 기관이 성업중인 것은 왜 그럴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 속에 생명의 말씀으로 육화(肉化)시키고 실천하는 구도자의 과정없이 그대로 교인들에게 설교자로 나섬으로 목회자 자신은 하나님 말씀의 대리자이기보다는 종교적 정보전달자가 되어 버린다. 그 정보전달자가 무인가 신학교 등에서 양산된 무자격 교역자라면 한국교회의 앞날은 암담할 뿐이다.
거기에다 교회의 대형화는 목회자의 교인양육 사역에도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대형화는 한 목회자의 감당할 수 있는 양육의 범위를 넘어섰고 목회자와 교인 사이의 인격적인 교류가 상실되면서 상당한 거리감이 형성되었다.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인격적인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겨우 교회라는 울타리를 통해 묶여있던 신자들은 언제 그 밖으로 튀어나갈 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대형교회를 과시하는 한국교회에 성장둔화의 중요한 요인이다.
넷째, 서열화된 교회 직분구조와 리더십의 부재를 들 수 있다. 한국 교회 리더십의 문제는 한국 교회의 자율적인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다. '섬김을 통해 이끈다'는 기독교 본래의 리더십이 왜곡된 데다 서열화된 직분관과 신자들의 영적인 타율성 의존성이 또한 문제다. 모든 교인들은 교역자에게 매어 있도록 훈련받고 있으며, 영적인 문제를 해결한 수 있는 성숙성은 거의 갖지 못한다.
그리고 교회의 직분은 은사에 의해 부여된 기능적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분을 계층적 서열로 잘못 이해하거나 바꾸어 놓고 교회 공동체가 운영되고 있다. 그 결과 교회의 직분이 마치 세속적인 계급 모양으로 서열화되어 교회안의 민주적 공동체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공동체에 속한 모든 성도는 각 개체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갖고 있으며, 각 성도는 교회의 사역자요 지도자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층화 내지는 서열화되어 있는 교회의 직분 구조에서 각 직분을 가진 성도는 그 직분과 은사를 거의 매몰시켜 버리고 말았다.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세속적인 리더십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보여주신 리더십의 모형인 '섬김을 통한 리더십'을 교회와 사회 속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 섬김을 통한 리더십의 실현은 교회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새로운 선교의 장을 개척해 가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다섯째, 미래와 후세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다. 교회의 대학부나 청년부에 대한 목회비전이 결여되어 있고, 장년 중심의 교회운영으로 교육전담 목회자가 부족하다. 대부분의 교육목사는 교회행정과 교육을 함께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고 있다. 수십년래 취해 온 그와같은 정책의 당연한 결과가 현재 맞고 있는 성장의 둔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주일학교가 이래서는 안된다고 걱정하던 것이 벌써 몇십년이 지났는데, 그 동안 한국 교회는 미래와 후세를 위한 투자를 게을리했다. 미래를 위해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 그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1970-80년대에 교회가 성장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해방 후와 6.25때에 한국 교회가 주일학교를 통해 뿌린 씨앗이 늦게나마 싹이 트고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각 교회마다 성장중심의 목회를 강조하면서 그 성장의 목표를 헌금을 낼 수 있는 장년층에 맞추다 보니 장년 위주로 교회의 프로그램이 편중되었고, 후세들을 위한 주일학교 교육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 한국의 해외진출이 본격화되면서 교회는 다시 해외선교에 열을 올리게 되는데, 개교회는 자기 과시에다 교회의 응집력을 제고할 수 기회로 이용하게 되었다. 교회의 목표와 정책의 편중성은 상대적으로 주일학교 교육에 투여하는 비용이 저조하게 되었다. 투자의 부실은 과실의 빈곤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선교 초기, 한국 교육의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교회는 이제는 세속 교육을 뒤따라가는 형편에 처지게 되었다. 그 결과 세상의 문화는 교회에 다니는 젊은이들에게도 재미를 끌고 있지만, 교회는 재미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갔다. 이는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한 투자를 더욱 강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경고다.
여섯째, 교단 분열과 개교회의 불화 및 경쟁관계가 교회의 성장을 둔화시키는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지방색은 일반사회의 지방색이나 파벌 의식이 조장되기 전에 시작되었다. 가령, 일제 하 서북지방과 경기 지방간의 긴장과 분열은 오랫동안 계속된 것으로 이것은 일제하의 한국 교회의 일본에 대한 신사찹배투쟁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또 해방 이후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그것이 아무리 변명된다 해도, 초기 선교지역의 분할과 관련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지방의식이나 파벌의식이 구체화하기 전에 한국 교회의 파벌은 먼저 보였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한국 민족 앞에 회개해야 할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1994년 유선 텔레비전 방송국 허가를 당국에 촉구하는 개신교 보수교단들의 성명서가 각 일간 신문지 1면에 발표되었다. 이 때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간판을 가진 105개의 교단이 있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식있는 신자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언필칭 사랑과 화평을 입버릇처럼 외우던 교회가 걸핏하면 분열하여 같은 간판을 건 105개의 장로교단이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1993년 기독교문사 발행의 《기독교연감》에 의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가진 교단만 58개가 등록되었는데, 실제로는 105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단의 분열은 실질적으로 어떠한 교리나 신학의 차이에서 온 것이 아니며, 교인들에게 교회에 대한 회의를 안겨 춰 점차 교회를 떠나게 한다.
일곱째, 사회를 향해 섬김과 나눔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데서 교회성장이 둔화되고 있다. 양적 성장의 추세 속에서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자체의 물적 인적 자원을 사회봉사나 구제에 활용하기보다는 대부분을 교회당 증축, 기도원이나 수양관 건립, 교회묘지 구입 및 교육관 건축 등 보이는 일, 대형화하는 일에만 치중했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한국 교회 성장을 부추기는 동인이 되기도 했고 성장의 결과로 과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에 치중하면서 윤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한국사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와 함께 목회자 및 교인들의 윤리성 결여로 인해 사회적 신뢰가 실추되는 것도 교회성장 둔화에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여러 여론 조사에서 목사의 정직과 윤리성이 다른 종교의 성직자보다 저조하므로 교회성장의 길을 막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섯째, 사이비 종파로 인한 종교에 대한 불신도 한 요소이다. 오대양사건, 시한부종말신앙, 영생교주사건, 아가교사건 등 사이비 종말론이나 사이비종파의 발호는 항상 그 모체가 교회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자기 정체성과 고도한 윤리성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물량주의, 기복신앙, 반지성주의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 속에 이런 것들이 번식되었던 것이다.
4. 민족사와 기독교 (생략)
4-1. 반봉건·개화운동과 애국계몽운동
4-2. 국권회복·독립운동(삼일운동과 임시정부운동, 무장투쟁, 외교운동과 무실역행운동)
4-3. 인권·민주화(평등 정의) 운동 (유신정권과 신군부정권)
4-4. 통일운동(분단체제의 형성에 방조, 민주화운동의 한계로 통일운동, KNCC통일선언과 글리온 회의, 북한돕기운동과 한국기독교북한동포후원연합회 등)
5. 한국교회의 반성과 새로운 과제
20세기 한국 기독교는 성장과 그 둔화 현상을 경험하였고 성장 정체(停滯)의 이면에는 한국교회의 반성적인 과제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 기독교의 민족사와의 관계를 좀 더 분명하게 살필 수 있다면, 한국기독교가 한민족사에 끼친 긍정적 성격과 부정적 한계를 직시하고 새천년기의 과제를 논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한국 기독교는 외형적으로 세계 선교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빨리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력과 성장의 뒷켠에 숨겨진 어두운 모습들은 교회성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글을 끝맺으면서 우리는 한국교회 성장의 긍정적 및 비판적 성격을 지적하고 앞으로의 과제도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5-1. 기독교가 끼친 긍정적 성격
한국에 기독교가 수용되고 성장함에 따라 한국사회에 미친 긍정적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대로, 한글문화를 민중 속에 정착시키는 등 한국의 봉건사회를 개혁하는 데에 기독교가 앞장섰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한말 일제하에서는 민족의 독립을 보전하고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한, 말하자면 민족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것이 긍정적 성격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이다.
기독교의 수용, 발전의 의미는 이보다 근원적인 데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적인 가치관(윤리관, 노동직업관, 소유관, 축복관, 세계관 등)이, 부분적이긴 하지만, 한국사회의 기존의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거기에다 기독교가 갖는 신관(神觀)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훨씬 크다고 본다.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존재도 그 절대성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관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상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 파장은 한국인의 가치관 형성과 민족운동·시민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의 군국주의와 소련식 공산주의, 군부독재에 투쟁하는 역량은 사실상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존재도 절대화할 수 없다는 기독교적 신관에서 출발하였다. 또 기독교적인 인간관은 혈통신분제를 부정하고 남녀의 평등을 주장하는 윤리적 근거를 제공하였을 뿐아니라 천부적인 권리로서의 인권을 확립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이 한국기독교가 한말 일제하 그리고 군부독재하에서도 인권·민주화운동과 반독재운동에 앞장섰고 기독교적인 보편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예언자적 역할을 그런대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확고한 신관과 인간관을 가졌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가 미친 반봉건·근대화운동, 국권회복운동과 통일운동 등 민족운동(앞의 4. 부분)에서는 한국 기독교의 긍정적인 성격을 더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5-2. 한국기독교가 감수해야 할 비판 두 가지
한국기독교는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많은 식자들에 의하여 때로는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옷로비' 사건을 비롯하여 한국사회의 대형비리의 이면에 거의 예외없이 기독교인이 개재되어 있다는 현상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인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25%를 상회하는 1,000만명을 훨씬 넘어섰는데도 거기에 상응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의 확립이나 그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적 변혁을 꾀하지 못한 것도 이런 비판을 정당화시켜주고 있다.
한국기독교가 외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개혁적 영향력을 갖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과 관련, 필자는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신앙과 행위의 분리에서 시작되는 이분법적 신앙행태요, 다른 것은 왜곡된 '복사상'이다.
먼저 한국기독교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 신앙과 행위의 분리문제다. 성경과 교회가 가르치는 기독교진리와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이 생활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연결, 실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적 가치관이 개인화·사회화되지 못했다. 이렇게 신앙과 행위가 분리되게 된 이유를 두고, 기독교수용 이전에 있었던 한국의 전통적 성리학사상이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이단시하고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하는 주자학을 정통시함으로써 사실상 '지행분리'(知行分離)를 용인하는 사상적 풍토를 조성하게 되어 한국기독교에도 그같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한국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장로교가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사상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행위를 신앙에서 분리시키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혹은 그 이유를 전적으로 신자개인의 실천의지와 관련시키는가 하면, 사회의 구조악에다 더 큰 비중을 두기도 한다. 하여튼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 할 시급한 과제의 하나는 이 '신앙과 행위의 분리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과 행위의 분리문제는 한국기독교의 이분법적 신앙형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가 사상적으로 이분법적 사고구조를 뿌리깊이 갖고 있는 한국사회에 접목되면서 복음 자체가 이분법적으로 해석된 부분도 없지 않다. 특히 인간의 몸을 영과 육으로 이분하는 인간관과, 하나님의 일과 세속적인 일로 구분하는 노동·직업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나라와 구분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세속사에서 일정하게 제한시키는 등의 사상에서 한국교회의 이분법적 신앙형태는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이분법적 신앙구조 하에서는 기독교진리를 사회화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구조하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학문, 노동, 직업, 전문기술이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나 하나님의 나라와는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극기독교사에서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근본주의적 보수신앙 전통과 관련되어 심화, 발전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교회성장이 대부분 보수신앙과 관련되어 있는 추세로 본다면, 이분법적 신앙행태가 한국기독교를 거의 지배하게 되었던 것은 자연스런 결과로 보인다.
한국기독교가 사회변혁에 거의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 것은 '정교분리'라는 이분법과 관련이 깊다. 한말 일제하에서 구미의 선교사들은, 극동에서 일제의 역할을 두둔하는 본국 정부를 고려하여, 한국에서 정치와 종교의 역할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지도하였고, 통감부 설치 이래 일제도 기독교에 대해 정교분리정책을 강행하였다. 이 정책은 기독교가 인간성과 민족의 생존권을 말살하려는 전제적 통치권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에 그 본질적인 의도가 있었다. 정교분리론은 한국교회 보수진영에 의해 면면히 전승되어지면서 최근에는 편의적으로 오용되면서 균형성을 상실했다. 정부에서 협력을 요청할 때나 어떤 정권에 지지와 박수를 보낼 때에는 정교분리론에 구애됨이 없이 행동하던 자들이, 반대로 비판해야 할 때나 투쟁해야 할 때에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표리부동하게 불간섭주의로 나갔다. 이것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교분리론'에도 합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용기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 외에 다름 아니다. 한국기독교의 정교분리론은 보수교회들을 권력에 아부하는 집단으로 만들어가는 최면제 구실을 해 왔고 한국사회에 대한 교회의 예언자적인 소리를 막는 재갈 구실을 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기독교계의 '반(反)정교분리론'자들의 현실참여는 자신들이 고수하였던 예언자적인 사명을 계속 수행할 수 있는가의 시험대에 올라 있고, 한편에서는 거기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한편 한국기독교는 왜곡된 '복 사상'이 기독교를 물질주의적인 종교로 타락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한 지 오래다. 특히 1960년대 이래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이 냉랭한 한국교회를 뜨겁게 하여 교회성장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내세운 '삼박자 축복(구원)론'은 기독교적인 복을 세속적인 것으로 대치, 변질시켜 버렸고 기독교 자체를 기복적인 종교로 타락시켜 버렸다. 한국기독교 일각의 '삼박자 축복'에 의한 '복 사상'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것이 복"(마 5: 10)이라는 말씀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 35)는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를 왜곡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바알의 전당'으로 변질시켜 가고 있다. 이러한 '복 사상'은 소유에 대한 강한 집착이 전제되어 있는데, 이런 비기독교적이요 왜곡된 사상을 한국기독교가 극복하지 않는 한 자기갱신은 물론 사회개혁도 기할 수 없다.
5-3. 새천년기의 과제
한국기독교는 20세기의 엇갈린 경험에도 불구하고 새세기 새천년기를 맞아 새로운 과제와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성장 둔화의 요인'과 '한국기독교가 감수해야 할 비판 두가지'는 한국기독교의 새 세기를 위해 시급하게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요소다. 그밖에 몇가지를 추가 지적함으로써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의 경험과 한국의 문화, 상황을 바탕으로 한 신학과 기독교문화를 창건해야 한다. 한국기독교는 아직도 자신의 외적 성장에 걸맞는 자기의 신학과 문화를 갖지 못했다. 자기성장에 걸맞는 신학이란 한국적 상황과, 자신의 고민과 체험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개성적이면서 기독교적 보편성을 결여해서는 안된다. 그 신학적 관심은 한국의 전통과 문화의 문제에서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문제·인권과 민주화·사회정의·환경·다원사회문제·민족통일·평화의 문제 등에 확대되어야 한다. 그 신학을 바탕으로 한국기독교계가 공유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가져야 하고, 백여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가꾸지 못한 '한국의 기독교문화'를 수립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교회관의 정립과 그 실천이다. 이는 기독인들이 대외적인 역할을 강조하기 전에 자기역량을 온축하기 위해 가져야 교회적 지향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이상과 목표는 대형·부자·모우는 교회 지향이다. 이 지향을 소형·무소유·나눠주는 교회로 방향전환해야 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한국기독인이 이분법적 신앙행태와 왜곡된 '복 사상'을 극복하는 노력과 병행하여 추진해야 할 과제다. 이것은 또한 초대교회 중 예루살렘형 교회형에서 안디옥형 교회로 개혁시켜 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셋째, 교파·교단·교회간의 불필요한 분열과 대립을 해소하고 화해, 연합, 협력, 일치해야 한다. 한국기독교계가 겪은 분열과 파쟁, 갈등과 경쟁은, 사랑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고 이율배반적인 가치관을 형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에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고 선교의 문을 막았다. 근래 우리 사회의 남북, 동서의 지역간 갈등과 지역감정은 망국병이라고까지 비판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기독교계의 파쟁갈등이 그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이 시대의 기독인의 책임을 통감케 한다. 화해와 일치는 최근 '열린 진보'와 '열린 보수'를 통해 급진전되고 있으나 해외선교 등 여러 방면에서 더욱 확대해 가야 한다. 이같은 노력은 한국사회의 지역간 계층간의 벽을 허물게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민족분단을 해소하는 민족사적 사업을 선도하는 계기를 만들 것이다.
넷째, 한국기독교가 오늘날과 같이 성장한 섭리사적 의미를 숙고하면서, 그것이 민족통일을 대비하고 세계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며 국제간의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거기에 상응하는 결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통일을 위한 노력과 함께 통일이 막상 이뤄졌을 때 분단의 고통과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와 용서를 실현함은 기독인에게 주어질 큰 역할이 아닐 수 없다. 또 그동안 제일세계가 담당했다가 현재 거의 공백상태에 처하게 된 세계선교는 그 대리적 담당자가 마련될 때까지만이라도 한국교회가 겸손히 담당하는 것이 한국교회를 성장시킨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새세기의 기독인은 또한 일본과의 문제에서 해결해야 할 화해와, 베트남에 대해 지고 있는 부담의 해소, 그리고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가한 반인권적 학대 등에 대해 져야 할 책임과 역할이 있음을 통감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책임과 역할들을 나열하는 것은 기독인이 처한 현실에서 자신의 선택을 따라 역할을 감당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끝으로 새 천년기의 기독인의 역할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실현하되 그것을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 구석구석으로 확대해 가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한국의 기독교는 19세기 후반부터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것이 아니었고, 이웃 나라에까지 들어온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선교사들의 입국에 앞서서 성경을 먼저 번역하고 그 번역된 성경을 도입하여 전파하는 과정에서 수 많은 새 신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선교사의 입국에 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로 자생적인 기독교라고 할 것이다.
한국에 수용된 기독교는 세계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였다. 성장과 발전에 따라 한국에 기독교는 한국 사회의 변화와 성장, 나아가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세동점의 시기에 서양문화의 도관의 역할을 감당,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에 공헌하였고, 한말 일제하에는 애국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 해방 직후의 새조국 건설운동과 군부통치하에서는 인권·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기독교의 이러한 역할에도 불구하고 최근 기독교는 한국 사회에 매우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형비리의 뒤켠에는 기독교인들이 온존해 있고, 교회와 교단의 행태는 사회개혁의 추세를 역진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는 온갖 비행과 어둠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고, 화해와 치유의 역할보다는 분열과 상처의 근원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행태는 자연히 기독교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게 되어 뜻있는 기독지성인들과 교계 지도자들은 한국 교회의 개혁을 외친 지 오래 되었다. 더구나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기를 맞아 기독교는 구태를 벗어버리고 민족과 사회 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 글은 지난 20세기의 한국 기독교회의 모습을 성찰하고 새 천년기에 감당해야 할 기독인의 역할을 조명함으로써 새 세기 새 천년기를 향한 우리의 지향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2. 한국 기독교의 성장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성장과 발전을 거듭한 한국 기독교는 1990년대에 들어서서 그 성장이 둔화 내지는 정체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1945년 해방 당시에 382,800명이던 기독교인은 1955년 1,000,482명, 1965년에는 2,255,193명에 이르렀고, 1967년 2,899,108명, 1979년 5,986,609명, 1990년에는 1990년 11,427,485명, 1992년 12,571,062명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장 비율이 4%이상을 유지하다가 3%대로 떨어지는 것이 1993년이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의 대표적 교단이라고 일컬어지는 6개 교단은 93년부터 3년간 평균 1%이상 성장한 교단이 하나도 없었다. 따라서 수용 이래 성장 신화에 끝없이 도전하던 한국 기독교는 1990년대를 고비로 점차 그 성장이 둔화되는 추세였으며, IMF로 일시 성장이 회복되는 듯 하지만, 둔화 추세는 경제적인 안정과 함께 다시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선 수용 이후의 기독교의 성장을 살펴보자.
2-1. 한말 기독교회의 성장
1879년 네 사람의 한국인이 만주에서 스코틀란드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신약성경의 한글번역 작업이 활발히 전개되어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7년에는 신약성경이《예수셩교젼셔》라는 이름으로 번역 간행되었다. 이와 함께 번역된 성경이 한국인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반포되면서 기독교 전도가 본격화되었다.
복음서를 처음 반포한 이들은 초기의 수세자들과 성경의 번역·출판에 관여했던 한국인들이었다. 성경 간행 때의 식자공 김청송(金靑松)은 압록강 북쪽 만주지역의 한국인들에게 전도, 한꺼번에 75명과 25명이 수세토록 하였고, 초기의 수세자요 성경번역자였던 백홍준(白鴻俊), 이응찬(李應贊) 등은 1882년경에 한반도에 복음 전파를 시작하였다. 서상륜(徐相崙)은 1883년 초에 서울에 도착, 2년간 비밀리에 복음전도활동을 전개한 결과 1885년 초에는 70여 명의 세례청원자들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당시 로스가 쓴 편지에서 밝혀졌다. 주목되는 것은, 로스가 편지를 쓴 날자가 미국계 복음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한 1885년 4월 5일보다 약 1개월 앞서 작성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독교가 한국에 처음 수용된 것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복음에 자발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한 한국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점은 그 뒤의 한국 기독교의 성장, 발전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1885년 선교사들의 입국은 한국기독교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890년이 되기 전에 한국에는 100명 이상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가 이미 두 개나 생겼다. 복음을 수용한 한국인들의 열심과 사명감에 불타던 선교사들의 정열이 어우러져서 이룬 성과였다. 한말 교인들의 수가 "폭발적인 증가"를 이룬 것은 네비우스(Nevius)정책이나 권서들의 활동을 포함하여 다음 몇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한말'이라는 시대적 상황이다. 이 무렵이면 기성 종교가 한국인들의 정신적인 공허를 메꾸지 못했다. 조선조의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은 형식적 예론(禮論)과 폐쇄적 화이론華夷論)으로 한반도의 주변을 감도는 세계사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였으며, 불교 또한 그 생명력을 상실한지 오래 되었다. 기독교는 이같은 기성종교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한국인들의 공허한 심성과 세계사의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한편 조선후기로부터 누적된 파벌정치와 개항이후에 형성된 민씨 정권의 세도정치는 관료집단의 조직적 부패를 만연시켰다. 관리의 선발과 인사에서 공정성이 깨어지고 매관매직 현상이 노골화되었고, 권력남용과 뇌물이 횡행하게 되었다. 봉사의 직분이 될 수 없었던 관직은 인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강탈하는 이른바 '가렴주구'의 수단으로 오용되었다. 이 때 생명과 재산을 위협받는 의지할 데 없는 가련한 백성들은 이 새 종교에 의지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교회와 선교사들이 관리들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는 기독교 선교의 '제국주의성'과 한말 선교사의 '양대인화'(洋大人化)가 함께 거론되어야 한다. 한말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 기독교회로 몰려든 것은 이러한 사회적 정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둘째는 대외적 요인으로 청일전쟁(1894~95)과 노일전쟁(1904~05)을 들 수 있다. 청일·노일전쟁은 교인들을 증가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전쟁 중 교회는 마치 피난민 수용소와 같았는데, 이는 교회가 '외국인의 소유'로 간주되고 치외법권적인 영역으로 인식되어 외국인 특히 일본군에게 위협받고 있던 한국민중들이 그곳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보호받았던 민중들은 전쟁 중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교인들의 깊은 신앙을 보고 그 후에도 계속 교회를 찾게 되었다. 청일전쟁 중 가장 피해가 컸던 평양을 그의 선교지역으로 갖고 있던 마펫(S.A.Moffett)도 이같은 증언을 한 바 있다. 노일전쟁 때에도 경의선 철로 주변의 주민들은 "태반이 실소(失巢)에 처하여 길가로 쫓겨나는" 극한상황에서 그리고 일본군의 잔학성이 전쟁의 공포와 위험을 더 실감시키는 상황에서 많은 민중이 교회를 찾게 되었다. 노일전쟁 전후에 일본군의 포학성에 시달리던 거의 2만명의 의지할 데 없는 선천의 백성들이 교회로 들어왔다는 것은, 그 표현이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을 준다.
셋째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는 민족적 상황을 들 수 있다.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군대를 해산하였으며,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 등을 차례로 빼앗아 갔다. 주목되는 것은 이 기간동안에 '대부흥운동'과 '100만명 구령운동'(Million Souls for Christ)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당시의 민족적 위기를 두고 부흥집회에 참석한 한 지방관리가 "지금 우리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길 외에는 달리 아무 도리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했듯이, 한국 민족의 절망적인 상태가 이러한 교회성장의 새로운 계기로 만들어졌다. 한국교회에 성령강림을 체험케 했던 이 시기의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보다는 죄의 깨달음과 용서를 체험케 한 영적 신생과 성결에 더 큰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대부흥운동기간에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하여는 엇갈리는 평가가 있지만 대체로 성장추세를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2-2. 일제치하의 기독교회의 성장
일제의 강점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기독교인들 중에는 '매국원흉제거'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 민족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하였지만, 한국교회의 주류는 평온을 유지하였다. 일제 통감부의 의도에 따라 선교사들이 정교분리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한 데다가 대부흥운동과 백만명구령운동을 통해 한국기독교인의 강력한 항일민족의식을 누그러뜨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한국교회는 비교적 조용한 성장을 기할 수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10년대에 감리교와 장로교의 경우를 들어 한국 기독교의 성장이 둔화 내지는 퇴보했다는 지이 있지만, 1912∼19년의 기간에도 평안남북도 지역에서는 교회의 성장이 침체상태에 빠진 것이 아니라 "꾸준하고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장은 일제초기의 기독교탄압에 대해 한국 기독교인들이 국망(國亡)의 설움과 시련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신앙으로 전환시켜 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국망 이후의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교회부흥운동이 민족의식과 일부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10년부터 싹이 터서 1915년부터는 매년 부흥회로 발전하여 1950년경까지 계속된 강화도의 마니산 부흥회가 그 대표적인 케이스로, 강화도가 "가장 성공적인 선교" 지역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이 부흥회를 통해서이다. 이 부흥회의 마지막 날에는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남여를 불문하고 돌 하나씩을 가지고 마니산에 올라가 참성단을 보수하면서 부흥회를 했다. 이 부흥회는 "단군의 건국정신 즉 '하나님 숭배'와 '홍익인간'정신을 존중하는 동시에, 조상 때부터 하나님께 제사드리던 참성단을 보수 재건하는 것을 도리어 기독교인의 마땅한 의무로 확신했던" 기독교인들이 '단군정신과 기독교 신앙의 공존지대'로서는 마리산 부흥회를 시도했던 것으로, 민족의식이 잘 표출되고 있었다.
3 1운동은 복음전파의 새로운 통로를 제시하여 기독교가 '두번째 급속한 성장 시기'를 맞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우선 3.1독립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이 보여준 놀라운 활략상과 관련이 깊다. 3.1운동에서 보여준 기독교계의 활동상은 많은 한국인들을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자세를 갖게 하였다. 때문에 복음전파는 벌써 옥중에서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옥고를 치르면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고 있었다
1920년대에 들어 교회가 성장한 또 하나의 계기는 부흥운동이다. 이 때의 부흥운동은 그 전과는 달리 특정한 개인의 카리스마적인 영적 지도력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그 전에는 부흥운동이 집단적 신앙체험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1920년대에는 장로교의 김익두(金益斗)와 길선주(吉善宙) 같은 부흥사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주목되는 점은 길선주, 이용도 같은 부흥운동 지도자들이 그 전에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경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1920∼30년대의 부흥운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데, 이는 한국이 처한 민족적 시련을 딛고 일어서려는, 말하자면 암울한 민족현실을 극복하려는 기독교신앙의 한 표현형태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의 부흥운동은 "암울한 민족현실 속에서 나름대로 민중의 희망을 선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세'·'재림'을 강조하는 내세지향적 성격과, '회개'·'신생'을 주제로 한 내면적 성격은 당시 고양되고 있던 사회주의 계열이나 교회 내의 진보적인 청년계층으로부터 몰역사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부흥회를 통해 정착된 한국 기독교인들의 '내세지향적' '신비주의적' 신앙성격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교회의 존재양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20-30년대에는 감리교가 '백년전진'(The Centenary Advance)운동을, 장로교가 '진흥'(振興, The Foward Movement; 전진운동)운동을 각각 벌여 교회성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결과 1920년부터 1925년까지 5년간의 성장율은 30%에 달하였다. 1934년도 감리교와 장로교를 합한 교세는, 교회수 3,498, 한국인 전도인수 1,458, 선교사수 335, 교인총수 367,220명이었는데, 세례교인은 9년 전에 비해 거의 배 이상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교회핍박이 가속화되던 1938년 이후에는 그 성장이 저지되었고 2차대전이 발발하던 1941년 이후에는 세례교인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일제의 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세계에 유례없는 성장을 기록했는데, 장로교의 경우, 1910년에 39,384명이던 세례교인이 1942년에는 110,002명으로 늘어나 32년간에 279.3%나 증가했던 것이다.
2-3. 해방 후 한국교회의 성장
해방은 일제 하에서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았던 한국교회로서는 신앙의 자유를 맞는 계기가 되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쟁하던 '옥중성도'들이 출옥하여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면서 한국교회를 재건하는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해방이 되기 전 옥중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출옥 후에 한국교회를 재건하기 위한 방법으로 "대전도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전도자를 양성할 것"이라는 복안을 세운 바 있는데, 이것은 해방직후 신학교 설립과 전도운동으로 구체화되어 갔다. 해방이 되고 국토가 분단되자, 남과 북에서는 각각 교회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먼저 전도운동을 일으켰다. 1945년 12월 초에 열린 '이북 5도연합노회' 는 6개항의 결의안을 통해 그 조직의 성격과 방향을 정했는데 그 중에는 해방을 기념하는 전도운동을 일으키자는 내용도 있었다. 이 전도운동은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남한에서는 '남부대회' 이후 교파의 환원운동과 분열이 가속화되어 교회 성장을 위한 전도운동이 구체적으로 계획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긴 하지만, 교단분열이 교회성장의 한 계기가 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교단의 분열조짐들이 드러나는 상황 속에서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등장은 기독교계의 성장을 가져올 수 있는 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한국인들은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인식하였고, 이승만은 기독신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해방직후에 기독교계는 상대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기독교적 정권의 등장으로 기독교 전도와 외형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의 성장운동은 한국전쟁(1950∼1953) 중의 여러 부흥운동을 통해 이루어져 갔다. 전쟁 중에 기독교회는 구국봉사활동과 피난민 구호활동을 벌이는 한편 교파별로 전도 부흥운동도 전개하여 큰 성과를 올렸으며 따라서 전쟁 중에 교세가 증가하게 되었다.
한편, 이 무렵에 범기독교세력의 성장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뒷날 한국교회의 질적 성장에 반드시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만 평가될 수 없는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서구계 여러 교파가 전쟁구호물자와 함께 대거 이식되어 전도활동과 교단설립을 서둘렀고 이 중에는 이단종파도 있었다. 교파들의 경쟁적인 전도활동은, 한국을 수많은 교파들의 전시장으로 만들기는 하였으나, 한편 기존의 교파들이 발견하지 못했던 전도방법을 통해 외적인 성장을 이루었던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예로, 오순절 계통의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의 급속한 외형적 성장을 가져오게 한 것을 들 수 있다.
1960년대에 들어 한국교회에 새로운 기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미 군정 이래 정권에 유착하여 그 시녀노릇을 하던 한국교회, 또 외세의 조종과 지방색 등으로 분열과 파쟁을 거듭하던 한국기독교계는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교회는 분열과 파쟁의 추태를 지양하고 화해·일치의 모습으로 민족에 봉사하는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런 깨달음 때문인지, 기독교계는 연합(에큐메니칼)운동과 '민족복음화운동'으로 일치 정신을 고양시켜 나갔다. 1964년에 발기된 '한국복음화운동추진회'의 결성과 1970년대의 민족복음화를 위한 대전도대회, 1973년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와 '엑스폴로 74'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어서 1977년 8월 15일∼18일에는 여의도 민족광장에서 '77민족복음화를 위하여'라는 대전도집회가 열려 연인원 150만명이 동원되었는데, 이 때는 1965년, 1973년과는 달리 한국인 강사진들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이 해에 다시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1984년, 종래의 선교사(宣敎史)적 개념에 따라 '선교 100주년'이 된다고 하고 있을 때, 한국의 기독교인이 천만에 이른다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한국기독교계의 이같은 성장은 앞서 말한 대부흥집회가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는 한편 각 교단들의 성장정책 또한 크게 주효하였다. 예를 들면, 통합측의 '5천교회, 150만명'이나, 합동측의 '1만교회 10개년 계획', 가미교회의 '5천교회 100만신도' 운동이 그런 것이다. 또 목사후보생이 목사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 3년간의 단독목회 경력을 요구하는 의무조항도 교회설립을 촉진하였다. 이런 정책들은 기독교의 외형적 교세는 확충되었을는지는 모르나, 사회에 대한 교회의 이미지와 목회자 윤리를 추락시켰으며, 1990년대 교회성장 둔화의 요인이 되었다.
1980년대에 전두환 군부독재정권 하에서 교회성장이 이뤄진 것은 사회비판세력이 전면적으로 봉쇄당하는 상황에서 종교심의 내면화와 중산층의 보수화의 추세를 이용, 심령의 공허를 메꾸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이들의 현실도피적 종교심리를 해외선교의 열심으로 집중시켜 나갔다. 또 1980년대 학원의 파라처치(parachurch)세력이 보수·복음주의 계통을 중심으로 성경공부운동을 활성화시켜 나갔던 것도 범기독교 세력의 성장에 공헌했다. 최근, 1970∼80년대에 진보·보수로 양분되었던 한국 기독교계를 두고, 당시 진보계통이 민주화와 인권, 반독재투쟁 등 사회구원적,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을 때에, 보수측이 개인구원의 차원에서 국내전도와 해외선교에 힘썼다고 평가하려는 것은 이런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2-4. 한국교회 성장의 요인
지금까지 살펴 본 한국교회 성장은 그 요인이 다원적이며 복합적임을 알 수 있다. 그 요인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성장의 외적 요인으로서 교회사 전개에 영향을 미친 복잡 다기한 위기적 상황들을 들 수 있다. 그런 위기적 상황들이 선교와 교회성장의 기회로 적절히 이용되었다. 다시 말하면, 봉건말기의 구조적 모순과 외세의 침략이 겹쳐 위기의식이 고양되었고 종말사상이 확산되어 갔는데, 그러한 상황전개가 새로운 복음을 수용, 확산시키는 데 기회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발발한 이래 노일전쟁, 일제의 한국 강점과 의병투쟁, 3.1운동과 국내외 민족독립운동, 일제 말기 신사참배강요와 기독교탄압, 민족분단과 한국전쟁, 군사쿠테타와 군부독재정치, 산업화에 따른 빈부격차와 소외현상 등 한국의 근대사는 위기와 갈등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외적 요인들의 전개가 기독교 내부의 교회성장의 요인들과 상승적으로 작용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둘째, 한국의 선교 초기부터 제시된 선교원리로서의 Nevius정책과 그것을 구체화하여 추진한 일련의 선교과제들, 또 교육 의료 등의 연계된 선교사업들은 교회성장과 기독교세 확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점과 관련, Nevius정책을 채택하여 적극적으로 추진한 장로교계가 그렇지 않은 감리교계보다 교회성장이 뚜렷하였다는 점도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셋째, 복음화를 위한 끊임없는 관심과 노력이 교회성장의 초석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거기에는 기도운동과 전도운동을 빼놓을 수 없다. 1906년,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을 목격하면서 민족독립과 민족복음화를 위한 구체적인 기도제목을 갖고 시작한 새벽기도운동은 오늘날까지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한국기독교인이 산재한 세계 각처에서 계속되고 있다. 이 기도운동은 복음화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힘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운동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한국교회의 성장이 설명될 수 없을 것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기도의 토대 위에서 복음화를 위한 전도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호별방문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축호(逐戶)전도를 비롯하여 각 교회와 교단들이 개별 혹은 연합적으로 전개한 여러 번의 전도운동은 전도의 사명감을 고양시키는 한편 많은 개종자를 얻게 하였다.
넷째, 1960년대 이후의 성령운동이다. 이 운동은, 같은 시기의 민족복음화운동과 같은 대형전도운동과 학원내의 파라처치 운동, 그리고 경제성장으로 여유를 갖게 된 중산층을 상대로 한 성경공부와 함께,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특히 성령운동과 함께 강조된 왜곡된 축복관이, 복음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국인들을 들뜨게 만들어 한국 교회의 외적 성장을 가능하게 한 촉진제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점은 곧 많은 사람들이 산업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세속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하여 기독교에 귀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주도한 교파 교단이 성령운동과 직간접으로 연관을 맺고 있었다. 세속적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한 기독교인들은 물질적 욕구와 세속적 지위를 축복과 관련시키고 중산층의 기득권 확보와 정치권의 야심을 기독교신앙으로 값싸게 담보하면서 '삼박자구원'의 논리에 스스로 빠져 들어가기도 했다. 빗나간 성령운동이 이러한 비(非)복음적 신앙행태를 부채질하였다. '복음화'라고는 분명히 말할 수 없지만 교회는 이들 세력에 의해서도 외적인 성장을 이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다섯째 1970년대에 부쩍 늘어난 개척교회가 교회성장을 관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개척교회 설립은 교세확장과 교회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각 교단들은 한 때 교세 확장의 수단으로 목사후보생에게 일정기간 단독목회의 경험을 쌓아야만 목사로 안수하겠다는 정책을 강행하였다. 이 정책은 개척교회 설립을 부채질했고, 한 때 교단의 지원을 받으며 그 열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그 결과 교파간의 불필요한 경쟁을 심화시켰고, 심지어는 한 아파트 상가에 여러개의 교회들이 난립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필요한 교파대립과 교회난립의 개탄할 현상은 현재 러시아 등 선교지에서도 가끔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교세의 실속없는 성장을 의미할지는 몰라도 진정한 '복음화'일지는 의문이다.
위에서 열거한 한국 교회성장의 요인들은 서로 유기적 연관성을 띄고 있다. 비록 그 요인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다시 종합하는 작업을 통해 한국교회의 오늘날까지의 성장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국기독교 성장의 요인 하나를 더 지적하는 것이 좋겠다. 그것은 교회성장 전개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면서도 지금까지 비교적 덜 알려진 한국기독교의 '성경기독교'적 성격에 대해서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이것은 곧 성경이 한국 기독교 성장에 미친 영향이라 할 것이다.
여섯째, 성경의 번역 보급 그리고 사경회의 열심 등이 한국 기독교의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선교사 입국 이전에 외국에서 번역, 출판된 성경은 국내에 반입되는 과정에서 전도가 이뤄졌고 그것이 국내에 널리 보급되면서 한글운동이 일어났으며, 뒤이어 사경회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한국의 복음화사업은 결정적인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이같은 성경의 번역 출판 보급 성경공부 등의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한국기독교를 '성경기독교(Bible Christianity)'라고 명명한 바와 같이, 바로 이 '한국기독교의 성경기독교적 성격'이 한국기독교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다.
3, 한국교회의 성장둔화와 그 요인
1990년대 들어서서 한국교회의 성장 둔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성장과 '성장둔화'에 대한 주장이 엄정한 통계와 과학적인 분석을 거쳐 이뤄진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설사 1990년대에 들어서서 '둔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는 주장이, 검증을 거친 주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아직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성장둔화' 문제는 최근 여러 차례 학술토론을 거친 바 있었기 때문에, 다음의 논의도 일정하게 그런 논의들에 근거해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종교인구가 감소하는 것은 비단 개신교만의 문제는 아니고 종교 일반의 현상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교회 성장이 둔화하는 요인은, 사회적인 것과 기독교 내부의 문제로 대별하여 개조식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3-1. 사회적인 요인
첫째, 가장 큰 요인은 우리 사회가 경제 성장에 따라 긴장감이 해이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앞에서 한국 교회의 성장과정과 그 요인을 거론할 때, 환경적 요인을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한국사는 기독교수용시기 이래 위기의 연속이었고 그것이 기독교의 성장에 외적인 요소로서 크게 작용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비근한 예로, IMF가 닥쳤을 때에 교회당 출입자 수가 늘어났고 대학입시철에 새벽기도회가 열심을 더했다는 것은 이를 방증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잘살게 된 환경의 변화는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한국 교회가 급성장하는 시기가 '조국 근대화'의 기치를 걸고 경제적 성장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을 때였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잘 살아보세'라는 슬로건이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을 때, 기독교계는 '성령운동'과 '삼박자 구원'을 강조하는 한편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슬로건을 같이 내세웠다. 양측은 타이밍을 맞춘 듯 절묘하게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었다. 경제가 일어나는 것은 '삼박자 구원'에서 강조하는 물질적 축복과 맞아 떨어졌고, '잘 살아보세'는 설교와 기도에서 강조하는 '금생(今生)의 복락과 내세의 천당'과 아우가 맞았다. 기독교는 그래서 1970-80년대의 국가의 기본정책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무역고는 세계 11위를 마크하고, 1인당 국민소득은 한때 1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OECD에 가입함으로 선진국 문턱에 올라섰다.
물질적 풍요는 종종 정신적 황폐화를 불러오기도 하였다. 현세가 배부르고 따뜻해지면 내세에 대한 간절함이 덜하거나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도 살만 하면 하나님을 떠나 그 진노를 불러일으켰다. 앞서간 서양 나라들의 교회는 한국교회의 미래모형이 아니랄 수 없다. 기독교회와의 관계가 우리보다 훨씬 가까웠던 그들의 교회는 더 이상 우리에게 성장을 가르쳐 주지 않고 있다. 따라서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한국 교회 성장의 둔화현상은 기본적으로 경제성장의 당연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경제성장이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둘째, 종교의 기능적 대행물이 출현하여 더 이상 종교를 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은 1980년대 후반부터 그동안 교회가 수행해 왔던 기능을 대신해 주는 대행물을 급속히 발전시켰다. 관광지, 휴양지,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이 급격히 증가되었으며, 특히 서울 근교와 지방 곳곳에 콘도와 호텔이 세워졌고 각종 위락시설, 유흥시설이 마련되어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자가용 승용차의 급증과 도로망의 확충은 휴일에 고속도로와 국도로 행락 인파를 유인했다. 자가용과 여가는 서로 손잡고 인간의 향락성을 부추기는 반면 그 종교성은 점차 소멸시켜 갔다. 자가용과 비행기 등의 발달은 물질적 속도감을 만끽케 함으로써 종교적 정적성을 점차 빼앗아 갔다. 이와 함께 1988년 해외여행 자율화 조치는 해외여행을 증가시켰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한층 바쁘게 만들었다. 분주해진 인간들은 휴식을 요구하게 되어, 종교적 수련을 쌓는 기회로 사용되어 왔던 정기 휴일은 이제는 휴식의 기회로 점차 바꿔지고 있다. 주말에 휴식이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을 집에 묶어두는 또 하나의 요인은 TV이다. 가구당 TV 보유율이 1975년의 30.2%에서 1990년의 97.2%로 늘어났고 시청율도 1977년 54.4%이던 것이 1993년에는 94.8%로 증가하였다. 1인당 평균 주당 TV시청 시간도 1977년의 14.3시간에서 1993년의 17.5시간으로 늘어났다. 이처럼 여가산업의 급속한 발달은 교회참여나 헌신을 약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 되어버렸다.
종교에 대한 대체물은 여가산업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민족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주체사상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이념은 기성종교의 이념과 경쟁하거나 젊은이들에게는 그것으로 종교적 공간을 대체시키고 있으며, 정신의학과 상담기술의 발달은 커다란 정신적 치유효과를 보이면서 종교적 신유운동을 비웃고 있다. 실제로 비종교인이 종교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필요성을 못 느낀다(35.2%)"는 것이었는데 그 비율은 5년 전의 12.7%보다 훨씬 높았다. 이제 종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른 데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인구구조의 변화와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를 들 수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구비에서 젊은 층 인구는 감소하고 장년, 노년층 인구는 늘어나고 있는데, 젊은 층이 타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개신교회로서는 젊은 인구의 일반적인 감소와 장년, 노년인구의 일반적인 증가가 교회성장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 왔다.
한편 여성의 취업확대가 종교 인구를 감소시켰다. 흔히 박탈감을 더 경험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더 종교적인데 여성의 신도비율이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남성과 비슷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여성의 종교성은 남성의 종교성과 비슷하게 낮아지는데, 실제로 여성들이 취업하고 경력을 쌓는 일에 몰두할수록 종교에 대한 참여도는 감소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1980년대 이후 늘어나는 여성의 취업율(1980년 522만, 1985년 583만, 1990년 738만, 1994년 800만)은 여성의 종교참여와 종교적 관심을 약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고 이것은 교회의 성장둔화와도 깊은 관계가 있다.
3-2. 교회 내적인 요인
첫째 '거품교인'의 증가를 들 수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일기 시작한 교회의 대형화 추세에 따라, 전도에 의한 실질적인 교인의 증가가 아닌 '수평이동'이나 '거품교인'들이 많이 늘어났다. 여기서 '거품교인'이란 믿음이 없이도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을 말한다. 거품교인'의 유형도 여러 가지여서, 체면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 경우, 기복신앙의 유혹에 따라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 실리추구적인 측면, 교육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경우, 친교장으로서 교회이용 등 이런 저런 목적으로 출석하는 교인의 수가 한국교회의 양적 통계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이른바 '거품교인'들이 경제성장에 따른 여가문화와 다변화된 사회에 관심을 돌림으로 통계상 교인 수는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또 이 교회 저 교회에 이중 삼중으로 통계에 잡힌 신자들의 수도 상당한 편인데, 정부통계와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둘째, 교회의 자기 정체성의 약화를 들 수 있다. 현대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 경제성장은 상대적으로 교회의 부유화를 초래하여, 세속화되고 있는 교회는 종교적인 기구로 전락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교제를 나누며 사랑과 희생, 봉사와 정의를 실천, 확산시켜 가는 공동체인데, 최근에는 이 같은 정체성을 점차 상실하고 세속적인 현실에 영합하는 한편 신흥 '종교 귀족'을 탄생시키면서 '종교적 왕국' 구축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 목회자의 연성 상실을 들 수 있다. 목회자들은 교회 일과 세속적인 관심 때문에 매우 분주하다. 그 때문에 목회자는 기도하는 무릎을 상실하였고 성경과 신학을 심도 있게 연구하지 않아도 그 양심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안일한 성경연구에다 기존에 나와 있는 성경공부책이나 외국의 베스트셀러를 소개하는 대리자로 전락하고 있다. 매주일 설교를 준비, 공급하는 기관이 성업중인 것은 왜 그럴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 속에 생명의 말씀으로 육화(肉化)시키고 실천하는 구도자의 과정없이 그대로 교인들에게 설교자로 나섬으로 목회자 자신은 하나님 말씀의 대리자이기보다는 종교적 정보전달자가 되어 버린다. 그 정보전달자가 무인가 신학교 등에서 양산된 무자격 교역자라면 한국교회의 앞날은 암담할 뿐이다.
거기에다 교회의 대형화는 목회자의 교인양육 사역에도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대형화는 한 목회자의 감당할 수 있는 양육의 범위를 넘어섰고 목회자와 교인 사이의 인격적인 교류가 상실되면서 상당한 거리감이 형성되었다. 목회자와 교인 사이에 인격적인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못하면 겨우 교회라는 울타리를 통해 묶여있던 신자들은 언제 그 밖으로 튀어나갈 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대형교회를 과시하는 한국교회에 성장둔화의 중요한 요인이다.
넷째, 서열화된 교회 직분구조와 리더십의 부재를 들 수 있다. 한국 교회 리더십의 문제는 한국 교회의 자율적인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다. '섬김을 통해 이끈다'는 기독교 본래의 리더십이 왜곡된 데다 서열화된 직분관과 신자들의 영적인 타율성 의존성이 또한 문제다. 모든 교인들은 교역자에게 매어 있도록 훈련받고 있으며, 영적인 문제를 해결한 수 있는 성숙성은 거의 갖지 못한다.
그리고 교회의 직분은 은사에 의해 부여된 기능적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분을 계층적 서열로 잘못 이해하거나 바꾸어 놓고 교회 공동체가 운영되고 있다. 그 결과 교회의 직분이 마치 세속적인 계급 모양으로 서열화되어 교회안의 민주적 공동체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교회공동체에 속한 모든 성도는 각 개체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의 사명을 갖고 있으며, 각 성도는 교회의 사역자요 지도자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층화 내지는 서열화되어 있는 교회의 직분 구조에서 각 직분을 가진 성도는 그 직분과 은사를 거의 매몰시켜 버리고 말았다.
한국 교회에는 아직도 세속적인 리더십의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보여주신 리더십의 모형인 '섬김을 통한 리더십'을 교회와 사회 속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 섬김을 통한 리더십의 실현은 교회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새로운 선교의 장을 개척해 가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다섯째, 미래와 후세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다. 교회의 대학부나 청년부에 대한 목회비전이 결여되어 있고, 장년 중심의 교회운영으로 교육전담 목회자가 부족하다. 대부분의 교육목사는 교회행정과 교육을 함께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고 있다. 수십년래 취해 온 그와같은 정책의 당연한 결과가 현재 맞고 있는 성장의 둔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주일학교가 이래서는 안된다고 걱정하던 것이 벌써 몇십년이 지났는데, 그 동안 한국 교회는 미래와 후세를 위한 투자를 게을리했다. 미래를 위해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 그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1970-80년대에 교회가 성장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해방 후와 6.25때에 한국 교회가 주일학교를 통해 뿌린 씨앗이 늦게나마 싹이 트고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각 교회마다 성장중심의 목회를 강조하면서 그 성장의 목표를 헌금을 낼 수 있는 장년층에 맞추다 보니 장년 위주로 교회의 프로그램이 편중되었고, 후세들을 위한 주일학교 교육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 한국의 해외진출이 본격화되면서 교회는 다시 해외선교에 열을 올리게 되는데, 개교회는 자기 과시에다 교회의 응집력을 제고할 수 기회로 이용하게 되었다. 교회의 목표와 정책의 편중성은 상대적으로 주일학교 교육에 투여하는 비용이 저조하게 되었다. 투자의 부실은 과실의 빈곤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선교 초기, 한국 교육의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교회는 이제는 세속 교육을 뒤따라가는 형편에 처지게 되었다. 그 결과 세상의 문화는 교회에 다니는 젊은이들에게도 재미를 끌고 있지만, 교회는 재미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갔다. 이는 한국 교회의 미래에 대한 투자를 더욱 강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경고다.
여섯째, 교단 분열과 개교회의 불화 및 경쟁관계가 교회의 성장을 둔화시키는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지방색은 일반사회의 지방색이나 파벌 의식이 조장되기 전에 시작되었다. 가령, 일제 하 서북지방과 경기 지방간의 긴장과 분열은 오랫동안 계속된 것으로 이것은 일제하의 한국 교회의 일본에 대한 신사찹배투쟁의 전열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또 해방 이후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은, 그것이 아무리 변명된다 해도, 초기 선교지역의 분할과 관련시키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지방의식이나 파벌의식이 구체화하기 전에 한국 교회의 파벌은 먼저 보였다. 그런 점에서 한국 교회는 한국 민족 앞에 회개해야 할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1994년 유선 텔레비전 방송국 허가를 당국에 촉구하는 개신교 보수교단들의 성명서가 각 일간 신문지 1면에 발표되었다. 이 때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간판을 가진 105개의 교단이 있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양식있는 신자들은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언필칭 사랑과 화평을 입버릇처럼 외우던 교회가 걸핏하면 분열하여 같은 간판을 건 105개의 장로교단이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1993년 기독교문사 발행의 《기독교연감》에 의하면 '대한예수교장로회' 간판을 가진 교단만 58개가 등록되었는데, 실제로는 105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단의 분열은 실질적으로 어떠한 교리나 신학의 차이에서 온 것이 아니며, 교인들에게 교회에 대한 회의를 안겨 춰 점차 교회를 떠나게 한다.
일곱째, 사회를 향해 섬김과 나눔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데서 교회성장이 둔화되고 있다. 양적 성장의 추세 속에서 그 동안 한국 교회는 자체의 물적 인적 자원을 사회봉사나 구제에 활용하기보다는 대부분을 교회당 증축, 기도원이나 수양관 건립, 교회묘지 구입 및 교육관 건축 등 보이는 일, 대형화하는 일에만 치중했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한국 교회 성장을 부추기는 동인이 되기도 했고 성장의 결과로 과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에 치중하면서 윤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한국사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와 함께 목회자 및 교인들의 윤리성 결여로 인해 사회적 신뢰가 실추되는 것도 교회성장 둔화에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여러 여론 조사에서 목사의 정직과 윤리성이 다른 종교의 성직자보다 저조하므로 교회성장의 길을 막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섯째, 사이비 종파로 인한 종교에 대한 불신도 한 요소이다. 오대양사건, 시한부종말신앙, 영생교주사건, 아가교사건 등 사이비 종말론이나 사이비종파의 발호는 항상 그 모체가 교회였다. 이는 한국교회가 자기 정체성과 고도한 윤리성을 제대로 갖지 못하고 물량주의, 기복신앙, 반지성주의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 속에 이런 것들이 번식되었던 것이다.
4. 민족사와 기독교 (생략)
4-1. 반봉건·개화운동과 애국계몽운동
4-2. 국권회복·독립운동(삼일운동과 임시정부운동, 무장투쟁, 외교운동과 무실역행운동)
4-3. 인권·민주화(평등 정의) 운동 (유신정권과 신군부정권)
4-4. 통일운동(분단체제의 형성에 방조, 민주화운동의 한계로 통일운동, KNCC통일선언과 글리온 회의, 북한돕기운동과 한국기독교북한동포후원연합회 등)
5. 한국교회의 반성과 새로운 과제
20세기 한국 기독교는 성장과 그 둔화 현상을 경험하였고 성장 정체(停滯)의 이면에는 한국교회의 반성적인 과제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한국 기독교의 민족사와의 관계를 좀 더 분명하게 살필 수 있다면, 한국기독교가 한민족사에 끼친 긍정적 성격과 부정적 한계를 직시하고 새천년기의 과제를 논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한국 기독교는 외형적으로 세계 선교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빨리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력과 성장의 뒷켠에 숨겨진 어두운 모습들은 교회성장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글을 끝맺으면서 우리는 한국교회 성장의 긍정적 및 비판적 성격을 지적하고 앞으로의 과제도 나름대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5-1. 기독교가 끼친 긍정적 성격
한국에 기독교가 수용되고 성장함에 따라 한국사회에 미친 긍정적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대로, 한글문화를 민중 속에 정착시키는 등 한국의 봉건사회를 개혁하는 데에 기독교가 앞장섰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한말 일제하에서는 민족의 독립을 보전하고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투쟁한, 말하자면 민족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것이 긍정적 성격에 대한 대체적인 평가이다.
기독교의 수용, 발전의 의미는 이보다 근원적인 데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적인 가치관(윤리관, 노동직업관, 소유관, 축복관, 세계관 등)이, 부분적이긴 하지만, 한국사회의 기존의 가치관을 변화시켰다. 거기에다 기독교가 갖는 신관(神觀)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은 훨씬 크다고 본다.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존재도 그 절대성을 부정하는 기독교의 신관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상대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 파장은 한국인의 가치관 형성과 민족운동·시민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제의 군국주의와 소련식 공산주의, 군부독재에 투쟁하는 역량은 사실상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존재도 절대화할 수 없다는 기독교적 신관에서 출발하였다. 또 기독교적인 인간관은 혈통신분제를 부정하고 남녀의 평등을 주장하는 윤리적 근거를 제공하였을 뿐아니라 천부적인 권리로서의 인권을 확립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같이 한국기독교가 한말 일제하 그리고 군부독재하에서도 인권·민주화운동과 반독재운동에 앞장섰고 기독교적인 보편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예언자적 역할을 그런대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확고한 신관과 인간관을 가졌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와는 달리 기독교가 미친 반봉건·근대화운동, 국권회복운동과 통일운동 등 민족운동(앞의 4. 부분)에서는 한국 기독교의 긍정적인 성격을 더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5-2. 한국기독교가 감수해야 할 비판 두 가지
한국기독교는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많은 식자들에 의하여 때로는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옷로비' 사건을 비롯하여 한국사회의 대형비리의 이면에 거의 예외없이 기독교인이 개재되어 있다는 현상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인의 숫자가 전체 인구의 25%를 상회하는 1,000만명을 훨씬 넘어섰는데도 거기에 상응하는 기독교적 가치관의 확립이나 그 가치관에 입각한 사회적 변혁을 꾀하지 못한 것도 이런 비판을 정당화시켜주고 있다.
한국기독교가 외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사회개혁적 영향력을 갖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풀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과 관련, 필자는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신앙과 행위의 분리에서 시작되는 이분법적 신앙행태요, 다른 것은 왜곡된 '복사상'이다.
먼저 한국기독교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 신앙과 행위의 분리문제다. 성경과 교회가 가르치는 기독교진리와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이 생활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연결, 실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기독교적 가치관이 개인화·사회화되지 못했다. 이렇게 신앙과 행위가 분리되게 된 이유를 두고, 기독교수용 이전에 있었던 한국의 전통적 성리학사상이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이단시하고 '선지후행'(先知後行)을 주장하는 주자학을 정통시함으로써 사실상 '지행분리'(知行分離)를 용인하는 사상적 풍토를 조성하게 되어 한국기독교에도 그같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하는가 하면, 한국기독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장로교가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사상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행위를 신앙에서 분리시키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혹은 그 이유를 전적으로 신자개인의 실천의지와 관련시키는가 하면, 사회의 구조악에다 더 큰 비중을 두기도 한다. 하여튼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 할 시급한 과제의 하나는 이 '신앙과 행위의 분리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신앙과 행위의 분리문제는 한국기독교의 이분법적 신앙형태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가 사상적으로 이분법적 사고구조를 뿌리깊이 갖고 있는 한국사회에 접목되면서 복음 자체가 이분법적으로 해석된 부분도 없지 않다. 특히 인간의 몸을 영과 육으로 이분하는 인간관과, 하나님의 일과 세속적인 일로 구분하는 노동·직업관,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나라와 구분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세속사에서 일정하게 제한시키는 등의 사상에서 한국교회의 이분법적 신앙형태는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이분법적 신앙구조 하에서는 기독교진리를 사회화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구조하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학문, 노동, 직업, 전문기술이나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일이나 하나님의 나라와는 관계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극기독교사에서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근본주의적 보수신앙 전통과 관련되어 심화, 발전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교회성장이 대부분 보수신앙과 관련되어 있는 추세로 본다면, 이분법적 신앙행태가 한국기독교를 거의 지배하게 되었던 것은 자연스런 결과로 보인다.
한국기독교가 사회변혁에 거의 무관심한 태도를 보인 것은 '정교분리'라는 이분법과 관련이 깊다. 한말 일제하에서 구미의 선교사들은, 극동에서 일제의 역할을 두둔하는 본국 정부를 고려하여, 한국에서 정치와 종교의 역할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지도하였고, 통감부 설치 이래 일제도 기독교에 대해 정교분리정책을 강행하였다. 이 정책은 기독교가 인간성과 민족의 생존권을 말살하려는 전제적 통치권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데에 그 본질적인 의도가 있었다. 정교분리론은 한국교회 보수진영에 의해 면면히 전승되어지면서 최근에는 편의적으로 오용되면서 균형성을 상실했다. 정부에서 협력을 요청할 때나 어떤 정권에 지지와 박수를 보낼 때에는 정교분리론에 구애됨이 없이 행동하던 자들이, 반대로 비판해야 할 때나 투쟁해야 할 때에는 정교분리를 내세우며 표리부동하게 불간섭주의로 나갔다. 이것은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교분리론'에도 합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용기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 외에 다름 아니다. 한국기독교의 정교분리론은 보수교회들을 권력에 아부하는 집단으로 만들어가는 최면제 구실을 해 왔고 한국사회에 대한 교회의 예언자적인 소리를 막는 재갈 구실을 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기독교계의 '반(反)정교분리론'자들의 현실참여는 자신들이 고수하였던 예언자적인 사명을 계속 수행할 수 있는가의 시험대에 올라 있고, 한편에서는 거기에 대한 우려의 소리가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한편 한국기독교는 왜곡된 '복 사상'이 기독교를 물질주의적인 종교로 타락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한 지 오래다. 특히 1960년대 이래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이 냉랭한 한국교회를 뜨겁게 하여 교회성장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내세운 '삼박자 축복(구원)론'은 기독교적인 복을 세속적인 것으로 대치, 변질시켜 버렸고 기독교 자체를 기복적인 종교로 타락시켜 버렸다. 한국기독교 일각의 '삼박자 축복'에 의한 '복 사상'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은 것이 복"(마 5: 10)이라는 말씀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 35)는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를 왜곡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바알의 전당'으로 변질시켜 가고 있다. 이러한 '복 사상'은 소유에 대한 강한 집착이 전제되어 있는데, 이런 비기독교적이요 왜곡된 사상을 한국기독교가 극복하지 않는 한 자기갱신은 물론 사회개혁도 기할 수 없다.
5-3. 새천년기의 과제
한국기독교는 20세기의 엇갈린 경험에도 불구하고 새세기 새천년기를 맞아 새로운 과제와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성장 둔화의 요인'과 '한국기독교가 감수해야 할 비판 두가지'는 한국기독교의 새 세기를 위해 시급하게 극복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요소다. 그밖에 몇가지를 추가 지적함으로써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첫째, 한국교회의 경험과 한국의 문화, 상황을 바탕으로 한 신학과 기독교문화를 창건해야 한다. 한국기독교는 아직도 자신의 외적 성장에 걸맞는 자기의 신학과 문화를 갖지 못했다. 자기성장에 걸맞는 신학이란 한국적 상황과, 자신의 고민과 체험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개성적이면서 기독교적 보편성을 결여해서는 안된다. 그 신학적 관심은 한국의 전통과 문화의 문제에서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한 문제·인권과 민주화·사회정의·환경·다원사회문제·민족통일·평화의 문제 등에 확대되어야 한다. 그 신학을 바탕으로 한국기독교계가 공유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가져야 하고, 백여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가꾸지 못한 '한국의 기독교문화'를 수립해야 한다.
둘째, 새로운 교회관의 정립과 그 실천이다. 이는 기독인들이 대외적인 역할을 강조하기 전에 자기역량을 온축하기 위해 가져야 교회적 지향이다. 현재 한국교회의 이상과 목표는 대형·부자·모우는 교회 지향이다. 이 지향을 소형·무소유·나눠주는 교회로 방향전환해야 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한국기독인이 이분법적 신앙행태와 왜곡된 '복 사상'을 극복하는 노력과 병행하여 추진해야 할 과제다. 이것은 또한 초대교회 중 예루살렘형 교회형에서 안디옥형 교회로 개혁시켜 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셋째, 교파·교단·교회간의 불필요한 분열과 대립을 해소하고 화해, 연합, 협력, 일치해야 한다. 한국기독교계가 겪은 분열과 파쟁, 갈등과 경쟁은, 사랑을 무엇보다 강조하는 자신에게 큰 상처를 주고 이율배반적인 가치관을 형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에 큰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고 선교의 문을 막았다. 근래 우리 사회의 남북, 동서의 지역간 갈등과 지역감정은 망국병이라고까지 비판되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기독교계의 파쟁갈등이 그보다 먼저 있었던 것은 이 시대의 기독인의 책임을 통감케 한다. 화해와 일치는 최근 '열린 진보'와 '열린 보수'를 통해 급진전되고 있으나 해외선교 등 여러 방면에서 더욱 확대해 가야 한다. 이같은 노력은 한국사회의 지역간 계층간의 벽을 허물게 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민족분단을 해소하는 민족사적 사업을 선도하는 계기를 만들 것이다.
넷째, 한국기독교가 오늘날과 같이 성장한 섭리사적 의미를 숙고하면서, 그것이 민족통일을 대비하고 세계선교의 사명을 수행하며 국제간의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거기에 상응하는 결단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통일을 위한 노력과 함께 통일이 막상 이뤄졌을 때 분단의 고통과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와 용서를 실현함은 기독인에게 주어질 큰 역할이 아닐 수 없다. 또 그동안 제일세계가 담당했다가 현재 거의 공백상태에 처하게 된 세계선교는 그 대리적 담당자가 마련될 때까지만이라도 한국교회가 겸손히 담당하는 것이 한국교회를 성장시킨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까. 새세기의 기독인은 또한 일본과의 문제에서 해결해야 할 화해와, 베트남에 대해 지고 있는 부담의 해소, 그리고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가한 반인권적 학대 등에 대해 져야 할 책임과 역할이 있음을 통감하고 이의 실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렇게 책임과 역할들을 나열하는 것은 기독인이 처한 현실에서 자신의 선택을 따라 역할을 감당해야 하겠기 때문이다. 끝으로 새 천년기의 기독인의 역할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실현하되 그것을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 구석구석으로 확대해 가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출처 : 명지새벽이슬
글쓴이 : 임왕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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