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etch of the life of Samuel Rutherford
*번역한 권혜영 자매는 현재 평강교회 청년부의 회장입니다. 컴퓨터 공학을 공부하고 있는 공학도이기도 합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살려고 하는 자매입니다. 특별히 책 읽기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사무엘러더포드의 책 LEX REX의 서문에 있는 러더포드의 생애를 번역하여 주었습니다. 사무엘 러더포드의 서한문은 번역되어 있으나 위의 책은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귀한 책이지만 분량도 엄청나고, 읽기가 쉬운 책은 아닙니다. 번역에 은사가 잇다면 이러한 책을 한 장씩 번역하여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겟습니까? 이러한 날을 기억하면서 번역에 애쓴 권혜영 자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샬롬
인생의 삶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일반적으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신에 의해 묘사된다. 그 시대가 평화롭고 당파의 싸움과 논의로 시끄럽지 않다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평온할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평안하고, 당의 논쟁과 다툼에 대해 냉정할 것이다. 배움과 문학의 목적으로 사람들의 취향이 드러고. 과학과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의 개발과 발견과 도약의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시대는 “땅에서는 평화”가 있었던 번영의 시대로부터 돌아보면, 혹은 역사의 한 장면으로 읽어보면, 무기력과 단조로움이 나타난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살고 죽고 묻히는 존재라고만 생각할 때는, 우리에게 관심을 일으키거나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무정부 시대, 시민 전쟁, 또는 종교적 박해가 있을 때는 다르다. 공동체의 침묵과 고요가 깨진다. 사람들은 그들을 둘러싼 선동적인 사건들에 흥분된다. 각각의 사람들은 그들의 편을 가진다. 사람의 용기와 대담함이 두드러짐과 동시에 약하고,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인간의 성격이 진실한 빛 가운데서 드러나는 때가 바로 이때이다.
인류의 역사에는 오랫동안 이슈가 되어온 두 가지 큰 쟁점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error) 과 참(truth)의 싸움이며, 참과 거짓의 다툼이다. 거짓이라는 측면은 억압적인 폭력, 종교적 박해를 자행하는 모든 행위, 도덕적 세계에서 덕을 전멸시키려는 노력이다. 참이라는 것은 고귀한 용기, 확고함이며, 무지와 박해에 대항하여 진리의 원리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4천년 이상, 진리는 미신과 우상, 편협과 싸워왔고, 도덕적 무기를 가지고 그 원리의 정당성을 입증해 왔다. 반면에 진리의 적들은 논쟁보다는 검을 가지고 대답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이 밝혀졌다. 모든 시대에서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적었던 반면, 거짓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결국 진리는 화형이나 단두대에서 조차도 승리를 거두었다. 세상이 진리의 가르침에 머리를 조아릴 때까지 사나움 화염은 계속 탈 것이고, 단두대는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 것이다. 우리의 사회와 종교적 역사를 다시 돌아볼 때, 카톨릭과 개혁교리 사이의 극명한 대립을 보게 된다. 우리는 옳고 그름의 지독한 대립을 본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신적 속박과 무지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족쇄를 풀려고 노력하는 진리를 본다. 다시 우리는 17세기 후반의 장로와 주교의 다툼을 본다. 한쪽은 종교적 권리와 사람들의 특권을 짓밟기 위해 그들을 로마 교회의 세력 안에 다시금 끌어들이기 위해 모든 것을 한다. 스코트랜드의 첫번째 순교자 Hamilton으로 시작하여 많은 고귀한 영혼들이 희생되었다.
“몇몇 사람들만이 그들을 기억하지만 그들은 종교 박해가 그들의 이름을 알려지게 하기 전까지 무명으로 살았으며 이제는 천국에 있다.”
사무엘 러더포드는 1600년도에 Roxburghshire의 Nisbet 교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로부터 받은 신분으로 그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없지만, Raid는 이런 말을 했다. “그는 훌륭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리고 Wodrow는 그가 평범하지만 정직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가 사회에서 존경 받는 계급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그의 아들에게 그렇게 수준 높은 교육을 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조숙한 재능을 나타냈고, 그래서 그의 부모는 그를 신학교에 보내려고 했다.
1617년에 그는 에딘버러로 가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학문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4년 후에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1623년에는 세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대학의 학생위원의 한명으로 선출되었다. 이런 초기의 성과들은 그의 동년배들로부터 당연한 것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약 2년동안 학생위원으로서만 행동했고, 그 자리에서 떠나자 마자 앤드류 람세이 교수 밑에서 신학 공부에 전념했다.
스코틀랜드의 교회는 거의 감독 주교(Eposcopal bishops)의 관할권에 있었다. 감독주교제도는 감독 주교들에게 모든 원조와 권력을 하사했던 제임스가 영국의 왕으로 즉위한 이후로 계속되었다. 억압적인 강요에도 불구하고 교회 정부의 원리에 굴복하지 않았던 장로들은 무자비하게 탄압을 받았다. 많은 사람이 옥에 갇혔고, 재산이 몰수되었으며, 다른 이들은 그들의 국가에서 추방당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거나 화형당했다. 제임스 왕이 죽었던 1625년에 그의 아들 찰스가 왕위를 이었고 사람들은 그들의 불만의 씨가 풀어지고, 잘못된 것이 바로잡혀지기를 바랬지만 곧 실망하고 말았다. 스티븐슨은 “그 아버지의 광기가 엄청난 화의 기초를 놓았고, 그의 아들이 그 아버지의 전처를 따랐다.”고 말한다. 제임스는 군주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너무 강하게 절대적이고 명시적인 복종을 요구했다. 그가 그의 아들에게 주입시킨 것들이 불행하게도 찰스의 때에도 성공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원리로 통치했다. 그것은 많은 무정부 상태와 국내 갈등의 원인이 되었고, 그의 불행한 통치로 오명을 남겼다. 그의 말년은 너무나도 비참했다.
1627년에 러더포드는 복음주의 설교자의 자격을 얻게 된다. Kenmure의 존 고든(후의 Kenmure 자작)의 영향으로 Kirkcudbright 지역의 Anwoth 교구의 교회에 임명된다. 당시에 그를 감독주의 성직 안수식으로 끌어들이려는 많은 권리들이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부터 있었던 장로교에 굳게 서서 그는 고위 성직자제도에 대한 그의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또한 당시 가장 벗어나기 힘들었던 주교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았다. 스티븐슨은 “1628년 초까지, 몇몇 목회자들이 국교를 신봉하지 않는 신학을 하기위해 고통을 당했다. 그리고 이 몇몇 목회자에 사무엘 러더포드도 들어간다.” 라고 말했다. 다른 권력들은 같은 영향으로 인용되었을 것이다. 그는 신성한 소명을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이다. 그리고 의심할 것도 없이 그것은 성공하였다. 그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성도들의 영적 필요와 그 자신의 개인적 직책을 위해 헌신했다. 그의 노고는 그의 교구민들에게로만 제한되지 않았고 주변 교구에서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쳤다. “그는 그 나라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위대한 사람이었다.”라고 리빙스톤은 말했다.
1630년에 러더포드는 그의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했다. 13개월이라는 오랜 투병생활 끝에 그의 아내가 죽었을 때는 결혼한지 5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의 죽음은 그에게 많은 슬픔의 원천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음 아픈 사별 후에, 그의 편지들에서 자주 그러한 아픔이 드러난다. 설상가상으로 그 또한 3개월간 지속된 열병으로 시달렸다. 이것은 그가 목회를 할 수 있게 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러더포드의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이며 그를 존경했던 존 고든, Kenmure 자작이 1634년 8월에 병에 걸려 다음 달에 죽게 되자 러더포드의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Kenmure은 상냥하고 경건한 성품의 사람이었고 러더포드와 함께 교제하며 많은 기쁨을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러더포드는 그의 유명한 “서한집”에 많은 편지를 Kenmure 부인에게 썼다.
이때에, 아르미니안 주의가 감독주의 사이에 걱정스러울 만큼 퍼지기 시작했다. 그의 신조는 Canterbury의 대주교 라우드의 지지를 받았고, 같은 주장을 펼친 로스의 주교 맥스웰이 주가 된 스코틀랜드의 많은 성직자들만이 교회에서 승진할 기회를 가졌다. 러더포드는 이런 위험한 주의의 발표를 우려해서 그의 모든 힘을 다해 아르미니안 주의를 논박했으며, 그들을 대항했다. 1636년에 그는 Kenmure 자작에게 헌정하는 “Exercitationes Apologeticce pro Divina Gratia(신성한 은혜 앞에서의 예배)”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그러나 그 논문은 그가 죽고 8개월이 지날 때까지 발표가 되지 않았다. 이 논문은 정부에 큰 반항을 일으켰다. 그는 결국 아르미니안 주의였던 Galloway의 주교 Thomas Sydserff가 있는 대법원에 소환되었다. 1636년 6월에 Wigton에서 열린 이 재판에서 그는 그의 성직을 박탈당했다. 러더포드를 누구보다도 싫어했던 Sydserff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7월에 Edinburgh 대법원에 그를 다시 소환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다른 허위사실과 엄청난 벌금을 부과했다. 러더포드는 그러나 부단한 노력을 통해 그 모듯 것을 물리칠 수 있었다. Lorn 경(Kenmure 부인의 남형제)과 다른 많은 사람들은 러더포드의 친구가 되어 함께 인내했다. 그러나 그것은 동의하지 않으면 왕에게 알리겠다고 했던 Sydserff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3일 후 예심에서 그는 목회 자격을 박탈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어떤 지역에서도 설교할 자격을 내려놓으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1636년 8월 20일 전에 왕의 명이 있기까지 Aberdeen에 구금되어야 했다. 그가 받은 판결은 가혹하고 부정한 것이었지만, 그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의 서한 중 한 군데에 이런 말이 쓰여있다. “나는 Aberdeen에서 나의 임금의 성에 들어간다. 혀와 펜 그리고 어떤 말들도 나의 기쁨을 억누를 수는 없다.”
Aberdeen에서의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잘 알려진 그의 “서한집”을 썼다. 그 서한집은 스코틀랜드의 아주 작은 도서관에 있었다. 감독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는 Aberdeen에서 당시 유일한 세력이었고 박학한 학자들이 러더포드를 주시하는 것을 곱지 않게 보았다. 그들은 그들의 막강한 후원자 Laud의 원리를 모두 받아들였고 러더포드를 감옥으로 가게 한 장로교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을 분명히 했다. 그는 처음으로 푸대접을 받았고, 그의 반대세력들은 사람들이 그를 반대하도록 그들의 모든 힘을 다했다. “사람들은 그가 이상한 사람이고 그가 온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Laud는 말한다. 그러나 그의 무죄는 결국 드러났고 그의 명성은 날로 퍼져갔다. 이 사실은 러더포드가 국외로 추방당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많은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학자들은 러더포드와 논쟁했지만,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했다. “나는 여기서 위대한 학자들과 논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간직하시고 나의 고백을 의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러더포드는 말했다.
이 시기에, 스코틀랜드에는 엄청난 갈등과 폭동이 있었다. 영국 교회의 예배책과 스코틀랜드 장로교 예배의 기준을 소개하려고 했던 찰스 왕의 바램은 오래된 것이었다. 그는 1636년 4월에 무분별한 정책의 성취를 위해 정리를 시작했다. Juxon과 Wren의 주교인 Laud 대주교에게 명하여, 스코틀랜드 교회를 위한 특별한 성찬식을 집행하도록 했다. 그 결과, 약간의 변화를 제외하고 영국의 교회와 비슷하게 되어졌다. 그리고 용어들도 로마 카톨릭의 미사에서 쓰는 용어들을 닮아갔다. 1637년에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엄격하게 준수하도록 했고, 그 날은 이 예식이 Edinburgh에 소개된 날로 정했다. 이 때는 모든 지역에서 승낙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들의 감정은 정점에 달했고, 종교적 자유에 대한 전제적인 간섭에 대항했고, 저항의 기치를 높였다. 찰스는 곧 자신이 고삐를 단단히 당겼음을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제한된 자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장로교 예배를 자유롭게 받아들였다. 이런 연속된 일들은 국가 조약의 갱신과 감독주의의 폐지를 가져왔다.
이런 반란이 있는 동안, 러더포드는 8개월 만에 Aberdeen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Anwoth의 소교구민으로 돌아갔는데 1638년 2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그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부는 Glasgow로 가게 된다. 러더포드는 Kirkcudbright 장로회로부터 대표위원으로 선정되어 1638년 11월 21일 Glasgow에서 개최된 총회(General Assembly)에 파견된 것이다. 그는 대법원에 의해 소송이 제기된 경위에 대해서 설명하도록 되어있었다. 심의 후에, 그의 우세로 판결이 났고, 그와 같은 상황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총회의 일원으로 인정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곧 바로, 총회 위원회는 그를 Glasgow로 파견하도록 했다. 그리고 성 앤드류 대학에서는 그를 New Collage의 신학부 교수로 선정했다. 위원회는 그의 학식과 재능이 당시 중요한 상황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 그를 성 앤드류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Anwoth를 떠나는 것을 강력하게 부인했고, 진정서에서 그의 육체적, 정신적 쇠약을 그 이유로 호소했다. 그가 Anwoth를 떠나는 것을 반대하는 몇몇 진정서들이 Galloway에서 나왔지만 소용이 없었다. 법원은 그의 총장 임명을 승인했다. 1639년 10월에는 성 앤드류의 목사 중 한 사람인 로버트 블레이어의 동료가 되었다.
러더포드는 1634년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열린 신학 총회의 위원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동료들로는 – Alexander Henderson, Robert Baillie, George Gillespie, Fobert Doublas와 같은 목사들과, Cassilis 백작, Maitland 경(후의 Lauderdale 공작), Warriston의 Archibald Johnston 경과 같은 장로들이 있었다. 그는 유명한 위원회에서 나오는 모든 심의를 다뤘고, 논증적이고 실제적인 몇몇 작업들을 책으로 출판했다. 이 당시에 그는 추방당한 Ross의 주교 존 맥스웰의 논문 “Sacro-Snacta Regum Majestas(왕권은 성경에 의해 유일한 것으로 여겨져야 마땅하다는 내용, 1644년 옥스포드)”에 대한 대답으로 그의 유명한 “Lex Rex”를 썼다. 이 작품은 왕의 특권이 하나님으로 부터만 나오고, 절대적이고 주권자의 뜻에 따르는 온전한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쓰여졌다. Lex Rex의 요지는 모든 맥스웰의 논문에 있는 터무니 없고 모순된 개념들을 완전하게 논박하는 것이다.(몇몇 의견들이 현 세대에 좀더 민주적이라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저자는 고전과 고대 신부와 교수들의 저서에 대한 정통한 지식을 보여준다. Lex Rex는 출간되자 마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Guthrie 주교는 “요사이 총회의 모든 일원들이 사무엘 러더포드의 저서를 읽고 있다. 뷰캐넌의 논문(de jure Regni apud Scotos)이 권위 있는 글로 인정 받고 우상화 되었을 때에 나온 러더포드의 Lex Rex는 믿을 만하다(authentic)”라고 말한다.
건강상의 이유로 스코틀랜드로 돌아가는 것을 걱정했던 러더포드는 총회에 이전신청을 했지만 러더포드의 봉사가 그들에게는 매우 가치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업무가 끝날 때 까지 허락되지 않았다. 러더포드는 1647년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성 앤드류에서의 그의 직분을 되찾았고, 나이가 다 되어 은퇴하는 Howie박사를 대신해서 New College의 교장으로 임명된 것도 같은 해 12월이었다. 1651년에 러더포드는 그 대학의 학장으로 임명 되었고 스코틀랜드의 교회의 가장 탁월한 성직자가 되었다. 학자와 성직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지금까지도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퍼져가고 있다. 1649년 총회에서 러더포드를 그 대학 신학부 교수로 에딘버러로 파견하는 것을 인준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Harderwych 대학과 Utrecht대학에서 히브리 신학 교수로 특별히 초빙했지만, 러더포드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교회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찰스 1세가 죽고 난 후에, 러더포드는 교회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투쟁에 가담했다. 그러는 동안에 크롬웰이 왕위를 찬탈했고 영국의 독립(independency)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658년 크롬웰이 죽자마자 찰스 2세가 왕위를 이었다. 국제 규약이 철회된 1651년에 열린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1638년 이후로 제정된 모든 장로교적 법령들을 폐지하도록 결정했다. 사람들이 권리는 무너졌고 그들의 자유는 짓밟혔다. 1688년 Renwich 순교자의 시기까지 무자비한 종교탄압과 살육의 장면이 이어졌다. 러더포드는 그러한 박대에서도 도망하지 않았다. 정부는 Lex Rex가 군주에 대항하고 반역에 기반을 세웠다고 여겨 에딘버러의 교수형 집행인에게 태워버릴 것을 명령했다. 런던과 성 앤드류에도 유사한 조치가 내려져, Lex Rex의 사본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정부의 반역자라는 선언이 발표되었다. 러더포드는 대학과 교회에서의 그의 직책을 박탈당했고, 그의 봉급마저도 압수당했다. 그는 그의 집에 구금되었고 번역이라는 명목으로 에딘버러 의회에 소환되었다. 그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눈에 보이듯 훤하지만 그는 세상의 법정에 소환되기 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강한 체질은 아니지만 열정적인 정신을 소유했던 러더포드는 분쟁과 논쟁의 시대에 그 자신을 헌신했다. 노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건강은 점차 쇠약해졌다. 임종이 가까워 짐에 따라 그는 그리스도인다운 침착함과 강건함을 보여주었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 몇주 동안, 복음 안에 있는 그의 믿음과 소망의 증거들을 남겼다. 임종할 때, 그의 크리스찬 친구들의 위로 속에서 영원한 삶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1661년 3월 20일 61세의 나이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그는 마지막에 “영광, 영광, 임마누엘의 나라에 거하는도다.”라고 말했다.
1842년 4월 28일에 “러더포드 기념비”라고 불리는 거대한 기념비의 기초석이 그를 기리기 위해 그가 설교했던 지역에서 반 마일 정도 떨어진 Anwoth의 교구 Boreland 지방에 세워졌다. 화강암으로 된 이 기념비는 높이가 6 피트이고, 7피트의 사각 주춧돌과 3겹의 층으로 되어있다.
그의 재능과 경건함은 여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저서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학식과 지식의 깊이 보다 그의 크리스천의 면모를 찬양하는 것을 보며 놀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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