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유대교인(세파라딤 Vs. 아슈케나짐)
세파라딤(히브리어: Sefardi 복수형: Sfaradim)은
이베리아 반도를 기원으로 하는 유대인 그룹으로, 아슈케나짐과 구분하기 위하여 정의되는 것이다.
주로 세파르딤은 포르투갈이나 스페인계 유대인들로 여겨지지만
이란같은 중동 나라의 유대인이나 북아프리카계 유대인이 포함되기도 한다.
▲ 1. řada: Maimonides • Isaac Abrabanel • Baruch Spinoza David Nieto •
Daniel Mendoza • David Ricar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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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jamin Cardozo David de Sola Pool
3. řada: Basil Henriques • Pierre Mendès-France • Sam Costa Jacques Derrida •
Šlomo Amar • Hank Azaria
아슈케나짐 ▲
(히브리어: ???????, 독일어: Aschkenasim,
영어: Ashkenazi Jews, Ashkenazic Jews, Ashkenazim, German Jews)는
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 그룹이다.
아슈케나지 유대인(????? ????? 예후디 아슈케나즈) 이라고도 불리며 세파라딤과 구별된다.
중세시대 당시 라인랜드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후손이다. "아슈케나즈"는
그 당시 히브리어로 독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동유럽 국가들로 이주했다.
아슈케나짐은 11세기 당시 전세계 유대인들의 3%에 불과했으나
1931년에는 92%를 차지했으며 현재 80%를 차지한다.
20세기 중반까지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이디시어를 사용했다.
지중해 주변에 있는 유대인들을 제외하면
유럽 출신 유대인들의 대부분이 아슈케나짐으로 여겨진다.
현재 아슈케나짐 유대인의 숫자는 8백만 명 내지 1천 2백만명이다.
이중 3~4백만 명은 이스라엘에 거주하고있으며,
약 6백만 가량의 유대인들은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3]
중세시대
유럽에서는 유대인들의 직종이 한정되어있었으며,
기독교인들 사이의 높은 이자와 관련된 금융활동을 금지해서
아슈케나짐들은 대부분 무역과 금융에 관련된 직업을 맡았다.
프랑스에서는 많은 유대인들이 포도밭을 소유했으며 포도주를 만들었다.
최초의 반유대 폭동은 11세기에 발생했으며
1182년 결국 유대인들은 프랑스에서 추방당했다.
15세기 경 폴란드에 존재한 유대인 지역들은
디아스포라 이래 가장 큰 유대인 지역들로 발전하였다.
유대인 대학살
당시에 전 유럽에 존재했던 약 8백만 유대인들 중 대다수가 아슈케나짐이었고,
학살당한 6백만명의 희생자 역시 대부분 아슈케나짐이었다.
폴란드에 존재했던 330만 유대인 중 3백만 명(91%)의 폴란드 출신 유대인과
110만 명 중 90만명의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82%)들이 희생당했다.
슬라브 민족, 독일, 프랑스, 헝가리와 발칸 반도 출신 유대인들은
약 50~90% 정도가 학살당했다.
아슈케나짐이 아닌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희생된 나라는 그리스밖에 없었다.
생존한 아슈케나짐은 대부분 이스라엘, 오스트레일리아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관습, 전통과 법
아슈케나짐들의 관습들은 세파르딤과 여러모로 다르다.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과월절에는
전통적으로 콩과식물, 옥수수, 쌀과 조를 먹는 것을 멀리했다.
반면에 자유롭게 생선을 섭취하고 우유를 마시지만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이런 음식들을 피하는 편이다.
히브리어 발음 역시 다소 다르다. "타우"라는 히브리 문자를 발음할 때
끝 부분에 "t" 혹은 "th" 발음 대신에 "s" 소리를 붙인다는 것이다.
Map of the Western (purple) and Eastern (blue) Göktürk khaganates at their height,
c. 600 CE. Lighter areas show direct rule; darker areas show spheres of influence.
카자르 왕국은
9세기부터 국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슬라브족의 침략을 받게 되었으며
급기야 965년 우크라이나 스비아토스라브 왕의 침략을 받고 몰락했다.
그후 아시아로부터 온 몽골군이 유럽으로 원정을 하자
그들은 몽골의 대군을 피하여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러시아, 그리고 더 나아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독일 등의
지역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공동체를 구성하여 카자르 인이 아니라
유태인으로서 생활하게 되었다.
사실 그들은 유태교를 믿는 종교집단이지 유태민족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아리안족의 발상지인 코카서스로부터 왔던 것이다.
유전학적으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자손이 아니고 백인계로서 셈족계열이 아니다.
셈족 계열은 스파라디나 아랍인 등이다.
그렇지만 이들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을 우리는 진짜 유태인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오늘날 전 유태 인구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Khazar
that established a commercial empire
in European Russia in the late 6th century.
A people of the northern Caucasus region,
the Khazars allied with the Byzantines
against the Persians in the 7th century
and warred with the Arabs until the mid-8th century.
Their empire extended westward along the Black Sea,
and they controlled trade routes and
exacted tribute from their neighbors.
The ruling class adopted Judaism and maintained close
relations with the Byzantine emperors.
The Khazar empire began to decline in the 10th century
and was crushed by Kiev in 965.
‘전설속 유대왕국’ 카자르제국 수도 발견
[모스크바 AP=연합뉴스 2008-09-22]
1천여년전 카프카스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다 홀연히 사라진
고대 카자르(Khazar) 제국의 수도 이틸(Itil)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됐다.
21일 러시아 아스트라한 주립대학의 드미트리 바실리예프 교수는
9년간의 발굴 끝에 카스피해 아스트라한항(港) 서남쪽 습지에서
구운 벽돌로 지어진 삼각형 성채 의 기초를 찾았다고 밝혔다.
성채 주변에는 몽골 유목민의 천막집인 유르트(Yurt)와 유사한 거주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카자르 제국에서 구운 벽돌로 집을 짓는 것은 수도 이틸에서만 허용됐으며,
유적의 위치는 당시 실크로드를 오가던 상인들이 남긴 기록과 일치한다고
바실리예브 교수는 설명했다.
인구 6만의 대도시였던 이틸은 실크로드의 주요 거점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유적에서는 8~9세기경 유럽과 비잔틴제국, 북아프리카 등으로부터 전래된
도자기와 갑옷, 목제식기, 유리램프, 컵, 보석류, 약품그릇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 됐다.
바실리예프 교수는 유적에 대규모 화재 흔적이 있다면서,
이는 10세기 말 러시 아에 정복될 당시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계 일각에서는 유대교 관련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부른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카자르 제국의 지배계층은 8~9세기께 모두 유대교로 개종,
역사상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교를 국교로 삼은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
바실리예프 교수는 다른 카자르제국 유적에서도 유대교 관련 유물은
매우 제한적으로 밖에 발견되지 않는다면서 유대교는 전통적 샤머니즘이나
이슬람 등 다른 종 교에 비해 인기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모스크바 중동문제연구소의 예브게니 사타노프스키 소장은 이에 대해
“카자르 지배계층이 유대교를 받아들인 까닭은 (이슬람이나 기독교를 믿는 주변
국가들 사이 에서) 오늘날의 스위스처럼 중립으로 남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투르크계에 속하는 카자르족은
중국 북부로부터 흑해까지 펼쳐진 광대한 초원을 방랑했던 유목민족으로,
7~10세기에는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 카프카스 산맥,
중앙아시아를 망라하는 대제국을 건설했었다.
스파라디(=세파르딤)유대인과 아슈케나지 유대인 - [1]
유태인은 혈통적으로 조상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그 아들 야곱의 자손이 진짜 유태인이다.
기원 70년 로마군에 의해 에루살렘이 함락되었다.
그곳에 있었던 유태교 신전은 완전 파괴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땅을 버리고 떠났다.
기원 135년에는 발-코호바에 의한 반란이 일어났다.
그것은 유태의 제2전쟁이라고 일컬어진다.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한 전쟁이었지만 도리어 로마군으로부터 가차없는 타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 남아 있었던 소수의 유태인들도 모두 다른 나라로 흩어져갔다.
물론 그들은 로마에 가는 것을 피하고 주로 북아프리카로 향했다.
시대는 흘러 622년, 사라센 제국을 수립한 아랍인들은 유태민족에 대하여 매우 관대했고,
심지어 존경까지도 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평온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많은 유태인들은 점차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그 후 스페인은 유태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스파라디는
이산한 유태인 중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거주했던 사람들과 그 자손들을 말한다.
이베리아 반도에 이주한 스파라디는 중세에 세계 유태인의 약 절반을 점했고
라디노어를 사용하며 이슬람 문화와도 동화하는 등 활동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옛날 스페인에서 커뮤니티를 형성했던 스파라디가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1492년 바로 그 스페인에서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스페인은 그 때 이미 강력한 카톨릭국가가 되었다.
유태인들은 카톨릭으로 개종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만약 개종하지 않으면 스페인에서 떠나라 명령하였다.
이때 약 25만 명이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오스만제국으로 이주했다.
스파라디 유대인 - 아브라함의 자손 '유대인' - [2]
로마제국에 대항해 예루살렘에서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가 쫓겨났지만
고향을 제발로 떠난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스파라디’라는 말은 스페인에서 살던 유대인을 가리키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하였다.
아랍사회속에서 살던 유태인들이 회교도들을 따라서 스페인까지 갔다가 기독교도들이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하면서 기독교로 개종을 강요받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다고 하여서 생겨난 말.
이에 반하여
아슈케나지 유태인들은 북동 유럽계 유태인으로
옛날 카자르 왕국을 세웠던 터키계 카자르인의 자손이다. - [1]
카자르 지방은 남러시아의 평원을 말한다.
8세기 경 이 광대한 초원에서 터키계의 사람들, 즉 카자르족이 상인, 직인, 무사로서 살았다.
이 무렵 카자르 왕국은 비잔틴의 기독교와 이슬람교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보통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되면 어느 강한 쪽의 세력을 선택하지만 카자르 왕은
용케도 양쪽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유태교로 개종하였다.
만약 이슬람교를 받아들인다면 그리스도교가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며,
반대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면 이슬람교도가 불쾌해 할 것이다.
그러나 양파가 다같이 예언자 모세를 위대한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인종적이 아니라 종교적으로 유태인이 된다면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 양파로부터의 증오를 잘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래서 강제적으로 전 국민들이 개종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태교를 국교로 삼은 결과, 수십 년 내에 민족 전체가 유태교도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자기들은 혈통적으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유태의 가면을 쓴 셈이다.
아슈케나지 유대인 - 독일에서 살던 유대인이란 히브리어에서 유래. - [2]
나찌스나 기타 유럽인들에게 탄압을 받았던 유대인들로
아인슈타인과 유명 유대인들이 여기 속함.
몽고의 러시아 침략 시기에 슬라브족과 몽고족의 혼혈 민족인
'카자르' 라는 왕조가 동구에 있었다. 원래는 슬라브족 원주민을 몽고족과 함께 온
아랍계 회교도들이 정복하면서 혼혈로 생긴 민족.
문제는 러시아가 몽고족들을 다시 밀어내면서 중간에 있었던 카자르 사람들이 묘한 위치에
놓임. 회교도로 남아 있자니 정교를 믿는 러시아에 핍박을 당하게 생겼고, 개종하자니
자신들의 전통과 완전히 단절을 하면서 러시아에 흡수될 위험이 컸다.
이에 '유대교' 로 개종하기로 결정.
아슈케나지들은 이스라엘에서는 20-30%로 소수지만 세계적으로
전체 유대인의 80%를 차지하며 현재 이스라엘의 지배층이라고 할 수 있다.
대다수와 하층부를 담당하고 있는 '스파라디' 들은 수천년간을 아랍인들과 어울려 살아왔고,
실재로 혈연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오랜 세월의 통혼과 문화적인 교류로 말미암아 사실상 동일한 민족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실제로 이들에게는 아랍인들이나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적대감도 별로 없고,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고발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스파라디'들이다.
‘아슈케나지’들은 고대 유태인들의 후손이 아닌 사실상 유럽인이라 팔레스타인 사람과
혈연관계도 없고, 문화도 유럽인들에 가깝고 아랍인들에 대한 적대감도 대단해서
이들이 이스라엘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어 분쟁은 불가피하다.
미국과 유럽인들은 ‘태인 국가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회교 국가들 속에 심어진 기독교 국가의 아류를 지원.
Azeri Turks are related to Khazar Jews:
From Wikpedia:
Other noted historians include Tabari, who describes in detail various incursions
into Azerbaijan by Ural-Altaic tribes (Huns and Khazars) in the 4th and 5th
centuries CE.
Tabari also states that by the mid-6th century, there was a significant Turkish
presence in Azerbaijan and other adjacent regions.[citation needed]
Kalankatly also states that in the year 629, the army of the Gokturks as well as
a series Khazar Turkic tribes entered Azerbaijan and declared the land to be
the "eternal possession" of the Turks. [citation needed]
Byzantine sources of the mid-6th century refer to the "settlement of Khazar
Turks" in the left bank of the Kura river and Kalankatly makes reference to a
"Hun state" on the left bank of the Kura River in the 7th century.
According to Professor Peter B. Golden, "In the course of the seventh century,
the two major tribal unions emerged in Azerbaijan under the Turk banner:
the Khazars and the Bulgars...the Khazars formed the bulk of the Turk forces
used by the Byzantine Emperor Heraclius (610-640) in his counter-offensive
against the Sasanids (rulers) in Azerbaijan".
These two people are very similar according to many Jews:


건국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이스라엘 전문가 유태영 교수 주장-
유대인들은 유대교를 믿는 종교집단이지 민족이 아니다.
유대교를 세웠다고 하는 아브라함부터 다른 민족의 여자와 결혼했고,
아랍지역을 통해 중국과의 교역으로 중국인들의 피까지 들어간 상태이므로
외모상으로 유대인을 구별하기는 아주 어렵다.
대학살 현장을 방문하는 유대인들. 매부리코가 있나요?
이 사람은 매부리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