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여신과 인간이 치른 성혼례와 이별의 노래
여신과 인간이 치른 성혼례와 이별의 노래
사랑은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모든 역사와 문화에 사랑 노래가 있지만, 고대 수메르에는 성스러운 혼례의식이 있었고 이 혼례가 치러질 때마다 사람들은 사랑과 이별을 노래했다. 여신 인안나와 양치기이자 도성국가 바드티비라를 다스렸던 두무지의 사랑, 구혼, 이별과 저승이야기까지, 성혼례 의식에서 불린 노래를 소개한다.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한다’라는 문구는 작고한 크레머 Samuel Noah Kramer 교수의 책 제목이다. 크레머 교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헌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이다. 그는 런던, 파리, 이스탄불, 필라델피아 등에 있는 여러 박물관의 유물창고 서랍에 보관된 수많은 점토판에서 수메르 이야기를 찾아내 번역하고 편집했다. 그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1956년에 출간된 <수메르 점토판에서 From the Tablets of Sumer>이며 그 이듬해 나온 프랑스어 번역판 제목이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한다 L'histoire commence a sumer’다. 그 다음해에는 제목을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한다 History Begins at Sumer'로 바꿔 다시 출간되고 1981년에 ‘역사상 “처음”으로 기록된 39개의 이야기Thirty-Nine "Firsts"in the Recorded History'라는 부제를 달고 개정 3판이 나왔다.
1950년대까지도 고대 근동의 문화사는 고대 이집트, 고대 메소포타미아 순서로 엮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나 기원전 3,300년경에 사용된 수메르 상형문자 기록이 고대 이집트 것보다 300여 년 앞섰다는 사실이 그때 이미 연구로 밝혀진 상태였다.
‘사랑은 수메르에서 시작한다 L'amour commence a sumer’라는 문구는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한다> 개정판의 프랑스어 번역본을 준비할 때 생겼다. 프랑스의 점토판 전공학자 보테로 Jean Bottero 교수는 수메르 신화와 노래에 사랑을 주제로 하는 텍스트가 개정판에 많이 첨가된 것을 보고 ‘사랑은 수메르에서 시작한다’는 문구를 부제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사랑은 역사처럼 문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고 또 수메르라는 지역에 한정될 이유도 없다. 특별히 사랑이라는 주제가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성혼례 Sacred Marriage Rite라는 매우 특이한 종교적 의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크레머 교수는 수많은 점토판에서 수메르 성혼례 신화와 노래를 엮어 <성혼례 Sacred Marriage Rite>(1969)라는 책으로 펴냈다.] 성혼례聖婚禮 텍스트는 사랑만이 아니라 이별의 애가哀歌도 함께 노래한다. 또 성혼례와 관련된 저승신화도 이야기한다. 이렇게 풍부한 성혼례 자료가 수메르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랑은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바빌론 도시를 재구성한 그림. 성벽너머로 도시중앙에 보이는 높은 탑이 바빌론의 지구라트다(그림 오른편 위쪽).[after M,Roaf, Cultural Atlas of Mesopotamia & the Ancient Near East(1996),p.193]
여신과 인간의 결합, 성혼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성혼례는 본래 신년 행사로, 층계탑과 같은 높은 탑 위의 신방神房에서 도성국가의 통치자와 여사제 사이에 치르는 혼례를 말한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도시 수호신전 옆에 흙벽돌로 쌓아올린 층계탑은 지구라트라고 불렀으며 그곳에 신당神堂과 정원도 있었다.
기원전 21세기 수메르 도성국가 우르에 쌓은 지구라트의 높이는 20미터 정도 되었다.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꼽히는 것은 기원전 7세기 바빌론에 세워진 마르둑Marduk 신전 옆의 지구라트다. 가장 낮은 층이 약 90평방미터였으며 그 높이도 약 90미터였다.
기원전 40세기경 수메르 도성국가가 형성되기 전에도 성혼례 의식이 있었지만 도성국가가 건설되면서 국가적 의례로 자리잡았고, 심각한 사회 혼란 등으로 이행되지 못한 해를 제외하고 페르시아 왕국이 바빌론을 지배하게 된 기원전 6세기 중엽까지 3,500여 년 동안 지속되었다.
성혼례를 치르는 신년은 추분이었고 신년행사는 보통 12-13일 동안 거행되었다. 통치자와 혼례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지구라트 계단을 올라가며 성혼례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도시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했다. 성혼례 행사 모습은 우루크에서 출토된 기원전 35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설화석고 항아리에서 볼 수 있다. [이 항아리는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었는데 지난 이라크 전쟁 때(2003년 4월 초) 약탈당했다.]
맨 위 단 가운데에 있는 ‘갈대로 엮은 기둥’은 갈대로 엮어 지은 집(창고) 입구에 세운 기둥이며, 인안나를 상징하는 그림문자다. 인안나는 사랑과 풍요의 여신으로 곡식과 고기, 술 등을 보관하는 창고의 수호신이다. [인안나는 ‘하늘의(an-na) 여주(in)’라는 뜻이다.] 갈대 기둥 앞에 서 있는 여자가 인안나 역할을 하는 여사제며 그 뒤편에 놓인 곡식 담은 항아리 두 개와 제물을 담은 항아리, 짐승 두 마리는 성혼례에 가져온 선물이다. 여사제 앞에 벌거벗은 사제가 열매 담긴 큰 그릇을 혼인 선물로 여사제에게 주고 있다. 그 뒤에 아마亞麻포 치마를 입은 인물이 통치자인데, 손상된 형체를 재구성한 것이다.
가운데 단에는 신전에서 일하는 사제들이 벌거벗은 채로 음식과 술 등 제물을 들고 인안나 신전으로 향하는 행렬 장면이 보인다. 아래 두 단은 가축과 곡식이 늘어나는 것을 보여준다.
우르크의 설하석고 항아리아 표면그림.[afer M.Roaf,p.61]
성혼례의 여사제와 통치자는 사랑의 여신 인안나와 젊은 양치기 두무지 역을 각기 맡는다. ‘착한 아들’을 뜻하는 두무지는 ‘수메르 왕 계보’에 의하면 수메르 왕조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도성국가 바드티비라의 왕이었으며 별칭은 양치기다. 따라서 수메르 성혼례는 여신과 통치자(인간)의 혼례를 말한다. 신년행사가 끝나면서 성혼례 역시 끝나고 통치자는 지구라트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간다. 혼인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만났다가 헤어지는 관계다. 통치자가 지구라트에 올라가 혼례를 치르는 동안 사람들은 사랑의 노래를 부르고, 그가 내려올 때 두무지의 애가를 부른다. 이 애가는 두무지가 저승으로 끌려가는 내용으로 성혼례의 비극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성혼례의 주제는 식품창고 여주와 양치기 사이의 사랑과 이별이다. 수메르 사랑의 노래는 백여 편 있으며 두무지와 인안나의 만남과 구혼, 혼인과 갈등 등 여러 주제로 이루어진다. (아래 번역된 텍스트는 조철수, <수메르 신화> 참조.)
두무지는 인안나에게 반해 검은 양, 흰 양 그리고 맛있는 음식 즉 갖가지 유제품, 치즈 등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구혼한다. 인안나는 자신의 식품창고에 선물이 그득할 것을 기대하며 기뻐한다. 인안나의 오빠 태양신 우투는 두무지를 혼인 상대로 보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인안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는 내 마음의 사람입니다.
내 마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입니다.
호미질을 하지 않아도 짚 더미가 쌓아올려지겠고
곡식이 창고에 쟁여지겠습니다.
농부여, 그의 곡식은 많이 쌓일 것이며
양치기여, 그의 양羊은 털이 수북해지겠습니다. (<새색시의 꿈>, 48-54)
두무지가 인안나의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리며 열어달라고 한다. 아름답게 차려입고 치장한 인안나가 문을 열고 나오자 두무지는 문을 확 열어젖힌다. ‘그녀는 달빛처럼 집 밖으로 나와 그에게 왔다. 그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는 기뻐했다. 그는 그녀의 목을 껴안고 입 맞추었다.’ 두무지는 인안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와 자기 집안이 섬기는 신의 신당에서 이렇게 맹세한다.
나는 당신을 내 여종으로 여기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식탁은 화려합니다. 당신의 식탁은 화려합니다.
화려한 식탁에서 당신은 먹을 것입니다.
내 어머니는 술통 위에 놓고 먹었습니다.
두투르의 동생도 (그런 식탁)에서 먹지 않았습니다.
내 누이 게쉬틴안나도 (그런 식탁)에서 먹지 않았습니다.
바로 당신이 화려한 식탁에서 먹을 것입니다.
나의 신부여, 당신은 나를 위해 옷을 짜지 않을 것입니다.
젊은 여인이여, 당신은 나를 위해 실을 꼬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신부여, 당신은 나를 위해 양털을 풀지 않을 것입니다.
인안나, 당신은 나를 위해 휘어진 널빤지를 밟지 않을 것입니다.
(<인안나와 두무지의 혼인>, iv 5-17)
그러나 두무지의 맹세와 혼인의 즐거움도 잠시. 두무지는 인안나의 분노를 사서 저승사자들에게 쫓기다가 결국 붙잡혀 저승행이 되고 만다. 갓 혼인한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기에 인안나는 두무지를 저승으로 보냈을까?
인안나의 저승신화와 두무지의 저승행
두무지가 어떻게 하여 저승에 살아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되었는지 가장 잘 알려주는 이야기는 ‘인안나의 저승여행’ 신화다. ‘인안나의 저승여행’ 신화는 인안나가 저승에 내려갔다 오겠다고 마음먹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왕관을 쓰고 화장먹을 눈에 바르고 가슴마개를 가슴에 두르고 금반지를 끼고 저승여행 길을 떠난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시종에게 그녀는 만일 자기가 이승으로 올라오지 않으면 자신의 할아버지 엔릴과 아버지 난나 그리고 시아버지 엔키에게 달려가 도와달라고 요청할 것을 당부한다. 저승 입구에 도착하자 저승 문지기는 “사람이 돌아가지 못하는 길을 당신은 왜 택하였습니까?”라고 묻는다. 그녀는 “나의 언니 저승 여주의 남편인 ‘하늘의 큰 황소’가 죽었기 때문에 그의 장례식을 보고 장례식에 술을 따르러 왔다”라고 대답한다. 인안나는 저승의 일곱 대문을 지나며 몸에 걸친 것을 모두 빼앗긴다. 저승에서는 화려한 복장이나 치장을 하지 않는다. 끝내 인안나는 벌거숭이가 된 채 두들겨 맞은 고기 덩어리처럼 되었다.
한편 인안나의 시종은 여주인이 돌아오지 않자 엔릴과 난나에게 달려가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거절당한다. 그녀는 지하수신 엔키에게 도움을 청한다. 엔키는 자신의 손톱 밑에서 때(점토)를 긁어내 두 곡哭꾼을 만들어 생명수와 생명초를 건네주고 저승으로 보내어 인안나를 일어서게 만든다. 그녀가 저승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저승신들이 막는다. “저승에 들어왔다가 어떻게 몸성히 올라갈 수 있느냐?”고 웃어대며 그녀 대신 머리 하나(한 사람)를 보내줄 것을 요구한다. 그들은 인안나에게 그러겠노라는 약속을 받고서야, 그것도 저승사자들과 동행시켜 인안나를 내보내준다.
지상에 도착한 인안나 일행은 저승에 보낼 자를 찾아 여러 곳을 다니다가 우루크의 옛 도시에 있는 큰 석류나무에 이르렀다. 화려한 옷을 입은 두무지는 석류나무 밑에서 즐겁게 걸터앉아 놀고 있었다. 인안나는 그를 보자 화가 치밀었다. 그를 저승으로 보내라고 인안나가 소리치자 저승사자들은 그를 붙잡았다. 양치기 두무지는 자신의 새색시 인안나의 오빠 태양신 우투에게 눈물을 흘리며 살려달라고 이렇게 애원한다.
나는 여신의 남편입니다. 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은 나의 처남이며 나는 당신의 매제입니다.
당신의 어머니 집에 기름을 날라다 준 것이 나이며
인안나의 신전에 음식을 날라다 준 것이 나입니다.
우루크에 혼인 선물을 한 것도 나이며
인안나의 성聖스러운 무릎에서 춤춘 것도 나입니다.
내 손을 도마뱀의 손으로 바꾸어 주십시오.
내 발을 도마뱀의 발로 바꾸어 주십시오.
내가 저승사자들에게서 도망가
그들이 나를 잡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우투는 두무지의 손과 발을 도마뱀으로 바꾸어주어 저승사자들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게 했다. 들판으로 도망간 두무지는 그의 누이 게쉬틴안나(‘하늘의 포도’라는 뜻)가 일하는 포도주 양조장에 숨었다. 날아다니던 파리가 이를 알아차리고 인안나에게 일러바쳐 결국 그는 붙잡히게 된다. 도무지의 누이가 저승에 끌려가게 된 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인안나에게 호소하자, 인안나는 자기 남편과 그를 숨겨준 시누이에게 각각 반년씩 저승에서 살다오라고 운명을 정해 준다.
물론 두무지와 케쉬틴안나가 각각 반년씩 저승에 갔다가 돌아오는 신화는 자연 환경을 배경으로 엮어졌다고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건기와 우기 구분이 확실하며 우기인 겨울이 지나 6월에 여름이 되면서 들판에 초목이 시들기 시작한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양떼를 모는 양치기들은 마지막까지 남은 풀을 찾아 벌판을 헤매다가 양조장에 가서 술 한 모금씩 축이는 자신들의 처절한 모습을 이렇게 저승에 끌려가는 이야기에 담아 부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포도를 수확하여 즙을 짜내 통에 담아 지하 저장창고에 보관하였다가 몇 달이 지나 꺼내 마시는 생활도 계절 변화가 관련이 있어서 ‘포도의 여주’ 게쉬틴안나가 두무지 신화와 엮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두무지의 저승행을 성혼례와 연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층계탑 신방에 사는 여사제는 신년행사로 도성의 통치자인 남편을 맞이하고 그는 여신의 남편으로 화려한 침상에 누워 당분간(12-13일) 혼인 생활을 하지만 정해진 때에 세상으로 내려가야만 했다. 이러한 종교의례도 두무지가 저승으로 내려가야 하는 이유를 신화 속에서 말해준다. (얼마나 내려가기 싫었으면 ‘나는 여신의 남편이다’라고 말할까?)
두무지는 착한 저승신이 되었다. 두무지는 바빌로니아 말로 탐무즈인데, 6-7월에 걸리는 달[月]을 탐무즈 달이라고 부른다. 이 달은 망자의 혼령을 달래주는 곡哭하는 달이었다.
길가메쉬의 이웃 사랑
길가메쉬는 성혼례로 태어난 아들로 기원전 2650년경 도성국가 우루크의 왕이었다. (성혼례로 태어난 아들들 가운데 이처럼 왕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 수메르어로 기록된 길가메쉬 이야기는 다섯 편 있으며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1800년경)에 와서 바빌로니아어로 12개 토판에 편집되어 완성본이 나왔다. 이 바빌로니아 판을 흔히 길가메쉬 서사시라고 말한다. 바빌로니아판 길가메쉬 서사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심연深淵을 본 자를 나는 온 세상에 알리겠다.
모든 것을 안 그에 대하여
나는 모든 이야기를 하겠다.
여기에서 심연을 본 자는 길가메쉬 자신이다. 그는 옛날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영원히 살고 있는 현인을에게서 ‘재기再起의 풀’을 얻고자 죽음의 바다를 건너가 그를 만나 결국 그 비밀 장소를 알게 된다. 길가메쉬는 발에 돌을 묶고 잠수하여 깊은 곳(심연)에서 풀을 보았다. 심연에서 풀을 뜯고 밧줄을 자르고 올라왔다.
내가 이것을 우루크로 가져가서
그곳 늙은이들에게 나누어주겠다.
이것의 이름은 ‘늙은이가 젊은이’이다.
나 역시 이것을 먹고 내 젊은 시절로 돌아가야겠다.
‘늙은이가 젊은이다’는 뜻을 가진 단어가 바로 길가메쉬다(수메르어로 ‘길가’는 ‘늙은이’, ‘메쉬’는 ‘젊은이’라는 뜻이다). 재기의 풀을 손에 쥔 길가메쉬는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다 마침 시원한 연못이 보여 멱을 감는다. 그때 뱀이 풀 냄새를 맡고 풀을 가져가 먹어버렸다. 뱀이 혼자 껍데기를 벗기 시작하자 길가메쉬는 앉아 울면서 뱃사공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누구를 위하여 내 팔은 애썼는가.
누구를 위하여 내 심장의 피는 말라 버렸는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가메쉬 영웅담은 이렇게 끝난다. 서사시의 마지막 부분은 첫 부분을 되풀이한다. 그가 그렇게 애써서 얻은 생명초가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탈한 일인가. 이 이야기는 인간의 운명은 신들이 정해준 것이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노력할 뿐이라는 것을 전해준다. 길가메쉬가 재기의 풀을 구하여 도시의 늙은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도 젊어지고자 한 것처럼 이웃의 안녕을 생각하는 마음이 심연을 본 자가 전하는 메시지다. 죽음의 바다를 건너 영생의 풀을 얻고자 한 것은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를 위한 일이었다. 길가메쉬는 저승의 감독관이 되어 저승에 내려온 망자들을 돌보아준다.
조철수 고대근동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