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옥성호著 `부족한 기독교`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책 소개
옥성호의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중 제1부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현재 기독교는 위기와 맞닥뜨렸다. 세상을 부정하기보다는 경쟁하려고 노력하다가 성경말씀만으로는 부족한 기독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경말씀을 도와줄 구원군을 요청하게 되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성경말씀을 전하고 있다.
교회성장전문가들은 성경말씀만으로는 부족한 기독교를 구원군이 도와준다면 교회가 성장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구원군을 교회성장에 꼭 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대표적 구원군 3가지를 분석하여, 그것으로 인해 기독교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음을 주장한다.
제1부에서는 대표적 구원군 3가지 중 '심리학'에 대해 다룬다. 교회 속의 여러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심리학이 설교가 성경말씀을 떠나 감동적 이야기로 채워지도록 만들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아울러 심리학이 기독교에게 주는 메시지를 검토한다.
옥성호의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중 제2부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현재 기독교는 위기와 맞닥뜨렸다. 세상을 부정하기보다는 경쟁하려고 노력하다가 성경말씀만으로는 부족한 기독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성경말씀을 도와줄 구원군을 요청하게 되었고, 그들의 도움을 받아 성경말씀을 전하고 있다.
교회성장전문가들은 성경말씀만으로는 부족한 기독교를 구원군이 도와준다면 교회가 성장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구원군을 교회성장에 꼭 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대표적 구원군 3가지를 분석하여, 그것으로 인해 기독교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위기에 빠져들게 되었음을 주장한다.
제2부에서는 대표적 구원군 3가지 중 '마케팅'에 대해 다룬다. 교회 속의 여러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마케팅의 원리가 성경말씀의 진리를 밀어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마케팅이 성경적인지에 대해 물으면서, 교회가 마케팅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한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저자소개
이 책을 쓴 옥성호는 크리스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나 20대 후반 어느 시점에 '기독교는 코미디' 라는 결론을 내리고 기독교에 대해 관심 자체를 끊었다. 그러나 가정적 환경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불필요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 교회 출석은 빠지지 않았으며 겉으로는 기독교인으로 행세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2005년 1월 로이드 존스 목사의 「교리 강좌 시리즈」(The Great Doctrins of the Bible)를 읽던 중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크리스천이 되었다.
이후 성경 진리에 새롭게 눈이 열리면서, 성경의 진리보다 심리학, 경영학, 엔터테인먼트를 더 의존하고 있는 세속화된 교회, 부족한 기독교의 모습에 충격을 받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스스로 체험적으로 익혀 그 정체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세일즈계의 자기계발 기법들을 마치 성경의 가르침인 양 포장만 바꾸어 전파하고 있는 각종 신앙 서적들과 설교들을 대하면서 자신의 소명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을 닮아 있는 부독한 기독됴의 원인과 현상을 진단하고 다시금 성경만으로 충분한 기독교, 교회다운 교회 회복을 위해 작은 불씨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소망이 <부족한 기독교 3부작 시리즈>(1권: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2권: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3권: 엔터테이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의 집필로 결실을 맺게 되었고, 이번에 1권을 탈고했다.
옥성호는 한국 외국어 대학교의 노어과를 나와 미국 인디애나주에 있는 The University of Notre Dame에서 MBA를 취득했으며, 특허 데이터베이스와 분석 솔루션을 제공하는 한국의 벤처 기업 위즈도메인에 입사하여 2001년부터 미국지사를 맡아 현재 북미 시장의 세일즈와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 [반디북 제공]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저자 옥성호 인터뷰
▲이 책이 큰 관심을 끌며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이 정도의 반향을 예상했는지, 또 이렇게 큰 주목을 끄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전혀 못했습니다. 책을 출판한‘부흥과 개혁사’가 재정적으로 넉넉한 출판사가 아니기 때문에 좀 부담이 됐습니다. 혹시 이 책 때문에 손해를 보지는 않을까 해서요. 이 책이 주목받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옥한흠 목사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이고요. 두 번째는 책 초반에 나오는 백 목사님과의 이 메일 내용이 책의 내용에 대한 신뢰감을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책에 실릴 줄 전혀 몰랐습니다. 좀 더 메일 내용에 신경을 쓸 것 그랬습니다. 세 번째로 책 내용 자체가 주는 파격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교회 내의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부분들에 대해서 나름대로 명확하게 선을 그어주었기 때문이겠지요.” ▲저술 동기를 좀 더 설명해 주신다면, 그리고 특별히 책제목에‘부족한’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책 머리말에 나옵니다. 제가 세일즈를 통해서 공부한 각종 자기 계발성의 심리학 기법들이 아무런 여과없이 교회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사실 매우 놀랐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어도 그런 모습을 전혀 보지 못했거든요. 완전 장님이었지요. 책제목과 관련해서는 기독교의 진리가 부족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마치 결함이 많은 얼굴을 성형수술 하듯이 세상의 이것저것을 기독교의 진리 위해 갖다 붙이고 있는 오늘의 교회를 풍자하는 의미로 붙인 용어입니다. 부족하지 않은데 왜 부족하게 만들고 있냐라는 항변이지요.” ▲한국교회의 대표적 지도자 중 한분인 옥한흠 목사의 자제 분으로, 당연히 신앙적인 배경에서 출생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인이 될 때까지 회심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대단히 용기있는 고백이며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목회자의 아들이자 평신도로서 한국교회의 기독교 가정교육과 신앙교육의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회심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각종 신앙 체험들은 수도 없이 했거든요. 그런데 그런 대부분의 체험들은 청소년기의 감정적 흥분에서 비롯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요. 그런 상태에서 생기는 감정적 변화들을 회심이라고 정의한다면 회심을 수십 번 한 셈입니다. 제가 말하는 회심은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말합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말합니다. 내가 왜 믿는가에 대한 확신을 말합니다. 저는 30년 가까운 시간을 제가 크리스천이라고 알고 살았는데 어느 날 나를 보니까 전혀 아니더군요.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받은 자의 모습과 당시 나의 모습이 너무도 달랐으니까요. 성경 이야기에 익숙한 것과 성경의 진리를 체험한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과 크리스천 사이의 차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는 것을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셈이지요. 신앙 교육이 소위 말하는 경건 훈련으로 대표되는 기계적 습관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봅니다. 똑똑한 아이라면 자라면서 분명히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아이라면 그냥 습관적 익숙함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게 되겠지요. 아이들이 부모를 보면서도‘도대체 저 사람들이 믿는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마음속에 든다면 성공한 신앙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미국의 경우, 부모가 교회에서는 성심을 바쳐 봉사를 하지만 집에서는 주로 한국 드라마 비디오에만 빠져 있다면 그 부모를 보고자라는 아이에게 기독교는 사회적 봉사활동 장소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에 대한 진지함을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갖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정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20대 후반 어느 시점에‘기독교는 코미디’라는 결론을 내리고 기독교에 대한 관심 자체를 끊었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독교가 너무 쉽고 간단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집회 끝나고 한번 일어났다가 앉으면 구원받았다고 하니…. 세상에 그런 가벼움 속에 무슨 진리가 있을 수 있겠냐라고 생각했지요. 물론 진리가 반드시 무겁고 어려워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벼움 속에 있는 경박함은 더더욱 아니지 않겠습니까. 기독교 진리의 가벼움에 대한 회의가 일단 들자 제가 나 자신을 보면서 ‘아, 이러니까 내가 그토록 교회를 다녔어도 내가 이 모양이지.’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에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현대 심리학의 이론을 마치 과학인양 최종적인 분석과 결론의 권위를 부여하여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교회의 오류를 공감합니다. 그러나 심리학의 무의식의 존재에 대해선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이 문제 자체를 해결하는 최종적 능력은 없지만 문제의 원인분석에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견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무의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래된 기억, 잊혀진 기억은 있겠지만 그것을 무의식이라는 무슨 거대한 빙산이 의식 아래 있다는 식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 심리학이 인간 중심적 학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조직신학은 인간 중심적 학문인 철학을 끌어들여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인데, 철학은 문제가 없나요. 역사학을 토대로 한 성서고고학 또는 역사신학은 어떤가요. 또한 기독교교육과 기독교사회복지 등은. “저는 심리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책에서‘심리학’이라는 용어로 시작했지만 사실 제가 전면 부정하는 것은‘정신 분석‘입니다. 물론 심리학이 과학이다라는 주장에는 전면 부정하지만요. 심리학 역시 활용 가능한 하나의 영역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리학은 철학 또는 고고학 등의 다른 학문과는 달리 성경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더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서 보조적으로 사용되는 다른 학문들과는 달리 심리학은 성경의 진리 자체를 재편성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의 이론에 맞추어 인간을 재정의하고 그에 따라 다른 성경의 모든 진리들도 왜곡되고 있지요.” ▲ 인간 중심적 심리학이 아닌 성경을 근거한 기독교심리학이 가능한지요. 왜 가능하지 않은지, 또는 왜 가능한지 설명해 주신다면. “기독교 심리학이라고 굳이 용어를 붙인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인간론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만약 성경이 정의하는 인간의 본질에 근거한 내용들을 가지고 굳이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쓰겠다면 쓰지 못할 이유도 없다고 봅니다.” ▲ 기독교상담학은 가능한 것인지요. 성경적인 기독교 상담가들의 공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독교 상담의 공헌 가능성에 대해 견해를 밝힌다면. “성경 속의 많은 가르침은 개인 상담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교회속에 가장 필요한 한 영역이 성경적 상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적 바른 상담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명목상의 기독교 심리학이라는 사실상의 세속적 심리학이 교회 속에서 먼저 사라져야 합니다. 세속적 심리학에 맞추어 성경을 재해석하고 왜곡하는 대신 성경 말씀을 바로 보고 순종하도록 하는 성경적 상담이 절실합니다.” ▲기독교 상담학의 보수주의 쪽 거장이라 불리우는 제이 아담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또 래리 크랩과 폴 투르니에는 어떤지요. “제이 아담스는 제가 존경하는 훌륭한 성경적 상담가입니다. 래리 크랩과 폴 투르니에의 가르침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지적하고 싶은 결정적인 심리학의 폐해를 예로 든다면. “설교 준비를 위해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하는 대신 목회자가 감동을 이끌어 내기 위한‘이야기’들을 수집하는 데에 더 열중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교회 속에 너무도‘상처’라는 말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무슨 조그만 일만 있어도‘상처 받았다’라는 식이지요. 상처속에 회개와 순종은 없습니다. 상처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입니다. 옳고 그름은 사라지고 아픈가 안 아픈가의 문제만이 남게 됩니다. 상대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 교회 속에 들어와 꽈리를 트는데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주는 셈이지요.” ▲ ‘자기사랑’과‘긍정적 사고방식’, ‘성공의 법칙’등을 비 성경적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부 아니면 전무란 이분법을 사용하고 있어, 너무 극단적이란 느낌이 듭니다. 하나님 자녀로서의 자신의 소중함이라든가, 어떤 부분에서는 장점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 교회 속의 90%이상이 장점만을 얘기하는 분들이니까 저 하나는 오로지 단점만을 얘기해도 될 것 같은데요.” ▲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인간의 심리 문제에 대해 심리학의 이론을 따라 갈 것이 아니라, 성경의 충분성을 믿고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며,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진리대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심리문제에 대해 왜 성경만으로 충분한지, 성경에서 이것이 어떻게 증거되고 있는지 설명한다면. “인간의 모든 심리문제는 결국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나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아닌가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성경으로 충분합니다.” ▲ 혼합주의로 오염된 한국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대안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불신자들을 교회로 이끌기 위한 대안으로‘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좀 빈약한 감이 있습니다. 세상성을 인정하고 불신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균형잡힌 대안은 없습니까. 한국교회가 말씀으로 돌아가기 위한 실제적인 대안이 있다면. “곧 출판될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서 이 문제를 보다 더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 아버님이신 옥한흠 목사께서는 이책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요. 또 옥 목사님의 제자훈련에 대한 생각은. “일단 아들이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달갑게 생각하지 않으시지요. 하지만 저의 비판이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다라는 점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비판이냐 아니냐보다 중요한 것은 복음이냐 비복음이냐의 문제이니까요. 아버지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저를 지지하십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들에 있어서는 저와 생각이 분명 다르십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버지도 지금 교회가 세속적 심리학적 가르침에 너무 오염되어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 제자훈련이 소그룹 성경공부 차원을 벗어나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명실상부한 목회의 본질로 제대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제자훈련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신학적 뼈대가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시작은‘제자‘에 대한 개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교회를 시작하시던 당시의 교회적 환경을 고려할 때 제자훈련 자체가 준 성과는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에의 진지함을 교회가 회복하는 데에 공헌했다고 봅니다.” ▲ 영성생활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기도와 말씀∙독서를 비롯해 개인의 영성관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요. “책 많이 읽고요. 시시한 영화나 비디오 안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혼자 있을 때 잡생각을 안하고 정신 차리려고 애를 쓰지요. 성경은 존 맥아더 목사님이 쓰는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대로 하면 하루에 한 시간 반 정도를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중간 중간 메모하고 기도하고 그럽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될 생각은. “계획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목사가 될 계획은‘전혀’없습니다.” ▲ 마지막으로 미주 한인교회와 성도들에게 한 말씀. “교회에 착한 사람이 새로 와서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잘 한다고 그 사람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보통 이민 생활이 힘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와서 교회를 다닙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똑바로 선포해야 합니다. 미국 생활이 힘들고 외로워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이 신앙을 갖는데 도움은 되지만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교회가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에 있는 한국교회는 자녀들의 한국어 교육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속에 EM이라는 별도의 섬을 만들어 놓고 학생들이 영어로 예배 드리도록 하는 것을 저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어 부분에서 교회가 역사성을 가지고 책임을 지는 것이 결국 교인들의 가정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출처: http://blog.daum.net/holylife2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최종 비평 |
교회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 그러나 인간의 전인성 살펴봐야 |
-이 글은 인터넷 신문 뉴스파워(www.newspower.co.kr)에 게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
지난번 옥성호 씨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에 대한 비평글을 올렸다. 애초 비평을 목적으로 삼은 것인데 내용의 일부분을 예를 들어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다 보니 전체적인 총평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아 이번 기사로 연재 형식이 아닌 최종적인 비평으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먼저 옥성호 씨의 책을 읽으며 그가 얼마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지키고자 하는 뜨거운 열심을 지니고 있으며 세속적인 것에 편승해 가는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대해 분명하고도 확신에 찬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한 점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그의 전체적인 논지에 대해 필자가 느끼는 바는 이렇다. 옥성호 씨는 책을 통해 일반 심리학 내지는 기독교 심리학(상담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넘어 그것이 일체 기독교 신앙 안의로의 유입을 거부하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과 일치할 수 없는 반기독교 사상으로 단정하고 있다. 물론 옥성호 씨의 저의(底意)는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기독교의 본질을 흐려놓는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고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이 배우고 있는 심리학의 문제점에 대해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바를 필자 또한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학문에 대한 깊이 있고 진지한 탐구보다 그것이 주는 부정적 요소들만을 관찰하다보면 또 다른 도그마(Dogma)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사고가 편향되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잃기 쉽다는 것이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의 제목 자체에서 보여 주듯이 그의 책은 오늘날의 기독교가 심리학에 물들어 본질을 벗어나 잘못 흘러가고 있다는 그의 시각을 담은 책이지 이것이 일반 심리학이나 기독교 심리학에 대한 전체적인 상황을 말해주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필자가 느끼는 바로 옥성호 씨는 신학적으로는 칼빈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 상담학적으로는 J. E. 아담스의 사상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책에서 게리 콜린스저서에 기록된 저자 소개 부분에 대해 밝히기를 “게리 콜린스는 균형잡힌 사람이고, 제이 아담스는 편협한 사람인 것처럼 제시됩니다.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자면 제이 아담스는 바리새인이고 게리 콜린스는 예수님까지는 못해도 세례 요한 정도는 되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라는 표현에서 보이듯이 옥성호 씨는 게리 콜린스의 상담의 신개념에 대한 확신과 강조법을 게리 콜린스를 절대화 하고 있는 것처럼 비약해 표현하고 있다. 사실 신학 안에도 보수, 중도, 진보가 존재하듯이 기독교 상담에도 이러한 조류가 형성돼 있다. 일반적으로 제이 아담스, 게리 콜린스 둘 다 복음주의 상담학자이지만 제이 아담스는 극보수 쪽이며 게리 콜린스와 내러 모어 등은 중도통합주의에 속하며 로렌스 J. 크렙은 중도 중에서도 보수에 가깝다. 특별히 필자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 옥성호 씨가 이들이 주장하는 심리학과 성경의 통합주의 운동에 대해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가 라는 것이다. 앞서 필자가 옥성호 씨의 신앙관이 칼빈주의 같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오늘날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칼빈은 인간의 존재를 영과 육으로 이분화하여 혼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론에 대한 토론은 이분법 내지는 삼분법의 한쪽 편을 들 수 없을 만큼 쉽게 결론나지 않는 오랜 논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신학계의 추세는 고전적인 신학자들 사이에서 보다 강조되었던 이분설마저도 배격하고 이원론(dualism)을 주장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으며 이원론을 넘어 일원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반면 실천신학 분야인 기독교 상담에서는 인간의 전인(whole person)성에 대한 연구가 보다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 인간의 마음을 어떠한 체계 안에 가두지 않는 방향으로 점점 진보해 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굳이 인간론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삼분설을 믿는(그리고 앞으로 더 나누어 질 수도 있다고 믿는)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필자 또한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나 인간의 혼의 기능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결국 이단을 만든 워치만 니의 견해에 대해 그들의 이단론을 철저히 부정하며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경계해야 할 것은 과거 영지주의자들과 같이 영과 육을 엄격히 구별하여 지나치게 영적인 면만을 강조해서도 결국 올바른 인간관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을 기독교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옥성호 씨는 책에서 “‘모든 진리는 다 하나님의 진리인데 왜 그 진리 중에 하나인 심리학을 배척하는가’라는 주장은 심리학을 기독교와 통합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구호이다... 이 말을 쉽게 풀어쓰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시는 데에 꼭 기독교인만을 사용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에서 보여 주듯이 특별은총인 성경이 말하는 일반은총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다소 극단적인 보수신앙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어 “물론 이 말 자체는 100% 옳은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심리학에 적용할 때는 주의를 해야 합니다.”라며 여러 가지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필자 또한 그의 의견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동의한다는 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맹목적으로 심리학을 신앙에 적용하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된다는 점과 심리학이 100%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구체적인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심리학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 잘못 프로그램화 된 인간의 죄악된 심리구조를 깨닫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결론적으로 심리학을 공부하면 공부할 수록 인간의 죄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여러 다양한 방어기제(투사, 전이, 합리화, 부인, 부정 등)들이 이러한 인간의 죄로 인해 생겨난 것이며 현재 우리 인간들이 그러한 심리구조로 산다는 것에 필자 또한 동의한다. 그러나 기독교 상담의 목적은 이러한 인간의 심리구조를 파헤쳐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그 최종목적이 아니다. 기독교 상담에서는 심리학 이론을 통해 한 인간의 심리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며 위로해 주고 동정심(Compassion)으로 한 영혼을 바라보는 것이며 그가 죄를 떠나 마음이 성숙하고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갖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인인 인간에게 보여 주신 마음이며, 태도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과의 만남에서, 그리고 간음한 여인과의 만남에서 그러한 그분의 깊은 긍휼과 영혼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고 계시다. 옥성호 씨가 우려하는 바는 다음 대목에서 깨달을 수 있다. “과연 프로이트파 또는 융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독교파 또는 성경파 또는 다른 어떤 융파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기독교파 또는 성경파 또는 다른 어떤 이름의 독립적인 심리학 이론이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즉 신학교에서 기독교 심리를 가르친다고 할 때 프로이트나 융의 이론과 관계 없는, 성경에 근거한 독립적인 심리학을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필자 또한 동일한 우려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우리 나라의 기독교 상담학조차 옥성호 씨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지나치게 인본주의로 흐르고 있는 경향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 상담을 가르치는 곳도 있으며 올바르게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해 심리학 내지는 상담학을 가르치는 곳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 상담은 옥성호 씨 또한 지적하듯이 심리학 이론이라는 안경을 쓰고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렌즈로 심리학 이론을 바라보고 걸러내는 작업을 행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다(물론 기독교 상담학에도 분리적 접근, 혼합적 접근, 영적인 접근, 통합적 접근 등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틀리다-로렌스 J. 크렙의 성경적 상담학 참고바람).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이가, 기묘자요 모사(wonderful counsellor)이신 우리 예수님은 그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절반 이상을 치유사역에 집중하셨다. 이는 단지 육체의 치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병든 영혼이 오랜 세월 지니고 있었던 그 마음의 상처와 병을 치유하신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 영혼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연약함을 그분의 자비하심과 긍휼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계시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이처럼 이러한 연약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동일하게 기독교 상담이라는 유용한 도구를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을 필자는 확신한다고 말하고 싶다. 필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옥성호 씨의 주장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치없는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십자가를 바라보는 인간 내면의 문제, 그리고 믿음의 분량, 각자가 받는 은혜의 통로의 다?聆纛? 차원에서 이해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옥성호 씨가 심리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의 행복’이라고 지적한 것은 정말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행복을 구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며 다만 이 행복이라는 것이 정욕적이며, 이기적인 것의 추구인지를 분별해야 하며 하나님 영광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매슬로우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아실현의 욕구’를 지닌다고 한다. 여기서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자신의 이기적 목표 달성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며 오늘날 기독교 상담은 이 자아실현의 욕구를 넘어 인간이 가진 ‘영적 필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보길 바란다. 또 인간의 ‘자기사랑’ 부분에 대해서도 옥성호 씨는 부정하고 있는데 이는 오히려 비성경적이다.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세시는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의 신분에 대해 “너희는 택한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말씀하셨으며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 3: 17: 개역개정판)라고 말씀하신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기사랑은 올바른 자기 존중감을 말하는 것이지 이기적(selfish)이고 자기도취적(narcisstic)인 것과는 분명 구분되어야 한다. 옥성호 씨가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에 대해 “프로이트와 융이 가진 기독교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은 거부해도 그들이 발견한 인간 심리와 관련한 업적은 인정하고 수용해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라는 대목에서 보여 주는 논지는 심리학이 기독교와 절대 화해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의 표현인데 이는 매우 극단적 사고이며 심리학과 기독교 신앙에서 공통된 요소가 있음을 부인함으로써 어떠한 분별과 선용의 여지를 무시하고 있다. 이후 옥성호 씨는 보다 구체적으로 한국 기독교에 만연한 ‘긍정적 사고방식’과 ‘성공의 법칙’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사실 필자 또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옥성호 씨의 주장에 적극 동감하고 있으며 필자 개인적으로 이에 대한 글도 준비 중에 있다. 필자 또한 과거 소위 성공론을 말하는 목회자 내지는 크리스천 동기부여가들(지그 지글러, 나폴레온 힐, 노만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이들의 주장에 대한 의심의 꼬리를 놓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옥성호 씨가 이에 대한 진지한 비판을 제기한 것에 대해 필자 또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으며 올바른 목소리가 나왔다는 생각을 지금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긍정적 사고와 성공의 법칙이 얼마나 왜곡된 신앙을 만들어 가고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영광받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드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최근 이러한 사상의 조류가 일어난 것이 심리학 운동에서 비롯됐음을 깨닫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우려하던 바가 결국 현실로 일어난 것 같이 말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서구의 성장론자들이 말하는 그 핵심에 자리잡고 있는 바도 필자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잠재의식(무의식)’이다. 이들은 잠재의식을 인간의 정신적 영역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잠재의식’을 ‘우주 전체에 흐르는 무한한 힘’이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이 곧 ‘하나님’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구체적인 확인을 원한다며 조셉 머피의 <잠재의식의 힘>을 참고하라). 이러한 점에서 옥성호 씨의 날카로운 지적이 충분히 공감되고 오늘날 한국 교회에 필요한 메시지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이분법적인 그의 논리다. 그는 ‘긍정’이라는 단어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고 있으며 심리학에서 나온 일체의 학문적 업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긍정’이라는 용어가 왜 무가치한 것이 되어야 하는가? 기독교는 복음이라는 기쁨과 소망을 가진 종교이기에 우리는 근본 절망의 존재에서 절대 긍정의 존재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긍정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인 긍정을 말하는 것이 아닌 신앙 안에서 말씀에 합당한 긍정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옥성호 씨는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되고 있는 기독교인의 ‘말의 권세’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이 세속적 성공을 위한 것이라면 당연 부정해야 될 부분이지만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만물을 지으셨고 말씀으로 만물에게 명령하셨듯이 우리 믿는 자들 또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를 지니고 있음까지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말의 능력으로 우리의 인생이 변화되어진다고 보는 것이나 우리의 말의 권세로 하나님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 타당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할 것을 말씀하셨고 그러한 권세를 이미 우리 믿는 자들은 지니고 있음을 성경은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의지에 따르는 수동적인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좀더 부연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그분의 변치 않으시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상대성이 있음을 성경은 보여 주고 있다. 예를 들어 구약에서 엘리야가 더 이상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하신 하나님께 기도하여 삼 일 동안 비를 내리게 한 사건이나 히스기야가 제 수명이 다했으나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15년 수명을 연장받았던 사건, 소돔을 위한 당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대화(물론 멸망을 당했으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충분히 보여주신다) 등 여러 가지 사건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장면들은 하나님의 계획이 변해서였다기 보다 인간의 기도의 간절함을 보시고 그분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베푸시는 것으로 봐야 한다. 옥성호 씨가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을 통해 한국 교회에 자성의 목소리를 갖게 한 점 참으로 훌륭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심리학이 기독교 신앙 안에서 어떠한 부정적 요소들을 만들어 내는 지에 대한 비판적 시각 또한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어떠한 절대적 기준으로 한 가지 학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것이 그 학문이 제시하는 모든 것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은 다소 위험한 접근이라는 것이다. 물론 옥성호 씨가 지적한 것은 심리학이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고 그것들이 어떠한 폐해를 낳고 있느냐는 우려에서 시작되었지만 옥성호 씨의 책의 전체적인 논지에서 일반 심리학 내지는 기독교 심리(상담)학이 교회에 도입되서는 안 될 이단아로 취급받는 점이 무척이나 아쉽다. 이 세상에는 죄도 선도 아닌 중립적인 것이 참으로 많이 존재한다. 돈, 성욕, 식욕, 수면욕, 분노, 명예 등 사소한 것에서부터 보다 폭넓게는 우리가 배우고 접하는 세상의 모든 학문들까지 그것들 자체는 중립적인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그것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하고 이끌어가냐의 문제다. 우리 인간은 도상적(途上的) 존재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목적대로 살아가려고 애쓰며 끊임없이 성화(聖化)를 위해 나아가는 존재이기에 날마다 말씀 앞에 우리를 쳐서 복종시켜야 된다. 하나님의 의(義)의 기준으로 봤을 때 이 세상 그 누구도 그분의 의에 도달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크리스천의 삶은 성육신(聖肉身) 하시어 인간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그분을 닮아가는 삶임을 말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