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유사

[스크랩] 철학과 물리학(과정신학)

향기나무 김성휴 2008. 1. 3. 22:11
 

 철학과 물리학1)

- 과정신학에 적용된 현대물리학적 개념들 -


0. 여는 넋두리(?)

♬♪♩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1. 들어가며 - 과정철학이란 무엇인가?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 중에서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와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서로 상이한 철학적 견해들을 제시했다. 먼저 파르메니데스는 자연에 대한 시에서 “존재”는 “형성”에 선행하며, 모든 변화는 그 기저에 영속하고 있는 보다 근원적인 실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헤라클리투스는 “우리는 동일한 강을 결코 두 번 건널 수 없다. 그리고 실체의 근원은 유동과 변화이다.”라고 변화와 과정의 개념을 중요시했다. 그 이후로 계속되는 서구사상의 대부분은 “형성(Becoming)”과 “과정(Process)”, 그리고“진화(Evolution)" 등의 역동적인 개념보다는 "존재{Being)"와 실체(Substance)", 그리고 “본질(Essence)" 등의 정적인 개념으로부터 유래한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 문화의 전통에 대해 점증하는 불만이 드러나고 있으며,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 이 문화와 전통이 대처해 나갈 수 있는지를 의문시하고 있다. 또한 일반사회의 것이든 교회적인 것이든 우리의 제도들과 심지어는 이것들을 창출해 낸 사상들조차 미래에 대처하기에는 부적절하고 불충분하다는 느낌이 있다. 근원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의문들은 실재의 근본범주인 변화를 다루기에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철학들이 능력의 한에 부딪힌 것이 아닌가 하는 근본적으로 철학적인 회의이다. 이런 근원적인 물음들이 제기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실재를 파악하는 방법, 바로 그것이 지금까지 계속 변화되어 왔다는 사실에 있다. 급속도의 모든 변화로 말미암아 우리는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제 실재는 더 이상 우연적으로만 변하고, 근본적으로는 정적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실재 자체를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는 것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실재의 기본적인 범부는 안정이 아니라 과정인 것이다. "실재는 과정이다.(Reality is a Process)” 현대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물질의 운동원리들이 밝혀지면서 실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과학적으로 뒷받침되었다. 특히 양자론의 대두와 양자역학의 이론화로 말미암아 실재에 대한 과정적인 인식은 서구사회의 또다른 하나의 철학적 범주로서 인식되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인식에서 기인되어 영국의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며, 철학자인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에 의해 구상되어진 것이 바로 과정철학이며, 이 과정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과정신학이다.2)

2. 과정신학의 존재론과 현대물리학에서의 물질

1) 절대공간과 절대시간 속에서의 ‘독립된 존재’

뉴턴의 말에 의하면, “절대공간은 그 자체의 본성에 있어서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언제나 동일하며 정지의 상태로 있다.” 물리세계의 모든 변화는 별도의 차원으로 기술되며, 시간도 역시 절대적인 것으로서 물질적 세계와 아무런 연관없이 과거에서 현대를 거쳐 미래로 일정하게 흘러가는 것이다. “절대적이고, 진정한 수학적 시간은 저절로 그 자신의 본성에 의하여 외부의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일정하게 흘러간다.”고 뉴턴은 말했다.

이 절대공간, 절대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뉴턴적 세계의 요소들은 물질의 입자였다. 이 입자들은 물질을 만들고 있는 작고 견고하며 파괴할 수 없는 것들이다. 입자의 운동은 뉴턴의 견해에 의하면 어떤 거리에서도 동시적으로 작용하는 중력의 힘에 의해 일어난다. 물질 입자와 이들간의 힘은 근본적으로 성질이 다른 것이며 입자의 내부 구성은 입자의 상호작용과는 무관하다. 뉴턴은 입자와 중력의 힘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았으며, 더 이상 분석의 대상으로는 삼지 않았다.


2) 현대 물리학에서의 관계성과 운동의 의미로의 존재

장의 개념은 19세기에 패러데이와 맥스웰에 의하여 전하와 전류사이의 힘을 설명하기 위하여 도입되었다. 전기장이란 그 공간에서 어떤 다른 전하에 힘을 산출할 수 있는 전하체 주위의 공간의 상태이다. 자기장은 운동 중에 있는 전하에 의해 즉 전류에 의해 산출되며 그 결과인 자기력은 다른 움직이는 전하에 의해서만 느껴진다. 장의 개념은 전자기력과 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력과 결부되었다. 중력장 이론에서 질량을 가진 물체의 주위의 공간에 대한 영향은 그에 상응하는 전기역학에서의 전하체의 영향보다 훨씬 심대하다. 여기에서도 대상체 주위의 공간은 다른 대상체가 힘을 느끼게 하는 상태에 있게 되나 이번에는 그 상태가 기하학, 즉 공간의 구조 자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질량체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중력장이 있게 되는데 이 장이 그 물체를 둘러싸고 있는 만곡된 공간을 채우며 그것을 휘게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둘은 구별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장이 곧 만곡된 공간인 것이다.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중력장과 그 공간의 구조는 동일하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는 물질은 그 중력장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중력장은 만곡된 공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물질과 공간은 단일한 전체의 분리될 수 없는 상호 의존적인 면으로 이해된다.3)

현대물리학이 제시하는 새로운 세계관에서 바라보면 우주는 상호 연결된 사건들의 역동적인 그물로 보여지게 되었다. 이 그물의 어느 부분의 특성도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즉 그것들은 모든 다른 부분들의 특성으로부터 이어져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 서로의 상호관계의 전체적 조화가 그 그물 전체의 구조를 결정짓는다.4)

현대물리학은 원자의 구성요소들인 아원자적 입자들이 독립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상호 작용들의 불가분한 그물의 불가결한 부분들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상호작용들은 입자들의 교환으로써 그 자신을 나타내는 에너지의 끊일 줄 모르는 유동을 포함하고 있다. 즉 그것들은 에너지 모형의 연속적인 변화를 통해 입자들이 끝없이 생겨나고 소멸되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이다. 입자 상호작용들은 물질세계를 생성하는 안정된 구조를 낳게 하지만, 그 물질계는 정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율동적인 운동을 하며 진동하고 있다. 그리하여 전 우주는 끊임없이 운동과 활동을 즉 에너지의 지속적인 우주적 무도를 하고 있다.5) 이런 관점에서 전 우주는 이제 어디에도 끊어지는 곳 없이 부드럽게 흐르는 운동을 하는 하나의 옴살스런6) 전체로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발상과 개념은 벌써 종래의 기계론식 세계관과는 아주 중요한 곳에서 어긋나고 있다. 기계론식 세계에서는 서로가 관계를 맺지 않고 개별적으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독립적이고 고정적인 실체인 원자나 전자와 같은 물질의 기본적 요소들이 그저 기계의 부품처럼 서로 포개지고 이어져서 구성되는 우주를 가상했었던 것과 대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3) 과정신학의 실재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물질의 기본 요소인 원자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고정적으로 차지하는 실체가 아니라 운동하는 동적 존재이다. 화이트헤드는 유물론자들과는 달리 모든 실재에는 물질적인 면과 함께 정신적인 면이 있다고 한다. 그는 또 모든 실재가 현재의 욕망에 근거하여 새로운 미래를 지향한다고 본다 즉 사물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 무엇을 욕구함으로써 성장하고 발전한다. 우주는 신 안에서 이루어진 궁극적 단일화를 향해 전진하는 과정으로서 세계는 동적인 사건과 변천하는 역사로써 형성된다. 그러므로 “존재와 본질”보다는 “되고 있음(Becoming)"과 "행동(Activity)"이 더욱 중요시된다. 따라서 사물의 변화와 운동은 성장 과정으로서 정적 불변성보다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본다.7)

현대물리학은 사물을 구성하는 궁극적 실재는 장의 역학관계와 상호의존, 침투, 관통, 보완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창조와 붕괴의 순간적 사건만이 있게 되고 그것만이 실재의 궁극적 단위가 된다. 이러한 현대 물리학의 발견들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의 기본원리가 된 것이다. “현실재(actual entities)”들이 우주를 구성하는 최종적 참 실재이다. 실재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은 현실재이다. 현실재라는 개념은 현실사건(actual occasion)이라고 바꾸어 쓸 수도 있다. 현실재보다 더 근원적인 다른 실재를 생각할 수 없다. 이 현실재들이야 말로 모든 사건과 경험의 최소단위요, 그것들은 상호의존적 상보적 상호관통적인 복합관계의 생성적 흐름이며 발생이다.

화이트헤드의 현실재 개념은 물리학에서의 아원자적 소립자들의 에너지 춤(운동),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양자장 이론에 의하며, 물질의 구성요소들 간의 모든 상호작용은 입자들의 방출과 흡수를 통하여 발생한다. 한층 더 나아가 창조와 붕괴의 무도는 물질을 존재하게 하는 기본이 된다. 끊임없는 에너지의 유동이 창조와 붕괴의 율동적인 무도를 통해 다양한 입자 모형을 겪어 가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에 있어서는 현실재가 복합적 상호관계적 관계 구조 속에서 어떤 형태와 군을 이룰 때 그것을 총생(Societies)또는 연관적 실재(Nexus)라고 부른다.8)

경험의 순간은 필연적으로 그 경험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 환경에 대한 이해를 포함하고 있다. 현실사건은 자신의 주체적 목적을 성취하고 자신이 추구해 온 만족을 얻은 후에는 소멸한다. 즉 그것은 더 이상 경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손실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경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과정의 연속 속에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미래의 사태들의 객체적인 자료가 된다. 과거는 포악(prehention)된다. 이때 포악됨으로써 과거가 역사 속에 주는 영향은 계속 “느껴지는” 사건들의 연관적 사건의 구성요소가 됨으로써 불멸화된다.9)

개개의 현실사건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독특한 총합이기 때문에 각각은 그 나름의 현실화를 통해서 실재의 총체에 공헌한다. 각자는 다자를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에 새로운 사건이 출현할 복합적 환경에다 그 자신을 추가시킨다. 새로운 사건은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에게 관계하는 과거의 요소들에게 새로운 통일성을 부여하고 객체화하며, 그리고 불멸화시킨다.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모든 차원에 있어서 역동적 상호관계 속에 있는 다원성의 통일성을 가리킨다. 경험의 순간으로서의 현실사건에 대한 위의 분석에서는 우리가 가장 미소한 혹은 미시적인 수준에서 실재를 논의해 왔다. 이러한 수준의 현실재가 과정철학에서는 가장 작은 단위 실재인데 심지어 이 현실체까지도 많은 포악작용들의 통일체이다.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미시적 요소는 물질의 조각이라고 생각한 철학적 전통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런 철학은 모든 통일체들은 보다 작은 구성요소들로 계속 나뉘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면 마침내 실재를 구성하는 궁극적인 단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실재를 구성하는 그런 근본적인 단위들은 없다. 왜냐하면 실재는 경험의 순간들로 구성되지 물질의 조각들로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의 한 순간을 그 구성요소들로 분석하면 이 요소들은 그 경험의 순간 곧 현실사건으로부터 독립해서 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주를 구성하는 종국적 실재들인 현실사건들은 통일체들이지 실재의 단위들이 아니다. 그런 까닭에 궁극적인 실재는 유기체적인 실재이다. 더 큰 유기체는 보다 작은 유기체들의 복합적인 통일체들이다. 전체로서의 실재는 다양성의 복합적인 통일체이다. 10)

과정신학자가 사용하는 대다수의 개념들은 상대성이라는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자의적이며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믿거나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성(relativity)이란 개념은 모든 실재들은 시․공 안에서 서로 관계되어 있다는 것, 그 어떤 단일 실체도 전체 실재의 과정에 초연한 사전 절대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성이라는 개념은 다른 모든 것들을 종국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어떤 특권적인 순간이나 관점의 가능성을 거절한다는 점에서 절대성과 대조된다. 상대주의자들에게는 다른 것들보다 더 객관적으로 타당할 수 있는 단일 순간이나 시각을 허용하는 어떠한 기준도 설정할 수 없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객관성에 대한 최상의 근사치는 어느 한 부분에 근거한 실재 전체에 대한 판단이다.

예수의 의의(意義)도 그의 추종자들과의 관계성 속에서만이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신도 마찬가지이다. 과정신학자는 신과 세계가 어떻게 서로 관계되는 가를 신의 의의가 어떻게 세계로부터 도출되는가를 설명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과정신학자들은 어떤 점에서는 신이 세계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일반적으로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와 마찬가지로 신도 시간적이다. 정적인 완전성과 과정적인 완전성 모두를 신 개념으로 통합시킨 것은 C. 핫숀이었다. 전자는 “개념으로나 가능성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의해서 조차도 능가될 수 없는 존재에 적용된다. 후자는 ”자기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고는 능가될 수 없는“ 존재에 적용된다. 후자의 개념이 과정신학자들에게 중요하다. 이개념은 불완전해질 수 없는 완전성들, 즉 정적완전성들 외에도 완전해질 수 있는 완전성들 즉 역동적 완전성들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적 준거틀을 일단 인정한다면 상대적 완전성은 불완전성을 위미하지 않으며, 또 의미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불완전성이란 그 시각에 현존해야 할 완전성의 부재를 뜻한다. 상대적 완전이란 시간의 한 순간에서 다른 실재에 비해 상대적인 완전성에 도달하는 그 어떤 것이 미래의 순간에는 보다 더 완전해질 수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신은 타자에 의해서는 어느 시간에도 결코 능가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 자신은 향상될 수 있고 자신을 능가할 수 있다. 이것은 신이 세계와 구체적으로 관계하는 방법이다. 즉 세계의 가치 실현이 신의 가치를 증가시킨다. 그것은 또한 세계가 신과 관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것은 또한 세계가 신과 관계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신은 사랑할 수 있고, 고난당할 수 있고, 그리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이라 불리울 수 있다. 세계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은-과정 속에 있는 신의 완전성을 훼손하지 않은 채- 신에게 변화를 준다.


3. 과정신학의 역사관과 양자론적 세계관

1) 고전 물리학의 기계론적이며 결정론적인 세계관11)

과학적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믿음이 데카르트적 철학과 그 철학에서 유도된 세계관의 바로 밑바닥에 깔려있다. 데카르트적 확실성은 그 본질적 성질에 있어서 수학적인 것이다. 데카르트는 우주의 열쇠는 우주의 수학적 구조에 있다고 믿었으며, 그의 마음속에는 과학이란 수학과 동의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물리적 객체의 성질에 대해 그는 “진리임을 의심할 수 없는 통상 개념으로부터 수학적 증명의 명료성을 가지고 연역되지 않는 것은 진리로 인정할 수 없다. 모든 자연 현상은 수학적 방법에 의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물리학의 다른 원리가 허용될 필요가 없고 그것이 바람직한 것도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라고 말한다. 이 새로운 방법은 데카르트로 하여금 모든 물리적 현상을 정확한 수학적 상관관계로 환원시키는 그의 거대한 계획에 따라서 수학적 분석의 아주 일반적인 형태를 운동체의 연구에 적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은 분석적인 것이다. 사상과 문제를 각 부분으로 분해하고 이들을 논리적 순서로 배열한다. 이 데카르트적 방법의 지나친 강조가 우리들의 일반적 사고와 함께 전문적 학문의 특색이 되어버린 세분화를 초래했으며 과학에서의 환원주의적 태도 - 모든 복잡한 현상은 이것을 형성하고 있는 구성분으로 환원시킴으로 해서 이해할 수 있다는 태도 -를 팽배하게 한 것이다. 데카르트에게는 물질세계는 하나의 기계였으며 기계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질에는 목적, 생명 또는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자연은 기계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물질세계의 모든 것은 각 부분의 배열과 운동으로 설명 가능한 것이었다. 이 자연의 기계론적 영상이 데카르트 이후의 지배적 과학 모형이 되어 버렸다. 사물과 현상의 근본원리를 조망함으로써, 사물과 현상의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 하나의 질서를 발견하고자 하는 가진 희랍의 유기체적 자연관으로부터 기계론적 자연관으로의 이 철저한 변화는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중세기의 유기체적 세계관은 생태계적 행위를 돕는 가치 체계를 가졌었다. 기계적 조직으로 보는 데카르트적 우주관은 서구문화의 특성이 되는 자연의 조종과 착취를 위한 과학적 승인을 부여한 것이다. 사실 데카르트 자신도 과학의 목적은 자연의 지배와 조종이며 과학적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주인이며 소유자가 되게 한다는 베이컨과 같은 의견을 가졌었다. 완전한 자연과학을 수립하려는 의도에서 데카르트는 물질의 기계관을 생물에게도 확대시켰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위대한 과학이었다. 분석적 사고 방법을 이용하여 그는 모든 자연 현상을 단 한가지 기계적 원리 체계로 정확히 설명하고자 시도하였다. 그의 과학은 완성되어야 했고 그것이 주는 지식은 수학적 절대확실성을 갖추어야 했다. 데카르트의 꿈을 실현시키고 과학혁명을 완성한 사람은 아이작 뉴턴이었다. 그는 기계론적 자연관의 완전한 수식화를 발전시켰으며, 이로써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베이컨, 갈릴레오 및 데카르트의 업적을 총 집대성하게 된 것이다. 17세기 과학의 기념비적 업적인 뉴턴 물리학은 일관성있는 수학적 세계관을 수립하였으며, 이 이론이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과학 사상의 견고한 기초가 되어 온 것이다. 뉴턴의 우주는 정확한 수학 법칙에 따라 작용하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기계적 조직이었다.

뉴턴 역학에서는 모든 물리적 현상은 상호인력, 즉 중력에 의해 야기되는 물질입자의 운동으로 환원된다. 입자 또는 다른 물체에 대한 이 힘의 영향은 뉴턴의 운동방정식에 의하여 수학적으로 기술되는데 이 방정식은 고전 역학의 기초를 형성한 것이다. 이들은 그것에 따라 물체가 움직이는 고정 법칙으로 강조되었으며, 물리적 세계에서 관찰되는 모든 변화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뉴턴의 견해로는 태초에 신이 물질입자와 그들 간의 힘 및 운동의 근본법칙을 창조했다고 보았다. 이렇게 해서 전 우주는 운동을 하게 되었으며, 그 이후, 불변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기계처럼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와같이 기계론적 자연관은 거대한 우주기계가 완전히 인과적이며 결정적인 엄격한 결정론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발생하는 모든 것은 명확한 원인을 갖고 있으며, 또한 일정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서, 그 시스템이 어느 부분의 미래도, 어느 시점에서 상태를 모두 상세히 안다면-원칙적으로는- 절대적 확실성을 가지고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론적 세계관이 사회철학자 존 로크를 통해서 사회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뉴턴 물리학을 본받아 로크는 개인을 기본 구성체로 하는 원자론적 사회관을 개발하였다. 물리학자가 기체의 성질을 원자나 분자의 운동으로 환원하였듯이, 로크는 사회에서 관찰되는 형태들을 개인의 본질을 연구하고 , 이 인간 본질의 원칙을 경제 및 정치적인 문제에 적용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는 탄생시의 인간의 마음은 완전히 비어있는 서판으로서, 감각적 경험에 의해 획득된 지식은 이 서판에 기록된다고 하는 그의 유명한 은유로서 설명하였다. 로크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동일하게 태어났으며 그들의 발전은 그들의 환경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언제나 그들이 이익이라고 여겨지는 바가 그 동기가 되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로크가 그의 인간본질이론을 사회현상에 적용했을 때 그는 물리학적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사회현상을 지배하고 있는 자연의 법칙이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2) 현대물리학의 세계관 (관계성의 세계관, 되어감(Becoming)의 세계관)

양자이론에서 모든 활동 모든 움직임은 그 이하로 더 이상은 나누어지지 않는 최소량의 단위인 양자의 차원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러 개의 전자궤도 중 하나를 따라서 선회하던 전자가 튀어나가서 다른 궤도로 진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전자의 운동양태는 종전까지의 고전 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전자라는 소립자는 두 궤도 사이를 연결하는 일정한 연속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개개의 양자는 너무 작아서 그 자체만으로는 감지할 수 없다. 거시적으로 드러나는 연속적인 움직임이란 개개 양자가 움직이는 총합에 해당된다. 그런데 양자 개개의 차원에 양자는 우리가 여태껏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양자가 움직여 간 궤적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으며 앞으로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 불가능한 비연속적인 운동을 한다. 양자의 이러한 특성은 물질은 공간적으로 특정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며 물체의 운동이란 하나의 연속적인 궤적을 그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뉴턴의 고전 물리학에서 상정하는 기계론적인 사고방식의 기본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12)

이렇게 어떤 한 시각에서의 입장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알기가 불가능하다면 그 후의 시각에서의 입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데 필요한 데이터는 얻지 못하게 되는 셈이다. 미래는 불확정하게 되어 양자적 우연성이라는 것이 나타난다. 아원자 세계에서 물질은 일정한 장소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수학적 형식에서는 이들 경향이 확률로 표현된다. 이렇게 해서 현대물리학은 고전 물리학의 결정론적이며 절대적인 인과율로부터 결별하게 된다.13)

양자역학의 발전으로 알려진 획기적인 사실은 모든 물질의 근본인 원자를 구성하는 이른바 아원자들이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이다. 양자는 관찰상황에 따라서 즉 어떤 실험을 실시하느냐에 따라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입자로도 나타나고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파동으로도 나타나는 상보적인 특성을 보인다. 그러나 입자성과 파동성은 동시에 관찰되지 않는다. 뉴턴 물리학에서 파동이라고 여겼던 빛도 특정상황에서는 하나의 입자처럼 혹은 무수한 입자가 모여서 움직이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 입자의 에너지는 너무나 낮은 수중이라 특별히 정밀한 관측조건이 아니고는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은 뉴턴식 기계론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떤 물질의 존재 모습이 그 자체로 확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를 둘러싸는 환경의 상태에 따라서 파동으로서의 특성을 보이기도 하고 입자로서의 특성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은 상호연결이라는 것이 공간적인 접촉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입자와 입자들이 혹은 장과 같은 힘의 다른 요소와 입자들이 거리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이들은 모두 실제에 있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계는 그저 공간적으로 근접해 있을 때에만 힘의 작용이 성립하는 제각기 분리된 물체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양자이론에서 모든 움직임이나 그들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종국적인 단위는 더 이상 쪼개어지지 않는 양자이다. 모든 요소는 항상 움직이고 서로 부딪히면서 작용을 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세상은 서로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조각들로 나누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또한 양자역학에서는 이 세상을 관찰하는 자와 그가 관찰하는 대상의 분리가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양자역학은 인간이라는 관찰자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특정한 입자의 현상에 대해 서술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아원자의 미시세계에서는 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산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위치와 운동량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정확히 알면 다른 하나는 전혀 모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W.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 중에서 어느 한쪽만을 알 수 있는 것이 물질의 본성이므로 관찰자는 이 두 가지 속성가운데 어느 하나를 관찰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하여야 한다. 측정할 속성을 관찰자가 선택한다는 말은 관찰자 스스로가 관찰대상의 속성을 함께 지어낸다는 뜻이다. 따라서 양자역학에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즉 인간의 경험과 동떨어진 하나의 객관적인 현실로 관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14)


3) 과정신학의 세계(역사)관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현실재들은 모래알처럼 개별적으로 분리되어 있거나 혼돈의 바다 속에 충일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합생과정 속에만 있다. 합생이란 “현실재”들로 구성된 무수한 자료들이 새로운 총생운동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유기적 실재를 이루어가는 사건의 총합적 발생을 말한다. 합생은 수많은 순간순간의 사건들이 하나의 통일된 유기체적 형태 또는 규정성을 성취하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합생과정은 하나의 유기체적 실재로서 그 목적을 성취할 때 자기 향유 또는 만족이라는 성취감을 획득하고 관계된 무수한 현실재들은 완성되자마자 또 다시 붕괴, 사멸되면서 보다 새롭고 복합적이니 차기 합생과정의 자료가 된다. 그러므로 합생과정은 무수한 현실재들에 의해 구성되는 점진적 통전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세계는 그렇게 스스로 창조적이며 끊임없는 합생과정을 거쳐가면서 보다 충만하고 자기 충족적인 현실재의 축생을 형성해가는 생성과정이다.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잡다하고 무수한 현실재들이 창조적이고 유기적인 합생과정을 형성해가는 것은 “영원한 목적(eternal objects)"이 있기 때문인데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체계에서 볼 때 신이 세계와 관계성을 갖게 되는 채널이 바로 이 ‘영원한 목적’ 또는 ‘선험적 목적’을 통해서이다. 화이트 헤드에 의하면 영원한 목적 또는 선험적 목적은 순수 가능성으로서의 개념적 실재로서 현실재가 생성에로 진입, 기동할 수 있는 기동가능성이다. 선험적 목적은 구체적인 현실재와 합생과정 속에서 실현될 창조적 가능성이요 원형이며 생성의 유인력이다. ‘선험적 목적’들은 ‘현실재’ 보다 개념적으로만 앞서서 존재할 뿐, 실질적으로는 ‘현실재’를 떠나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15)

샤르뎅에 의하면 진화란 삶에 대한 열정의 형식으로 생존을 위한 어떤 내적인 선택에 의해서 발전함을 의미한다. 진화의 작용이 활동할 때 그것은 인류 발생을 조건짓는 생물, 물리학적인 에너지들의 전체적인 복합성을 지탱, 지지하는 것이다. 이런 진화의 의미는 희망의 중요성과 관련된다. 희망은 문명과 지구의 미래가 황량한 지금의 상황에서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역사를 위한 희망의 근거들로 첫째, 미래는 전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열려있다는 데서 찾는다. 그것은 현재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에 대한 의미와 무게를 변화시키는 전적으로 새로운 요소들의 도입으로 가능하다. 둘째, 과정이 발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새로운 이상들이 역사 안으로 들어올 수 있고 그들의 구현을 가능하게 하는 변화들을 산출시킨다는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희망은 우리 실존의 바로 그 질 안에서의 급진적인 변화를 위한 것이다. 인간은 그 동안 기술공학이나 경제학의 발전의 결과로부터 그리고 스스로 자연적인 공동체를 억압적이라고 인식한 결과 풍부한 상호관계를 가졌던 관계로부터 이탈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 비인격적 조직의 속박으로 변형되었다. 그러므로 진정 자유케 할 수 있고 완성시킬 수 있는 전망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열정의 상실과 사회조직들의 통제에 대한 위험한 관용이 있게 되었다.

J. 캅은 역사과정에 대한 결정론적이고 우연적 관점 둘 다가 화이트헤드에 의해 극복된다고 인식한다. 화이트헤드는 모든 단일 사건과 모든 경험의 계기들 속에는 자기 결정의 요소가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나의 결과는 단지 적절한 대안들 가운데서 가능하다. 그러나 그 결정은 그 자신을 그런 대안들 안에 위치시키는 과거의 본성 안에 있지는 않다. 과거는 작용인으로서 필연성의 압력과 함께 현재에서 작동한다. 만약 거기에 적절한 대안들이 있다면, 과거의 지나간 실재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가능성들의 영역이 있어야 한다. 관련된 가능성들은 상관적인 신생의 가능성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자기 구성을 위한 이런 적절한 새로운 가능성들의 유효한 현존이 어떻게 경험의 계기가 실제로 그 스스로를 구성하는지를 바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 가능성들은 ‘감각을 위한 단서’로서 설득적으로 기능한다. 그것에 의해 가능성들은 결정론과 기회 둘 다와 구별되는 자유를 창조한다. 경험의 각 계기 속에서, 그 자체에 관한 그 계기의 결정을 위해 하나의 공간이 개방된다. 물론, 그 계기들에 대한 많은 것은 과거에 관한 충분한 인과성의 기초 위에서 예견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계기의 결정에 관한 잔여가 존재한다. 이 잔여는 대부분 다른 경험의 계기들보다 인간 경험에 있어 더 크게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계기도 잔여없이 그것의 과거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화이트헤드는 관련된 잠재성들을 경험의 각 계기들 속에서 유효하게 만드는 우주적 활동성이 하나님이라고 불린다고 믿는다. 더욱 명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원초적인 본성(Primordial Nature)-신생의 근원으로서의 하나님-이다. 어떤 사건도 세계를 결정하는 과거의 한 영역으로서가 아니라 자유와 초월, 미래라고 하는 선물로서의 하나님의 도래 없이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캅은 역사과정의 완성에 관한 이런 확실한 기대에 동의하기를 거절한다. 대신에 라인홀드 니버처럼, 그는 역사는 실제로 개방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역시 캅은 사회적 성취들이 단지 순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니버도 반대한다. 니버는 언젠가 우리가 완전한 정의가 최선을 다해 자극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환상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바 있다. 니버와는 달리 캅은 현재상황보다 훨씬 더 나은 상황 이 실제적으로 가능하다는 확신에 의해서 우리가 헌신적인 노력에로 고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뒤따르는 사건들이 환상을 깨도록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참된 완성적 종말에 대한 판넨베르크 류의 신념에 자신을 맡기길 원치 않는 정치신학을 위한 하나의 선택은 사회 속에서 선을 향한 상대적으로 모호하지 않은 변화들에 대한 희망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4. 글을 맺으며

화이트헤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수학자로서 20세기 초 이론 물리학이 제시한 새로운 세계관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론 물리학에서 제시된 많은 자연과학적인 개념을 그의 과정철학에 도입하여 적용시키고 있다. 물론 이러한 이론 물리학적인 지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과정사상을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유기체적인 세계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20세기가 제시하고 있는 물리학적 개념들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화이트헤드가 말하고자 하는 개념들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모든 현실재들은 관계성 속에 있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그러면 저 우주의 변두리에 있는 퀘이서(Quasar)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이인슈타인의 장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에 대해 대충이라도 알고 있다면, 관계성 속의 실재라는 개념은 별 의문이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카오스이론은 과정사상이 거부하고 있는 인과율에 대한 현대인의 사고를 바로잡는데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과정사상가들은 인과법칙이라는 말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한 말을 사용해야될 때에라도 조건요인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다. 즉 여러 가지의 조건들 중에서 하나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물론 이 조건요인이란 것은 어떤 경우에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고, 다른 경우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카오스 외에도 많은 물리학적 개념들(20세기 초에 등장한 것과 등장한지 얼마되지 않은 물리학적 개념들)이 과정사상에 접목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카오스 이론도 화이트헤드가 살 당시에는 그 맹아만이 있었고, 유아기적인 이론화 작업도 1960년대에 들어서야 시작되었다. 그런데 과정사상은 이러한 새로운 이론들을 그 철학의 체계안으로 끌어들여 그 철학의 내용을 풍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풍부화는 과정사상에서는 언제나 가능하다. 왜냐하면 과정사상 자체도 과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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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생각하면서 이면지를 사용하였습니다. 양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4. 과정신학의 종말론과 현대물리학의 우주론적 세계관

1) 고전적 의미의 종말론과 신정론

   - 기독교 종말론 : ‘영속적 소멸’로서의 ‘악’과 ‘영속적 실재’로서의 ‘천국’16)

악의 문제는 실재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이다. 기독교 유신론은 하나님은 불필요한 고통과 심지어는 도덕적인 악의 발의자로 보는 모험을 무릅쓰면서 까지 하나님이 악에 대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과정신론은 세계에서 악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가능한 선은 무엇이든지 가져오도록 설득적으로 활동하시며 무한한 지속적인 설득적 힘으로 하나님을 이해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파괴적인 인간행위들의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행하지는 아니한다.

과정신학은 미래란 진실로 열려있으며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인간이 무엇을 행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무신론자들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인간의 능력을 자신의 주어진 존재나, 선행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이해하는 반면,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설득적 능력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악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궁극적으로 불의,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민이 아니다. 최종적 문제는 죽음이 아니다. 때 이른 죽음조차도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가치와 의미를 파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화이트헤드가 J. Lock로부터 빌려서 부르는 영속적인 소멸과 같은 그러한 잠정성이다. 우리의 성숙기에 있어서 우리의 젊음의 열정을 파괴하는 것은 불의, 고통, 그리고 고민이 전체 삶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의 발견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악들이 극복된 기쁨의 순간들이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또한 최종적으로 다함께 상실되어 버리는 일의 실현인 것이다. 성공이 궁극적으로 지속하지 못한다는 확신은 많은 실패들보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의 열정을 잘라 버린다. 비록 모든 현재의 경험 속에 즐김이 있으며 따라서 그 자체로서 본질적인 가치가 있으나 우리가 성취하고 향유하는 모든 것들이 망각의 상태로 사라져 버린다는 사실에 관한 의식적인 반성은 이러한 자립적인 향유의 가치를 손상시킬 수 있다. 만일 최종적인 결론이 소멸이라면 모든 사물들을 사랑하라는 요구는 복음의 메시지가 될 수 없다.

이와같은 통찰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기여할 수 없다는 사실, 반대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들을 궁극적인 무의미성으로부터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교도들은 참된 실재를 열반 혹은 무로서 이해했다. 열반이라는 말은 불교의 구원과 구속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된다. 열반은 개인존재의 소멸과 부정개념을 포함한다. 이 종교적 활력을 갖는 열반의 의미에 대해서 뮬러는 “영혼의 안식처로 들어감, 모든 소원과 욕망을 없애고 조용하게 하는 힘, 기쁨과 고통에의 무감동, 선과 악에도 무감동 영혼 그 속에로의 몰입, 생사의 굴레로부터의 자유, 태어나고 죽는 것에서의 해방”으로 보았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응답적이라면 우리의 기본적 상황은 아주 다를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응답적이라면 우리의 기쁨과 행위들은 신성 그 자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신적 생명은 무시간적인 의미에서 영원하지도 않으며 영속적 소멸의 의미에서 시간적이지도 않다. 그 신적 생명은 끊임없이 세계로부터 받아들이며, 그러나 영속적인 현재의 즉시성에서 과거의 세계 안에 있는 것을 지탱한다는 의미에서 영원한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영원함을 좀 더 훌륭한 종교들이 수립되는 통찰의 내용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영속적 실재가 천국이다. 천국은 “모든 질서의 기초인 원초적 욕구의 성취로서의 받아들임과 개혁에 의해 완전해진 시간적 세계를 말한다.” 하나님의 결과적인 본성은 결코 배타적이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즉시적이고 언제나 다수이며 또한 언제나 일자(One)이며 그리고 언제나 앞으로 진행하며 결코 소멸하지 않는 새로운 전진을 수반한다.

하나님의 본성의 이러한 작용하는 성장이 가장 잘 이해되는 이미지는 부드러운 돌봄의 이미지이다. 하나님의 응답적인 사랑은 우리의 시간적 실존의 궁극적인 악을 극복하는 힘이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악에 직면해서도 의미를 지니고 하나님의 기쁨에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과정신학은 죽음 후의 개인적인 삶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 개방적이다. 그러나 공식화하기는 쉽지 않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화이트헤드의 용어로 표현하면 여전히 과정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죽음과 영속적인 소멸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데는 확신이 있다.


2) 과정신학의 우주관과 종말론 및 신정론




출처 : 샬롬
글쓴이 : 작은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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