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의

[스크랩] 기독교와 과학과의 만남에 대한 재평가(데이빗 C , 린드버그)

향기나무 김성휴 2006. 11. 15. 16:54
-기독교와 과학과의 만남에 대한 재평가-



남북전쟁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할 때인 1869 년 12 월 어느 저녁. 여전히 희생을 치르고 있는 또 다른 전투에 대해 듣고자 수많은 청중이 뉴욕 쿠퍼 유니온 (Cooper Union)의 커다란 홀에 모였다. 이 전투는 “비교적 소규모 전쟁이었던 알렉산더나 시이저. 나폴레옹의 어떤 전쟁보다도 격렬하고. 포위공격 기간이 길며. 전략도 강력하였다.” 비록 칼이 아니라 펜으로. 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을 위한 것이긴 했지만 이 전쟁 역시 생명과 명성을 파괴시켰다. 그러면 전투원은. 과학과 종교 .
이 반갑지 않은 소식의 유발자는 성공회가 낳은 37 세의 역사학자 앤드류 딕슨 화이트 (Andrew Dickson White)였다. 그는 33세에 코넬대학교의 초대 총장이 되기 전에는 미쉬간대학교에서 가르쳤으며 뉴욕주 상원 의회에서 봉사했었다. 그가 총장으로서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그 어떤 종교적 시험도 부과하기를 거절하고. 과학을 위한 피난처. 즉 계시된 종교에 맞추기 위해 혹은 종교에 맞게 늘리거나 자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를 위해 진리가 추구되는 이타카 (Ithaca) 만들겠다는 그의 의도를 선언하자. 경건한 뉴욕인들이 분노를 일으켰고. 그 젊은 총장과 더불어 학교를 종교적 무관심과 불신앙을 이유로 비난했다. “조리있는 해명”으로 그의 비판자들을 무마시키지 못하자 화이트는 그들이 베잘리우스 (Vesalius) 케플러 (Kepler) 갈릴레오(Galileo) 박해한 것과 똑같은 편협한 정신과 인색한 마음의 소유자라고 비난하면서 그의 쿠퍼 유니온으로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 역사는 “가상적인 종교 관심사에 있어 과학에 대한 간섭은―그 간섭이 얼마나 양심적인가에는 상관없이―항상 과학과 종교 양편 모두에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음”을 보여준다고 화이트는 선언했다. 이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이 커다란 전쟁의 가장 격렬한 전장”에 대해 개관하면서. 성경의 고지식한 문자적 해석자들과 교리적인 신학자들이 어떻게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종교를 타락시켰음을 설명함으로. 결국 잃은 것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화이트는 소위 과학혁명 기간인 16~17 세기에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믿었다. 그때 힘있는 교회 지도자들은 현대 과학의 개척자들의 입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감히 태양을 태양계의 중심에 놓으려 했던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이단적인 견해를 공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걸었고 “오직 죽음에 의해서 그 박해”를 면했다. 많은 그의 제자들은 훨씬 불행한 결과를 겪었다. 부르노는 “불경건의 괴물로 여겨져 산 채로 화형 당했고. 갈릴레오는 가장 못된 불신앙자라고 모욕과 고통을 당했으며 케플러는 개신교와 가톨릭에 의해 동시에 추적을 당했다.” 16 세기의 내과 의사인 앙드레아 베잘리우스는 인체를 직접 해부할 것을 조심스레 주장함으로써 현대해부학의 기초를 놓은 인물인데. 그는 “추적 당하다 죽음”으로써 자신의 만용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과학에 대한 이 오랜 전쟁의 최근 희생자로는 미국의 어느 대학이 단지 학문의 자유를 수호하고 종교의 지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계와 언론으로부터 “불경하다”는 비난을 당한 것이라고 화이트는 말했다. 이는 분명히 자신의 경험을 언급한 것이었다. 화이트는 그 대학의 총장 역시 그가 당한 박해로 인해 마땅히 과학의 순교가 대열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화이트의 쿠퍼 유니온 강의는 다음날 뉴욕 데일리 트리뷴지에 “과학의 전장 (The BattleField of Science)”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이후 그는 과학과 종교의 투쟁자에 새로운 설명으로 살을 붙여 나갔는데. 어떤 것은 당시 창조론자와 진화론자 사이에 빚어지고 있던 적대관계에서 끌어낸 것도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공격의 초점을 좁혀나갔다. 즉 1869년의 “종교”에서 과학 전쟁 (The Warfore of Science) 이라는 제목의 작은 책자를 출간한 1876 년에는 “교회만능주의”로. 그리고 마침내 그의 완전한 주장을 담은 두 권의 기독교국가에서 과학과 신학의 투쟁사 (History of the warfo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ristendom) 펴낸 1876 년에는 “교의신학”으로 공격의 초점을 좁혀 간 것이다. 그의 주장을 담은 이 마지막 책에서 그는 세상에 대해 입증할 수 없는 진술들을 하고 성경을 과학 교과서화 한 신학과 “우주의 한 힘 (Power)"을 인식하고 황금률에 따라 살아가는 종교를 명확히 구분했다. 그렇게 정의하면 종교는 과학을 육성시키는 반면 신학은 과학을 억제시킨다 .
화이트의 책만큼―심지어 존 윌리엄 드레이퍼 (John Whilliam Draper)의 베스트셀러인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사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1874) 조차도―과학과 종교 사이의 대립 관계에 대한 인식을 대중의 마음에 주입시킨 책은 없다. 그의 저작은 인쇄되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으며 독일어와 불어. 이태리어. 스웨덴어. 일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의 전투적인 웅변술은 여러 세대에 걸쳐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여전히 감동을 주는 풍부한 인용들은 그의 저술에 건전한 학문적 성격을 더해주며. 심지어 그보다 더 잘 알고 있을 20 세기의 역사학자들도 당황시킬 정도이다. 최근 수십년 간. 예를 들면. 뛰어난 역사학자인 부르스 마즐리쉬 (Bruce Mazlish) 잔화이트의 이론이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 위에 근거한 것이라고 보증했으며. 하바드의 탁월한 과학사가인 그 죠지 사르톤 (George Sarton)은 화이트의 주장이 비기독교 문화에까지 영향력이 확장될 만큼 흥미를 돋우는 것임을 발견했다 .
그러나 비록 그러한 판단들이 “과학적 창조론”의 원수들과 기존 과학에 대한 현대의 다른 위협자들에게는 설득력있게 들릴지 모르나. 그것들은 화이트가 전쟁의 상처를 입은 쌍안경으로 과거를 해석했으며.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시켰다는 증거가 증가하고 있음에 정면으로 맞부닥뜨리고 있다. 비록 기독교와 과학역사 속에서 갈등과 논쟁의 예들을 찾아내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의 학문은 그 전쟁 비유가 과학과 종교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유용하지도. 또한 공헌하는 바도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논문의 나머지 부분에서 우리는 최근의 학문적 연구들에서 비롯된 일련의 예를 통해 이같은 결론을 뒷받침하고. 화이트의 논제에 대해 지금까지보다도 더 체계적인 비판을 가하려고 한다.

I. 화이트는 초기 기독교 시대는 과학을 위해 전적으로 불행한 시기라고 보았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교부들은 모든 과학적 노력을 무익한 것으로 여겼으며. 끈질긴 관찰과 사고를 통해 얻어진 과학적 지식의 조그만 부분까지도 독단적인 교회지도자들이 성문서 (sacred writings)에서 추출해낸 미숙한 견해에 순복할 것을 요구했다. 그같은 “과학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예외없이 인류를 진리에서 떠나도록 강요했으며 기독교국가로 하여금 오랜 세월 동안 오류와 슬픔의 심연 속에 빠지게 했다”고 그는 적고 있다 . 따라서 기독교의 전래는 “ 1500 년 이상 동안 물리와 과학의 정상적인 발전을 억제했으며” 참된 과학을 짓밟고 왜곡시키는 무지와 미신의 노예가 되게 만들었다.
물론 과학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 교부들은 극소수였으며. 어떤 사람은 과학을 경멸한 것도 사실이다. 어거스틴은 자연과학의 가치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표명했다. “우리가 종교의 문제에 있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질문을 받을 경우 그리스인들이 물리학자라고 부른 사람들의 태도를 따라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데에서 그 대답을 찾아서는 안된다. 크리스챤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사물의 원인이 다름 아닌 창조주의 자비임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같은 언급들로부터 교부들이 전적으로 과학을 거부했다든지. 과학이 언제나 성경의 진술에 따라야 할 것을 요구했다고 결론지어서는 안된다. 흔히. 방금 인용한 단락의 첫구절이 간과되곤 한다. 어거스틴은 단지 .종교의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 물리학자들에게 배울 것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본문에서 그는 과학적 지식이 필요한 한. 그 과학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이교도 저자들에게서 그것을 취해와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종 땅. 하늘. 또는 세상의 다른 요소들과 별들의 운동과 회전 및 크기와 거리 및 해와 달의 식, 연한과 계절의 진행. 또 동식물. 광물의 본질. 그와 같은 것들의 다른 사항들 등에 대한 질문이 행해진다. 그런데 가장 확실한 사고와 관찰에서 이끌어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크리스챤이 아니다. 이것은 매우 통탄할 만하고 해로운 일이다. 그리고 크리스챤들이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기독교 문서들과 일치되게 말하는 것을 들어야만 한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크리스챤이 수준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아는 것은 경계해야만 할 일이다. 그러면 불신자들은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종교와 과학에 대해 쓴 화이트와 다른 저자들은 만약 기독교 초기에 기독교가 과학의 성장을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과학은 더욱 빨리 발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만약 상황이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는가 하는. 그와 반대되는 사실에 대한 고찰도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보다 고대사회에서는 자연에 대한 연구가 매우 불안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싶다. 즉 약품과 천문학에 대한 약간의 연구를 제외하고는. 자연에 대한 실질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이라는 인식을 얻지 못했다. 그 결과 그것은 이교도와 크리스챤 모두에게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독립적인 수단과 개인의 주도하에 존속되었다. 로마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운명이 후기에 들어 쇠퇴하자 부자의 수가 줄어들고. 엘리트들은 다른 곳에서 주도권을 나타냈다. 게다가 교육적. 철학적 가치의 변화는 자연세계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했다. 이래서 과학의 추구는 필연적인 시련을 당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그 상황을 바꾸는 데 거의. 아니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기독교는 자연과학에 대해 이교사상과 다소 같은 태도를 지녀왔다. 만약 다른 점이 있다면. 기독교는 주요 경쟁 이데올로기들 (영지주의,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신비 종교들)보다 덜 내세적이며. 자연 연구에 대해 약간 더 자극을 주었다는 점이다. 교부들은 이단에 대항하여 신앙을 수호하고. 성경을 설명하는데 그리스의 과학 지식을 사용했으며. 그렇게 함으로 기독교 시대의 첫 천년 동안 겪은 사회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것을 지키고 전달할 수 있었다. 따라서 과학은 신학의 시녀였다. 이 말은 자치권과 지적인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현대 과학의 지위와는 거리가 먼 말이며. 또한 화이트가 묘사한 대로 과학이 기독교의 편협에 의한 희생물이라는 것과도 거리가 멀다. 기독교는 적이 아니며(만약 전적으로 의존할 만하지 않다면) 오히려 소중한 하인이다.
신학에 도움을 준 외에도. 그리스의 과학 지식은 가이사랴의 바질 (Basil of Casarea)과 어거스틴 때부터 증세 말기를 지나 그 이후까지 기독교 세계관에 있어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다. 아무리 진지한 크리스챤 사색가라 할지라도 성경에서만 세계관을 이끌어 내려고 했다는 것은 우스운 견해이다. 예를 들면. 일반적인 신념 (화이트의 저서가 그 신념 형성에 도움을 준) 과는 반대로. 교회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구가 둥근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 그것이 거의 원주에 가깝다는 것을 몰랐던 기독교 학자는 중세에 거의 없었다. BC 초기에.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연구가 유럽에서 유용하게 되었으며. 이 이후로 우리는 기독교 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이나 과학의 융화 노력이 계속됨을 보게 된다. 결국. 기독교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사고의 기본 골격. 그 철학적 원리. 형이상학과 우주론의 상당 부분을 취해왔다. 인간의 경험을 체계화하고 해석하는 그 능력을 수단으로 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기독교계를 정복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기독교 신학도 과학에 영향을 미쳐. 그 성격을 바꿔놓았다. 결정론 (발생할 모든 것은 반드시 발생한다)과 창조에 대한 부인 등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의 어떤 측면들은 기독교의 중심교리와 전혀 상반되는 것이다. 그 결과 벌어진 싸움은 (그것은 과학과 기독교 사이의 싸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와 과학 사이의 적절한 관계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들을 지닌 크리스챤들 사이의 싸움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결국 1270 년과 1277 년에 이들과 다른 철학적 전제들에 대한 신학적 유죄 판결을 낳았다. 기독교와 신학의 만남의 복잡성을 이 유죄판결들의 여파에 의해 매우 잘 설명된다 . 즉 이 판결들은 과학적 사고에 어떤 한계선을 그어 놓았다. 즉 그 이후.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특정 주장들을 지지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신학적 영역에 접근할 때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할 것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자유들을 상실한 반면 다른 자유들을 얻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전제들의 상당 부분에 대한 신학적 정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막대한 권위를 약화시켰고. 과학자들로 하여금 비아리스토텔레스 내지 반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향에서 사고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따라서 우리는 14 세기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양한 이론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이 가해짐과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자전함과 같은 비아리스토텔레스적 가능성에 대한 사고의 진정한 자유가 생기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 유죄 판결들은 또 다른 면에서 과학의 진취적 정신에 영향을 미쳤다. 즉 그 판결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전능하심의 선포였다. 이 교리로부터 나온 것이 자연의 절대적인 우발성이다. 즉 자연의 행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데 따라 결정되며. 따라서 인류가 습득한 자연 원인에 대한 지식은 단지 하나님이 사물을 다르게 운행하시면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판결들은 관찰된 사건의 이면에 깔려 있는 원인들에 대해 인간 정신이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어떤 회의론을 탄생시켰다. 이같은 태도는. 과학은 경험적인 사실에만 관심을 국한시켜야 하고 이면에 놓인 원인에 대한 연구는 무시해야 한다는 관점을 조장함으로 과학적 방법론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4백년 후. 하나님의 절대주권 개념과 그 결과로 인한 물질의 전적 복종 개념은 아이작 뉴톤 (Issac Newton) 의기계론적 세계관의 핵심적인 특징이 되었다 .

Ⅱ. 1543 년에 북부 폴란드 출신의 가톨릭 교회 행정가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1473~1543)는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옮겨. 결국 중세의 세계관을 뒤엎은 태양중심의 천문학설 (지동설)을 발표했다. 이 사건에 대한 화이트의 해석은 중세에 대한 그의 넓은 이해의 폭을 거의 반영하고 있다. 화이트는 코페르니쿠스가 각각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심지인 로마나 비텐베르크에서 그가 발견한 사실들을 공표하기를 꺼렸다고 보고한다. 대신. 코페르니쿠스는 뉘른베르크로 바꿔. 그곳에서 그의 저술이 출간되었다. 그 저술에는 루터교 목사인 안드레아스 오시안더 (Andreas Osiander;1498~1552) 쓴 “비굴한 서문”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의 공전설을 사실이 아닌 가설로 제안했다는 변명조의 거짓말”을 담고 있다. “아마도 과학적 진리들을 가장 고상하게 한 것은 그것들이 세상에 발표되는 과정이 슬그머니 몰래 이루어져야만 했던”것이었다 . 코페르니쿠스는 그의 첫번째 책을 받은 지 몇시간이 못되어 죽었다. 따라서 화이트의 말에 따르며. 그는 “그의 명예를 더럽히고 아마도 그의 생명을 파멸시키려 했던 그 양심적인 사람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한 것이다.
태양중심설에 대한 끊임없는 종교적 적대에 대한 화이트의 묘사는 설사 예전에 실제로 그러했다 하더라도. 더 이상 변호의 가능성이 없다. 만약 코페르니쿠스가 참으로 출판을 두려워했다면 그를 걱정시킨 것은 성직자들이 아니라 과학자들의 반응이었다. 그의 이전의 다른 성직자들은― 14 세기의 니콜레 오레스메 (Nicole Oresme; 주교)와 15 세기의 니콜라스 쿠사 (Nicholas Cusa; 추기경)- 지구의 공전 가능성에 대해 자유스럽게 논했었고. 따라서 16 세기에의 개념이 재등장한 것은 종교적 혼란을 야기시켰을 것이라는 가정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주교와 추기경 등을 포함한 성직자들이 코페르니쿠스에게 그의 책을 출판하도록 독촉했으며 그 책에는 교황 바울Ⅲ에게 바치는 헌사가 들어 있는 것이다. 만약 코페르니쿠스가 그 책이 출간된 1543 년 이후까지 살았다 해도 그가 어떤 적대감을 느꼈거나 핍박을 당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교회는 새로운 천체 또는 우주계보다도 더 걱정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코페르니쿠스 가설에 일부의 비판과 반대가 있었다 하더라도. 가톨릭 교회의 조직적인 반대는 17 세기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에 대한 개신교의 반응에 관하여. 화이트는 “개신교의 모든 교파들이 서로 다투어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성경에 위배되는 것으로 공격했다”고 주장한다 . 그는 또한 신학자인 마틴 루터 (Martin Luther)와 필립 멜랑크톤 (Philipp Melanchthon) 그리고 쟝 깔뱅 (John Calvin)이 모두 그 새 이론을 통렬히 공격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설명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루터에게서 단 한번의 즉석 언급을 찾아보게 된다. 1539년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나오기 4년전)의“좌담”기간에 한 이 언급에서 그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고 싶어하는 그 바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멜랑크톤은 처음에는 태양중심설을 사실의 기술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으나. 후에는 그의 입장을 완화시켰다. 깔뱅은 태양중심설에 대해 고린도전서 1:10~11에 관한 설교 (약 1556년 경의)에서 말했다 그는 그 헛된 새로운 이론의 전파자들에 대해 진리 탐구를 훼손시키는 논쟁적인 성향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같은 문제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깊지 못했으며. 우주론적 문제들은 결코 그의 신학에 체계적으로 도입되지 않았다 .
중요한 점은.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처음 지지 반응이 멜랑크톤의 전체적인 후원 아래 일했던 루터파의 젊은 수리천문학자들 그룹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 그들 중 한명인 게오르고 요아킴 레티쿠스 (Geoge Joachim Rheticus)는 잔코페르니쿠스가 죽기 바로 직전 2 년간을 그와 함께 보냈으며. 그 늙은 천문학자가 그의 책을 출간하도록 설득했었다. 레티쿠스는 오시안더의 도움을 받아 그 출판 과정을 지켜보았다. 오시안더의 서문은 천문학이 수학적인 예상들을 하는 것이지 자연의 사실을 묘사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비굴한” 변명이 아니며 많은 천문학자들도 공감했던 깊은 확신을 표현한 것으로서. 불필요한 비난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를 보호하려는 충심어린 시도였다. 레티구스 자신은 화이트의 주장과 정반대로 태양중심설을 자연의 사실로 받아들였으며. 자기의 입장을 공공연히 개진했다. 그러나 레티구스의 동료들 중 많은 사람이 코페르니쿠스 학설을 단지 행성의 예상 위치들을 더 잘 설명하는 수학적인 개정안으로 받아들였고. 지구가 진짜 돈다는 급진적인 학설을 거부하거나 그냥 눈감아 주었다. 그들이 지구의 공전을 반대했던 이유에는 과학적인 면과 신학적인 면이 모두 있다. 태양중심설은 아리스토텔레스 물리학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며. 지구가 고정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듯한 성경 본문의 특정부분과 문자적 해석에 충돌되는 것이었다. 두번째 반대에 대해 태양중심설 주장자들은 그러한 본문들은 일상 언어로 쓰여졌으며 따라서 과학적 진리의 논술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대답했다. 16 세기 말 개신교는 우주론적 관점들의 다양성을 견지했으며. 그 시비를 자유롭게 토론했다.
화이트에 의하면. 17 세기는 태양중심설의 “새 챔피온”을 배출했는데. 바로 새로운 과학 기구들과 망원경을 갖추었던 젊은 갈릴레오였다. 화이트는 기록하기를 “그에 항거한 전쟁은 길고도 비참했다. 교회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던 약간 과학적인 (semiscientific) 교수들은 거짓 과학으로 그를 공격했다. 또 열성적인 목회자들은 왜곡된 성경으로 그를 공격했다. 그리고 신학자들. 종교재판관들. 추기경회. 그리고 마침내는 교황들도 그를 재판했으며. 그의 불경한 학설을 영원히 잠재우려는 듯했다”고 했다. 이 극적인 이야기는 과학에 대한 신학의 공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졌다.
화이트는 선과 악. 진리와 오류. 영웅과 악인을 구분하는 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의 학자들은 그 차이가 보다 섬세한 그림을 제시하고 있다. 그 사건을 바로 파악하고. 왜 갈릴레오의 운명이 코페르니쿠스와 달랐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6 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반종교개혁운동 (Counter Reformation)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개신교의 개혁 도전에 응하는 가톨릭은 점점 더 보수적이고 권위주의적이 되어갔다. 권력이 중앙집권화되고 이념적인 경계가 심해졌다. 그 중 가장 민감한 논쟁들 가운데 하나는 성경해석이었다. 왜냐하면 교회만이 성경해석권을 가진다는 가톨릭의 주장과 그에 대한 개신교의 반대가 완전히 대립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 트리엔트종교회의 (Council of Trent.:.1545~1563)에서 분명한 입장을 표명했다. 즉 “거룩한 어머니 교회에 의해 결정된 의견에 반하는” 신앙이나 행위의 어떠한 문제에 관한 성경해석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 중세의 융통성 있는 해석은 과거의 일이 돼버린 것이다.
1610 년 갈릴레오가 등장했을 때. 그는 태양중심 이론을 입증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망원경을 통한 관측 사실들 뿐만 아니라 지구의 고정을 가르치는 듯한 성경 본문들의 해석법에 대한 진보적인 논쟁들을 들고 나왔다. 갈릴레오는 하나님께서 성경과 “자연이라는 교과서” 두가지 모두를 통해 말씀하셨으며. 그 둘은 참으로 충돌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과학적인 문제에 있어 권위는 이성과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확정적인 과학적 증거의 도전을 받은. 상반되는 듯한 성경 본문들은 재해석되어야 했을 것이다. 갈릴레오는 신학자들의 영역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트리엔트 종교회의의 정신과 명백히 대치되는 해석원리들을 지지함으로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갈릴레오는 그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지구 공전에 대한 설득력있는 과학적 증거들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망원경을 통한 그의 관측은 모두 티코 브래이 (Tycho Brahe)의 수정 지구중심설과 양립했으며 조류를 예로 든 갈릴레오의 주장 (조류가 움직이는 지구 위의 바다의 움직임을 나타낸다는)은 거의 설득력이 없었다. 결국 갈릴레오 자신이 문제를 발견했고. 그리고 그것은 마침내 그가 유죄판결을 선고 받게 만들었다. 즉 그 판결은 성경의 주장들과 전혀 상반되어 말썽을 일으키는 명백한 과학적 증거 때문에 비롯된 것 (화이트의 이야기처럼)이 아니고. 올바른 성경해석 원리에 관해 가톨릭교회 안에 내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애매모호한 과학적인 증거들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논쟁은 갈릴레오의 희생으로 보수주의자들의 승리로 돌아갔다 . 갈릴레오는 결코 성경의 권위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 아니고 단지 성경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하는 원리들을 제시한 것이었다.
갈릴레오가 당한 유죄판결의 세부 내용은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 코페르니쿠스 학설을 위한 갈릴레오의 운동은 1616 년에 갑자기 중단되었다. 그 해에 교리성성 (Holy office)에서 태양중심설을 이단적인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그 당시 갈릴레오는 전혀 신체적 위협에 직면해 있지 않았다. 8년 후 갈릴레오는 학자풍의 새 교황인 얼번Ⅷ (Urban Ⅷ)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단지 가설로 다루는 한 그에 대해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갈릴레오의 두개의 주요 천체가설에 대한 대화 (Dialogue Concerning the Two Chief World Systems)는 1623 년에 출간되었다. 거기에서 갈릴레오는 태양중심설을 물리적인 사실로 분명히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 가설적인 성격에 대한 교황의 훈계를 머리가 둔한 아리스토텔레스파 학자 심플리시오 (Simplicio)의 입을 빌어 말하는 전략적 실수를 범했다. 비록 교회의 출판 허가를 받긴 했지만. 이제 화가 난 얼빈Ⅷ를 포함한 갈릴레오의 적들은 그를 재판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그 심문은 결국 갈릴레오의 유죄를 선언했고 그에게 주장 철회를 강요했다. 비록 여생 동안의 가택 억류를 선언받았지만. 그는 플로렌스 외곽의 별장에서 안락한 생활을 했다. 그는 고통을 당하지도 두목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저 침묵당했을 뿐이었다.
갈릴레오 사건은 다면적인 성격의 사건이었다. 분명히 그것은 이성과 계시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과 자연의 가르침을 조화시킬 적절한 수단에 관해 심각한 질문들을 야기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코 과학에 대해 기독교가 일으킨 전쟁이 아니다. 그 모든 관련자들은 스스로를 크리스챤이라고 자처했으며. 모두가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다. 이것은 대립되는 성경해석 원리 사이의 싸움이다. 즉 트리엔트종교회의의 보수적인 이론 대 갈릴레오가 내놓은 보다 자유로운 대안의 싸움으로서 그 둘은 모두 교회사에 이미 선례가 있던 것이었다. 갈릴레오가 높은 장소들에서 그의 적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그의 안식(眼識)을 증명해 보였을 때. 거기에는 개인적. 정치적 요인들도 또한 한몫을 담당했었다.

Ⅲ. 19세기 전반을 통해. 그러나 특별히 찰스 다윈 (Chales Darwin)이 1859 년에 종의 기원 (Origin of Species) 을 출간한 이후에. 화이트가 말한 전쟁의 가장 뜨거운 전투가 창조에 관한 성경의 설명에 불붙었다. 이 분쟁은 “거대한 신학자들의 집단”과 창세기에 나타난 정적이고 초자연적인 설명 대신 세상에 대해 동적이고 자연적인 역사를 제시하려고 하는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 그리고 인류학 분야의 과학자들의 연합체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화이트는 말하기를. 각 접전은 예상할 수 있는 형태를 따랐다. 신학자들은 먼저 위배되는 과학적 이론에 반하는 성경 본문들을 열거했고. “성경의 진술과 확인된 사실의 견강부회적 일치”를 제안함으로 과학적 일치를 밝힌 후에 화평을 청했다.
이러한 과정의 예로 화이트는 1796년에 성운의 수축. 회전으로부터 태양계가 자연히 생성되었다고 주장한 피에르 사이먼 래플레이스 (Piere Simon Laplace)의 성운설에 대한 반응을 인용했다. “신학계 전체에 무신론을 반대하는 외침이 일시에 일어났고. 격렬한 전쟁이 일어났다”고 화이트는 쓰고 있다. 후에. 그 가설이 과학적으로 옳다는 것을 입증한 여러 발견들이 있은 후. 그 신앙인들은 래플레이스의 추측은 전혀 무신론적이 아니며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는 성경의 선언과 놀랍게 상응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 전투를 묘사하려는 열심 때문에 화이트는 처음 그 가설을 수용하고 대중화한 사람들 중에 목회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데 소홀했다. 그리고 모세의 이론과 래플레이스의 우주진화론을 “견강부회적으로” 조화시키려는 노력은 지나친 상상력을 지닌 성경학자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가장 뛰어난 두사람의 미국 과학자인 프린스톤의 아놀드 귀요트 (Arnold Guyot)과 예일의 제임스 드와이트 더너 (James Dwight Dana)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성운설의 역사는 과학에 대한 전쟁을 일으키는 신학자들의 열심을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과학과의 싸움을 피하려는 정통 크리스챤들의 노력을 보여준다 .
지질학사 (地質學史)의 발전에 대한 종교적 반응은 과학 대 신학의 공식 싸움이 궤변임을 보여주는 또다른 예이다. 수년 전 챨스 C . 길리스파이 (Charles C. Gillispie)가 지적했듯이 19 세기 초반 지질학의 문제는 “종교 대 과학의 문제이기 보다는 과학에 있어 종교 (있는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문제”였다. 성직자들과 과학자들의 싸움의 부당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19 세기 초반의 유수한 영국 지질학자들인 윌리엄 버클랜드 (William Buckland) 윌리엄 다니엘 코니베어 Willam Daniel Conybeare) 그리고 아담 세지윅 (Adam Sedgwick) 등이 모두 미국 지질학자인 에드워드 히치코크 (Edward Hitchcock)와 마찬가지로 성직자였다는 것을 지적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지질학과 창세기의 조화를 위해 “다소 터무니없는” 안을 만들어내려고 애썼던 모든 신학자들의 경우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지질학자인 벤자민 실리먼 (Benjamin Silliman) 죤 윌리엄 도우슨 (John William Dawson)등 그와 똑같은 일을 행한 과학자들이 있었음을 들 수 있다.
지구의 오래됨. 아담 이전의 생명 존재. 그리고 제한된 지역에만 노아 홍수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은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처음 싸움이 터졌을 때는 신학자들에 반대한 지질학자들은 없었다. 오히려. 최근 제임스 R. 무어 (James R. Moore) 주장했듯이. “성경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자세로 지질학을 연구하라는 챨스 리엘 (Charles Lyell) 의 권고를 응낙한 전문적인 지질학자들은 “다른 책들과 똑같이 성경을 해석하라”는 벤자민 조웨트 (Benjamin Jowett) 의 충고를 받아들인 전문적인 성경학자들과 동맹하여. 이러한 처세 교훈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아마츄어 지질학자들과 주석학자들에 반대했다.
논의의 여지가 있는 다윈의 계통진화 이론 (인간을 동물화하고 사실상 하나님은 상관없게 만든) 의 출현은 말할 것도 없이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화이트의 논쟁적인 분석은 그 이유들을 명확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혼동시켰다. 화이트에 따르면. 옥스포드의 주교인 사무엘 윌버포스 (Samuel Wilberforce)는 잔다윈의 이론은 성경에 모순된다고 비난하는 글을 쿼터리 리뷰 (Quaterly Riview) 에 게재함으로 다윈에 반대하는 신학적 공격에 착수했으며 논쟁의 분위기를 낳게 했다. 후일 1860년 6월 30일. 옥스포드에서 열린 영국 과학진흥협회 (British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에서 행한 연설에서 윌버포스는 그의 반대 주장을 되풀이했는데. 이번에는 그 자신이 “원숭이의 후손이 아닌 것”을 자축했다. 이 연설을 들은 다윈의 친구 동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 (Thomas Huxley) 잔반격을 가했다. “만약 내가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나는 진리를 찾아 삶을 낭비하고 있는 거짓된 사람들에게 자기 지식과 웅변을 의지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차라리 겸손한 원숭이의 후손이 되겠다.” 화이트는 말하기를 이 반격이 “전 영국에 울려 퍼졌고” 참으로 세계에 울려퍼졌다고 했다.
화이트의 주장을 생각해 볼 때. 그는 그 이야기의 보다 선풍적인 (그리고 위조된) 부분을 전하지 않고 있다. 그것에 따르면 그 주교는 헉슬리에게 뻔뻔스럽게 물었다. “당신의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혈통 중에 원숭이 혈통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냐고. 그러자 그 불손한 동물학자는 “나는 주교일 바에는 차라리 원숭이의 후손이 낫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극적이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이지만. J. R. 루카스 (J. R. Lucas)와 다른 사람들이 보여주었듯.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윌버포스를 대단히 부당하게 보여지게 하고 있다 .


옥스포드의 연설 기초가 된 쿼터리 리뷰의 논문에서 윌버포스는 다윈학설의 신학적 관련에 대해 관심을 표현했으며. 다윈 이론에 대해 종교적 반대가 아닌 과학적 반대를 다루고 있다. 실제로 그는 만약 그것이 옳다고 입증된다면 그 이론을 기꺼이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만약 다윈이 똑같은 정확성과 합리성을 가지고 우리가 버섯류와 같은 혈통임을 설명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교만을 내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가 그 버섯들과 혈연관계임을 인정할 것이다 단지 우리는 그같은 결론을 내려고 있는 그 주장의 각 단계를 자세히 조사할 것을 요청하며. 그 어떤 점에서든 꾸준한 관찰 대신 무제한적인 가설들이 제시되는 것을 반대한다 우리는 자연의 어떤 사실. 또는 가정된 사실에 반대하거나. 그 사실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된 추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나타난 것은 계시의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들이라고 그들은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윈도 인정했듯이 비타협적인 근본주의자의 분노라고 말하기 어렵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윈은 그 주교의 견해를 “매우 현명하다”고 말하고 그의 목회자적 비평은 “종의기원의 추측에 의한 모든 부분들을 노련하게 골라내고 있으며 모든 문제들을 잘 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
헉슬리―윌버포스의 대화는 전혀 다윈 이론에 대한 논쟁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당시에는 알려지지도 않았었다. 식물학자인 요셉 후커 (Joseph Hooker)는 그 모임 직후에 그것을 기록하여 다윈에게 보고했는데. 그 주교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한 사람은 헉슬리가 아니라 바로 그였다. 그리고 애티니엄 (Atheraeum) 에 그 모임을 취재하여 게재한 어느 필자는 심지어 헉슬리의 가정된 응답을 언급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윌버포스와 헉슬리는 말을 주고 받았으나 그 말들은 의기양양한 다윈론자들이 그들의 투쟁사를 인정된 것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하면서.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기억할 만한 것으로 변했다. 그들의 기억으로는 그 날 옥스포드에서 헉슬리가 승리했지만. 당시의 기록은 다르게 나타나 있다. 윌버포스의 지지자들 중에는 참석하고 있던 대다수의 성직자와 평신도 뿐만 아니라 “가장 뛰어난 박물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근 수십년 동안 1925년 스코웁스 재판에서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William Jennings Bryan)과 클레어런스 대로우 (Clarence Darrow)의 교전은 과학과 종교의 전쟁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으로서 그와 유사한 전설적 위치를 획득했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진화론자들은 법정에서 승리했지만 대중 홍보전에서도 놀라운 승리를 기록했고 반진화론 운동을 멈추게 했으며. 무능한 브라이언을 무식쟁이로 만들었다. 그러나 더 세심히 살펴보면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다. 폴 M. 왜거너 (Paul M. Waggoner) 밝혔듯이. 당시의 자유스런 당시 사람들조차도 처음에는 그 재판을 근본주의자의 불안한 승리로 보았으며. 그 재판 후에도 수년간 반진화론 운동이 계속 성행했다. 현재의 기준에 의하면. 브라이언은 창조론자로서 남달리 편견이 없었음을 보여주었다. 지질학자들의 증언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창세기의 “날들”이 오랜 기간을 나타낸다는 것을 인정했다. 사적으로는 “인간 이전의 진화”에 대해 아무 불평이 없다고 친구들에게 인정했다.
과학과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모든 일화들을 단순히 전쟁같은 대립으로 축소시키려는 듯한 화이트의 강박관념은 그로 하여금 다윈에 대한 반대가 정직한 과학적 관찰들에 의한 것이라든지. 또한 그의 지지자들이 신학적인 전제들에 매료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하버드의 훌륭한 교수 루이스 애거시즈 (Louis Agassiz)가 “그가 태어난 스위스의 작은 목사관의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진화론에 반대했다고 말한다. 또한 캐나다 지질학자인 윌리엄 도우슨 경 (Sir William Dawson)은 신학적인 이유로 다윈 학설에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그 두 경우 모두 과학적 고충이 있었음을 무시하고 있는 주장이다. 이처럼 화이트는 다윈 학설과 깔뱅주의 사이의 유사성을 간과했다. 즉 그 유사점 때문에 식물학자인 아사 그레이 (Asa Gray)와 지질학자이며 목사인 죠지 프레드릭 라이트 (George Fredrick Wright)같은 정통적인 크리스챤들이 자연도태이론을 받아들인 것이다 .
우리는 모든 것이 조화로왔고 심각한 갈등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화이트에 의해 묘사된 것같이 단순히 양극단의 갈등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최근 학자들은 다윈 학설이 최소한 세가지 다른 방향에서 갈등을 야기시켰다고 주장한다. 제임스 R. 무어 (James R. Moore)는 다윈론자들의 논쟁은 과학자와 신학자 사이에가 아니라. 새로운 과학적. 역사적 발견들과 타협하려고 애씀에 따라 “신앙의 위기”를 경험하는 개개인의 마음속에 갈등을 일으켰다. 그것은 “기독교 전통에 깊이 물든 마음들과 다윈 학설의 사상들과 암시들의 갈등”이라고 적고 있다.
닐 C. 길레스파이 (Neal C. Gillespie)는 그 갈등은 과학 또는 “지식”의 경쟁체계를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오래된 과학 이론일수록 신학적 가정에 근거하고 있는데 반하여 새로운 것일수록 더 다윈과 연합하여 세계를 아는 수단으로서의 종교를 거부하고. 단지 자연적 2차적 원인들을 내포하고 있는 자연의 해석만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과학 지식은 그 안에 신학에게 내줄 자리가 없다는 점에서 옛것과 다르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로 인해서. 때로는 환상이나 실수로 처리되는 그 갈등을 매우 실제적이 되게 하는 심각한 질문들이 야기되었다.” 과학 내의 변형들로부터 발생한 그같은 갈등은 과학자들과 성직자들의 싸움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프랭크 M. 터너 (Frank M. Turner)는 다윈론자의 논쟁을 보는 세번째 길을 제시한다. 그는 주장하기를 “종교와 과학의 대변인들 사이에 있었던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갈등”은 화이트의 주장처럼 진보적인 과학과 퇴보적인 신학 사이의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지식 세계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권위와 특권이 이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전문적인 과학자들이 과학의 세계에서 성직자들을 몰아내고 성직자들의 교육 주관을 끝내려고 함에 따라 발생한 것이라는 것이다. 터너에 따르면 가장 긍정적인 인식론은 길레스파이에 의해 기술되었다.
그는 원인과 방어수단을 모두 만들어냈다. 그 “젊은 호위병”은 그들 가운데서 종교적 교리나 자연신학 또는 종교적 권위자들의 견해와 상관없이 과학이 추구되어야만 한다는 데 동의했다 보다 전문적인 과학 공동체를 형성하고 보다 비판적인 방법에 과학을 한정시키려는 갈망은 강력한 개혁 과학자들로 하여금 두 그룹의 사람들과의 갈등에 빠지게 만들었다. 첫째 그룹은 조직화된 종교의 지지자들로서. 그들은 교육에 대해 꽤 많은 통제를 계속 가하고 싶어 하며. 종교를 도덕적 사회적 가치의 근원으로 유지하고 싶어 한다. 두번째 그룹은 전문적인 과학 공동체 중 종교적 성향을 지닌 부분으로.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그룹이다.
터너의 견해에 의하면. 그 갈등은 지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도 지니고 있었다.

Ⅳ. 화이트의 오래된 전장들 (battlefields)중 일부를 간단히 돌아본 결과 과학과 기독교 사이의 역사적 관계는―또는 더 정확히 말해. 과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의 역사적 관계는―단순히 갈등과 전쟁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보충적인 예들은 이 결론을 더 확실하게 할 뿐이다 . 그러나 그 전쟁 가설에 대한 의심은 단지 우리에게 직면한 역사적 과업의 시초에 불과하다. 우리는 또한 만족할 만한 대안을 세워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그 전쟁 비유가 계속 역사적 해석을 지배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의에 차고 이기주의적인 왜곡에서 자유로운 (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자유롭게) 과학과 종교의 신선한 역사를 필요로 한다. 과학과 종교의 만남처럼 복잡한 문제를 재해석하는 일은 논문 한편으로는 도저히 끝낼 수 없는 미묘하고 곤란한 과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적절한 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약간의 단서들과 제안들을 제공하고자 한다.
첫째로. 우리가 오해한 것이 아님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는 화이트의 전쟁 가설에 대한 우리의 불만은 그 반대 가설에 대한 우리의 혐오감과 어울려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단언하고 싶다. 즉 기독교와 과학 사이의 관계를 끝없는 적대와 갈등으로 규정하는 것을 반대함에 있어. 기독교와 과학이 영원한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어떤 집단들에서는 넓게 번져 있는 (특히 기독교 변증가들 사이에 그같은 해석은 역사적 검열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로. 화이트의 견해에 있어 가장 매력적인 것 중의 하나는 그 단순성이다. 그의 책들에서 발견되는 기억할만한 비유는 그 책들의 아주 오랜 수명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와 대등한 단순성을 지닌 만족할 만한 대안을 결코 찾지 못할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의 상호관계의 복잡성을 올바로 평가하려는 어떤 해석도 엄청난 조건들과 복잡한 의미들을 지녀야만 한다. 이는 대중의 인정을 받기에는 불리한 조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일이다.
셋째로. 전통적인 분류는―적과 아군. 갈등 대 일치라는―오해를 낳기 쉽고. 심지어는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잘못된 질문들로 몰고가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과학사가들은 1세기 이상 동안 화이트처럼 흔히 극단적인 또는 변명적인 의도로 악인과 희생자를 가려내려는 시도에 시간을 낭비하고 정력을 쏟아왔는데. 그것은 항상 수많은 가치기준에 시달리는 뼈대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전략적으로. 과학이 서구 문명화의 가장 가치있는 문화적 가공품이었으며 계속 그러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며. 실로 그처럼 가치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그것을 간섭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계속하여 왜 과학활동의 그 가장 완전한 표현 (즉 현대과학)나타나기까지 그처럼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 마치 현대 과학의 생성이 단순하고 필연적인 문제인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고는 재빨리 그 주범이 기독교인 온갖 적들의 손에 과학이 갖가지 모욕을 당했다고 결론짓는다. 그같은 과학만능주의는 결코 불문에 붙여져서는 안된다.
이러한 비판을 함에 있어. 우리는 과학의 업적과 가치의 중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과학적 가설들로 출발하는 것은 결코 과학의 본질과 기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과학의 진보만을 찬양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쉬울 것이다. 게다가. 열성적인 종교사가들도 그와 유사한 경기를 진행할 수가 있다. 종교가 첫째가는 문화적 자산이어야 하고 그 외의 모든 것 (과학을 포함한)은 그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가정함으로써 그들은 과학이 종교의 발전에 자주 간섭했다고 본다. 비록 변명의 역할을 위해서는 매력있지만. 그 양측 모두 역사학자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대부분 그 경기가 치러지는 가치 폐쇄적인 법칙들에 의해 미리 결정되기 때문이다. 건전한 학문은 보다 중립적인 출발점을 요구한다 .
연대에 따른 역사적 연구는 과학과 기독교 사이의 풍성하고 다양한 상호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과학적이고 신학적인 온갖 신념과 다양한 지식 및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기술과 완전도를 가지고 단체들을 만들고. 발전을 이루며. 갖가지 만족을 추구하면서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일에 착수해오고 있다. 그 과정에서. 과학과 기독교는―지적인 체계로서. 단체로서. 개인적 참가 대상으로서―때로는 안락하게. 또 때로는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서로 가까이 지내왔다 . 이후로 우리는 “기독교와 과학이 서로의 만남을 통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를 물어야지. “누가 공격자인가.”를 물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연구를 통해 그 만남이 다양했으며 그 광대한 영향의 폭이 밝혀지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유동적인 동맹관계와 이중적인 가입관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과학과 크리스챤 공동체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 내부 자체에도 많은 갈등과 경쟁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영향이 상호간에 오고갔으며 기독교와 과학은 똑같이 서로와의 관계에 의해 그 형성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단정된 영예와 비난의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할 경우. 우리는 결코 서구 문화 형성에 있어 기독교와 과학의 역할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우리의 이해를 심각한 가난에 빠지게 할 것이다.

주)
1.First of the Course of Scientific Lectures Prof. White on .The Battlefields of Science 1 New York Daily Tribune , 196 12. 18. P. 14 .
2 Bruce Mazlish, Preface to 1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 , by Andrew Dickson White (abridged ed., New York, 1965), P. 13.;.Andrew Dickson White, 1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in Christendom , 2vols. (New York, 1896), 1.:.Viii, 화이트에 관해서는 Glenn C. Altschuler, 1 Andrew D. White.Educator, Historian, Diplomat (Ithaca, 1979) 을 보라.
3. Firt of the Course of Scientific Lectures,. P. 4 .
4. Ibid
5. Ibid.;.Andrew Dickson White, 1 The Warfare of Science (New York, 1876), p. 145.;.White, 1 A History of the Warfare , 1.:.ix, xii . 물론 종교와 신학의 차이에 대한 화이트의 언급이 그의 초기 저술에도 나타남에도. 1896 년 판에서 교의신학에 초점을 맞춘 것은 기본적인 전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때늦은 궁리―윌리엄 드레이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려는 잘못된 노력인 듯하다. Draper, 1 History of the Conflict between Religion and Science (New York, 1874) 를 보라. 헨리 겔락 Henry Guerlac 멎출간되지 않은 논문인 “ Sartoniaha and Forword ”에서 이같은 판단을 확증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화이트가 1896 년 저술의 제목을 1 A History of the Warfare of Science and Religion 이라고 붙일 의도였으나 그의 조력자인 죠지 링컨 벌 George Lincoln Burr 의해 그것이 누설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6. Mazlish, Preface, p. 18.;.George Sarton, Introductory Essay., in Science Religion and Reality ed Joseph Needham(New York, 1955), p. 14 .
7. 전쟁 비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위해서는 다음 논문들을 보라. James R. Moore, 1 The Post.Darwinian Controversies.:.A Study of the Protestant Struggle to Come to Terms with Darwin in Great Britain and America, 1870 1900(Cambridge, 1979), pp. 1122. David C. Lindberg and Ronald L. Numbers, eds. 1 God and Nature.:.Historical Essays on the Encounter between Christianity and Science (Berkeley, 1986), passim.;.Ronald L. Numbers, .Science and Religion. In 1 Historical Writing on American Science , ed. Sally Gregory Kohlstedt and Margart W. Rossiter, 1 Osiris 1, 2d ser.(1985):59 8
8. White, 1 A History of the Warfare , 1:325 . 과학과 초대 교회에 대한 더 완전한 설명을 위해서는 다음 논문을 보라. David C. Lindberg, .Science and the Early Church. In 1 God and Nature , pp. 158 .
9. White, 1 A History of the Warfare , 1:375 .
10. Augustine, 1 Enchiridion 3. 9, trans. Albert C. Outler,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Philadelphia, 1955). Pp. 341.42 .
11. Augustine, 1 De genesi ad litteram 1. 19; trans. Meyrick H. Carre, 1 Realists and Nominalists (London, 1946), p. 19 . 또다른 번역으로는. Augustine, 1 The Literal Meaning of Genesis, trans. John Hammond Taylor, S. J., 2vols., Ancient Christian Writers (New York, 1982) 1:42.43 .
12. 이것과 앞 단락의 주제는 Lindberg, .Science and the Early Church., pp. 233 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13. 그 유죄판결의 영향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서는. Edward Grant, .The Condemnation of 1277, God.s Absolute Power, and Physical Thought in the Late Middle Ages., 1 Viator 10(1979).:.211.44.;.reprinted in Edward Grant.s 1 Studies in Medieval Science and Natural Philosophy (London, 1981), article 13 .
14. Gary Deason, .Reformation Theology and the Mechanistic Conception of Nature., in 1 God and Nature, pp. 181.85 .
15. White, 1 A History of the Warfare , 1:123 .
16. Ibid, 1:123.124 .
17. 오레스메의 논문은 Marshall Clagett, 1 The Science of Mechanics in the Middle Ages (Madison, 1959), pp. 600-609에 번역 및 분석되어 있다.
18.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대한 16C 가톨릭의 반응에 대해서는. Robert S. Westman, .Copernicanism and the Churches., pp. 81.85, 86.95 .
19. White, 1 A History of the Warfare , 1:26 .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대한 개신교의 반응에 대해서는 Westman, .Copernicanism and Churches., pp. 81.85, 898 .
20. 루터와 멜랑크톤에 관해서는 다음 글을 보라 B. A. Gerrish, .The Reformation and the Rise of Modern Science,. In 1 The Impact of the Church Upon Its Culture.:.Reappraisals of the History of Christianity, ed. Jerald C. Brauer (Chicago, 1968), pp. 231.65 . 깔뱅의 입장에 관한 긴 논쟁 중 최근의 것으로는. R. Stauffer, .Calvin et Copernic, . 1 Revue de l.histoire des religions 179(1971):31.40.;.Robert White, .Calvin and Copernicus.:.The Problem Reconsidered . 1 Calvin Theological Journal 65(1980):.233.43 .
21. Robert S. Westman, .The Melanchthon Circle, Rheticus, and the Wittenberg Interpretation of the Copernican Theory, . 1 Isis 66(1976):164.93 .
22. White, 1 A History of the Warfare , 1:130.31 .
23. 그 포고령의 본문이 Olaf Pedersen, .Galileo and the Council of Trent.:.The Galileo Affair Revisited, . 1 Journal for the History of Astronomy 14(1983):28.29, n. 46 .에 나와 있다.
24. 갈릴레오와 교회 안의 그 비판자 사이의 논쟁에 관해서는 위의 글을 보라. 또한 William R. Shea,. Galileo and the Church,. In 1 God and Nature , pp. 118.33 도 보라.
25. 사건의 경과에 관해서는 Petersen 과 Shea 의 저술 외에 Jerome, J. Langford, 1 Galileo, Science, and the Church (New York, 1966) 을 보라.
26. 태양중심설에 관한 논쟁은 화이트가 말한 과학혁명시대의 유일한 논쟁은 아니었다. 생물의학에 관한 그의 주장은 1 A History of the Warfare , 1:463 을 보라. 그리고 그와 반대되는 다음 글들을 보라 Ronald L. Numbers and Ronald C. Sawyer,. Medicine and Christianity in the Modern World,. 1 Health./.Medicine and the Faith Traditions , ed. Martin E. Marty and Kenneth L. Vaux (Philadelphia, 1982), pp. 134.36;.Jemes J. Walsh, 1 The Popes and Science (New York, 1908) .
27. White, 1 A History of the Warfare , 1:22, 218 .
28. Ibid, 1:1 18 .
29. Ronald L. Numbers, Creation by Natural Law.: .1 Laplace.s Nebular Hypothesis in American Thought (Seattle, 1977) .
30. Charles Coulston Gillispie, 1 Genesis and Geology.:.A study in the Relations of Scientific Thought Natural Theology and Social Opinion in Great Britain, 1970.1850 (Cambridge, Mass, 1951);.White, 1 A History of the Warfare, 1:234.;.Nicolas A. Rupke, 1 The Great Chain of History.:.William Buckland and the English School of Geology , 1814.1849(oxford, 1983) .
31. James R. Moore, .Geologists and Interpreters of Genesis in the Nineteenth Century,. In 1 God and Nature , pp. 322.50.;.Martin J. S. Rudwick, .Shape and Meahing of Earth History,. Ibid., pp. 296.321 .
32. White, 1 A History of the Warfare , 1:70.71 .
33. J. R. Lucas, .Wilberforce and Huxley.:.A Legendary Encounter, . 1 The Historical Journal 22(1979).:313.30. ;.Sheridan Gilley,. The Huxley.Wilberforce Debate.:.A Reconsideration,. In 1 Religion and Humanism , ed. Keith Robbins, Studies in Church History 17(Oxford, 1981), pp. 325
34. 루카스의 7 Wilberfore & Hurlet., pp. 31 20 에서 인용함.
35. Ibid., pp. 313.3
36. Paul M. Waggoner, .The Historiography of the Scopes Trial.:.A Critical Re.evaluation,. 1 Trinity Journal , n. s. 5(1984).:.155.74;.Ronald L. Numbers, Creationism in 20th.Century America,. 1 Science 218(1982).:.538.44.;.Edward J. Larson, 1 Trial and Error.:.The American Controversy over Creation and Evolution (New York, 1985) .
37. White, 1 A History of the Warfare , 1:68, 82 . 다윈 학설과 깔뱅주의의 관계에 대해서는 Moore, 1 Post.Darwinian Controversies , pp. 280.98 334 40 을 보라. 다윈 학설의 논쟁에 대한 화이트의 해석은 A. Hunter Dupree,. Christianity and the Scientific Community in the Age of Darwin,. In 1 God and Nature , pp. 351.68 에서 부정되었다.
38. Moore, 1 Post.Darwinian Controversies , pp. 102.103 .
39. Neal C. Gillespie, 1 Charles Darwin and the Problem of Creation (Chicago, 1979). Pp. 12.13, 18, 53.;.Alvar Ellegard, 1 Darwin and the General Reader.:.The Reception of Darwin.s Theory of Evolution in the British Periodical Press , 1851872.:.(Go teborg, Sweden, 1958), p. 337 .
40. Frank M. Turner,. The Victorian Conflict between Science and Religion.:.A Professional Dimension,. 1 Isis 69(1979).:.356.76 . 오웬 채드윅 Owen Chadwick 멎과학과 종교의 갈등은 “수많은 갈등들에서 필연적으로 실체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1 The Secularization of the European Mind in the Nineteenth Century (Cambridge, 1975), pp. 163.64 .
41. 예를 들어. Edward E. Daub, .Demythologizing White.s Warfare of Science with Theology,. 1 American Biology Teacher 40(1978).:.553.56 .
42. 예를 들어. R 13. .40.eijer 13. .40. Hooykaas, Religion and, the Rise of Modern Science (Grand Rapids, Mich., 1972).;.Stanley L. Jaki, 1 The Road of Science and the Ways to God (Chicago, 1978) .
43. 중립적인 자세의 필요성에 관해서는 다음 글들을 보라 Martin Rudwick, .Senses of the Natural World and Senses of God.:.Another Look at the historical Relation of Science and Religion,. In 1 The Sciences and Theology in the Twentieth Century, ed. A. R. Peacocke(Notre Dame, 1981), pp. 241.61.
44. 비록 어떤 독자들은 우리가 사용한 “과학”과 “기독교”란 용어를 이름의 구체화된 대상으로 부당하게 해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이 용어를 기독교와 과학의 여러 가지 표현들을 나타내는 가장 편리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 논문에 대하여 (김영길)
기독교와 과학의 논쟁은 비단 신학자나 과학자 만이 아니라 철학자. 역사학자 등 여타 분야의 학자들까지도 참여한 뿌리 깊은 논쟁거리였다. 그만큼 기독교와 과학은 얼핏 보기엔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갈등과 모순의 관계에서 출발하고 전개되어야만 하는 것처럼 인식되어져 왔다.
이 논문에서 지루할 정도로 인용되는 화이트 (Andrew Dickson White)의 견해는 과학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며 오히려 크리스챤에 의해서 과학의 발달이 저해된 사건의 예로서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대한 교회의 박해를 들고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기독교가 과학의 발전을 지연시켰고. 크리스챤은 과학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든가. 크리스챤 과학자는 과학의 발달에 공헌하지 못했다는 식의 논리 전개에는 동의할 수 없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 지동설에 대한 종교재판은 그 당시 성경해석학의 문제에서 빚어진 문제이지. 결코 과학을 이단시 하거나 배척하지는 않았다.
갈릴레오 (1564~1642)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행성운동에 관한 3 가지 법칙을 밝힌 요하네스 케플러 (1571~1630)는 철저히 성경을 믿었던 과학자로서 이것에 의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높임을 받기만 한다면 나의 이름은 영원히 없어져도 좋다”고 할 정도였다. 밝힌 행성운동의 법칙은 오늘날에도 우주여행을 위한 행로를 그리는데 사용될 정도로 과학의 발달에 공헌하였다 .별의 법칙으로 유명한 로버트 보일 (1627~1691) 역시 매일 아침마다 성경을 읽었으며. 성경의 뛰어난 교리를 변증하는데 열심을 다했다. 그는 선교사업에 많은 돈을 기부했다. 그는 새로운 아일랜드성경 번역에 재정적으로 투자를 했으며. 수천부의 성경이 그의 돈으로 배포되었다.
너무도 잘 알려져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는 아이작 뉴우튼경 (1642~1727)은 별을 연구하기보다 성경을 연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했다. 창조의 시각을 확정했던 그는 어셔 대주교의 이론에 동의하는 성경연대기에 관한 책을 썼다. 그는 “나의 모든 발견들은 기도의 응답으로 이루어졌다”고 할만큼 하나님과 철저한 관계에 있었던 과학자이다.
이밖에도 과학사(科學史)에 혁혁한 공헌을 한 크리스챤 과학자들이 많은데. 어떤 특정한 예(지동설에 대한 교회의 배척 등)로써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말하는 것은 마치 나무는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과학이란 관측이 가능한 현상에 대하여 실험을 통해서 증명된 것이어야 하는데. 그 당시 신학자들이 실험을 거치지 않고 단지. 경험적인 느낌으로 천동설 (天動說)을 지지하고 지동설을 배척한 것만으로 종교가 과학을 배척 운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요즈음도 경험적인 느낌으로는 해가 떴다. 해가 졌다고 하지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지는 않지 않는가. 책에서 지구가 움직인다고 하니까 그렇게 믿을 따름이지.
그리고 하나 더 부기할 것은 과학은 만고불변의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자주 변하는 이론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과학지상주의가 되면 안된다는 저자의 의견에 필자도 동감한다.
진화론 역시 1980년 10월 16~19일 시카고에서 세계의 정상급 진화론자 160명이 “ Macroevolution(대진화)”란 제목으로 토의를 하였다. 이때 다뤄진 주요 내용은 “종(種)에서 종(種)으로의 진화 (Macroevolution)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명한 진화론자요 하바드대학의 교수인 굴드 (Gould) 역시 “장기간에 걸친 점진적인 변이(變異)의 누적 결과로 대진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백만년 동안 서서히 변하다가 갑자기 도약했다”고 밝혔다. 즉 급진적이고 거대한 유전인자의 변이는 괴물이 나올 수도 있으므로 이 이론을 “있음직한 괴물 이론 (Hopeful monster) 이라고 한다. 이로써 생명의 기원 이론으로서 오랫동안 학계와 종교계를 지배해온 진화론은 진화론자 스스로에 의하여 폐기처분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화론에 대한 무분별한 수용을 경계하며 불구하고 과학과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 이 논문의 저자가 결론 부분에서 아래와 같이 제안한 내용들은 참으로 신선한 내용들이다.
1) 기독교와 과학은 끝없는 적대와 갈등의 관계도 아니요. 영원한 동맹간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2) 기독교와 과학의 상호관계를 규명함에 있어서의 단순성이다.
3) 과학만능주의는 결코 불문에 붙여져서는 안된다는 것과 건전한 학문은 보다 중립적인 출발점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출처 : 명지새벽이슬
글쓴이 : 임왕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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