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이야기

[스크랩] ♥CBS와 교회문화연구소가 함께 하는 캠페인 [교회용어 바로 씁시다]

향기나무 김성휴 2006. 11. 2. 16:23
♥CBS와 교회문화연구소가 함께 하는 캠페인 [교회용어 바로 씁시다]


찬송가를 부르다보면 "예수 예수 귀한 예수"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또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라는 찬송가 가사가 있습니다.
이런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여간 민망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미국 찬송가 가사를 직역한 데서 온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오직 한 분이신 주님-그 분을 우리는 "예수"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으로 아주 특별하게 대우해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외는 사도신경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존경하는 분에 대해서는 식사를 “드셨다”고 하지,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먹으셨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또 “돌아가셨다”고 하지,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죽으셨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표현은 무례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표현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능하신 자여, 우리를 기억하소서."
잘 아시겠지만, 여기에서 ‘者’라는 한자어는 감히 주님을 가리킬 수가 없는 단어입니다.
이런 표현은 교역자를 초빙하는 광고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00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자' 참 무례한 표현인데 별 생각 없이 쓰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전능하신 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신 이‘가 좋겠지요?
‘우리'도 '저희'라고 해야겠죠?“


"주님,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이라는 말은 세 가지로 쓰입니다.
"당신이 그랬어요?"와 같이 상대방을 낮잡아 부를 때(제이인칭어).
또 그 자리에 안 계신 웃어른을 높여 말할 때(제삼인칭 대명사).
그리고 부부간에 서로를 부를 때(제이인칭어) 등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거나 찬양을 할 때에 하나님은 제2인칭이 되십니다.
그러니 '당신'이라는 말은 무례한 표현이 됩니다.
'당신'을 '주님'으로 바꿔서 말하는 게 맞습니다.
"주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여!" "예수여"
가끔 집회에 참석하면 '주여 삼창'이라 하여, "주여!"를 크게 세 번 외치며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까요?
누구를 부를 때 "아무개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여!", 또는 "김철수여!"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을 "선생님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주여!"보다는 "주님!", 하나님!', "예수님!"이 좋습니다.


"목사님, 개업 예배 좀 봐주세요."
"이번 주 구역예배는 집사님이 봐주세요"

예배를 봐준다는 말은 자칫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준다는 느낌을 줍니다.
예배는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행위이지, 누가 대신 드려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예배를 봐준다"는 말은, "점을 봐준다"는 미신적인 용어를 생각나게 하기도 합니다.
예배는 누가 대신 봐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것입니다.
"목사님, 예배를 인도해주세요"라고 하는 게 옳습니다.


흔히 주일 낮에 어른들이 드리는 예배를 "대예배"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들이 드리는 예배를 "소예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배에 큰 예배 따로 있고 작은 예배 따로 있을 수는 없지요.
예배에 등급이나 규격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한 두 사람이 모여도 '예배'입니다.
"대예배"라는 말보다는 "주일 낮 예배", 또는 장년부 예배"로 표현하면 어떻겠습니까?



"시간이 되었으므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 인도하는 분이 이 말을 간혹 쓰곤 합니다.
이 말은, 자칫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배를 시작해야 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예배는 정해진 시각에 시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시각이 되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의무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기꺼이 자발적으로 전폭적으로 감격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예배를 인도하시는 분들은, 시간이 되었다는 이유를 달지 말고, 그냥 예배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어휘가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축복해 주시옵소서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축복(祝福)'은 복을 빈다는 뜻입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이것이 바로 야곱을 위한 이삭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복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빕니다. 다시 말해 축복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 축복해주시옵소서."라는 말은, 다른 신에게 복을 빌어달라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부탁을 하는 셈이 됩니다.
"하나님, 복을 내려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게 올바른 말입니다.

 


"하나님, 건강의 축복을 주시옵소서"
우리는 기도할 때 '축복을 달라'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또 설교 중에도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합니다.
축복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복을 비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축복송'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그런데 물건이 아닌 '축복'을 달라고 하고, 받으라고 하니 도무지 말이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십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말에는 자기를 가리키는 말로 '나'와 '저'가 있습니다.
이 말은 상대방에 따라 잘 골라 써야 합니다.
존경하는 상대 앞에서는 자신을 '나'라고 하지 않고 '저'라고 낮춰 부릅니다.
기도나 찬양은 분명히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나'라고 하지 말고 '저'라고 해야 합니다.
"제가 주님을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사오니..."
이렇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외는 사도신경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존경하는 분에 대해서는 "음식을 드셨다"고 하지,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먹으셨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또 "돌아가셨다"고 하지,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죽으셨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표현은 무례합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전능하신 자여, 우리를 기억하소서"
잘 아시겠지만, 여기에서 '者'라는 한자어는 감히 주님을 가리킬 수 없는 단어입니다.
이런 표현은 교역자를 초빙하는 광고문에서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자'
참 무례한 표현인데 별 생각 없이 쓰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전능하신 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신 이'가 좋겠지요?
그리고 '우리'도 '저희'라고 해야겠지요?




"당회장님께서 설교해 주시겠습니다."
사람은 그 역할에 따라 호칭이 달라집니다.
자녀들에게는 '아버지'이지만, 회사에서는 '과장님', 교회에서는 '집사님'이라고 합니다.
목사님도 제직회 때에는 '제직회장', 당회 때는 '당회장'이 됩니다.
그러니 '당회장'이라는 말은 당회 때에 당회원들끼리 써야 합니다.
당회가 아닐 때에는 '담임목사'라고 불러야 하겠죠?

 

 



■지금도 시골 교회에 가보면 '00예배당'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요즘에는 '예배당'이란 말 대신 '교회'란 말이 많이 쓰입니다.
그러나
'교회(Church)'는 '주님의 백성들의 모임', '교인들의 무리'를 가리키고,
'예배당'이나 '교회당'은 교인들이 모이는 장소나 건물을 말합니다.
'예배당'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면, '교회'는 움직인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예배당'이나 '교회당'은 건물이나 장소의 의미로, '교회'는 교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구분해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요즘 '성전'과 '교회'라는 말이 혼용되고 있습니다.
'성전(Temple)'은 지성소를 모신 '하나님의 집'을 뜻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전'이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교회(Church)'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신약 시대에는 '교회'가 신앙의 중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니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하는 데에는 신학적으로 무리가 있습니다.
'성전'이라기보다는 '예배당'이나 '교회당'이라고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 보러 교회에 갑시다"
"예배 보고 나서 남선교회 모입시다."
우리는 무심코 "예배를 본다"는 말을 자주 씁니다.
그러나 "예배를 본다"는 표현은, 자칫 예배를 구경한다는 느낌을 줍니다.
남이 드리는 예배를 구경하지 말고, 내가 직접 예배를 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린다"는 표현도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예배란 말에는 이미, '드린다'는 뜻이 포함돼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어색할지 모르겠지만, "예배한다"라는 말이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배하러 교회에 갑시다!"



성경에는 양과 목자에 관한 비유가 자주 나옵니다.
여기서 양은 우리를, 목자는 주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목사를 목자로 오해하고, 목사도 교인을 자기 양으로 착각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목자는 주님 뿐이시고, 목회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양일 뿐입니다.
이 땅에서 양들을 양육하는 심부름을 맡은 목사가, 교인들을 두고 '내 양'이니 '네 양'이니 한다면 크게 잘못된 일이지요.



"아무개 집사님이 특송을 해주시겠습니다"
흔히 예배 중에 회중이 부르는 노래는 '찬송'으로, 찬양대가 부르는 노래는 '찬양'으로, 다른 노래 순서는 '특송'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찬송에 '특별송'이 있고 '보통송'이 있을 리 없습니다.
예배의 순서들은 모두가 특별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 데나 '특(特)'이란 말을 남발하지 말고, 누가 부르든 똑같이 '찬송' 또는 '찬양'이라고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처럼 이 말을 자주 쓰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은 아주 아름다운 일입니다.
"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이처럼 남이 베푼 은혜·도움·친절 등에 대해 마음속 깊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감사'라는 말은 "시간을 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처럼,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입니다.
비슷한 말이지만, 고마운 마음을 직접 표현할 때에는 '고맙습니다"라고 하고, 고마운 일에 관해 인사를 할 때에는 '감사합니다',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구분해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일일이 간섭해주시고........"
원래 '간섭(干涉)'이란, 남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지나치게 간섭한다"고 할 때 이 말을 사용합니다.
'간섭'을 '참견'이라고도 하는데, 두 말 다 남의 영역에 끼여든다는 느낌을 줍니다.
우리 삶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밖에서 우리의 삶을 참견하거나 간섭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저희 삶을 주관해주시고..."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도전을 주셨습니다"
'도전(挑戰)'이란 말은 서열이나 지위 등이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겨루어 승부나 우위를 가리려 하는 것입니다.
또 "신기록에 도전하다"라는 말처럼, 이루기 어려운 일이나 대상에 어려움을 무릅쓰고 맞닥뜨리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도전의 삶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도전하셨다"는 의미로 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전을 주셨다'는 말보다는 '내 마음에 도전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어느덧 이 해도 저물어갑니다.
12월31일 밤이 되면 교회마다 지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예배의식을 갖습니다.
보통 '송구영신예배'라고 하던 것이 요즘에는 '자정예배', '영시예배' 등으로도 불립니다.
그러나 '영시예배'나 '자정예배'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다고 봅니다.
단순히 예배가 시작되는 시각을 예배의 명칭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의미에서 '송구영신예배'가 좋지 않을지요?




"성경말씀을 봉독해 올리겠습니다."
성경 봉독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감히 받들어 읽는 매우 중요한 예배의 순서입니다.
이 순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내려주신다는 매우 엄숙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에서는 이 순서에는 전 교인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도 합니다.
"봉독해 올린다"는 말은, 인도자가 교인들에게 말씀을 '읽어드린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받들어 읽겠습니다."가 바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서도 열심히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요즘 교회 안에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참 아름답고 귀한 일입니다.
남을 위한 기도를 흔히 '중보기도'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중보(中保)'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중보자'라고 하지요.
'중보'라는 말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말이니,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중보기도'라는 말보다는 '이웃을 위한 기도', 또는 '도고'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합시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불신자'라고 합니다.
그들 중에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이들도 많습니다.
그들을 모두 '불신자'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불신자가 아니라 아직은 비신자일 뿐이니까요.
'불신자'라는 말보다는 '비신자'라고 하면 좋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하신 하나님!"
우리는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구분하지 않고 씁니다..
'고맙다'는 말은 "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처럼, 남이 베푼 은혜·도움·친절 등에 대해 마음속 깊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감사'라는 말은 "시간을 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처럼, 고마움을 나타내는 인사 표현입니다.
'감사하신 하나님!"이란 표현은 '고마움을 표현하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니, '고마우신 하나님!'이라고 해야 합니다.



'소경', '장님', '문둥병자', '절뚝발이'-
우리는 아직도 이런 말을 씁니다.
개역성경에 이러한 표현이 가끔 나오다보니, 예배 중에도 이런 말이 여전히 사용되곤 합니다.
이런 호칭은 상대방을 비하하는 말로서, 교회 바깥에서도 이미 사용하지 않습니다.
장애인을 비하하는 이런 말들을, 교회가 먼저 듣기 좋은 말로 고쳐 써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소경'이나 '장님'은 '시각장애인'으로, '문둥병자'는 '나병환자'로, '절뚝발이'는 '지체장애인' 같은 말로 바꿔 써야 겠지요.



담임목사를 보좌하는 목사를 보통 '부목사'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목사'라는 말은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같이 계급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신분을 뜻합니다.
안수를 받는 순간 목사가 되는 것이지, '副목사'를 거쳐 '正목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목사가 되면 영원히 목사인 것입니다.
'부교역자'나 '부목회자'라는 말은 몰라도, '부목사'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부목사'라고 하지 말고, '목사'로 호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도를 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기도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표 기도를 하면서 서두에 예수님을 먼저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끝낼 때,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기도는 성부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 아뢰는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보통 '사회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司會)'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서는 '사회자(Presider)'라기보다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Worship Leader)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따라서 모든 예배의 진행자는 '인도자(引導者)'로, 성례전과 같은 예전의 경우는 '집례자'로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배를 진행하는 이는 '사회자'가 아니라 '인도자'라고 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의 주보를 보면, 예배 중에 '헌금' 순서가 들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헌금'이란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는 '봉헌'으로 고쳐야 합니다.
'봉헌'은, 단순히 돈이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모두 포함합니다.
예배자들은 돈만 바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마음과 정성도 함께 봉헌해야 합니다.
'헌금'은 '봉헌'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헌금'이라고 하지 말고 '봉헌'이라고 했으면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목회자에게 매달 제공하는 생활비를 '봉급'이나 '월급', '임금'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용어는 회사 같은 데에서 일한 대가를 지급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교회가 성직자나 사역자들에게 제공하는 돈은 단순한 생활비나 대가, 보상의 차원을 넘어야 합니다.
'월급'이라는 말은 '삯'이라는 의미가 크므로, '사례비'라는 말을 쓰는 것이 낫겠습니다.
'사례비(謝禮費)란 감사의 예로 드리는 것이니,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서로 고마워하는 마음도 함께 주고 받아야 하겠지요.



우리는 '결혼예배'와 '결혼예식', '임직식'과 '임직예배'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예배와 예식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돌, 추도, 입학, 결혼, 임직, 교회 창립 등의 행사는 '예배(worship)'가 아니라 '예식(ceremony)'이라고 해야 합니다.
사람을 위한 모임이나,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에 '예배'라는 말을 붙이면 진정한 예배의 의미가 희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예배'가 아니라 '결혼예식'입니다.



예배순서 중에 '개회'와 '폐회'라는 말이 사용되곤 합니다.
그래서 "아무개집사님이 기도해 주심으로 예배를 개회하겠습니다", "아무개장로님 기도로 폐회합니다"라고 합니다.
예배는 회의가 아니기 때문에 '개회'나 '폐회'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아무개목사님의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예배가 아니라 회의를 시작하고 마칠 때에는 '개회기도'나 '폐회기도'를 사용해도 좋겠지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때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설교자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 말은 회중에게 자극을 주고 흥분시켜 '아멘'으로 응답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자칫 설교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미신적 기복 사상을 키워 줄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81년 65회 총회에서 이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바 있습니다.
설교자들은 이런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목사의 아내인 사모(師母)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사모'란 스승의 부인을 말합니다.
옛날에는 스승을 높여 '사부(師父)'라 하였는데, 이는 스승은 아버지와도 같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모란 말도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사모'라는 말이 교회내에서도 잘못 쓰이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목사 부인을 '사모님'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대중 앞에서 자기 아내를 '사모'라고 하고, 목사 부인이 자신을 '사모'라 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교우 여러분, 제 아내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심코 '재수 없다', '운이 좋았다''라는 말을 사용하곤 합니다.
이런 말은 다른 종교에서 나온 것으로 기독교 교리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들입니다.
'손이 없는 날', '사주팔자', '운명', '운수', '사주팔자', '명당자리', '도로아미타불', '공염불', '신주를 모신다' 같은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재수 없다'라는 말은 아예 쓰지 말아야 하며, '운이 좋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장의문화에는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영결식(永訣式)'은 영원한 이별이라는 뜻이고, 영면(永眠)' '영원히 잠들었다'는 뜻으로 '부활'을 부정합니다.
'명복(冥福)'은 죽은 뒤 명계(冥界)에 가서 받는 복이니, 아예 다른 종교의 용어입니다.
'영구(靈柩)'란 말도 죽은 사람의 혼백을 넣은 관이라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을 관에 가두어 넣을 수는 없습니다.
'영전(靈前)', '영좌(靈座)', '영구차(靈柩車"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가려서 써야 하겠습니다.



'성가대'인가, '찬양대'인가?
'성가대'라는 말은 이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가'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하여 모든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를 말합니다.
'성가'는 노래 자체를 말하지만, '찬양'은 예배하는 행위를 말하니 의미가 다릅니다.
더구나 성경에는 '찬양'이라는 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성가'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1960년대 이전에는 찬양대라는 말이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성가대'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성가대'보다는 '찬양대'로 부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도 그 위(位)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삼위는 동격이신데도 우리는 어느 위에는 '님'자를 붙여 호칭하고, 또 어느 위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격이시듯, 예수님도 인격이시고, 성령님도 인격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예수님' 같이 '성령님'께도 마땅히 '님'자를 붙여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면서도,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또 주인과 종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에는 '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목회자를 포함하여 주님을 위해 일하는 모든 일꾼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간혹 '주님의 종'을 높여 부른다며 '종님'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지요.
('종'은 '종'이지, '종님'이라고 하면 그는 이미 '종'이 아닙니다.)
그냥 '주님의 종'이라고 하면 됩니다.




요즘 복권이 사람들을 크게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매우 낮은 당첨 확률에서 어떻게든 뽑혀보려고 야단들입니다.
신자들은 어떤 일의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비신자들은 그 결과를 우연의 일치로 보고 '운이 좋았다', '운이 나빴다'고 합니다.
'행운'이니 '우연'이니 하는 용어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행운상 추첨'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안식일'과 '주일'이라는 용어가 마구 섞여 쓰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초창기까지는 십계명에 따라 토요일을 안식일로 거룩히 지켰습니다.
지금도 유대교에서는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일요일에는 일을 합니다.
그후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시면서, 일요일을 '주일'로 정하고 예배를 드리는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였습니다.
주일과 안식일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옛날 안식일에 그랬던 것처럼, 주님의 날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일요일'보다는 '주일'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간혹 직장에 전화를 걸어 "아무개 집사님 좀 바꿔주세요"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역할이 달라집니다.
호칭도 거기에 맞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집사이지만, 가정에서는 아버지, 직장에서는 과장입니다.
직장에서는 그곳에서의 역할과 상황에 맞게 호칭하는 것이 좋습니다.
직장에 전화를 걸었을 때에는 '아무개 씨', 또는 '아무개 과장님'으로 부르십시오.




비신자들은 조상이 돌아가신 전 날 밤에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祭祀)'는 조상신을 섬기는 전통종교의 용어여서, 기독교인들은 보통 '추도식(追悼式)'이라고 합니다.
추도(追悼)란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돌아가신 분들을 추억하며 슬퍼한다는 것은 좀 어색합니다.
그러니 '추도'보다는 '그리워한다'는 뜻을 가진 '추모'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사'가 아니라 '추모식'입니다.



기도는 은밀하게 하기도 하고, 여럿이 공개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또 조용히 하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할 때, '주여 삼창'이란 걸 외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여!'라는 말을 크게 세 번 외치고 나서 기도를 시작하는 겁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를 두고 '세계 교회사에 없는 기도법'이라며 우려를 합니다.
'주여 삼창'은, 성경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또 건강한 신학과 역사성을 가진 세계의 어느 교회에도 없는 일입니다.
기도가 자칫 자기 체면이 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주여!" "예수여"
가끔 집회에 참석하면 '주여 삼창'이라 하여, "주여!"를 크게 세 번 외치며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실까요?
누구를 부를 때 "아무개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여!", 또는 "김철수여!"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선생님을 "선생님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주여!"보다는 "주님!", 하나님!', "예수님!"이 좋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아무개 형제!"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형제'라는 말은 '자매', '남매'와 마찬가지로 '형과 아우' 두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를 때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오빠가 여동생을 "남매!"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색합니다.
영어권에서는 상대가 남자이면 형이든 동생이든 "브라더(Brother)!"로, 여자이면 "시스터(Sister)"라고 하는데, 이것이 "형제", "자매"로 잘못 번역된 것 같습니다.
"아무개 형제"라는 말 대신, "아무개 씨"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니면 "형", "누나", "오빠"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무개 형제!, "아무개 자매!"
이런 말이 교회에서 호칭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형제'라는 말은 '자매', '남매', '부부', '고부'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형과 아우'의 관계, 또는 형과 아우 두 사람을 이릅니다.
그러니 한 사람을 향하여 "형제!"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합니다.
오빠가 여동생을 향하여 "남매!"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아무개 형"이나 "아무개 아우", "아무개 씨", "아무개 집사님"이라고 하는 게 좋습니다.



"주님,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하나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당신'이라는 말은 세 가지로 쓰입니다.
"당신이 그랬어요?"와 같이 상대방을 낮잡아 부를 때(제이인칭어).
또 그 자리에 안 계신 웃어른을 높여 말할 때(제삼인칭 대명사).
그리고 부부간에 서로를 부를 때(제이인칭어) 등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하거나 찬양을 할 때에 하나님은 제2인칭이 되십니다.
그러니 '당신'이라는 말은 무례한 표현이 됩니다.
'당신'을 '주님'으로 바꿔서 말하는 게 맞습니다.
"주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예수님을 믿는 종교단체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 종류만큼이나 이름도 여러 가지입니다.
크게 신교와 구교로 나뉘는데, 구교는 '천주교'로 불립니다.
그러나 신교에는 마땅한 이름이 없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등의 이름이 말해주듯 '기독교'라고도 하고 '예수교'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란 말은 이미 구교는 물론, 그리스 정교회를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신교'든, '기독교'든 '예수교'든 하나의 이름을 속히 정해야 하겠습니다.


간혹 교회에서 나오는 상패 문안 같은 것을 보면, 그것을 주는 삶을 '아무개 목사'라고 쓴 것을 보게 됩니다.
공중이나 윗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칭할 때에, 자기 성명 뒤에는 직함을 붙이지 않습니다.
'아무개 목사'가 아니라, '목사 아무개'라고 해야 합니다.
상을 받는 사람도 '집사 아무개'식으로 해야 합니다.
저자의 표시나 공고문의 표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윗사람이 아랫사람이나 비슷한 위치의 사람에게 자기을 칭할 때에는 '아무개 목사'라고 해도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부를 때에는 상대방 성명 뒤에 직함을 붙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시작할 때 인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묵도하심으로써 예배를 시작하시겠습니다."
그러나 예배학자들은 이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묵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묵도'는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으로 하는 기도'인데, 자칫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의 기도'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침묵을 기도라고 할 수는 없지요.
'묵도'라는 말이 일본 신사참배 순서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세 번, 개역개정판에는 두 번 이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묵도'를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이왕이면 초신자도 알기 쉽게 "마음으로 기도하심으로써"나 "조용히 기도하심으로써"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믿는다'
이런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말은 있어도, '교회를 믿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말도 애매한 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중 기도를 하다보면 곤란한 경우가 있습니다.
목사, 장로 등 사람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우리 어법에 따르면, 더 높은 분 앞에서는 아랫사람에게 '님'자를 붙여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살제로 기도를 하면서 담임목사나 장로, 성도에게 막상 '님'자를 붙이지 않으면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도, 지존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높이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표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라고 합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신자'들이 모여서 '성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신도'니 '사도'니 하는 말도 '무리'를 뜻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이란 말은 어법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구태여 '성도'를 '성도들'로, '신도'를 '신도들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나 '신도'라는 말 자체가 복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우리'를 낮춰 부를 때에는 '저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를 '저희 나라'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주권국가는 다른 나라와 대등하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하나님'을 '저희 하나님'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 '저희'라는 표현은 상대와 상황에 맞게 잘 선택돼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마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정말 존귀합니다.
그 이름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께 직접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윗사람의 이름은 '존함'이나 '성함'이라고 높여 부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성함은 그냥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존귀하신 이름'이라며 이상한 표현을 합니다.
어색하기는 합니다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존함으로 기도합니다"가 맞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아마도 이런 외침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자주 들어봤을 것입니다.
전도용으로 자주 사용되는 이 짧은 표어에 대해, 신학자들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게다가 '천당'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당'이라는 말보다는, 성경에 나오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즘 복권이 사람들을 크게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매우 낮은 당첨 확률에서 어떻게든 뽑혀보려고 야단들입니다.
신자들은 어떤 일의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비신자들은 그 결과를 우연의 일치로 보고 '운이 좋았다', '운이 나빴다'고 합니다.
'행운'이니 '우연'이니 하는 용어는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행운상 추첨'이란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안식일'과 '주일'이라는 용어가 마구 섞여 쓰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초창기까지는 십계명에 따라 토요일을 안식일로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지금도 유대교에서는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고 일요일에는 일을 합니다.
그후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시면서, 일요일을 '주일'로 정하고 예배를 드리는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였습니다.
주일과 안식일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옛날 안식일에 그랬던 것처럼, 주님의 날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일요일'보다는 '주일'이라는 표현이 좋습니다.


간혹 직장에 전화를 걸어 "아무개 집사님 좀 바꿔주세요"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은 상황에 따라 역할이 달라집니다.
호칭도 거기에 맞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집사이지만, 가정에서는 아버지, 직장에서는 과장입니다.
직장에서는 그곳에서의 역할과 상황에 맞게 호칭하는 것이 좋습니다.
직장에 전화를 걸었을 때에는 '아무개 씨', 또는 '아무개 과장님'으로 부르십시오.


비신자들은 조상이 돌아가신 전 날 밤에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祭祀)'는 조상신을 섬기는 전통종교의 용어여서, 기독교인들은 보통 '추도식(追悼式)'이라고 합니다.
추도(追悼)란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돌아가신 분들을 추억하며 슬퍼한다는 것은 좀 어색합니다.
그러니 '추도'보다는 '그리워한다'는 뜻을 가진 '추모'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사'가 아니라 '추모식'입니다.


기도는 은밀하게 하기도 하고, 여럿이 공개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또 조용히 하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할 때, '주여 삼창'이란 걸 외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여!'라는 말을 크게 세 번 외치고 나서 기도를 시작하는 겁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를 두고 '세계 교회사에 없는 기도법'이라며 우려를 합니다.
'주여 삼창'은, 성경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또 건강한 신학과 역사성을 가진 세계의 어느 교회에도 없는 일입니다.
기도가 자칫 자기 체면이 될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예수님을 믿는 종교단체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 종류만큼이나 이름도 여러 가지입니다.
크게 신교와 구교로 나뉘는데, 구교는 '천주교'로 불립니다.
그러나 신교에는 마땅한 이름이 없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교대한감리회 등의 이름이 말해주듯 '기독교'라고도 하고 '예수교'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란 말은 이미 구교는 물론, 그리스 정교회를 포함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신교'든, '기독교'든 '예수교'든 하나의 이름을 속히 정해야 하겠습니다.


간혹 교회에서 나오는 상패 문안 같은 것을 보면, 그것을 주는 삶을 '아무개 목사'라고 쓴 것을 보게 됩니다.
공중이나 윗사람 앞에서는 자신을 칭할 때에, 자기 성명 뒤에는 직함을 붙이지 않습니다.
'아무개 목사'가 아니라, '목사 아무개'라고 해야 합니다.
상을 받는 사람도 '집사 아무개'식으로 해야 합니다.
저자의 표시나 공고문의 표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윗사람이 아랫사람이나 비슷한 위치의 사람에게 자기을 칭할 때에는 '아무개 목사'라고 해도 됩니다.
물론 다른 사람을 부를 때에는 상대방 성명 뒤에 직함을 붙여야 합니다.

■"묵도하심으로써 예배를 시작하시겠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시작할 때 인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배학자들은 이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우선 '묵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묵도'는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으로 하는 기도'인데, 자칫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의 기도'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침묵을 기도라고 할 수는 없지요.
'묵도'라는 말이 일본 신사참배 순서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는 세 번, 개역개정판에는 두 번 이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에서는 '묵도'를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이왕이면 초신자도 알기 쉽게 "마음으로 기도하심으로써"나 "조용히 기도하심으로써"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믿는다'
이런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다'는 말은 있어도, '교회를 믿는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말도 애매한 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그리스도인들끼리 무심코 자주 쓰는 인사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름으로' 인사를 한다는 건 좀 어색합니다.
어찌 보면, 인사는 정확히 자기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을 하는 경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우리의 이름으로 안 되는 경우에만 쓰는 겁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드립니다"라고 하는 게 적합합니다.


우리는 예배시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자주 욉니다.
그때마다 인도자는 "주기도문 하시겠습니다", "사도신경 하시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겠습니다"라고 구체적으로 인도해주면 어떨까요?
그리고 주기도문은 마침용 기도가 아니므로, "주기도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용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교인들이 열심히 들고만 다니는 것이 성경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암송만 하는 건 사도신경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도신경이란, 기도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문입니다.
따라서 눈을 감기보다는 오히려 두 눈을 바로 뜨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사도신경으로 자기의 신앙을 또렷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은 자기의 모든 소유물과 함께 아내와 종들도 묻게 했습니다.
이러한 순장(殉葬)제도는 우리 나라에서도 신라시대까지 존속했다고 합니다.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미망인'이란, '남편이 죽었기에 마땅히 따라서 죽어야 함에도,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미망인'이란 말은 써서는 안될 용어입니다.


요즘 '열린 예배'가 유행입니다.
'열린 예배'는 비신자들을 위해 예배의 형식과 접근 방식을 부드럽고 쉽게 바꾼 집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신자들의 응답을 예배라고 볼 때, 비신자들을 위한 집회를 '예배'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비신자나 구도자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향해 열려 있다는 뜻이니, '열린 예배'보다는 '열린 집회'로 부르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성령 축제', '부활 축제'
언제부터인가 교회 안에서 '축제(祝祭)'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일본에서 유래되었으며, 제사의 의미가 포함돼 있습니다.
'전야제'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축제'는 '성령 잔치'로, '부활절 축제'는 '부활절 절기 행사'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찬양대의 찬양에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배 시간에 인도자가 무심코 하는 말입니다.
찬양은 기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면서도, 회중들에게도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찬양은 오직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며,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찬양대가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무난할 것입니다.


비신자들은 보통 장례를 마친 후에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라고 하여 세 번 제사를 지냅니다.
이 중 장사 지낸 지 3일만에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는 걸 '삼우제'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까지 그걸 따라서 '삼우제'라고 하는 건 잘못입니다.
'삼우제'는 다른 종교의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삼우제(三虞祭)' 대신 '첫 성묘(省墓)'라고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아무개 집사님이 소천(召天)하셨습니다"
교회 내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소천(召天)'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입니다.
'소명(召命)'이란 말의 구조가 이와 비슷합니다.
이 경우 "나는 소명받았다"고 하지, "나는 소명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소천했다'는 표현은 '소천을 받았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니 이 말보다는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를 살펴보면 도무지 어법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창검이 겁 없네'는 '창검에도 겁 없네'고 해야 합니다. 사람도 아닌 창검이 겁을 먹을 리가 없습니다.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는 '나의 귀를 막지 마소서'가 옳습니다.
'황무지가 꽃 피니'는 '황무지에 꽃 피니'가 맞습니다. 황무지가 어떻게 꽃을 피우겠습니까?
'보혈의 피'는 그냥 '보혈'이 맞습니다. 보배로운 피가 곧 보혈이니까요.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기도할 때 자주 사용하는 이 말은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관계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기도자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표현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라면 '저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명확히 표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기도하는대로 무작정 따라 하지 말고, 뜻을 잘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성 프란치스가 쓴 '평화의 기도'는 가사와 노래가 워낙 유명해서 교회에서 자주 불립니다.
그러나 가사 중에 "자기를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라는 표현은, 선행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천주교의 교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하는 식으로 고쳐 불러야 합니다.


"할렐루야!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목회자나 방송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인사말입니다.
이 말을 사용하는 이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할렐루야'가 사람들간의 인사말로 사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는 뜻이니,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하나님을 향해서 정중히 사용하는 게 좋습니다.


교인들끼리 사용하는 말에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가 많습니다.
'태신자'라는 말이 좋은 예입니다.
어떤 사람을 신자로 기대하며 마음에 품고 기도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로 이해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가 되었으면 하고 기도하는 대상을 '태목사'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태신자'라는 말보다는 그냥 '전도 대상자'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언어는 보편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개 장로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대표기도를 해주시겠습니다"
예배 시간에 흔히 들을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기도에 있어서 '대표'나 '대신'이란 말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대표가 될 수 없다는 게 만인제사장 사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무개 장로님이 기도 인도해주시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보통 성직자를 가리키는 말에는 '성직자' 말고도 '목회자', '교역자'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교인들을 가리키는 말에도 '그리스도인', '성도', '신자', '신도', '기독교인' 등이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각기 나름대로 고유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직자'가 아닌 일반 신도를 가리키는 말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평신도'라는 말은 아무래도 '평사원'이란 말 같이, '낮은 급의 신도'라는 느낌을 주므로 가급적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사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대화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바울, 요한, 베드로, 야고보 같은 사도들의 이름을 자주 인용합니다.
그런데 그들을 칭할 때 너무 가볍게 이름을 부르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는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을 성명만 부르지 않고, '이순신 장군' 같이 직책명을 붙여서 예를 갖춥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높임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보다는 '바울선생'이라 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요즘 해외 여행이 늘어나면서 선교지를 방문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이나 청년들이 선교 현장을 찾아갑니다.
이런 경우 언제부터인지 '선교 여행', 또는 '단기 선교'라는 용어를 이용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선교를 하러 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단순한 여행이거나 선교현장을 견학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도 '선교여행'이나 '단기선교'라고 하는 건 어색합니다.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아니면 그냥 '여행'이나 '선교현장 견학'이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선교현장을 많이 견학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으로 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알게 모르게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은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들이 '탈북자'라는 호칭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한 자유이주민'으로 부르기로 했답니다.
이미 '탈북자'라는 말이 익숙해졌지만, 당사자들이 원하는 대로 '북한자유이주민' 또는 '자유이주민'으로 부르는 게 좋겠습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사장님!' 하고 부르면 여러 사람이 뒤를 돌아본다고 합니다.
이젠 사장이란 호칭도 여간 흔해진 게 아닙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선생'이란 호칭이 그렇게 쓰이고 있습니다.
'집사'가 아닌 젊은 사람들을 쉽게 '김 선생님!', '이 선생님!' 하고 부릅니다.
마땅한 호칭이 없어서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20대 초반 청년에게조차 '선생(先生)'이란 호칭을 쓰는 건 어색합니다.
아직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는 '아무개 씨'라는 호칭이 적합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교사 선생님'이라는 말은 뜻이 중복되니, '교사'든 '선생님'이든 하나만 써야 겠지요.


어떤 자리에 결원이 생겼을 때 임시로 그 일을 대행하는 사람에게는 직책명에다 '서리'라는 말을 붙여씁니다.
'국무총리 서리'라든지 '총장 서리'라는 말이 좋은 옙니다.
그러다가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면 '서리'라는 꼬리를 떼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원래 '집사'는 안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안수를 받지 않으면 정식 '집사'가 아닙니다.
그러니 장로교회에서 쓰는 '안수집사'라는 말은 좀 이상합니다.
더 이상한 것은 '서리 집사'라는 호칭입니다.
'안수집사'는 그냥 '집사'로, '서리 집사'는 '집사 서리'라고 해야 하겠지요.


 


●'여호와'인가, '야훼'인가?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 히브리 낱말의 발음을 놓고 논란이 많습니다.
신구교가 함께 만든 공동번역성서는 '야훼'로, 신교가 만든 개역판 성경은 '여호와'로, 표준 새번역성경은 '주님'으로 각각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이처럼 다른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학자들은 '야훼'가 맞다고 하는데, 어쨌든 빨리 용어 통일이 돼야겠습니다.


●'하나님'인가, '하느님'인가?
애국가를 부를 때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하나님'으로 고쳐 부릅니다.
이 말은 초창기 성경에서는 하나(아래 아)님으로 표기됐으나, 아래 아가 없어지면서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하느님'이 맞지만, 신교는 유일신을 강조하기 위해 문법을 초우러하여 수사에 존칭접미사를 붙여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우리말로 주님을 다르게 표기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란 호칭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주일학교'인가, '교회학교'인가?
언제부터인가 '주일학교'라는 말 대신 '교회학교'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주일학교'는 영국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어린이들에게 학교교육과 성경교육을 시켜줌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주일학교'는 일반 학교교육을 전제로, '교회학교'는 교회교육을 전제로 하는 용어입니다.
교회교육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주일학교'보다는 '교회학교'가 적합하다고 봅니다.


●'교사'인가, '반사'인가?
교회학교에서 '반사'와 '교사'라는 말이 함께 쓰입니다.
'반사'는 분반공부 때 반을 맡아서 가르친다는 의미이고, '교사'는 교회학교를 전제로 한 말입니다.
'반사'보다는 '교사'가 적합합니다.
그러나 교회학교 '교사'는 일반 학교 '교사'와는 그 역할이 달라야 합니다.


●한번은 교회에서 어느 초신자가 여집사님을 '아주머니'로 호칭해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은 교회에서 사용되는 모든 용어가 낯섭니다.
'롬', '살전' 같이 성경을 가리키는 약자는 무슨 암호 같고, '기립'이나 '착석' 같은 말도 어렵습니다.
교회는 가급적 누구나 알 수 있게 쉬운 용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 본문도 찾기 쉽게 페이지 수로 안내해줘야 합니다.


●'주일은 쉽니다'라는 광고 카피가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주일'이라는 표현 때문이죠.
주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일요일'을 '주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요일'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일요일은 7일의 첫날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입니다.
'일요일'을 '주일'로 부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도 '주일'로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나 종교인에 대해 배타적인 편입니다.
그래서 갈등도 큽니다.
'중'을 '스님'으로 부르는 문제만 해도, 지나치게 민감해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스님'으로 불러줘야, 그들도 목사를 '목사님'으로 불러줄 것입니다.
그것이 상대방 종교를 인정한다는 의미는 아니잖습니까?


이의용

출처:쉴터

출처 : 말씀의 공간
글쓴이 : 착한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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