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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uel Rutherford: Man of Word and Spirit Dr ATB McGowan/서 창원 역 이끄는 말 오늘 다룰 주제는 스코틀랜드 목사요 신학자인 사무엘 루터포드이다. 그의 생애와 사역을 살펴볼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필자는 특별히 그의 신학과 그의 영성과의 관계를 점검해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의 신학과 영성이 특히 스코틀랜드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려고 한다. 필자는 다음의 순서를 가지고 본 논고를 진행하고자 한다. 첫째 17세기 전반부에 걸쳐서 스코틀랜드의 종교적 및 정치적인 상황에 관하여 언급함으로 그 역사적인 배경을 세우려고 한다. 둘째는 그러한 외부적인 상황들이 루터포드의 삶을 규정해간 과정을 제시하고자 한다. 세 번째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이 루토포드의 성공적인 사역의 열쇠였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그의 영성과 신학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루터포드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제안하려고 한다. 1. 역사적 배경: 위기에 처해있는 스코틀랜드 1560년 종교개혁시기에 스코틀랜드에 장로교주의가 세워졌고 1592년 의회의 법령에 의하여 한층 강화되기는 했어도 1600년 사무엘 루터포드가 태어날 때 상황은 상당히 변하고 있었다. 제임스 6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총회를 소집하기를 계속해서 거부하고 있었다. 그의 정책을 반대하는 자들을 적대하는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1605년 초에 6명의 목사들이 왕의 재가가 없이 총회를 모였다는 것 때문에 심문을 받았다. 그 이듬해인 1606년 의회령에 의하여 감독주의가 부활되었다. 스코틀랜드 교회에 감독직이 재차 소개된 것이었다. 1610년에 고등 법사 위원회( the High Commission Court)는 새로 바뀐 종교정책을 수용하지 않는 목사들과 성도들을 억압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될 법안을 곧 제정하였다. 그러나 교회 안의 상당 수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를 수용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왕권이 교회 위에 있다고 믿었고 또 두려움과 협박에 굴복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1610년에 글라스고에서 열린 총회에서 왕의 재가가 없이는 어떤 총회도 열릴 수 없다고 결의하였고, 감독들이 노회의 항구적인 노회장으로 봉직한다고 동의하였으며, 목사 청빙 문제나 안수문제는 감독의 책임임을 정했다. 목사들은 위임을 받을 때 감독과 잘 협력하고 순종할 것을 서약해야만 했다. 이것은 1560년과 1592년에 정해진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1618년 퍼스에서 총회가 열렸을 때 당시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 총회에서는 소위 퍼스 5개 조항이라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감독주의 교회가 재 설립되자 그 법안은 장로 교회의 성례집전을 바꾸도록 요구받았다. 5개 조항이란 다음과 같다: 1) 무릎을 꿇고 떡을 받는다. 2) 사적 성찬을 허용한다. 3) 사적인 세례를 집전 한다. 4) 어린아이 입교를 하락한다. 5) 성일들을 지킨다. 교회의 정치와 성례거행에 대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교회를 자기 수하에 두며 성공회와 같은 교회로 만들려는 제임스 6세의 대부분의 시도는 다 실패하였다. 그러나 1625년에 그의 아들 챨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상황은 돌변하였다. 챨스는 그의 종교문제 자문위원으로 윌리암 라우드를 임명하였다(그는 후에 켄터베리 대 주교가 되었다). 라우드 주교는 정치에 있어서는 감독주의, 신학에 있어서는 알미니안 주의를 신봉한 사람이었다. 이 두 방면이 다 칼빈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정면 충돌을 빗게 된 것이다. 챨스와 라우드 주교는 장로교를 짓밟으려는 준비를 착실히 하였다. 1630년 장로교도들이 개혁교회의 권리와 자유에 관한 탄원서를 의회에 제출하였을 때 받아들여지지도 않았고 논의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탄원서를 왕에게 개인적으로 접수시켰을 때 왕은 그 문서를 읽었으나 무시해버렸다. 하나의 사건이 챨스로 하여금 스코틀랜드 교회에 가하고자 하는 계획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는 의회를 설득하여 두 개의 법령을 연계하도록 하였다. 즉 하나는 왕의 특권에 관한 것과 그리고 성직자들의 제복에 관한 것이었다. 그 안건이 상정되었으나 거부되었다. 그러자 챨스는 반대한 사람들의 이름을 낱낱이 기록하고 다시 투표하도록 소집하였다. 그리하여 왕의 의도대로 가결된 것이다. 토마스 머레이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챨스가 충실한 백성들을 다스리고 인도해가기에 부적격자임을 명백하게 들어낸 사건이었다. 그는 시민정부를 시민정부로 보지 않고 정반대로 간주하여 마치 군신들의 행동원리나 복지는 그들의 군주의 변덕스러움 또는 과욕에 희생되어져야할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Thomas Murray, The Life of Samuel Rutherford, William Oliphant, Edinburgh,1828) 1635년 이러한 변화는 교회 예식서(Book of Canons)가 왕의 재가를 받자 더욱 강화되었다. 그 예식서는 라우드 주교에 의하여 개정되었고 그 이듬해에 교회예식서와 헌법(Canons and Constitutions Ecclesiastical,1636)이 재차 소개된 것이다. 이 책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예전과 신학 및 헌법을 변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1604년에 입증된 것과 같이 잉글랜드 교회와 통일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정된 것이다. 1636년의 책에서 1604년의 내용이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 나타났다. 다른 여러 변화들 가운데 교회 예식서와 헌법은 왕이 교회 위에 군림하며 그의 결정은 교회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최종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성례거행을 위한 지침들은 개혁교회의 그것과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즉흥적인 기도가 금지되었다. 감독하는 기능과 관련된 규정들은 스코틀랜드교회에서 장로의 직임에 해당되는 것인데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출교는 이 예식서를 받아드리지 않는 자들에게 가해진 위협이었다. 심지어 아직 스코틀랜드 교회에 있지도 않은 기도 예식서 사용을 거절한 자들까지도 커다란 위협을 받았다. 새로 개정된 예식서가 스코틀랜드에 소개되자 예배의식에서의 변화가 스코틀랜드 전역에 폭동을 유발시켰다. 이 폭동은 에딘버러에 있는 성 자일레스 교회에서 1637년 7월 23일에 성공회식 예배가 집전될 때 일어난 것이었다. 제니 게데스라는 여인이 의자를 집어던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역사적인 논란이 많이 있지만 실제로 폭동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그 예식서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에 의해서 거부된 것이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정치제도, 예식, 신학과 실천을 바꾸려는 이러한 모든 시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하여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그 모든 시도들은 도리어 이들에게 낯선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였다. 또한 왕의 독재와 억압정책에 싫증을 느낀 국가 지도자들도 한자리에 모이게 하였다. 벌레이 교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라우디안 앵글로 캐쏠리시즘 이라 부르는 것을 스코틀랜드에 심으려고 한 챨스의 노력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하였던 이러한 지도자들(길레스피, 루터포드 및 핸더슨)의 결속을 다지게 하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또 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귀족들은 왕의 강한 횡포에 의하여 분노하기 시작한 것이다.(J. H. S. Burleigh , A Church Hostory of Scotland, OUP, 1973, p. 216). 그리하여 1638년이 저물었다. 만약 스코틀랜드에 장로교가 살아나게 된 해가 있었다면 바로 1638년이었다. 장로교도들은 많은 것을 이루었다. 우선 2월에 그레이프라이어 교회당 뜰에서 국가 언약에 서명하는 일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거짓된 교리와 스코틀랜드 안에 있는 개혁교회에 천주교식 예식을 강요하는 위정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의 표현이었다. 이것은 또한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자유와 독립성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 선언문은 이전에 의회에서 결의한 수많은 언약문서들을 재천명한 것이었다. 1638년 11월에 글라스고에서 총회가 모였다. 이것은 아주 극적인 모임이었다. 이 총회는 개혁을 부르짖는 총회였을 뿐 아니라 스코틀랜드교회에서 장로의 위상을 재 확정한 것이었다. 그 총회엔 140명의 목사 총대와 95명의 장로 총대가 참석하였다. 이 총회는 ‘이전의 여섯 번의 총회는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열린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합법적인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퍼스 5개 조항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전의 총회에서 통과된 모든 다른 이론의 여지가 많은 법안들은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더 나아가 1638년 총회는 종교 통일정책에 서약한 목회자들의 멍에를 벗겨 주었다. 고등 법사 위원회를 철폐하였고, 교회예전을 폐지하였으며 새로운 예식서를 부결시켰다. 마지막으로 감독주의는 불법적이요 불합리한 조항들이라고 선언하였으며 장로회주의를 회복하였다. 그러자 소위 언약도들과 왕정주의자들 간의 적대감이 있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수년동안 지속되었다. 때로는 언약도들이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며 때로는 왕의 세력이 힘을 과시할 때도 있었다. 물론 타협의 시기도 있었으며 평화의 시기도 있었다. 때로 왕은 언약도들에게 우호적이기도 했고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려는 마음에서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언약도들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한편 잉글랜드에서는 시민 전쟁이 일어났다. 잉글랜드 의회는 왕을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서 스코틀랜드에 도움을 청하였다. 1643년에 거룩한 협약과 언약을 체결하면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및 아일랜드대표들이 개혁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서약을 한 것이다. 잉글랜드의회는 종교 문제에 있어서 이 세 왕국에 “약조된 통일성”(Covenanted Uniformity) 추구하도록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리하여 상원과 하원의 의원들과 총대들이 함께 거룩한 협약과 언약을 만든 것이다. 필자가 루터포드에 대하여 말하는 이 시간에 역사적인 배경에 대하여 더 언급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서 1649년 5월 30일에 챨스 1세가 참수형을 당하였고 크롬웰에 의하여 공화정치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장로교도들에게 좋은 점도 있었지만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왕정정치를 반대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잉글랜드에 공화정이 들어서는데 찬성을 하지 않았다. 챨스 2세가 스코틀랜드에서 왕위에 오른 것은 이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어가일 후작이 1651년 1월 1일에 스콘(Scone)에서 챨스 2세를 스코틀랜드 왕으로 옹립하였을 때는 사전에 1638년의 국가 언약과 1643년의 언약 문서를 지킨다는 그의 서약을 받아낸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가 1660년에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을 때 그는 전에 다짐한 모든 약속들과 스코틀랜드 장로주의에 대한 입장을 완전히 폐기하였다. 그 이후로 28년 동안 언약도들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시기가 이어졌다. 1662년 수백명의 목사들이 감독주의를 받아드리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목회지에서 추방되었다. 그 이후에 “살인시대” 가 이어졌다. 1685년 챨스 2세가 죽고 그의 동생인 제임스 2세의 즉위했으나 문제를 더 진전시키지 못하였다. 1688년 명예혁명이 일어날 때에 약 18,000명이 살인시대에 순교를 당하였다. 1688년에 윌리암과 메리가 왕좌에 올랐고 장로회주의는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2. 루터포드의 생애 그토록 혼란스러운 스코틀랜드의 역사 가운데 루터포드는 어느 시기에 해당되는 인물인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우리는 그의 생애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 여정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위대한 사건들과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전기를 살펴보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하려고 한다. 그는 제드버러 근처에 있는 니스벳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최우수학생으로 공부하였다. 필자는 그의 생애에 관하여 세 가지 측면을 다루려고 한다. 그 모든 측면들은 그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고 본다. 1) 성직자 루터포드 그는 갈로웨이주 커크쿠드브라이트 근처에 있는 안오쓰 교회에서 1627년에 위임받고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는 헌신적인 목사였으며 성도들과 밀접한 사랑의 관계를 맺어갔다. 앞으로 보겠지만 교회 성도들과 영원히 함께 할 목사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루터포드는 그 시대의 지도급인물로서 강한 확신과 예리한 지성으로 무장된 사람이었다. 비록 작은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지만 그의 마음과 정신은 위정자들이 앗아간 교회의 자유를 위한 큰 투쟁의 선봉에 선 사람이었다. 논쟁적인 문제들에 대한 그의 견해들은 잘 알려졌다. 그는 감독주의를 격렬히 반대하는 자였다. 장로교주의를 훼손시키려는 자들에 대하여 예리하게 파고들며 비평을 가한 사람이었다. 이것 때문에 그는 1630년 고등법사 위원회 앞에 소환 당하였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모임이 해체되게 되어 그는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1636년 그는 화란에서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논문을 썼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라우드 주교는 대부분의 주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알미니안주의 자였다. 그리하여 그의 이 책은 그들의 심기에 적대감이 불타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들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라우드 주교의 열성 지지자인 토마스 씨드써프(Thomas Sydserff)가 갤로웨이주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루터포드를 역겨워하였으며 무슨 일이든지 다 그를 대적하는 자리에 있었다. 루터포드는 지체없이 위그톤에서 열린 지방 고등법사위원회에 소환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목사직을 박탈하였다(Murray, op. cit. p. 87). 루터포드는 이 재판사건을 확정짓기 위하여 모인 에딘버러에 있는 고등법사 위원회 앞에 소환되었다. 이 심문은 3일 동안 진행되었는데 퍼스 5개 조항을 반대하는 반역죄인으로 비난을 받았다. 그 위원들 중 일부는 루터포드 목사를 지지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풀려나는 듯하였으나 씨드써프 주교는 만약 이 법사 위원회가 그에게 확정판결을 내리지 않으면 본인이 직접 왕에게 상소하겠다고 말하였다. 그의 위협은 효과를 보았고 루터포드는 유죄로 판결을 받았다. 토마스 머레이는 그 판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는 목회지로부터 추방당하였으며, 반역죄라는 것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어느 지역에서도 목회하는 일을 금지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1636년 8월 20일 전에 아버딘에 있는 감옥에서 왕이 기뻐하는 동안 수감되게 된다고 선언하였다’(ibid, p.90). 왜 아버딘이었는가? 그 이유는 그 당시에 아버딘은 감독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강하게 옹호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아버딘에 있는 교회 목사들과 대학교 교수들 모두가 왕과 대주교를 지지하는 자들이었다. 루터포드는 그곳 감옥에서 18개월 동안 있었다. 그러나 1638년의 역사적인 순간에 살짝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는 국가 언약을 서명하는 곳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날짜가 그 사실을 입증한다. 그리고 그의 서명이 그 문서에 있지 않는 것도 그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를 단호하게 할 수 없는 이유는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서명하는 일에 대한 한 예술가의 표현이 그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하였기 때문이다. 어째든 루터포드는 후에 글라스고에서 모인 총회석상에는 참석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총회 석상에서 그는 주요한 역할을 감당한 것은 아니었다. 2) 신학자 루터포드 유배 생활로부터 귀환한 그가 원한 것은 안오쓰에 돌아가 그의 사랑하는 성도들을 섬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재질이 알려지자 1639년 초 총회는 그를 성 안드류에 있는 후에 성 마리아 대학으로 개명된 뉴 칼리지의 신학교수로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성도들과 노회가 반대한 것처럼 그러한 총회의 결정에 반발하였으나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1639년 7월에 모인 총회는 신학위원회의 결정을 확정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0월에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그 학교에는 그 대학의 학장인 한분의 신학교수만 있었다. 세 번째 교수가 임명되기까지 여러 해가 지나가야 했다. 루터포드는 1643년까지 교수직을 감당하였다. 그의 유일한 주장은 정기적으로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딘에서 유배되어 있을 때 그 일을 하지 못하여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있었던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기 때문이다. 그는 설교 사역을 위한 목적때문에 성 앤드류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사 중 한 분인 로버트 블레어 목사를 보조하였다. 그러나 1643년에 그는 총회로부터 다시 한번 부름을 받게 되었다. 이번에는 1643년 7월 1일에 개회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 스코틀랜드 대표단 일원으로 가라는 부름이었다. 루터포드는 11월 20일에 참석하게 된 4명의 목사 대표단 중 한 명이었다. 이 종교회의에서 그가 기여한 것은 비록 의결권이 없는 참관인에 불과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대한 것이었다. 그의 신학적인 예리한 통찰력과 세세한 부분에까지 생각하는 강렬한 집중력은 교회를위하여 커다란 공헌을 남기게 하였다. 그가 남긴 가장 큰 공헌 중 한가지는 그 종교회의에서 만든 신앙고백서에 언약신학이 그 근저가 되게 한 것이었다. 이 언약신학은 종교개혁시대 이후부터 특별히 유럽대륙에서 발전된 신학사상이었다. 언약신학은 ‘언약’ 또는 ‘언약들’ 이라는 용어에 베어있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해주는 칼빈주의의 독특한 표현이다. 이 신학은 기본적으로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에 나타나 있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를 비교하며 설명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교리가 함축된 사상의 완전한 개요이다(a complete schema).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그 신학사상의 주된 구분이다. 이 언약신학은 전 세계를 통하여 장로교의 신학사상이 되었고 장로교 신학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대부분의 장로교단의 원칙적인 신학사상으로 받아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신앙고백서를 분명히 고백하고 따르는 문제는 종종 결핍되어 있다. 루터포드는 주요한 일들이 마무리되자 그 종교회의로부터 1647년에 돌아왔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는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 및 공예배 지침서 그리고 교회정치조례인데 이것들은 스코틀랜드 장로교가 그 해에 신조로 받아드렸다. 루터포드는 성공적인 임무를 완수하고 성 앤드류 대학교의 교수직 사역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곧 성 마리아 대학의 학장이 되었고 1651년에는 성 안드류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다. 그의 신학적인 실력은 국내외적으로 인정받았다. 그 징조로 그가 성 앤드류 대학교에 있는 동안 그를 모셔가기 위한 시도들이 여러번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번은 웨스트 칼더 교구 교회에서 청빙을 받았었으며, 또 한번은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신학교수직을 제안하였고 그리고 화란의 하데르윅과 우트렉트 대학교에서도 초청을 받았다. 이 모든 청빙은 여러 가지 이유로 다 기각되었다. 그는 1661년 3월 20일 세상을 떠나기까지 성 앤드류 대학교에 남아 있었다. 3) 저술가로서의 루터포드 목사 루터포드는 그의 작품이 문체에 있어서 너무나 세세한 면이 있을지라도 매우 사려 깊은 독특한 저술가이다. 길게 늘여놓는 특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인내를 요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상이나 문체에 있어서 압축은 루터포드에게는 논쟁의 요소이다. 그의 동시대의 존경하는 동료들 중에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ibid, p.170)’. 그의 저술에서 우리는 그 당시에 왜 그가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는지를 실감케 하는 논제와 문체의 방대한 면을 엿볼 수 있다. 한번 비교해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한편 그는 교회정치와 장로회주의를 변호하는 논문을 세편이나 썼다.- A peaceable and temperate Plea for Paul's presbytery in Scotland(London, 1642), The Due Right of presbyterie, or a Peaceable Plea for the Government of the Church of Scotland( London, 1644), The Divine Right of Church Government and Excommunication...(London, 1646).- 또 다른 한편으로 그는 가장 감성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경건 서적들을 영어로 출판하였으며, 여기에는 1664년에 처음 출판된 이후 지금도 계속적으로 읽혀질 수 있는 목회서신을 담고 있다-A. Bonar, Letters of Samuel Rutherford(Banner of Truth). 그 내용들은 대부분이 그가 아버딘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쓴 것이다. 그가 유명한 사람이 되어진 것은 바로 이 목회서신 때문이었다. 필자 역시 혹 여러분들이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원칙적으로 이 목회서신으로 인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여러편의 신학적인 논문들도 출판하였다. 그 중의 하나는 알미니안주의를 비판한 것이며 또 하나는 안티노미안니즘 및 섭리론에 관한 것이었다-Exercitationes Apologeticae pro Divina Gratia....(Amsterdam, 1636), A Survey of the Spiritual Antichrist,etc.(London 1648), Disputatio Scholastica de Divina Providencia(Edinburgh, 1649). 그는 또 실천신학 책도 두 권이나 썼다. 이 책들은 성경의 본문을 체계적으로 설교한 것들이었다-The Trial and Triumph of Faith and Christ's dying, and Drawing Sinners to Himself(London, 1647). 그가 쓴 책 중에서 목회서신을 제외하고 가장 유명한 책은 헌법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군주제도야말로 가장 최상의 제도이나 거기엔 주된 자격이 있다. 즉 왕이 일반적으로 곧 법이지만, 그러나 일정한 환경가운데서 의회와 국민은 평상시에 왕에게 부여했던 권한을 취소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었다-Lex Rex, The Law and Prince(London, 1647). 이 책은 격렬한 소용돌이를 불러일으켰다. 1660년 9월 15일에 이 책에 대한 반박문이 나붙었다. 이 책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왕의 법무관들에게 반환하도록 벽보를 붙였다. 그 책들은 수거되어 에딘버러와 그가 시무하고 있는 성 앤드류 대학 정문에서 불태워졌다. 그리고 그에게도 소환장이 발부되었다. ‘그는 대학교수직을 빼앗겼으며 교회에서의 직책조차도 잃게 되었다. 그의 봉급도 압류 당하였다. 그는 거주지는 자택에 한하였다. 그는 반역죄로 의회 앞에 나오도록 소환되었다’(Murray, op. cit, p. 314). 비록 거의 죽음에 임박한 그였지만 그 역시 다른 언약도들 못지 않게 동일한 고난을 당한 자였다. 그가 반역죄로 의회 앞에 나오도록 소환되었을 때 그는 매우 유명한 말을 남기었다: “나는 보다 높은 재판장과 법정에 서도록 먼저 부름 받았습니다. 나는 첫 번째 소환에 응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당신들의 때가 오고 있습니다. 나는 몇몇 왕들만이 갈 수 있고 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가는 곳에 있게 될 것입니다”. 3. 루터포드의 신학과 영성(Theology and Spirituality) 우리는 이 사람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는가? 한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는 내적으로 양분된 사람이다. 그의 인격성에 있어서 경건하고 온화한 목사요 그리고 격렬한 논쟁적인 저술가요 성직자이다’(A. Taylor Innes, Samuel Rutherford in The Evangelical Succession, 2nd series, Edinburgh, 1883). 그게 사실인가? 만일 우리가 그에 관한 주변의 모든 일상적인 자료들을 다 버린다면 과연 그는 누구인가? 그가 안오쓰 교회의 목사였는가? 성도들을 그토록 사랑하였고 헌신적이었던 그는 탁월한 은사를 지닌 자요 야심이 없는 목사로서 오로지 한적한 농촌교회에서 주님만을 섬기기 위해 애쓴 목사였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 시대의 지도자적인 성직자로서 모든 크고 작은 일에 의도적으로 간여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까지 스스로 참가한 교회정치가였는가? 아니면 열정적이며 사려 깊은 신학자였는가? 그의 논문들은 깊은 신학적인 문제들의 핵심까지도 예리하게 파헤치는 뛰어난 지성과 능력을 지닌 학자의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지 않는가? 아니면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되어 그의 생애의 상당 부분 동안 많은 사람들과 서신 교환을 통하여 보여 준 그의 지혜와 분별력은 우리들에게 영성의 부족을 인하여 부끄럽게 하는 그러한 능력의 사람이었는가? 물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루터포드에게 있어서 경건과 신학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었고, 영성과 교회정치 사이에서도 다른 차이가 없었다. 오직 현대 사회만이 루터포드 목사가 일치시킨 것을 나누어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는 목사요 신학자였으며, 영적인 교회지도자였다. 그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 붙들 수 있었는가? 왜냐하면 그는 통합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그의 삶을 여러 갈래로 나누는 실수를 하지 않았다. 필자는 루터포드와는 달리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지성과 학문적인 업적 및 정치와 예술에 대한 견해는 자신들의 경건 생할과 신학적 입장 및 믿음 생활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로 믿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다고 본다. 첫 번째 교훈은 경건 생활과 신학은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한쪽은 다른 한쪽을 함축하고 있고 포함하는 것이다. 루터포드는 이 둘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여야만 한다. 우리가 한가지만 선택한다면 우리는 스스로 빈약한 모습을 피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교회에 해를 끼치는 것이 될 것이다. 경건하기는 하나 신학적으로는 무지한 교회는 모든 유형의 이단과 사이비 집단의 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신학을 가지고는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교회는 냉냉하고 딱딱하며 영적으로 죽은 교회일 분이다. 두 번째 교훈은 루터포드 목사와 같이 지적 이해력과 영성 및 ‘경건한 공동체’(Godly Commonwealth)를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으로 묶은 통합된 삶을 개발시켜 나가야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제 남은 시간동안 이 부분을 좀더 다루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필자가 루터포드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배우기를 원하는 원리적인 교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God-centred worldview)*** 하나님 중심의 통합된 세계관을 개발하는 것은 현대의 두 가지 경향을 거스리는 것이다. 첫째, 자기 중심의 기독교관인데 이것은 모든 것을 자기 만족과 기쁨 및 성취에 따라서 수용여부를 판단하는 세계관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여러분은 알 것이다. 만일 내가 교회에서 예배를 즐길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다른 교회로 옮겨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배의 가치를 내가 감흥을 누릴 수 있는 것인지에 따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우리의 신앙생활과 삶의 다른 측면들을 분리시키는 경향이다.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더 설명하려고 한다. 한마디로 이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모든 것이 내 주변을 공전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 대신에, 내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이 그 중심에 계시다는 생각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과 관계된 우리들의 모습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닌 우리들의 모습을 볼 때만이 진정한 우리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루터포드는 자신의 견해나 입장을 전제로 결정을 내린 적이 없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에 복종시켰다. 당시의 모든 잇슈들을 자신의 느낌이나 즐거움에 따라서 판단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기초로 하여 판단하였다. 왜 오늘날 서구사회에 더 이상 루터포드 같은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전체 문화적인 표현은 쾌락주의와 자기 중심주의로 변질되어버렸다. 이렇게 통합된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은 우리의 사상을 위하여 급진적인 함축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기독교인들 중에는 비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동일한 세계관을 지닌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동일한 신문을 읽고 동일한 TV프로그램을 시청하며 동일한 전문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삶에 대한 그들의 태도나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전체 사회 문화를 이끌고 있는 자기중심의 물질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결과 기독교는 그들이 가진 여러 상자 중에 하나의 상자로 전락되어 버렸다. 다른 상자들이란 ‘직업’, ‘여가 선용’, ‘가정’ 또는 ‘다른 취미 생활’등으로 규정할 수 있다. 핵심 요지는 이러한 상자들의 경쟁적인 목적과 대상들을 조화시켜보려는 어떤 시도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에 기초하여 한가지 목적으로 모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문제를 결정하는 것에 영향을 주고 있다. 정치 문제이든 경제 문제이든 건강 문제이든 무엇이든지 다 그러한 사고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필자의 집에 매주일 밤이면 대략 20명의 젊은이들이 모인다. 우리는 최근에 낙태문제나 안락사 문제 또는 성관계 등 여러 가지 문제를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런데 이 젊은 크리스챤들 역시 동일한 시각을 가지고 그 모든 문제를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발견하였다. 그들은 비기독교인들 친구들과 아주 똑같은 자료들로부터 논제들을 토론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에 대하여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필자는 대부분의 어른들도 동일한 상태인 것이 두려울 지경이다. 여기에는 깊은 신학적이고도 철학적인 원리가 있다. 어떤 문제이든지 하나님이 빠져있고 하나님이 그 중심에 있지 않는 것에서는 참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실지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중심의 세계관을 지닌 자이다. 일찍이 과학자들이 천문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이 이 행성의 중심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비로소 태양계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행성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과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되는 것들이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체계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관련이 없이 이해가 불가능하며 참 진리를 구성할 수 없다. 커넬리우스 반틸 교수는 이것을 구슬을 연결하는 줄로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말하기를 방바닥에 구슬이 지천에 깔려있다고 하자. 그리고 실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당신이 그 줄의 끝을 발견할 수 없다고 상상해 보라고 하였다. 이것 때문에 당신은 그 구슬들을 하나로 묶을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그와 상관없이 이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는 주변에 많은 구슬들을 모아 두기만 하였지 실지로 그 구슬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보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교수가 만일 무신론자라면 어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이 가지게 된 지식보다도 그는 덜 가진 자이다. 그 교수는 많은 사실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떠나 살기 때문에 그 사실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그 사실들을 어떻게 엮어갈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사실들을 하나로 엮으려는 그의 시도는 다 실패하고 말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사고를 하는 성도는 참된 이해와 바른 지식을 가진 자들이다. 필자는 아버딘 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 대학교의 모토는 잠언 1:7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필자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서야 그 모토가 단지 모토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식을 푸는 열쇠임을 깨닫게 되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이 원칙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의 상태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사람들을 청하는 것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제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도 모든 지식을 연결하는 수단을 제공하고 있다. 결론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리고 그의 사고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스코틀랜드의 영적인 것, 신학적인 것, 정치적인 문제에 엄청난 기여를 한 것이다. 만일 우리들도 이 나라에 기여하고 싶은 목사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들도 같은 세계관을 가지고 사는 것이 필요하다. |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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