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의

[스크랩] 개혁주의 은사론

향기나무 김성휴 2008. 1. 19. 06:31


    개혁주의 은사론







           김 문영


                 대한예수교장로회 

       새예닮교회









  제Ⅰ장 서론


     1. 문제 제기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로마의 공화정이 끝나고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30 - A.D. 14) 재임 시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의 시작과 함께 이 땅에 선포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누리려면 선결 조건으로 회개가 필요했던 것이다.1)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시작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와 진행에 있어서 간과(看過)할 수 없는 것은 성령( Holy Spirit )의 사역(使役)일 것이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진행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사역(使役)인 것이다.

 예수 승천 후에 그의 제자들에 의해 교회가 성립되었으며, 기독교는 잘 발달된 로마의 도로망을 통하여 로마 제국 내에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기독교의 확산으로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천국)는 성령님이 함께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인 것이다.(롬 14 : 17)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기독교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와 함께 확장되어 가고 있다. 교회의 확장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며 여기에는 성령의 역사(役事)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는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확장과 존립(存立)을 촉진시켰다.

 성령의 역사로 기독교 교회는 전 세계로 확산되었고 근세에 극동의 한국에도 전래되어 지금까지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사(宣敎史)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한국 교회의 성장에는 수많은 성도의 순교와 기도가 있었으며 성령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은사자들이 있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성장이 멈춘 가운데 그동안 질(質)보다는 양적(量的)으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교회의 성장에는 그동안 수많은 은사자들의 사역이 있었으며 교회사(敎會史)에서 이를 간과(看過)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지적할 수 있는 것은 한국 교회의 양적(量的) 성장에 있어서, 많은 사역자(使役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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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 경진,「하나님 나라와 윤리」, (서울: 그리심, 2003), 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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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가운데서 영적 은사들이 잘못 남용되거나 오용 되었다는 사실이다. 교회에서의 은사의 오남용으로 은사자들은 자칫 영적으로 타락할 수 있으며 교회의 타락과 침체를 가져올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양적(量的)으로 성장한 가운데 요즘은 성장이 둔화된 상태라고 한다. 작금의 한국 교회의 상태는 성장이 둔화된 가운데 군소교단의 난립과 무인가 신학교의 난립으로 신학 교육의 질적 저하와 함께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목회자 후보자로 매년 수 천 명씩 배출되었다는 사실이다.2) 그러나 무인가 신학교라고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 중에는 알차게 교육시켜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는 신학교들도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자질이 부족한 사역자들이나 평신도들이 신학적으로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가운데 영적 은사들이 남용  되었으며 오용 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신학교의 난립과 은사 사역자의 범람(氾濫)으로 그 어느 때 보다도 성령의 역사인 영적 은사들이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 교회에서 먼저 신학적으로 제대로 정립되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 된다





      2 연구의 목적

                                                                          

 팔레스타인(Phalestine)에서 시작된 기독교 교회는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役事) 가운데 은사자(恩賜者)들의 사역에 의하여 확장 되었으며 존립되어 왔다. 기독교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歷史)이며 은사자의 역사(歷史)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사(宣敎史)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급격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양적(量的)으로만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가운데 많은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교계(敎界)와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켜서 교계는 물론이거니와 사회에서 지탄(指彈)을 받기도 하였다. 이는 교회 사역자들의 윤리 부재에 기인한다고 생각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은 은사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役事)로 모든 신자들에게 은사를 주셨다. 성령의 은사들은 은사자 개인의 자기 즐김이나 개인적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은사는 교회의 덕(윤리)을 세우기 위해, 그리고 서로에게 유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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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의용,「잃어버린 십자가를 찾아서」,(서울: 일지각, 1992), p.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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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서 은사가 개인적인 자기 덕목에 머무는 것이나 자기 자랑으로 빠지는 유혹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은사에는 선물과 과업, 은혜와 봉사, 자유와 질서가 함께 가는 것이다.3) 오늘의 한국 교회는 많은 사역자들 가운데서 은사자들이 범람한 가운데 일부 은사자들은 이 은사를 남용하거나 오용함으로써 교계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며 성도들을 오도(誤導)하기도 한다. 은사자들의 오도(誤導)로 잘못된 성도들은 이단 사교에 빠지거나 신앙에 회의(懷疑)를 느끼고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사역하는 은사자들이 교회에서 은사를 나타내는데 있어서 교회에 덕(윤리)을 세우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을 보여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한국 교회의 사역하는 은사자들은 기독교 윤리에 바탕을 둔 모든 은사의 신학적 정립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에 본서가 기독교 윤리에 기초한 모든 은사의 신학적 정립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3. 연구의 범위 


 기독교 교회 역사(歷史)와 함께 시작된 성령의 역사(役事)는 수많은 은사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전 세계적으로 확장시켜왔다. 기독교 교회의 역사는 구약사(舊約史)와 신약사(新約史)의 연장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성령의 역사(役事)는 태초부터 진행되어 왔으며 따라서 성령의 역사로 인한 성령의 은사도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과 모세를 비롯한 수많은 예언자들(Prophets)과 왕들 가운데서 성령의 은사는 나타났으며, 신약시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와 그분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서도 성령의 은사는 나타났다.

 교회의 역사와 함께 성령의 은사는 교회를 확장하고 존립시켰다. 이에 본서는 창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21 세기 현대까지 이르는 하나님 신앙의 발자취를 성령의 영적 은사의 나타냄으로 보는 가운데, 구약, 신약, 그리고 오늘에 이르는 영적 은사를 살펴보려한다.. 앞서 밝힌 것처럼 오늘의 한국 교계에는 많은 은사 사역자들이 은사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가운데 은사를 남용하거나 오용하고 있다. 여기에는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은사에 관하여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책임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동안 국내 신학계에는 보수 및 근본주의 영향으로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김 지철,「성령과 교회」中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덕,(서울: 장신대출판부,1998), p.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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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에 관한 연구가 소홀히 취급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영적 은사에는 신비적인 요소가 있기에 지적이며 학구적인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은사에 관한 연구는 자연히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앞으로 한국 교계에 영적 은사에 관한 외국 신학자들의 번역서 및 국내 신학자들의 연구 논문과 저술이 많이 나와야 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부족하나마 몇몇 연구 논문과 여러 책들을 참고하여 영적 은사의 정의와 은사의 발자취, 은사의 종류 그리고 은사에 대한 분석을 서술하려 한다.

    



  


                     제 Ⅱ 장 영적 은사


      1 . 은사의 뜻과 본질


 성령의 은사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속에 포함된 사람에게”에게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인 기능이다.4)  “은사”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에서 χἀρισμα(카리스마)를 번역한 단어인데,  χἀρισμα 는 χαρἰζομαι(카리조마이; 선사하다)에서 파생하였다.5)  그리고 복수형인 χαρισματα(카리스마타)의 의미는 은혜의 많은 결과들(many results of Grace)이다.6) 그런데 사람들은 은사라고 하면 무슨 특별한 것을 생각한다. 방언이나 예언을 하거나 또는 병을 고치거나 이적을 행하는 등, 눈으로 보이는 특별한 것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런 가시적(可視的)인 것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좋은 것들 중에는 은사가 아닌 것이 없다. 건강하게 지내는 것, 말을 잘하는 것, 계산을 잘하는 것, 노래를 잘하는 것 등, 이 모든 것이 위로부터 오는 은사들이다.7) 기독교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중생하는 순간 영적인 유기체 안에서의 기능이 부여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은사이다. 한사람도 예외 없이 한 가지 이상의 성령의 은사를 받았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일방적으로 그의 존엄하신 결정에 의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영적인 기능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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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 호식,「성령론」,(서울: 한글, 1998), p. 283.

5) 김 균진,「기독교조직신학Ⅲ」,(서울: 연세대출판부, 1999), p. 89.

6) Michael Griffiths,「은사란 무엇인가」,이 근수 역,(서울:엠마오,1991), pp. 16-17.

7) 변 종길,「우리 안에 계신 성령」,(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3), p. 63.

8) 김 호식, op. cit., p.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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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성령의 은사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지는 가운데 기독교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한다. 성령의 은사는 그것이 아무리 순수하고 굉장한 것이라도 영적 성숙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 교인들처럼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도 은사에 관한한 탁월할 수 있다(참조 고전 1 : 7 ; 3 : 1-3).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된다.

 성령의 은사는 최고의 은사이며 동시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지반으로 해서 나타나야 한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무익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신령한 은사를 대신하는 대체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신령한 은사 위에 덧붙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나타내는 신자들은 제일 좋은 길인 사랑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성령의 은사는 다양하다. 성경에 의하면(고전 12 : 5 -6) 은사도 여러 가지이고, 직임(봉사)도 여러 가지이고, 역사(능력행사)도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동일한 성령, 동일한 주, 동일한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이와 같이 은사는 다양하지만 동일한 하나님 안에 그 뿌리를 갖고서 서로 연결되며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9)

 그런데 간혹 특정 은사만 강조하여 다른 영적 은사들을 소홀히 함으로 균형 잡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결과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성령의 은사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하는 동기가 되기도 하며, 성령의 특정 은사는 사도시대로 끝이 났다는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와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를 믿지 않는 자유주의(Liberalism)의 영향으로 오늘도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활동(은사)을 믿지 않는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계속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그들은 성령으로 찬양하고, 성령으로 기도하고, 성령의 은사와 사역을 기대하였다.10) 

  



        2 . 은사의 분류와 특성


 모든 성도들은 한 가지 이상 몇 개의 은사를 받는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봉사할 때 ‘선지자들과 교사들’의 명단에 들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행13 :1). 그리고 그 후에는 ‘사도들’이라고 불렀다(행14 :14).11)  그 이전에 바나바는 권위자(Son of Encouragement)로서 구제하는 일을 하였고 그의 별명이 나타내듯이 그는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었다(행4 :36-37). 바울은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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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 희성,「말씀과 현존」, (서울: 한들출판사, 2000), pp. 294-296

10) 이 재범,「구약이 말하고 있는 성령」,(서울: 임마누엘출판사,1988), pp.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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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는 은사와 함께 능력 행함, 방언의 은사를 받았던 것으로 증거 되는 가운데 바울은 적어도 5 가지 정도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11)

 성경에서 체계적인 은사목록을 작성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바울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믿음의 분량대로 은혜(χἀρις=카리스)를 주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는 모든 참된 성도들에게 예외없이 주어진 사역을 위한 성령의 은사요, 둘째는 새롭고 뛰어난 능력이 그 은사가 시행될 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바울서신에 의하면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고,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다고 말함으로써 교회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서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12)  그런데 성경의 기록에서 좀 혼돈되는 것은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한 가지의 은사를 받은 것같이 보이지만 그 기능이 여러 가지로 충만히 나타날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는 여러 가지 은사들이 서로 병합하여 나타나고 중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이 받은 은사 중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중복되어 언급되었고 모두 세분해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저들은 5 가지 이상의 은사를 소유한 사역자들일 것이다. 에베소서 4 :11에서도 목사와 교사는 한 그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함께 있는 디모데와 실루아노를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하였고 실라를 ‘예언자’라고 언급하였으며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성경상 두 곳에서 ‘반포자, 사도, 교사’라고 하였다.13)

 성경에서 예언자, 교사, 권위자, 목사 또는 전도자 등은 자체의 의미로 희미하게 구별되지만 가르치는 것과 권위하는 일은 예언자적 기능의 일부이다. 효과적으로 교회를 세운 사도는 또한 전도자로서 전도한 것이며 저들을 가르치고 권위함에 있어서는 사도적인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을 감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14)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은사들은 스펙트럼(분광기)과 같이 나타난다. 각각의 색깔은 붉은색, 파란색, 남색 등으로 분명하게 구별된다. 이와 같이 모든 은사도 분명한 목적하에 주어지는데 이웃 성도들과 중복되는 은사도 있다. 한 개인이 그 많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은사를 개인적인 스펙트럼에 나열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이 몇 개의 연관된 은사는 소유할 수 있다.15) 

 바울이 교회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서 세운 성령의 은사목록은 로마서 12장, 고린도전서 12장-14장, 에베소서 4장 등에 나타나 있으며 그밖에 신.구약 성경에 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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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M . Griffiths , op. cit., p. 28.

12) 박 찬섭,「교회 발전과 성령 은사」,(서울: 엘맨출판사, 1990), p. 71.

13) Loc. cit., pp. 28-29.

14) Ibid., p. 29.

15) Ibid.,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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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를 합하면 30여 가지가 된다. 성령의 은사를 분류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그 방법마다 다 일리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에 나타난 9가지 은사목록이다.16)  또한 28절에 나오는 은사 목록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람의 목록으로부터 시작한다(사도, 예언자, 교사). 그리고 순위를 가리키기 위해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라는 순서를 넣고 있다. 둘째로, 네 번째와 다섯 번째(기적과 병 치유 은사)에서는 다시 은사들(χαρισμάτα)로 되돌아오고 있다. 여기서는 단순히 “그 다음은”(ἔπειτα)으로 연결 된다(12 :9-10에서는 ‘병 고치는 은사’와 ‘기적’이 순서가 뒤바뀌어져 있다). 여섯 번째부터는 은사들을 그냥 나열한다. 방언의 은사가 마지막에 오는 것은 그 자체가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이었음을 부각시키려는 바울의 의도인 것으로 보인다.17)

 성령의 은사의 특성에 있어서 첫째로, 성령의 은사는 삼위일체 신론에 기초한다는 사실이다. 보통 은사는 성령의 단독 사역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 모두가 관여하여 신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다. 이를 극명하게 잘 보여주는 실례는 고전 12 :4-6에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으며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위의 구절에서 은사, 직임, 역사 등의 표현들은 모두 은사의 다른 측면들을 묘사하는 술어들에 불과하다. 이는 모두 은사라는 술어 속에 포괄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들은 하나님, 주, 성령으로 불려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적 선물들이라는 사실이다. 때문에 은사를 거론할 때 성자 예수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을 제외시켜 놓고 성령의 사역에만 배타적인 강조점을 두다보니 그들의 은사 경험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셨는지 놓쳐버리는 우를 범할 때가 많다. 바울의 주장대로 모든 은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기초해서 성령을 통해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이다.18)

 둘째로, 성령의 은사는 구원 받은 각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이 뜻하는 대로 주시는 주권적 선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 각 사람이 남다른 특별한 믿음을 준비해야 그 보상으로 은사를 주시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런 식의 발상이 성립된다면 은사 경험은 자신의 성취가 될 가능성이 많고 따라서 그것은 자신의 자랑의 근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은사는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의 선물로서 은사를 처음 경험하는 일은 순전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다.19)

 셋째로, 성령의 은사는 ‘개별화되어 있는’(individualized) 가운데 성령께서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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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박 찬섭, op. cit., p. 71.

17) 김 지철, op. cit., p. 74.

18) 이 한수,「신약은 성령을 어떻게 말하는가」,(서울: 이레서원,2001), pp. 183-184.

19) ibid. pp. 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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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적인 의지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떤 한 특정한 은사를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에게 의무처럼 짊어지울 수 없고, 또 어떤 특정한 은사를 받으라고 교회 구성원 전체에게 명령할 수 없다.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며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는 개별화된 선물이기 때문이다.20)

 넷째로,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선물로서(고전12 :7) 은사자 개인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신앙생활까지도 견고케 하고, 강하게 해주는 기능이 있다. 신자들이 신령한 은사를 소유함으로써 믿음 생활도 견실해지고 다른 사람의 믿음 생활도 강하게 붙들어 주는, 이른바 교회의 ‘덕을 세우는’(upbuild) 기능을 가지고 있다.21)

 다섯째로, 성령의 은사는 종말론적인 선물로서, 사도 바울은 고전 1:7-8에서 은사와 재림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짓고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한 신자들을 자신의 자녀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은사들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까지 교회 전체를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확증될 수 있다.22)






       3. 은사와 윤리


 성령의 대표적인 사역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는 카리스마적 사역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윤리적인 사역이다. 사도 바울은 영적인 은사들을 성령의 열매에 종속시킴으로써 그의 윤리적 전망에 통합시킨다. 바울은 고전 12-14장에서 영적인 은사들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윤리적인 문제임을 보여 준다. 고린도교인들이 비록 영적인 충만을 소유하고 여러 비상한 은사들을 받았다고 주장하더라도 그들은 분쟁, 싸움, 사랑의 결핍, 비평, 불화, 그리고 부도덕과 같은 다른 영들의 지배를 받아 ‘도덕적인 위기’(moral crisis)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13장을 영적 은사들을 논의하는 맥락에 곧바로 위치시킨 것은 중요하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3 :4-7에 묘사된 대로 ‘사랑’을 은사들이 행사되어야 할 표준으로 제시한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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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Ibid., pp. 188-189.

21) Ibid., pp189-190.

22) Ibid., p. 191.

23) Ibid., pp. 19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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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울은 그의 여러 서신들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의 삶’을 자주 ‘믿음의 삶’과 거의 같은 맥락에서 묘사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동일한 사실이 영적인 은사들에도 적용된다. 바울은 믿음을 카리스마 전체와 관련시킨다(롬12 : 3, 6). 이 점에서 은사들을 사용하는 것은 믿음이 은혜를 그 활동 속에서 표현한 것이다.

 로마서 12장을 보면 은사와 윤리는 모두 권면의 대상으로 서로 불가분리적으로 결합되어 있어서 그것들 사이에 구분을 짓기가 어렵다. 그래서 바울은 신유, 기적 행함, 방언 등과 같은 비범한 현상들만 은사에 귀속시키지 않고(고전 12 :9, 10) 서로 돕는 것, 긍휼을 베푸는 것(롬 12 :8 ; 고전 12 :28) 등과 같은 윤리적 형태의 행위도 은사에 귀속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윤리와 은사, 또는 성령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 사이에 날카로운 구분을 긋는 것을 반대하는 주장은 어느 정도 정당화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언의 은사인 경우에 교회에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하기’ 위해서 주어지므로, 예언은 신자들에게 그들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상황 속에서 실천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윤리적 차원’을 분명히 지닌다고 할 수 있다.24)

 바울 서신에 의하면 은사는 성령의 열매보다 더 강하게 개별화되어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은사는 무엇보다도 각 신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고, 반면에 성령의 열매는 모든 사람을 위하고 모든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갈 5 :22 ; 골 3 :12). 은사는 신자가 은혜에 순종적 반응을 보임으로써 나오는 결과가 아닌 반면, 성령의 열매는 신자가 은혜에 순종하는 데서 귀결되는 결과이다. 신자들이 특정한 은사를 소유하는 것은 개인 신앙의 능력이나 도덕적 성취의 정도에 의존하지 않는다. 은사를 경험했다고 해서 반드시 신자를 더욱 거룩하고 윤리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며 보다 영적인 사람임을 보여주는 징표도 아니다. 바울 서신에 의하면 진정한 영성(靈性)의 지표는 언제나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논증되고 나타나며, 신자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았는가에서 구체화되는 가운데, 바울은 ‘사랑’을 영적인 은사들을 시험할 수 있는 규범 또는 표준으로 설명한다. 바꾸어 말하면 카리스마는 사랑의 도구여야 하고 봉사자여야 한다.25

 은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만, 이러한 목표는 은사가 사랑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행사되지 않는 한 도달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불행은 위대한 영적인 은사들을 받은 일부 신자들이 사랑(자비, 인내, 친절, 겸손)이 없어서 별로 기여하지 못하는데 있다. 사랑은 영적인 은사를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은사를 추구하거나 표현하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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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Ibid. pp. 197-198.

25) Ibid. pp. 201-204.

26) 권 성수,「신학 정론」中 성령은사에 대한 이해,(수원: 합동신학교,1994), p.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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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Ⅲ 장 성경에 나타난 은사



       1. 구약에 나타난 은사


 구약 성경에서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모두 야웨 하나님의 영(󰖐�וּד 루아흐)으로부터 온 은사로 보았다.24)

 구약 성경의 성령은 창조자, 지배자. 계시자, 촉진자, 능하게 하는 자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시다.25)

 창세기 41장에서 요셉은 이집트의 파라오(pharaoh, 왕)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는 자’로 불린다. 요셉은 이집트의 많은 지혜자와 지식인들이 해석하지 못하는 꿈을 해석했으며, 이집트 온 백성과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 가나안의 자기 친족들까지 흉년으로부터 구원한다. 이 모든 일은 요셉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영적인 은사를 나타낸 것이다.

 다니엘도 요셉과 비슷하게 이방 임금의 꿈을 해석하여 이방 사람들로부터 “거룩한 신들의 영(루아흐)이 그의 안에 있다.” 는 말을 듣는다.26)

 민수기 11장에 보면 모세와 70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들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렸으며, 신명기 34장에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영(지혜의 영)이 임했다. 사사기에 보면 삼손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삼손 혼자의 힘으로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것을 볼 수 있으며, 옷니엘, 입다, 기드온,  등 여러 사사들에게 한결 같이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외세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하였다.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는 초대 사울 왕을 비롯하여 다윗과 솔로몬 왕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렸다.27)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루아흐)은 예언의 은사와 예언자의 직책과 특별한 관련이 있다. 한 사람을 택해서 예언자로 만들고, 또 그에게 메시지를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다. 엘리야와 엘리사에게는 늘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던 것으로 짐작되며 에스겔은 모든 예언자들 가운데서 야웨 하나님의 영이 가장 충만하게 살아 움직이고  활동한 사역자이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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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박 찬섭, op. cit., p. 62.

25) James I. Packer,「성령을 아는 지식」,홍 종락 역,(서울: 홍성사,2002), p. 81.

26) 박 동현, 야훼 하나님의 영과 그의 백성,「성령과 교회」,(서울:장신대출판부,1998),p. 37. 

27) Ibid., pp. 38-40.

28) 박 찬섭, p.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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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 성경에서 성령의 활동은 일반적으로 볼 때 특수하며 능력을 행하는 기적적인 일들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여, 사사 삼손에게 나타난 놀라운 힘과 예언자 엘리야와 엘리사에게 나타난 초자연적인 기적 등을 지적할 수가 있다. 또한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에 하나님의 영이 브사렐과 오홀리압에게 임하여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하여 성막을 완성하였다. 하나님의 사업을 위한 공예가의 솜씨는 성령의 특별한 은사이다.29)





        2. 신약에 나타난 은사


 신약 성경에 보면 복음서에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남을 볼 수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예수를 통하여 병 고치는 은사와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가 나타났으며, 제자들에게도 성령의 은사로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이 나타났으며 더 나아가서 제자들 외에 예수께서 세우신 70 인에게도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 처처에서 복음을 전하며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는 은사를 나타낸 것을 볼 수 있다.

 초대교회가 성립되면서 성령의 은사는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의 메시지와 같이 예언자 요엘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In the last days, God says, I will pour out my Spirit on all people. Your sons and daughters will prophesy, your young men will see visions, your old men will dream dreams. Even on my servants, both men and women, I will pour out my Spirit in those days, and they will prophesy. )"

 이것은 종말론적인 메시야 공동체에 나타날 예언, 방언, 기적 등의 은사를 말하는 것인데, 초대교회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30)

 초대교회에서 성령의 은사는 계속해서 나타난 가운데, 처음에는 모든 신자들에게 방언의 은사가 나타났으며 일곱 집사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났다.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은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병 고치는 은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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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Ibid.,pp. 63-64.

30) Ibid., pp. 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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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내었다.

 기독교의 복음은 점점 더 왕성하게 퍼져나가는 가운데 시리아(Syria)의 안디옥(Antioch)에 최초의 이방인 교회가 세워졌으며, 바울과 바나바가 교회에 의해서 다른 이방 지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서 각처에서 여러 가지 은사를 나타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언의 은사뿐만 아니라 교사, 선교사, 병 고침, 능력 행함 등 여러 가지 은사를 나타낸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복음은 그 당시 잘 발달된 로마의 도로를 통하여 그 당시 로마 세계의 공용어라 할 수 있는 코이네(κοινή)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는 바울과 바나바 그밖에 여러 제자들과 무명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은사 사역자들에 의하여 로마제국 내에 확산되었다. 마침내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는 공인된 종교로서 오랜 박해에서 벗어나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게 되었으며 기독교는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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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Ⅳ 장  은사의 종류



       1.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λόγο󰐠� σΦἰα󰐠�)은 영적 진리의 직접적 투시력에서 온 것으로, 이것은 연구하기 보다는 직접하나님과 교통하는 데서 얻은 것을 말한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력과 포용력을 말하는 것으로 교회내의 어려움, 교인들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기도 한다.31) 지혜의 말씀은 어떤 사람이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지식의 말씀은(λόγο󰐠� γνὡσεω󰐠�) 이미 알려진 진리의 말씀을 그것 그대로 새로운 상황에서 다시 알려주는 것을 말한다.32)

 사도 바울이 첫 번째로 언급하는 이 두 가지 은사는 가르치는 은사를 말하는 것이다. 지혜의 말씀(the utterance of wisdom)과 지식의 말씀(the utterance of knowledge)을 받은 은사자는 신자들의 모임에서 교훈을 할 수 있으며, 특별한 충고나 교훈을 특정한 사람에게 할 수도 있다. 신약 성경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사도들인데 이들은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가르치는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다.33) 성경이 말하는 지혜(σοϕια ;소피아)는 하나님의 진리와 의도를 파악하고 이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따라서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십자가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게 할 수 있는 말씀의 은사를 말한다. 지식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된 신학적 지식을 성경에 근거하여 바르게 이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새로운 상황 속에서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은사를 말한다. 이 은사는 소수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전유물(專有物)이 될 수는 없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신학적, 성경적 이해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34)

 사역자가 말씀을 증거할 때 준비없이 할 수 없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준비하고 공부할 때 조명하셔서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 이러한 사상은 바울서신에 여러 번 나타난다. 그리고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도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아 구약 성경을 기초로 하여 말씀을 전하셨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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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황 승룡,「개혁교회와 성령」,(서울: 성광문화사,1989), p. 76.

32) Arnold Bittlinger,「은사와 은혜」,정 인찬, 조 원길/역,(서울: 기독지혜사,1992), p. 29-31

33) Griffiths, op. cit., pp. 53-54.

34) 김 균진, op. cit., p. 95.

35) Loc. 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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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믿음


 믿음(πίστι󰐠�)의 은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모든 신자들이 나타내야만 하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믿음(갈5:22)도 아니며, 이것은 고전13:2에서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라고 말할 때의 믿음과 같이 능력이나 이적을 행하는 믿음과 관련 된다.36)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구약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은사를 풍성하게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37)

 예수께서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때로는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책망하셨으며(마8:26), 때로는 “믿음이 적은 세대여”라고 탄식하셨다(막9:19). 이것은 비록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두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한 백부장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칭찬하셨다(마8:10). 그러므로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으며 ‘큰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은사임을 알 수 있다.38) 사도행전 3:6을 보면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믿음의 은사는 종종 특별한 은사로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역사와 관련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이적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은 ‘하나님’이시며 그 사람의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할 따름이며 ‘원인’은 아니다. 따라서 이적이나 치유를 나타내는 믿음이 있다고 해서 마치 자기 스스로 그런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이며 잘못이다. 이런 큰 믿음은 기도와 함께 역사한다. 야고보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했다(약5 : 15). 또한 야고보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말한다(약5 : 16). 따라서 큰 믿음, 은사로서의 믿음은 신자의 삶과 관계됨을 알 수 있다.39) 믿음의 은사와 더불어 특히 기억해야만 할 것은 그 은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인간이 요구 할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어느 누구도 이 믿음의 은사를 자기의 ‘믿음의 분수’에 있어서 부족한 것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을 수는 없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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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변 종길, op. cit., p. 73.

37) Bittlinger, op. cit., p. 33.

38) Loc. cit. p. 74.

39) Ibid., pp. 74-75.

40) Bittlinger, op. cit., p.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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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병 고치는 은사


 병 고치는 은사는 원어로 ‘병들을 고치는 은사들(χαρἰσματα ἰαμἀτων)’이라고 복수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여러 종류의 병들을 고치는 은사로서 인간의 모든 것, 즉 몸과 혼과 영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는 것을 말한다.41)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15 :26)”고 말씀하셨으며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말4 :2)”라고 하심으로 자신이 치료하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고치고 싶은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병(病)은 인간과 그의 세계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罪)라는 병이다. 기독교의 주요 과제는 죄의 병을 고치는데 있다. 신체적 병 고침은 죄의 병을 고침에 있어서 나타나는 부수적 현상에 불과하다. 참된 병 고침의 은사는 죄의 병을 고치는 은사이다.42)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 사역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신체적인 병의 치유는 죄의 용서(容恕)와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43) 마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네 사람에게 메워 지붕을 뜯고 들어온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면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Son, your sins are forgiven.)"고  말씀하셨으며,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그에게 ”이제는 병이 깨끗이 나았으니 더 무서운 병에 걸리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See you are well again. Stop sinning or something worse may happen to you.)"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치유 사역에 대하여 프랑스의 종교사가 르낭(Ernest Renan)은 그의 저서 ‘예수전’에서 아름다운 문체로 표현하고 있다. “온화하게 병자를 대해 주고 어떤 동정적인 표시로 환자의 회복에 확신을 심어주는 탁월한 인간의 존재는 종종 결정적인 치료제가 된다. 아주 분명한 상처의 경우를 제외하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감정이 섬세한 인간과의 관계가 치료약의 수단이 되지 않는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치료약을 보는 즐거움으로 인하여 낫는 것이다. 치료약은 그것이 할 수 있는 것, 즉 미소와 희망을 제공하며, 이것이 헛되지 않는 것이다.”44)

 르낭의 표현은 보수주적인 학자들과 신자들에게서는 비판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또한 “질병이 물리적인 원인의 결과가 아니라, 죄에 대한 처벌 또는 악마의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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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Ibid., p. 35.

42) 김 균진, op. cit., p. 96.

43) 성경에서 질병의 치유가 죄의 용서(容恕)와 결합되어 있으며, 질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복음서 전체에서 사단(Satan)을 말하고 있다.(예: 마9:14-29, 눅11:14; 13:16)

44) Ernest Renan,「예수전」,박 무호 역,(서울: 홍성사, 1986), p.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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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라고 생각하던 때에 최선의 치료약은 초자연적인 질서 속에서 능력을 지니고 있는 성자였던 것이다. 치료한다는 것이 도덕적인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었다.“45)

 그런데 병 고침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은, 순종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1 세기의 기록들을 보면, 병에 걸릴 경우 자동적으로 건강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도 병에 걸릴 수 있다. 그런데 질병에 걸리는 것을 하나님의 징계와 형벌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환자가 많았다. 경우가 좀 다르지만 디모데는 건강을 목적으로 포도주를 좀 사용하라는 권면을 받았다(딤전5:23).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살아나게 되었다(빌2:27).46)

 신약 성경에 보면 어떤 경우에 있어서, 기적적인 치유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다른 경우에는 신자들이 질병에 걸려 끝내 죽는 일도 있다. 그리고 오늘날도 간혹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반 은총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것은 의학적 수단이다. 하나님은 이 방법으로 증가하는 환자를 치료하도록 하셨다.47) 그러므로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질병 발생시에 일반 은총인 의학적 수단으로 병을 고치거나,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적적인 치유가 있기를 기도하거나, 신유 은사자에게 기도를 부탁하여 기적적인 치유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4. 능력 행함


 능력 행함(ἐνερϒήματα δυνάμεων)은 원어에 복수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여러 가지 종류의 능력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행한 이적과 스데반이 행한 기사와 표적들,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행한 표적들, 베드로가 욥바에서 죽은 다바다를 살린 일, 사도 바울이 박수 엘루마에게 행한 이적 등,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통해 행하신 모든 이적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48)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가운데에 이적의 역사(役事)는 무수히 많이 있다. 그는 죽은 자들을 살리셨으며, 귀신들을 쫓아내셨으며, 자연까지도 지배하셨다. 예수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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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Ibid.

46) Griffiths, op. cit., pp. 64-65.

47) Ibid., p. 66.

48) 변 종길, op. cit., p.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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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 12에서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약속하셨다. 초대교회부터 오늘날까지 믿음의 선진들은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바로 이 말씀을 의지하여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의 사도들은 죽은 사람들을 살렸으며, 귀신을 쫓아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이적도 일으켰다(행16:26, 28:3).49)

 하나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에는 그분의 거룩함과 영광을 위해서 하시는 것이며, 그저 마술적으로 또는 인간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하시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이 원한다고 해서 다 베풀어지는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만 허락해 주시는 것이다.50)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기도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베풀기 원하시는 이적을 놓쳐 버리고 심지어 가로막는 일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51)

 성령의 활동으로 초자연적이며 기적적인 일들이 오늘날도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참 기적은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과 고난(苦難)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오심이다. 미움과 시기와 투쟁이 있는 곳에 사랑과 평화가 이루어지며, 불의가 있는 곳에 정의가, 죄와 죽음의 세계 속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세계가 일어나는 일이 참 기적이다.52)





            5 . 예언


 ‘예언(προΦητεία)’은 회중 가운데서 말하는 것과 관련된다. 이 은사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德; 윤리 )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consolation)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교회의 현재 상태나 미래의 일에 대해 말하고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는 예언자 아가보의 예언이 있는데, 그는 천하가 크게 흉년들 것을 예언했으며,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것을 예언했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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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Bittlinger, op. cit.,p. 41.

50) 변 종길, op. cit., p. 79.

51) Ibid., p. 80.

52) 김 균진, op. cit., p. 97.

53) Loc. c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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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은사자들이 범람하는 가운데, 은사자들로부터 많은 예언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적인 의도(意圖)와 목적(目的)을 가진 말일 수 있으며, 다른 교인들이나 교회에 대한 지배(支配)와 권위(權威)의 수단(手段)이 될 수 있으며 또 거짓예언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예언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정신과 일치하며 공동체의 건설에 기여하는지 언제나 다시금 여러 사람에 의하여 판단되어야 할 것이며, 그 열매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54)

 예언은 구약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성경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매개체였으며, 계시의 내용은 야웨의 말씀, 바로 그것이었다. 예언자는 대언자적 사명을 감당하는 사역자였다.

 구약 성경을 보면, 예언자들의 스타일이 대단히 다양하다. 말라기를 보면, 대부분의 말씀들이 하나님께서 직접 그의 백성들에게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요나서를 보면, 절반 이상이 니느웨를 향해서 적극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스가랴서와 호세아서를 비교해 볼 때 스가랴서에는 환상이 많으나, 호세아서에는  선지자의 불행한 결혼을 경험케 하여,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적용시켜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 이처럼 다양한 예언과 비슷한 예언이 있는 이유는 예언이 영감성도 있으나 모방성도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55)

 신약 성경에서 예언은 반드시 조심스럽게 시험(tested)하거나, 고려(weighed)해 보아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다.56) 그것은 예언의 은사가 그 자체로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그의 서신들에서 모든 예언이 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church)에 의해서 분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살전5:21-22, 고전12:10;14:29). 이것이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서 ‘성령/영 분별 은사를 언급한 첫 번째 의도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방언에 통역이 필요한 것처럼, ’분별‘이라는 명사의 동사 형태가 14장 29절에서 예언이 나타날 때 꼭 필요한 때문이다.57)

 예언에 있어서 그 대상에는 개인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체 공동체가 중요하다. 예언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교화가 주어진다.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영감을 받아서 예언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공동체에게 그들의 나아갈 길에 대하여 지시한다. 예언 없이는 어떤 올바른 방향성도 없다. 예언은 설교와 동시에 계시의 성격을 갖고 있다.5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54) 김 균진, op. cit., p. 93.

55) Griffiths, op. cit., pp. 44-45.

56) Ibid., p. 45.

57) Gordon. Fee,「바울,성령,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길 성남 역,(서울: 좋은씨앗,2001),p. 53.

58) 김 희성, op. cit., p.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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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통보이며, 회개로의 경고와 권면이며 핍박받는 교회에 대한 위로와 약속으로서 공동체 집회에서 가장 순전한 영의 표현이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이다. 그는 예언의 말씀을 통하여 죄인을 성령과 대면케 하고 공동체와 개별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식을 하도록 돕는다.59)

 또한 예언이 즉흥적으로 예기치 않게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고린도전서 14장 29-32의 증거를 볼 때 확실하다. 왜냐하면 한 사람이 예언을 하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임하기 때문이다. 예언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자신의 마음을 ‘통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14:29-33). 비록 어떤 사람들은 ‘예언자들’(선지자)이라 불렸지만, 고린도전서 14장 24-25과 30-31은 예언의 은사가 모든 이들에게(적어도 잠정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60)

 예언은 바울이 말한 바에 따르면, 미래의 어떤 예견이나 예고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길을 잘되게 하길 원한다. 그것은 미래에서 좋은 것으로 나타날 거기에로 결단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한다. 그것은 어떤 결정이 미래를 가로막고 있고 어떤 결정이 미래를 열어 놓고 있는지를 안다. 그러나 예언적인 말씀은 사랑 안에서 일어나는 안내하는 그리고 친근한 말씀이며 새로운 태도의 가능성들로의 권고이다. 현대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언적인 말씀은 ‘자기 발견’과 ‘자기 정체성의 확립’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돕는 말이다.61)





      6. 방언


방언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이 선택한 용어는 문자적으로 ‘각종 방언 말함(ϒένη ϒλωσσών)이다. 본래 이것은 혀 혹은 말을 뜻한다. 흔히 방언을 자기의 의식(意識)을 잃어버린 엑스타시의 상태 속에서 자기의 의지력(意志力)으로 통제할 수 없이 나오는 특별한 말로 이해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에 있어서 방언이란 교인들이 평상시에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말하는 것으로서, 그 시작과 끝을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력으로써 통제할 수 있는 말이다. 방언은 신자가 기도하는 중에 자신의 생각을 일상적인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였을 때에 일어난다고 한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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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Ibid.

60) Fee, op. cit., p.

61) Loc. cit.

62) 김 균진, op. cit., p.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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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와 같은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고 본다. 고린도전서 14장 27-28에 제시된, 공동체 안에서 방언사용과 관련된 규정들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황홀경이나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방언은 본질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자나 방언을 듣는 자들 모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은 회중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통역되어야 한다.

 방언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통역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한 ‘비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방언을 개인 기도를 위한 은사로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고전14:4, 롬8:26-27, 엡6:18).63) 그러나 바울은 방언에 대해 상당한 정도로 양면성을 보여준다. 공적인 모임에서의 방언사용과 관련해서 그는 방언을 정죄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그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어쨌든 통역이 없으면 회중 가운데서는 방언을 해서는 안 된다. 한편, 개인적으로 기도하거나 말할 때 사용하는 은사로서의 방언에 대해서는 아주 호의적인 입장을 취한다.64)

 방언은 실제로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고전14:2). 사실 이 말씀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 대중에게 방언의 은사가 많이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개인별로 주어져서 사용되는데,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을 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아신다. 방언은 자기의 덕을 세운다(고전14:4).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높은 수준이 아니며 낮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For if I pray in a tongue, my spirit prays, but my mind is unfruitful.)"

(고전14:14)  이것은 거룩하게 되는 열쇠도 아니고, 영적인 정상에 도달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보적인 가치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초신자의 경험으로 볼 때, 같은 수준에서 볼 때 이것은 하나님의 복된 선물이다.65)

 오늘날 소위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중에는 의심스러운 것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밤새워 기도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데, 이들의 경우에 방언의 진실성을 다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66)

 방언에 대하여 Z.B.롱과 맥머리 목사의 공저인 ‘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라’에 나온 몇 가지 내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방언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받고, 어떤 사람은 의지의     행위로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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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Fee, op. cit., p. 228.

64) Ibid., p. 229.

65) Griffiths, op. cit., pp. 87-88.

66) 변 종길, op. cit., pp. 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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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방언을 할 때 모국어로 말해서 그 은사를 방해하지 말라. 성령께서 당신이 말하    도록 감동시키신다면, 아무리 ‘무의미한 말’ 같더라도 그대로 말하라.

3. 방언을 하면서 어떤 사람은 감정적인 체험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감정적인    감흥이 전혀 없다.

4.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방언은 우리가 정한 때에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때에 온다.67)





        7. 방언 해석


 방언은 성경에 의하면 반드시 해석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에서는 ‘방언통역’의 은사라고 말하는데, 신약의 ἑρμενεἰα 는 통역이 아니라 해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방언 해석의 은사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방언의 단어 하나하나를 우리의 일상적인 단어로 정확하게 옮기는 것이 아니라, 방언하는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우리의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68)

 방언 해석의 은사가 실제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교회 내에서이다. 방언 기도는 해석의 은사를 통해야만 교회 내에서 의미를 갖게 된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해석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다.”고 하였다(고전14:5). 즉 방언 기도는 해석되어질 때에야 비로소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은사인 예언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게 되리라는 것이다.   방언을 해석하는 은사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주어지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기도 한다. 해석도 방언 기도와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의 은사이다. 그러나 방언을 해석한다고 해서 방언을 할 때 사용하는 언어를 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69)

 예언의 경우에 두세 사람이 예언하면 다른 사람들은 분변(分辨=분별)하라고 했는데, 방언의 경우에도 그것이 해석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분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듯이, 방언의 경우에도 문제될 만한 것이 있다면 즉시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고전14:2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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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Z.B.Long /D.McMurry,「성령의 능력으로 사역하라」,홍 석현 역,(서울: 홍성사,1999),        pp. 202-203.

68) 김 균진, op. cit., p. 100.

69) Bittlinger, op. cit., p. 51.

70) 변 종길, op. cit., p.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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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영 분별


 영 분별의 은사는 원어적으로 영들 분별함(διακρίσει󰐠� πνευμάτων)의 은사로서 기독교 신자들은 영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참 영인지 거짓 영들인지 분별해야 한다. 영 분별의 은사는 성경에 단 한 번 언급되었다. 고린도전서 12 :1-3에 의하면 이 은사가 필요함을 언급하였다. 이방인 신자들이 과거에는 말도 못하는 우상들에게 이끌려가서 악한 영들을 숭배하였는데 이것은 잘못된 예언자와 악한 영들에게 잘못 인도된 것이다.71)

 요한 1서 2-3에 보면 “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고 하였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고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는 자가 곧 거짓 영이라는 것이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기독교의 핵심 진리(교리)를 부인할 때에도 거짓 영의 역사로 판단해야 한다.72)

 초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받았다. 베드로의 경우에 사도행전 5:3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소행을 ‘사단의 속임수’라고 폭로하였으며 8:20에서는 마술사 시몬의 사악함을 적발하였다. 바울은 13:10에서 바예수를 ‘마귀의 자식’이라고 규정지었으며, 16:18에서는 점하는 여종에게 들어있는 귀신을 쫓아내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참된 은사와 거짓된 은사를 분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보다 객관적인 시험을 가해 본다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이 가짜 영과 진짜 영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는 없다. 그래서 교회에서 영 분별의 은사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영적인 은사는 반드시 진실하게 구별(분별)되어야 한다. 영을 분별하는 은사는 하나님의 영적인 은사를 진실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몇몇 신자들이 순진하고 어리석어서 무엇인가 놀랄만한 것, 떠들썩한 것(sensational)을 열망하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이 많은 사람도 있고, 보수적인 사람도 있고, 비평적인 사람도 있다.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을 분별하는 것이며73) 하나님의 영인지 거짓 영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이며 이것을 고의로 왜곡하고 곡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구원에 이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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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Griffiths, op. cit., pp. 78-79.

72) 변 종길, op. cit., p. 85.

73) Griffiths, p.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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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도록 하는 것이 거짓 영의 역사이다.74)

 또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7장 15-16에서 “ 거짓 예언자들을 삼가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너희는 그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따겠느냐?( Watch out for false prophets. They come to you in sheep's clothing, but inwardly they are ferocious wolves. By their fruit you will recognize them. Do people pick grapes from thornbushes, or figs from thistles? )” 고 말씀하신 것처럼 거짓 영의 역사 뒤에는 언행심사(言行心事)에 있어서 좋은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다.





      9. 섬김


 돕는다(섬김)는 단어는 고린도 전서 12 : 28에 ἀντιλήμψει󰐠� 라는 말로 단 한 번 사용되었다. 돕는다는 말이 가난한 자를 돕고, 약한 자를 돕고, 병든 자를 돕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초대 교회에서 일곱 집사를 택하여 과부들을 도와주는 일도 같은 것이다. 섬기는 은사는 로마서에 언급된 ‘구제하는 자’ ‘긍휼을 베푸는 자’ 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은사는 교회에서 목회자를 도우며 재정을 맡아 일하는 회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교회의 회계는 필요에 따라 돈을 지출하여 돕는 일을 하는 것이다.

 섬기는(돕는) 은사는 χαρισματα 로서 매우 실제적이며(practical) 중요한 것이다. 조직적으로 일할 때에 창설자, 회계, 타자수, 지배인, 호스테스 등이 필요한 것처럼 은사를 말할 때에도 성령님의 일을 분배받아 일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2 : 22-26에서 은사의 필요성을 인간의 지체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모든 지체는 중요한 것이라고 하면서 은사의 귀중성을 강조하고 있다. 큰 집회에 참여했을 때 이것을 기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로 눈에 보이는 설교자가 가장 중요한 것 같으나 실제적으로는 주님을 섬기는 회중이 더 중요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곳에서 효과적으로 서로 협력하여 섬기며 봉사할 때에, 섬기는 은사는 ‘은혜의 선물’로서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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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변 종길, op. cit., p. 86.

75) Griffiths, op. cit., pp. 7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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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다스림


 다스린다(κυβερνήσει󰐠�)는 말은 κυβερνήτε󰐠�에서 온 말로서 신약 성경에서 배의 선장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배를 운전하는 키잡이라고 이해된다. 그래서 다스린다는 말은 회중을 인도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은사는 교회의 장로들, 감독들이 가지고 실제로 봉사하고 있으며, 선교 단체에서는 총무, 행정 책임자들이 가지고 있다.

 이 은사는 로마서 12 : 8과 데살로니가전서 5 : 12 에 보면 προϊστάμενο󰐠�, 즉 인도하고 다스리는 은사로 표현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교회 지도자들을 다양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유대인 장로들에게 사용되었고, 예루살렘에서는 교회의 장로들에게 사용되었고, 갈라디아 교회에서도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다스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온유함으로 지도하고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영예가 돌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 많은 교회가 프로그램을 준비함에 있어서 목적의식을 잃고 단편적인 식견으로 인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은사는 필수적인 것이다. 승객을 인도하는 비행기에 기장이 필요한 것처럼 교회에는 다스리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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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Ibid., pp. 7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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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Ⅳ 장 은사의 분석


      1. 은사의 분별 기준


 은사 사역자가 받은 영적인 은사는 그것을 받은 사람의 인격적 미성숙(未成熟)과 인간적인 제한성(制限性)과 아직도 남아 있는 죄의 세력 때문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것은 성령으로부터 오지 않고 다른 영으로부터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자에게 나타난 은사가 참인지 아니면 거짓인지를 분별해야 된다. 이 분별 기준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A. 절대적인 규범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이다. 모든 은사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 라고 고백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유일한 구원자임을 거부하는 은사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기독교가 믿는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며 하나님의 영이다. 그러므로 이 영을 받았고 그의 은사를 받은 은사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유일한 구원자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77)

 B. 모든 은사는 공동체 교회에 화평을 가져와야 한다. 신자들 상호간의 교만과 비난, 다툼, 파벌 등으로 공동체에 분열을 초래하는 은사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성령은 나누어진 것을 하나 되게 하며 다툼과 분열이 있는 곳에 화평을 가져온다. 그러므로 은사자는 겸손하며 공동체의 질서를 지키며 모든 곳에서 정의가 있게 한다.   은사자로 인하여 교회의 질서가 파괴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은사는 경계되어야 한다. 참된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는 열광주의(熱狂主意)와는 거리가 멀다.

 C. 모든 은사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아무 쓸데가 없다. 영적인 은사가 나타나는 가운데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자는 교만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거나 다른 사람을 자기의 영향권 속에 예속시키려고 한다. 참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나타낸다. 가장 중심적인 성령의 열매는 사랑의 실천이다. 은사의 종류는 다르지만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위하여 필요하며, 모든 은사에 있어서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78) 

 D. 모든 은사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광을 받아야 마땅하다. 은사자는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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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김 균진, op. cit., p. 111.

78) Ibid., pp. 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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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은사자가 영적 은사를 행하면서 자기를 중심에 세우고 자기를 영광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의 은사의 진실성을 의심해도 좋을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한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E. 모든 은사는 언제나 공동체인 교회와 관련되어야 하며 신학적 기초와 방향을 가진 공동체에 의해 지도(指導)와 통제(統制)를 받아야 된다.

 공동체는 공동체의 지도와 통제를 거부하는 은사를 경계해야 된다. 이러한 은사들은 열광주의, 은사자에 대한 우상화 내지 개인숭배, 공동체의 분열, 소종파의 난립, 추종자들에 대한 물질적인 착취, 가정 파괴, 윤리적 혼란, 사회적 물의와 비난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향한 은사이며 교회 안에 있는 은사인 것이다.79)

 F. 모든 은사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줄 수 있는 것이지 어떤 특정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과 그 은사를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을 통하여 교회는 분열될 수 있으며 종교적인 기만과 착취가 일어날 수 있다.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가 자신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그분의 형상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80)





      2. 은사와 신비체험


 하나님의 선물인 영적 은사와 신비체험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안에서 신자들이 영적인 은사를 나타내는 것을 신비체험(또는 영적 체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한다. 기독교 안에서 체험이 없는 신앙생활은 무미건조(無味乾燥)한 맹목(盲目)이라 할 수 있으며, 도덕생활이나 철학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자(信者)라면 모두다 신비적인 영적체험(靈的體驗)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 한다.

 신비체험은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종교현상이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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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Ibid., p. 114.

80) Ibid., pp. 1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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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그러나 신비체험은 공동체 교회의 신자로 하여금 신앙에 대한 확신(確信)을 갖게 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1977-1978년 사이의 종교에 대한 갤럽 여론 조사에서 “ 당신은 이전에 종교적 또는 신비적 체험, 다시 말해 갑작스런 종교적 깨달음이나 각성을 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서 31%가 “예”라는 반응을 나타냈다. 질문을 받은 사람들 중에서 10%(“예”라고 대답한 사람들 중 1/3)는 그 체험은 다른 세계에서의 신적 존재와의 결합이었고, 죄의 용서와 구원의 확신을 수반한 것 이었다고 답변했다. 이들 중 5%는 자연에 대한 극적인 영적 깨달음이었고, 나머지 5%는 치유와 연관된 체험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렇게 응답한 사람들 중 4%는 그 체험은 환상, 음성, 꿈 등을 수반한 체험이었고, 또한 이 사람들 중에서 2%는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는” 체험이었다고 응답했으며, 나머지 5%는 그 체험을 설명할 수 없노라고 응답했다.81)

 모든 종교적 체험은 일종의 신비적 체험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 신앙도 일종의 신비적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회개하며 그분에게 기도한다는 것은 일종의 신비적인 현상이요 신비적인 체험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안에서 성령(성령의 은사)과 신비적 체험은 신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고 말 할 수 있다.82) 그러므로 모든 기독교 신앙인은 영적인 체험 속에서 사는 영성생활(靈性生活)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은 스티븐 바턴(Stephen Barton)이 지적한 것처럼 “영성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느낌이며 영성은 그러한 임재를 경험하고 그 빛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83)

 영성은 공동체 신자가 삶 가운데서 영적(신비적) 체험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신자의 신비체험은 성령의 은사가 삶 속에서(공동체 내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은사에 있어서 은사자뿐만 아니라 타인도 느낄 수 있는 은사는 외적인 은사(방언, 예언, 병 고침, 능력 행함 등)라고 할 수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적인 은사가 나타났을 때에 신비체험을 한 것으로 간주 한다. 그러나 외적인 은사만이 신비체험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영적인 꿈, 환상, 영적 회심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영적인 것은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문자적으로 자세히 표현할 수는 없다고 본다. 영적인 것은 신비체험을 한 사람만이 알 수 있으며 그것을 믿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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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Robert Ellwood,「신비주의와 종교」,서 창원 역,(서울: 이화여대출판부,1994), pp. 1-2.

82) 김 균진, op. cit., p. 130.

83) Stephen Barton,「사복음서의 영성」, 김 재현 역,(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1997),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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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꾸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다음과 같이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어째서 무력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 사람들의 사는 방식을 바꿔 놓을 수 있었을까? 이 예수의 불가사의는 아무리 우리가 합리적으로 해결하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신비를 지니고 있다. 이런 신비야 말로 ‘그와 그 제자의 이야기’의 X인 것이다.”84)

 엔도 슈사꾸가 풀지 못한 신비한 X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역사(役事)이며 성령의 역사(役事)로서 성령의 역사는 기독교 공동체에 신비체험적인 은사로 나타나거나   또는 자연적인 은사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령의 은사로서 예언은 구약 시대부터 이스라엘에 존재했었으며, 주변 이방 민족들의 우상 종교에도 이와 비슷한 신탁과 예언 같은 것들이 있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예언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אי󰔩�󰗺� (나비)’ 란 말은 “ 입에서 거품을 내며 말한다.” 혹은 “청산유수로 말한다.” 는 뜻의 동사와도 관련이 있는 말로서 열광적인 상태에서 격정적으로 발하는 음성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85) 구약 시대에 예언자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 봉사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사역자였다. 신약 시대와 교회 시대에는 공동체 교회에서 은사자들이 확신과 회개와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시기적절한 말씀을 선포하며, 회개가 없을 때에 하나님의 즉각적이거나 미래적인 심판을 선포하여 사람들을 경고하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전달한다.86)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의식을 잃어버린 황홀경 상태 속에서 자신의 의지력으로 통제할 수 없이 나오는 특별한 말로 이해한다. 그러나 방언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87) 방언은 의미론적 언어 영역이 빠져있는 그러나 표현적이고 소리내어 부르짖는 언어 영역이 보존되는 일종의 준언어이다. 다른 말로 말하자면, 방언은 음성의 흐름이다. 그것은 듣는 자나 말하는 자에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표현의 성격과 부르짖음의 성격을 갖는다. 방언은 심리 위생적 기능을 채우고 영적인 심층에 만족할만한 영향을 준다.88) 성공회의 어떤 사역자는 어린 아기의 옹알이와 방언의 은사를 동일시하기도 했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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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엔도 슈사꾸,「그리스도의 탄생 」, 김 광림 역,(서울: 홍성사,1988), p. 229.

85) G.W Anderson,「이스라엘 역사와 종교」,김 찬국 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1), p. 100.

86) 오 성춘,「은사와 목회」,(서울: 장신대출판부, 1997), p. 175.

87) 김 균진, op. cit., p. 98.

88) 김 희성, op. cit., pp. 303-304.

89) Packer, op. cit., p.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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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Ⅴ 장 결론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하나님 나라)를 먼저 이 땅에 확장시키기 위해서 구원 받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선물이다.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를 잘 활용하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덕을 끼치며 유익을 줄 수 있지만, 은사를 잘못 활용(오용하거나 남용)하면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가운데 본인 자신도 신앙적으로 유익함이 없다고 본다.

 성령의 은사는 공동체 교회적으로나 개인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유익한 것으로서 내적인 성숙과 외적인 성장을 촉진시킨다고 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는 개인 신앙의 능력이나 도덕적 성취의 정도에 따라서 어떤 특정한 은사를 소유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이 크다고 해서 은사를 받는 것도 아니며, 믿음이 작다고 해서 은사를 못 받는 것도 아닌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앙에 입문 한지도 얼마 안 되고 믿음도 작은데 여러 가지 은사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

 은사와 윤리에 있어서, 성령의 은사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선물이기 때문에 개별화되어 있지만 윤리(덕)는 모든 성도들에게 있어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은사가 나타나는 공동체에 윤리(덕)가 없다면 그 공동체는 존립에 있어서 불완전하다고 볼 수 있다. 패커(J. I. Packer)는 말하기를 “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때 윤리적인 것이 은사적인 것보다 우선한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90) 그러므로 은사가 있는 공동체에 윤리(덕)가 있으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존속되며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모든 은사는 언제나 교회와 관련된 가운데 교회의 지도와 통제를 받음으로 질서와 화평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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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Packer, op.cit., pp. 3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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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사와 신비체험에 있어서,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나타나는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는 때로는 초자연적인 신비체험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러한 은사는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으로서 신자들은 다만 경외심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될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존속 ,확장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성령의 은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졌다. 특별히 교회에서 사역하는 은사를 소유한 은사자들은 소속된 공동체에서 언제나 덕(윤리)을 세우며, 공동체와 자신에게 유익이 되도록 처신해야 될 것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교역자나 평신도나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은사 사역자를 필요로 한다. 모든 은사자들이 항상 말씀 안에서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 때 이 땅에는 하나님 나라가 더욱 확장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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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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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도나무 - Vitis
글쓴이 : Joh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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