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이야기

[스크랩] 가정교회의장점과장로교정치제도의충돌가능성(기독교보에서)

향기나무 김성휴 2007. 11. 21. 04:57

능력이 있어서(?) 또는 부단한 열심이 있어서 아니면, 잘 아는 선배 목사의 소개를 통해서 어느정도의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 사역자로써 주의 복음에 사용되어 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위 '가정교회'라 불리우는 가정목회에서 대부분의 전도사들은 그들의 신학교에서 배운 내용들을 소그룹 공동체를 이루며 목회 모범을 실천해 나갈 것입니다. 아래는 가정교회에 대한 그 실천적 의미에서의 정당성과 또는 신학적 모순은 없는지에 대하여 지난 고려신학대학원 학술대회에서 여러 교수님들께서 발표한 의견들을 기독교보에서 발췌 한 것입니다. 잘 읽어 보시고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퍼가시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가정교회’, 교회 아닌데 ‘교회’란 말 못 빼는 딜레마..............[기독교보 2007-11-14]
 

                          (제2회 고려신학대학원 학술대회)

 변종길, 이상규, 유해무, 김순성 교수(왼쪽부터, 발표자 순)

 

제2회 고려신학대학원 학술대회가 지난 11월 1일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강당에서 ‘가정교회 어떻게 볼 것인가?’란 주제로 열렸다. 이날 학술대회 1부 가정교회에 대한 신학적 조명에서는 고려신학대학원 박영돈 교수의 사회로 고려신학대학원 변종길 유해무 김순성 교수,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가 강사로 나서 성경신학 교의학 실천신학 역사신학 입장에서 ‘가정교회는 성경적인가?’ ‘개혁교회론과 가정교회’ ‘가정교회 소그룹 구조와 기능의 실천신학적 의의’ ‘교회사에서 본 가정교회’란 주제로 각각 논문을 발표했다. 김순성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2부 패널토의에서는 주제 발표자들과 함께 김낙춘(한영교회) 조태환(큰빛교회) 이문식(산울교회) 강경민(일산은혜교회) 목사, 권상준(구미남교회) 정성수(큰빛교회) 장로가 패널토의자로 나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에 본보는 주제발표자들의 발제강의 요약과 함께 패널 토의 내용을 정리한다.

-편집자 주-

             

 

1부. 발제강의 요약 정리

 

가정교회는 성경적인가? 

변종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초대교회는 대개 성도의 집에서 모였다. 그러나 최영기 목사를 비롯한 가정교회 주장자들은 단지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교회구조’로서 가정교회를 말한다. 즉, 교회 안에 있는 소그룹 모임으로서 그 각각이 완전한, 독립된 교회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 성경적 근거로서 그들은 1) 초대교회는 다 가정교회였다; 2) 한 도시에 하나의 지역교회가 있었고, 그 안에 여러 개의 가정교회가 있었다; 3) 그들은 한 달에 한번 정도 연합모임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물론 초대교회가 주로 가정에서 모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전’에서 모였다(행 2:46, 3:11, 5:12).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지만, 나중에는 ‘두란노 서원’에서 모였다(행 19:9,10). 야고보서의 수신자 교회들은 ‘회당’ 곧 기독교 예배당에서 모였다(약 2:2). 이런 예들을 보면 초대교회는 다 가정교회였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정교회 지지자들은 또한 한 도시에 여러 가정교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전’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모였지만(행 2:46), 이것을 두고 가정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오늘날의 구역모임이나 교제모임으로 볼 수 있다. 로마 교회의 경우,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롬 16:5) 외에 다른 곳에서도 모였을 가능성이 있지만(롬 16:10,11,14,15) 확실하지는 않다. 고린도의 경우, 단 하나의 교회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에 대해 말할 때 성경은 항상 단수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1:2, 고후 1:1; cf. 갈 1:2,22, 고후 8:1, 행 15:41, 16:5).

 

  그런데 가정교회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한 도시 안에 있는 여러 가정교회들이 때때로 ‘연합모임’을 가졌을 것이라고 본다. 그 회수는 이교도들의 회합의 경우를 따라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교도들의 제사를 우상숭배며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들을 본받았다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면 이에 대한 우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첫째로, 소그룹 모임에 대해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면 안 된다. 소그룹 모임이 성도의 신앙생활과 교회성장에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떠한 것이든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면 안 된다. 교회는 참 교회의 표지 곧 순수한 말씀의 전파, 순수한 성례의 거행, 권징의 실시가 있어야 된다. 그리고 교회에는 적법하게 선출된 직분자들(목사, 장로, 집사)이 있어야 한다. 성도 몇 사람이 모였다고 다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J. A. Heyns). 만일 그렇다면 유초등부도 유초등교회, 중고등부도 중고등교회라 부르고, 성도 몇 사람이 부엌에 모여 있으면 ‘부엌 교회’, 화장실에 모여 있으면 ‘화장실 교회’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둘째로, 장로가 소그룹 모임을 인도해야 한다. 장로회 정치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장로교에서는 구역모임과 같은 소그룹 모임은 원칙적으로 장로가 인도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장로의 직무가 양들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이다(행 20:28, 벧전 5:2). 구역은 많고 장로 수가 적을 때에는 장로를 더 뽑든지 아니면 장로 한 사람이 몇몇 구역을 맡아서 돌보면 될 것이다. 한 장로가 3-4명 또는 5-6명의 구역장을 자기 관할에 두고 지도하는 방법이다.

 

  셋째로, 소그룹은 소그룹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소그룹 모임이 교회가 해야 할 일, 곧 공예배나 세례식이나 성찬식을 하면 안 된다. 재정 운영도 각 구역에서 독립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당회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한다. 권징이나 치리에 관한 문제는 당연히 당회에서 다루어야 한다.

 

  근본적인 해결은 장로가 장로로서의 직무를 바로 이행하는 것이다. 장로가 회의만 하고 결정만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성도들을 돌아보며, 가르치고 권면하고 상담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장로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도들을 돌아볼 때, 현재의 논란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며, 더욱 더 성경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교회사에서 본 가정교회

이상규 교수 / 고신대학교 역사학

 

 

  오늘 논의되는 ‘가정교회’는 다른 목회 프로그램처럼 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한정적인 형태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사도시대 이후 교회 구조, 예배 형식, 집회 형태, 목회 방식은 고정된 그 무엇이 아니고 역사적 상황에 준하여 발전의 과정을 밟아왔다. 심지어 교회의 직분이라는 것조차도 허순길의 지적처럼 그 시대의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전하여” 오늘의 형태로 고정됐다. 복음은 변치 않고 변할 수 없지만, 그 복음을 선포하는 그릇은 시대를 따라 변천해왔다. 사도시대의 순회목회에서 잠정적인 과도기를 거쳐 오늘의 정착목회로 변화를 겪어 온 것이나, 자급목회에서 준 자급기를 거쳐 현재의 형태로의 변화도 그 중 하나이다. 물론 장로교회의 신학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지만, 장로교회의 신학과 예배, 의식 등 교회구조도 16세기를 거쳐 제도화됐다.

 

  지금은 그 누구도 ‘옥외집회’를 문제시 하지 않지만, 영국교회적 상황에서 휘필드에 의해 1739년 시도된 옥외집회는 성직주의적인 영국교회에서 볼 때, 기독교의 속화이자 교회 구조의 파괴로써 엄청난 비난이 있었으나 휫필드에게 있어서는 저조한 예배참석에 대한 현실적 대안이었다. 복음은 불변하지만, 그 복음이 선포를 위한 그릇은 모든 시대가 동일하지 않았고 역사적인 발전의 과정을 겪었다. 직분의 경우, 역사적 발전의 과정을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교회(Church of Christ)는 초대교회에로의 환원을 주창하고 장로교회의 직제는 비성경적이라고 공격하는 것은 다 아는 일이다. 지금 말하는 ‘가정교회’와 초기 기독교회가 ‘가정교회’ 중심이었다는 점은 별개의 사안이다. 그러나 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초기 기독교는 ‘가정교회’(domus ecclesiae)로 시작하였고, 오시에크의 주장처럼 첫 150여 년 간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예배를 위한 별도의 건물을 소유하지 않았다.

 

  블루(B. Blue)는 4세기 초 곧, 콘스탄틴이 최초의 바실리카라는 교회당을 세우기까지 약 300여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독립된 건물로써 교회당이나 예배 처소를 갖지 않고 가정집에서 가정교회 중심으로 유지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신자의 가정 이외의 다른 장소가 없었다는 불가피성 때문이 아니라, 가정은 안전, 공동식사와 교제를 위한 주방이 있는 등 회집의 유효성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150-250년 어간에는 개조된 개인 주택이 집회소로 이용되었고, 3세기 중엽을 거쳐 가면서 별도의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4세기 이후 바실리카로의 변천을 거쳐 왔다.

 

 ‘가정 중심의 교회’ 구조는 교제와 인격적 만남, 증거의 중요한 거점이었고, 탄압받는 시대의 기독교의 생존 모델이었다. 이런 ‘가정’이라는 유용성을 오늘의 교회가, 그것을 ‘가정교회’라고 이름을 하지 않더라도, 활용하는 것은 비난 받을 일이 못된다. ‘가정교회’는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대두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대교회 구조 속에서 상실되거나 약화된 교제, 인격적 접촉을 통한 증거의 취약한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목회구조에 대한 요구가 표출되었는데, 그 한 가지 현상이 가정교회라고 생각된다. 이런 현상은 교회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럽다. 문제는 ‘가정교회’가 침례교적 배경의 회중주의적 제도라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그래서 장로교회에서 수용할 수 없고, 또 직분과 사역의 괴리 혹은 장로교 치리회 기능의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 등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따라서 이런 점들에 대한 보완을 통해 기존의 교회 구조나 제도가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한 점들을 효과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면 ‘가정교회’는 기존의 한국장로교회의 특징인 구역제도의 쇄신과 보완이라는 점에서 수용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솔직히 말해서 ‘가정교회’가 가져온 가장 큰 거부감은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행정적인 문제였다. 즉 기존 치리회의 권위를 약화시킨다는 지적이었다. 그렇다면 기존 직분자들의 역할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구역 제도를 활성화하는 방안의 보완을 통해 가정교회는 긍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정교회’는 독립적인 완전한 교회인가와 ‘가정교회’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는 겸허히 수용하고 보완하는 유연성을 지향한다면 ‘가정교회’는 성도간의 교제의 회복, 불신자 전도 등 증거사역의 회복 등 초대교회적 교회관을 회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개혁교회론과  가정교회

유해무 교수 /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개혁교회를 표방하는 한국장로교회는 기실 감리교회나 침례교 또는 종파적인 운동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침례교나 회중교회의 배경에서 나온 가정교회론은 장로교회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기 정체성을 새로이 확립할 좋은 계기를 제공한다. 이런 주체적인 입장을 견지할 수만 있다면, 가정교회론은 개혁교회화·장로교화하여 도입하고 배울만한 방법론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경청되며, 성례가 그리스도의 제정을 따라 집례 되는 곳마다 교회가 있다고 말한다. 이 일을 행하는 직분인 목사직은 중요하며, 교회는 가르치는 목사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목사직에서 장로직과 집사직은 파생된다. 이렇게 파생된 직분이지만, 직분에 상하(上下)나 고하(高下)는 수반되지 않는다. 장로교회는 이런 성경적 배경에서 감독제(감리교)나 회중교회 제도를 거부한다. 개혁교회론에는 이른바 ‘평신도 사역’이 없다. 목사의 사역터는 교회이고, 교인들의 일터는 세상이다. 교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한다.

 

  개혁교회론은 말씀 선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하는 교회론이요, 모든 치리권은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의 책무이다. 이에 비해 가정교회론은 신도 사무총회가 회원을 심사하고 받아들이는 회중교회론의 입장을 지닌다. 말씀과 세례와 성찬뿐만 아니라 직분, 특히 장로직에 대한 이해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가정교회가 지닌 강점도 있다. 친교를 추구하는 가정교회는 현대 사회와 교회가 점차 개인주의화되고 교제가 사라져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 기여는 결코 적지 않다. 또 친교 중에 말씀을 묵상하고 나누며, 무엇보다도 전도의 장으로 삼는 장점도 지닌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회복하려는 열망을 가진 목회자들이 가정교회에 관심을 기울이며, 여러 곳에서 좋은 목회 성과를 일구어 내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전통적인 개혁교회론이 이런 분야에서 별다른 목회 방법론을 개발하지 못했음을 상대적으로 잘 노출시킨다. 그러나 가정교회론이 극복해야 하는 난제도 적지 않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명하신 말씀 전파와 세례와 성찬이 시행되어야 교회이다. 이것을 종교개혁자들은 잘 파악하였고, 칼빈의 교회 정의도 맥을 같이 한다. 또 제자들이 부름 받은 목회는 ‘평신도’ 모두에게 확대하여 적용할 수 없다. 가정교회는 은혜의 방편론과 직분론에 관한 한, 사도행전을 넘어 복음서를 더 경청해야 할 것이다.

 

  침례교회는 중생을 체험하고 그것을 간증할 수 있는 개인에게 침례를 베푸는 개인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보니 개혁교회와는 달리 언약론에 기초한 유아세례의 자리는 없다. 가정교회는 말하자면 ‘집단화된 개인’이라 하겠다. 과연 이 점에서 개혁교회화 할 수 있을까?

 

  목사직과 집사직만을 인정하는 침례교적 교회법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장로직을 버린 회중정치는 이미 장로직에 대한 원리적인 가치 평가요, 선택이다.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장로직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장로직에 대한 원리적 반성과 현상적인 비판이 건설적으로 선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교회 리더와 장로 또는 당회는 충돌을 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침례교회는 장로교회의 노회와 총회에 해당하는 치리회가 없다. 그렇다 보니 가정교회를 시행하는 교회들끼리 모여 협력 사업을 하면, 이는 장로교 정치 안에 활동하는 침례교의 총회(convention)의 성격을 지닐 것이다. 교회법적으로 깊이 살펴볼 문제이다.

 

  가정교회론이 극복해야 할 문제는 또 있다. 이 방법론은 여전히 교회 안을 겨냥한다. 교인들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개혁교회론의 중요한 면모를 가정교회론은 어떤 방식으로든 수용해야 비로소 공교회성을 말할 수 있다. 나아가 한 미국 침례교 신학자가 부르짖는 공교회성의 확보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곧 ‘성례전적 영성’으로서 예배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공동생활에서 표현되는 한 믿음과 한 성찬 공동체가 나타내는 가시적 일치이다. 그러나 장로교회가 개혁교회로서 거듭나지 않는다면, 가정교회에 대한 비판은 공허하다. 다각적으로 자신을 겸허하게 살피고 진지하게 개혁해야 할 것이다.

 

 

가정교회 소그룹 구조와 기능의 실천신학적 의의

 

김순성 교수 / 고려신학대학원 실천신학

 

 

  가정교회는 한마디로 교회의 공동체성을 지향하는 다기능적 소그룹 교회운동이다. 구조적인 면에서 공동체 중심이며, 기능적인 면에서 복합적이고 종합적이라는 점에서 종래의 소그룹 운동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가정교회는 넓은 의미에서 셀교회의 한 형태이며 사역의 중심 장(場)인 ‘목장’ 소그룹은 공동체 중심, 평신도 중심 사역의 장, 목양기능을 지닌 사역의 장, 삶의 나눔을 통한 친교와 치유사역의 장, 영혼구원 중심의 전도와 선교사역의 장, 성경적인 제자훈련의 장으로서의 성격과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목장 소그룹이 이처럼 교회 안에서 ‘작은 교회’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정교회라 부르는 것이다. 가정교회는 이 점에서 신약교회의 본질 회복이라는 사명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운동이 새삼 이 시대에 대두되고 있는 목회상황적 요인을 든다면 건물 중심, 목사 중심, 프로그램 중심의 제도화된 전통교회 그리고 장로직의 세속화를 들 수 있다. 총회 헌법 교회정치 제 6장 47조에 의하면 장로의 8가지 직무중 적어도 6가지가 목양과 관련된 직무임에도 불구하고 이 목양직무가 도외시된 채 장로직분이 계급화, 권력화 되고 있다. 구조적으로 이런 ‘낡은 부대’에는 복음의 새 포도주가 담길 수 없으므로 ‘새 부대’로서 가정교회가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교회 소그룹의 구조와 기능의 긍정적인 면은 무엇이며, 문제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교회됨의 본질적 구조로서의 공동체성의 발견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공동체란 상호의존, 상호책임에 기초한 ‘너와 나’의 관계성이 이루어지는 모임을 말한다. 6-12명이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은 성령의 코이노니아를 가능케 하는 구체적인 환경과 틀을 제공한다. 실천신학적 교회론의 관점에서 교회는 경축(doksa), 증거(marturia), 섬김(diakonia), 친교(koinonia)의 실천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데 가정교회 소그룹은 이 네 가지 기능을 두루 수행하는 공동체적 구조라 할 수 있다.

 

  교회성장학적 관점에서도 기본적으로 말씀과 기도가 살아있고 목회자의 지도력이 뒷받침될 경우, 가정교회 소그룹 체제를 갖춘 교회는 그렇지 않은 교회에 비해 질적, 양적으로 성장 가능성이 훨씬 높은 구조로 평가될 수 있다. 특별히 전도의 접촉점을 찾기 어려운 현대인들에게 관계성에 기초한 매우 바람직한 전도의 장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가정교회 체제는 장로교회 정치와 직분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가정교회는 직분중심 체제가 아니라, 목자중심 체제이다. 여기에는 장로직분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따라서 가정교회 체제를 장로교회에 그대로 이식하거나 접목하려고 할 때 장로교 정치체제와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침례교 배경의 회중교회론에서 나온 가정교회 체제는 개혁주의 교회론에 비추어 볼 때 가정교회 용어자체도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치리와 권징 면에서 매우 취약한 구조이다. 가정교회 소그룹에서 예기치 않은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특별히 지도자인 목자가 그 핵심에 연루될 경우, 가정교회 소그룹은 치명타를 입게 되고 십중팔구 와해되거나 교회에서 이탈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장로교 직제와 충돌되지 않으면서 접목이 가능한 대안모델은 없을까?

 

  목회자의 신학적 소양과 리더십만 뒷받침된다면 얼마든지 접목이 가능하며 나아가 장로교 직제에 부합하는 소그룹 모델을 통해 장로교회 목회자들이 이 시대 교회갱신 운동을 선도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요, 주장이다. 그 이유와 근거는 가정교회 소그룹 운동이 지향하는 바가 교회의 본질적 구조 회복과 직결되기 때문이며, 또한 가정교회 소그룹 목자의 기능이 다시 회복되어야 할 장로교회 장로의 목양직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대안으로서 목자직을 안수집사, 권사, 집사가 맡게 하고 몇 개의 목장 소그룹을 묶어서 장로가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장로도 목자직을 수행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할 때 목사직뿐만 아니라, 장로직 및 온 교회가 목회적 마인드로 영혼 돌봄과 섬김의 사역체질로 변하게 될 것이다. 당회의 행정, 감독기능이 전혀 약화되지 않으면서 오히려 교회의 본질적인 구조로 전환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가정교회 소그룹은 이 시대에 복음의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로서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틀을 제공한다. 중요한 것은 새 부대가 새 포도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새 포도주가 새 부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부대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는 여전히 목회자의 몫이다.

 

 

2부. 패널토의 내용 정리


‘가정교회’ 목회론적 장점 있으나 용어 문제 상존

장로교 정치제도와 충돌 가능성 배제 못해

 

11월 1일 천안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열린 고려신학대학원(신대원·원장 현유광 교수) 제2회 학술대회의 패널토의 참여자들은 모두 가정교회를 나름대로 잘 시행하고 있는 교회들의 장로, 목사들로 구성됐다. 이에 대해 실천신학 입장에서 가정교회를 발표하고, 패널토의 사회를 맡은 김순성 교수(신대원 실천신학)는 “토론을 위해서는 찬반 입장의 패널리스트들이 있어야 하는데, 가정교회를 하고 싶은데 못했거나 시행하다가 장로들의 저항에 부딪혀서 못하는 교회는 있었지만, 가정교회를 시행하는 목회자들 가운데 이것은 도저히 해서는 안 되는 프로그램이라고 말하는 목회자는 아무도 없었다.”며 가정교회 찬성 입장의 패널토의자들만 나온 것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이처럼 구성된 패널토의자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당연 가정교회에 대해서 긍정적 입장이다.

 

  패널토의자로 나온 김낙춘 목사(한영교회)는 “가정교회 하는 목사들이 가정교회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신학적인 통찰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목회 현장에서 목회적 반성에서 시작된 것”이라며 “최영기 목사의 가정교회 이론에 동의를 하지만, 최 목사와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총회 교회 안에서 한영교회라는 옷을 입고 가정교회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또 “가정교회와 관련 크고 작은 논의 과정에서 가정교회의 범주에 대해 다소 이해가 다르며, 한 달에 한번 가정교회의 연합 모임 형태로 이뤄지는 것은 없다.”고 밝혔다.

 

  또 조태환 목사(큰빛교회)는 “가정교회를 시행한 지 만 7년이 돼 가는데, 시행 결과 성도들이 너무 행복해하며, 영혼 구원과 복음 사역자로 헌신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불신자들의 전도를 통해서 교회가 성장하고, 관계 전도가 실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교회 안에 문제도 없어졌다.”며 “가정교회 운동은 성경에 나타난 원형교회를 회복하기 원하는 운동이며, 교회에 생명력을 공급하고 교회와 교단을 회생시키는 운동이다.”고 말했다.

 

  강경민 목사(일산은혜교회)는 “가정교회는 교회가 교회를 제자화 시킬 수 있는 탁월한 목회제도”라며 “고신이나 합신에서 가정교회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양 교단 교회들이 교회의 순수함을 유지하면서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고 부흥시켜 나갈 수 있는 노하우를 가정교회 목회론에서 만났기 때문이다.”고 주장했다.

 

  또 패널 권상준 장로(구미남교회)는 “몇몇 지도자들이 이끌어가던 교회에서 지금은 온 교인들이 함께 사역하는 교회로 바뀌어나가고 있으며, 행복해하는 교인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으며, 정성수 장로(큰빛교회)는 “가정교회로 전환하면서 장로들이 먼저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성도들이 합심하여 영혼 구원에 동참하고 있다. 가정교회를 하면서 부정적인 면, 나쁜 점은 없다.”며 가정교회에 대한 장점을 설명했다.

 

  이처럼 패널들은 가정교회를 초대교회의 원형으로 인식하면서 원형교회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 바로 가정교회 운동으로 보고 있다. 가정교회를 긍정적으로 수용하든, 다소 부정적인 입장에 서 있든 간에 모두 가정교회 운동이 갖고 있는 장점과 유익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하지만 신학자들 중에는 평신도 사역에 무게가 실리는 회중교회적 요소가 강한 가정교회를 도입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가정교회에는 개혁주의 교회론이나 장로 교회론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구조나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

 

  교의학 입장에서 가정교회를 발표한 신대원 유해무 교수는 “침례교회는 성경주의 관점에서 가정교회를 성경 주석적으로 끌어내려고 한다.”며 “침례교적 입장에서 가정교회를 초대교회의 원형으로 억지로 갖다 붙이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렇게 안 해도 된다.”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또 “언약 공동체로서 가정교회가 나서지 않는 것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심과 질문이 있다. 왜냐하면 가정교회론은 침례교회론으로서 개인주의이기 때문이다.”고 지적하면서 “가정교회 운동이 정치적 계파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형성이 안 된다고 할지라도 결국 장로교 정치 제도와 충돌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날 가장 집중적으로 격론을 벌인 것은 바로 소그룹 모임으로 이뤄지는 ‘가정교회’라는 용어 문제다. 토의에서는 가정교회에 대한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가정교회가 독립된 조직교회가 아닌 만큼 ‘가정교회’라는 용어는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거나 어떤 형태로든 바뀌어져야 한다는 데 의견이 하나로 모아졌다.

 

  이와 관련 강경민 목사는 “가정교회라는 용어 자체가 교회론적으로 접근하면 문제가 있을지라도 목회론적으로 접근을 한다면 크게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교회가 꼭 집에서 모여야만 교회의 본질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가정이 너무도 중요한 형식이기 때문에 운동적인 측면에서 ‘가정교회’라는 용어를 포기할 수 없는 열정이 우리에게 있다.”고 밝혔다. 또 김낙춘 목사는 “가정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작은 신앙공동체가 교회가 본질적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해보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패널 이문식 목사(산울교회)는 “가정교회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볼 때,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큰 전통 안에서 공동체성을 회복시키고, 끊임없이 재생산시키는 오이코스 공동체로서 교회의 원형적 기능을 충실히 하는 교회 안의 기초 공동체다.”며 “현재 쓰이고 있는 ‘가정교회’라는 용어를 ‘가정교회 공동체’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왜냐하면 이 목사는 가정교회가 하나의 독립교회로 이탈하거나 ‘가정교회’라는 용어 자체가 하나의 에클레시아로 착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날 토의에서는 또 “제자훈련 할 때도 많은 논란과 비판에 제기됐으나 기존 교단 질서를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지나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정교회라는 용어가 언어 철학적으로 접근해서 지금은 반감이 들지만 시간이 흐르면 괜찮아 질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에 반해 성경신학 입장에서 발표한 변종길 교수(신대원 신약학)는 “교회 안의 소그룹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게 되면 ‘교회 안의 교회’가 된다. 목사나 당회에 의해 임명되는 ‘목자들’(가정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가정교회’를 전통과 성경적인 의미에서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어떤 형태의 소그룹 모임이든 간에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따라서 가정교회라는 용어를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하나님의 교회는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하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 과연 가정교회가 잘 대처할 수 있느냐? 여기에 ‘교회’라는 용어가 중요하게 사용된다. 가정교회를 완전한 교회, 독립된 교회로 교육을 하고 인식을 시킬 때, 목자와 목회자와 관계가 좋을 때는 문제가 없는데 담임교역자와의 관계가 좋지 못하거나 어려움이 올 때, ‘우리끼리 예배를 드리자’ 하면서 공교회를 멀리하거나 이탈 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유해무 교수는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을 보이는 방식으로 집례하는 성례가 목사의 손에 없는 곳에서는 교회가 없다. 예배하고 있는 그 곳에 교회가 있고, 예배 속에 은혜의 방편이 들어가 있다.”며 “목사 또는 건물 중심을 비판할 수는 있으나 잘못된 현상이 원리를 폐기하거나 교회의 잘못된 관행이 교회의 머리되신 주예수의 명령과 주예수의 직분 훈련을 폐기시키지 않는다. 따라서 가정교회라는 용어는 곤란하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청중으로 참여한 천헌옥 목사(코람데오닷컴 편집장)는 “‘교회가정 공동체’라고 하면 신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서 ‘가정’과 ‘교회’라는 두 개의 단어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정교회가 독립된 교회, 조직된 교회 형태가 되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게 될 경우 기존의 공교회와는 별도로 결국 수많은 가정교회들이 탄생하게 되는 혼란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용어의 선택은 중요하다. 가정교회와 관련,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가정교회라는 용어가 장로교회론적으로 맞지 않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 하지만 가정교회 목회자들은 가정교회가 기존의 조직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가정교회’ 자체에서 풍기는 이미지 때문에 ‘교회’라는 말을 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국희 기자 cookie228@nate.com

출처 : keeper77 카페독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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